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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79화


1314화

과연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경계심을 품은 채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탑주로서는 너무도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탑주는 복잡한 심경을 쉬이 감추지 못했다.

존 워스, 철벽의 검왕이라니!

그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렇게 의혹이 깃든 눈길이 존 워스를 향하는 중에 정작 그 시선을 받은 인물은 실로 자연스러웠다.

마치 친구 집에 방문한 것 같은 모습이랄까.

존 워스가 흥미롭다는 듯 연구실 내부를 살피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벽면을 가득 채운 서적과 연구에 사용되는 기물들을 지나 탑주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바이트 타블렛에서 멈췄다.

그와 함께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흐릿한 미소.

그 모습을 마주한 탑주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존 워스의 미소가 너무나 의미심장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의미를 짚어 볼 사이도 없이 존 워스가 눈을 마주쳐 왔다.

“소드 팰러스의 존 워스요. 처음 뵙겠소. 그런데, 탑주는 날 아는 것 같구려.”

“……나 역시 처음 뵙겠소, 존 워스 경. 삼검왕의 일인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소.’

과거 마탑을 세우기 위해 후원이 필요했던 탑주는 은밀히 권력자들을 찾아다녔고, 삼검왕도 그 대상이었다.

자연히 삼검왕에 대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존 워스의 얼굴도 미리 눈에 익혀 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탑주가 접촉한 것은 페시딘 뿐으로, 나머지 두 검왕을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뇌리 한구석에 처박힌 정보였는데, 그게 지금 살아나고 있었다.

“하긴, 나와 내 친우들의 초상화가 세간에 많이 풀리기는 했지.”

“…..”

알아서 납득하는 존 워스에 탑주는 말을 아꼈다.

그사이 다시 탑주의 어깨 너머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으로 시선을 향한 존 워스가 예의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오, 저것이 바로 그 바이트 타블렛이오? 멋지군!”

존 워스는 순수하게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럴 만했다. 하나로 결합된 바이트 타블렛은 거대한 에메랄드 덩어리처럼 보였다. 특히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아 있는 모습은 마치 바이트 타블렛이 영혼의 관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매우 신비로웠다.

그런데 그의 이런 관심이 불편했던 것일까.

한 발자국 움직인 탑주가 자신의 몸으로 바이트 타블렛을 가렸다. 더 이상 존 워스가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이상 접근하지 마시오. 허락하지 않겠소.”

“흐음.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그대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바이트 타블렛에 손을 댈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과 함께 한발 물러서는 존 워스.

탑주는 그의 눈에 일말의 욕심도 비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경계심을 살짝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누가 뭐래도 저 삼검왕의 일인이다. 검후와 명예 후작이 있으니, 최강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분명 최고로 꼽히는 기사 중 하나다. 그런 강자를 어떻게 만만히 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검은 공간을 가르고 연구실에 나타나던 모습은 그가 단순히 검만 아는 기사가 아니라는 증거.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도대체 아까 그건 뭐였지?’

존 워스가 검은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던 모습이 쉽게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탑주다. 검은 공간을 구성하던 기괴하게 변형된 마나는 그도 처음 보는 종류였다.

하나 단언할 수 있는 점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던 마법이 아니라는 것일까. 자신이 세상의 모든 마법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할 수 있었다. 검은 공간을 구성하던 마나는 절대 마법의 그것처럼 정교하게 조립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공간을 갈랐을까.

지금까지 보지 못한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초인기가 가장 유력했다. 각성하는 사람에 따라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발현하는 초인기라면 자신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니까.

피식.

그러나 탑주는 곧 이런 가능성을 비웃고 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인 혐오로 유명한 존 워스에게 초인기라니. 세상에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아무리 초인기의 각성은 신도 모른다지만, 아무렴 존 워스는 아니다. 그야말로 만에 하나 그가 초인으로 각성하게 된다면, 존 워스는 아마 목숨을 걸고 각성에 저항하지 않을까?

어쩌면 대륙 최초로 초인 각성을 이겨 낸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초인기는 절대 아니다.

또 아무리 초인기라도 검은 공간을 구성하던 그것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그래, 마치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듯한……?’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마계의 마법조차 세상의 법칙 안에서 돈다. 그렇다고 두 눈으로 직접 본 걸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로 인해 어쩐지 존 워스라는 인물조차 그 정체가 모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묘하게 신경을 건드린다.

뒤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이 이런 존 워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찝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묘한 불안감이라니.

발끝부터 적셔 오는 칙칙한 불길함이 갑자기 등장한 존 워스에 대한 볼쾌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탑주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존 워스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 방문의 목적은 순수하게 탑주를 돕는 것이오.”

“솔직히 경의 말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협력 관계에 있던 검왕이 본 마탑에 대한 토벌의 최선두에 섰다는 말이 있소.”

“그건 사실이오. 검왕에게 직접 들었지. 하지만 검왕이 원하는 바는 다른 곳에 있으니, 어차피 토벌 참가는 형식적일 뿐이오.”

“그 형식적인 참가가 우리에겐 곧 시련이 된다는 걸 알고서 말하는 거요?”

검왕이 토벌에 직접 나섰다.

원인을 따지면 존 워스가 친 사고를 무마하기 위한 행위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검왕을 추종하는 기사들은 신이 나서 토벌에 참여할지도 모른다.

토벌 대상인 영혼의 관 입장에선 토벌대의 전력이 늘어나는 일이 달가울 리 없다.

“알고 있소만, 어쩔 수 없지 않소? 어차피 검왕의 참여 유무와 관계없이 벌어진 것을. 무엇보다 검왕의 일은 검왕의 일. 나와는 관계가 없소.”

“이익!”

남의 이야기를 하듯 뻔뻔한 존 워스의 말에 탑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검왕이 토벌에 참여한 이유가 존 워스 자신에게 있는데, 그걸 관계없다고 말하다니.

탑주는 어이가 없어 짜증스럽게 다시 물었다.

“정말 경이 원하는 것이 뭐요? 날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뭐냐 말이오.”

“말했을 텐데. 탑주를 돕기 위해 왔다고.”

“헛소리하지 마시오! 지금 경의 사정에 누가 누굴 돕는다는 말이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본인의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오?” 

“내 사정이 어떻다는 말이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상대의 반응에 탑주는 기가 막혔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정신의 관 토벌에 난입한 존 워스가 일으킨 사고는 물론, 황제의 소환 명령도 무시하고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정작 본인이 모른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혹시나 정말 어디 깊은 산속에 있다 나왔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존 워스 본인이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검왕을 만났다고.

그렇다면 자신이 일으킨 평지풍파에 대해 모를 수가 없는 일.

기분이 나빠진 탑주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차갑게 말했다.

“날 조롱하려는 처사라면 성공했소. 매우 불쾌하군.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일 거라면 가시오. 귀하와 할 이야기는 더 없으니까.”

탑주는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대답에 따라 당장이라도 존 워스를 연구실에서 쫓아내 버릴 것 같은 태도다. 그걸 느낀 것일까.

존 워스의 입가에서 지워지지 않던 흐릿하던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짧게 혀를 찼다.

“답답한 건 오히려 나요. 나는 처음부터 진심이었는데, 그렇게 오해한다면 나야말로 더 이상 탑주와 할 이야기는 없소. 굳이 한마디 하자면, 탑주가 말하는 문제가 본인과 제국 사이에 일어난 사소한 충돌을 말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하나 확실히 해 주겠소. 나는 제국에 속한 인간이 아니오. 황제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말이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이?”

“말이 되지 않을 것은 무엇이오? 탑주도 적당히 알아차리고 있었던 게 아니오? 검왕이 탑주를 후원한 진짜 이유 말이오.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검후를 친 사실을 벌써 잊으셨소?”

당연히 알고 있다.

삼검왕이 검후의 등에 칼을 꽂은 날, 마탑 역시 함께했으니. 그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배신의 날 이후에도 삼검왕이 본격적으로 제국에 등을 돌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그걸 대놓고 말한다고?

특히 토벌에 앞장선 검왕과 달리 존 워스는 아예 대놓고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탑주가 자신을 조롱하느냐 따져 물었던 것도 의미 없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토벌 중의 난입도, 황제의 소환에 대한 무시도 죄가 될 일은 아니니까.

문제는.

‘과연 저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존 워스는 제국과의 관계가 끝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하지만 탑주에게는 지금 존 워스가 주장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릴 방법이 없었다.

“좋소. 귀하가 그렇게 주장하니, 제국과의 문제는 없다고 칩시다. 그러나 아직 날 돕고자 하는 진짜 속내는 모르고 있소. 그 진실을 알아야 귀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소.”

“진실이라.”

“…….”

“좋소. 말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저거요.’

“설마, 바이트 타블렛을?”

존 워스의 손가락이 바이트 타블렛을 가리키자 탑주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섰다.

“조금 다르오. 내가 원하는 것은 바이트 타블렛 그 자체가 아니라,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되는 것이오. 이게 진짜 내 진심이오. 부디 일전에 내가 귀 마탑에 콘티에롬이라는 유품을 전달했음을 상기해 주시오. 내 짐작에는 그게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사실이다.

단순히 중요한 역할을 넘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진짜 바이트 타블렛을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현재는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

따지고 보면 존 워스의 주장대로 그는 이미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에 큰 공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가 콘티에롬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가정을 떠올린 탑주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오. 귀하의 말이 옳소. 하지만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이 귀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이오?”

“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바이트 타블렛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세상에 넘쳐나는 초인들이 멸종되는 날이 될 텐데. 하하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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