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89화
1324화
온화한 바다처럼 나른한 검광이 물결친다.
검무를 연상시키는 평온한 검로. 그러나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열여섯 방위를 가른다.
휘휘휘휭ᅳ
그러기를 열두 번.
검이 지난 자리로 백구십이 개의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벽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에 새겨진 자국의 정체는 검강이었다. 그것도 실체화될 정도로 결정화된 검강.
그렇기에 벽에 묻은 핏자국처럼 지워지거나 흩어지지 않은 것.
“……도대체 마나 응축도가 얼마나 높으면 저런 걸 해내지?”
“저게 가능하긴 하구나.”
붉은 자국의 정체를 조금 늦게 파악한 바벨의 초인과 마법사들이 새삼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특히 플레타는 눈빛이 밝다 못해 번쩍거릴 지경.
이런 바벨의 반응에 은색 기사단은 어깨가 으쓱한다.
이드와 일리나의 가르침을 받고, 라미아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싸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은색 기사단에 있어 이드는 이미 검후와 같은 경의를 가지고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다. 즉, 내 편이라는 소리다.
‘뭐, 겨우 그런 걸 보고 그렇게 놀라?’
‘너희는 신화에나 나올 것 같은 늑대와 싸우는 거 봤어? 못 봤겠지. 우린 봤다!’
생각지 않게 은색 기사단에 자부심을 심어 주게 된 이드다.
그 사이 이드 주변에는 파편화된 검강으로 만들어진 원이 생겼다.
그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를 물어 와 만든 새의 둥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안에 쌓여 있는 검강의 결정은 육백 개. 그러나 아직 원하는 숫자는 되지 않았다.
이드는 다시 검광을 번뜩이며 열여섯 방위를 베어 나갔다. 그와 함께 그의 발은 팔괘, 그것도 선천팔괘를 따라 움직였다.
선천팔괘는 어느 계절과 방위에서나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대자연의 공간과 지리적 원상을 형상화한 것.
현재 층층이 공간이 나뉜 영혼의 관을 관통하려는 이드에게 있어 이보다 더 적격인 해법은 없다고 하겠다. 이드는 이러한 선천팔괘의 보법을 통해, 사방에 쌓여 가는 검강에 기의 배치를 프로그램하는 것이었다. 이드가 기감을 통해 읽어 낸 각층의 마나 흐름.
그것을 밀어내고 공명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응하는 마나가 필요했다. 하나의 흐름으로는 독립된 마나의 흐름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여 나가는 검강 결정의 숫자가 천이백 개가 되었을 때다.
스숫.
도도히 흐르던 검강을 멈춘 이드가 라미아의 검 끝으로 새의 둥지처럼 쌓인 원형의 고리를 건드렸다.
쿠릉.
그것이 시동키였을까.
직후 멈춰 있던 검강의 덩어리가 움직였다. 고리의 형태를 유지한 채 안쪽으로 구르기 시작한 것.
그 상태를 만족스럽게 확인한 이드는 다음 과정에 들어갔다. 마치 악단을 연주하는 지휘자처럼 라미아의 검극을 천장으로 향했다.
그러자 구르기 시작한 고리가 라미아를 따라 느릿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처럼 둥실둥실 떠오른 검강의 고리는 금세 천장에 닿았다. 콰드드드득!
산사태가 일어나면 이런 소리가 날까.
검강의 고리에 닿은 천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니,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네 발의 철황파산포도 견뎌 냈던 천장이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검강의 고리는 땅속으로 파고드는 땅강아지처럼 손쉽게 천장을 뚫고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이 과정에서 작은 돌조각은 고사하고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검강의 고리 속으로 모조리 빨려들어 간 것 같았다. 그 안에 영혼의 관 1층의 무차원 공간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조화일까. 하지만 거기까지 깊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천장을 절반쯤 뚫어 내던 검강의 고리 앞쪽에서 갑자기 폭음과 함께 색색의 빛이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투두두둥!
쿠르르릉!
“마법 트랩입니다!”
“설치된 마법이 발동과 동시에 파괴되고 있습니다!”
폭음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들. 그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인지한 것이다.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아무렴 그들이라도 자신들이 사는 마탑에는 남김없이 꼼꼼하게 마법을 쑤셔 박아 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누구도 몰래 숨어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말이다.
하지만 땅강아지가 아무리 흙벽을 단단히 쌓아 본들, 두더지를 막아 낼 수는 없다. 흙벽은 발톱질 한 번에 무너지고, 금방 잡아먹힐 뿐.
지금 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딱 그러했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그 어떤 마법도 검강의 고리를 막아 내긴커녕 밀어내지도 못했다. 검강의 고리는 처음의 속도를 유지한 채 쉼 없이 상승을 이어 갔다.
그렇게 삼 미터 정도를 파고들었을까. 그에 걸린 시간은 일곱 번 숨을 쉴 정도.
쉼 없이 상승하던 검강의 고리가 갑자기 상승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가닥가닥 끊어진 검강의 결정이 복잡한 건축물의 뼈대처럼 변하더니, 하나의 커다란 둥근 기둥으로 변했다.
아니, 다시 보면 그건 기둥이 아니라 망치였다. 성벽을 부수는 망치.
“격(隔)!”
이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망치를 두드렸다. 라미아의 검극이 하늘을 찌르는 찰나, 기둥 끝에 붉은빛이 짧게 번뜩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단한 벽이 단번에 뚫렸다.
퍼엉!
시원한 소리와 함께 검은 구멍 속으로 쏟아지는 빛.
하지만 그건 일순간이었다.
콰드드드득.
기둥으로 변해 있던 검강 결정이 순식간에 둥근 벽이 되어 공간을 차단했다. 그것은 단순히 성긴 벽을 세운 것이 아니라, 공간을 단절하는 결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뚫린 구멍 사이로 쏟아지던 빛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대신 다시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천장.
콰드드드득.
망치로 변했던 검강의 결정이 다시 고리로 변해 돌관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2층의 천장을 뚫기 시작해서 3층의 천장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삼십 초.
“3층 통과했습니다.”
상황을 알리는 이드의 말에 가장 환호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라울이었다.
“아하, 하, 하하하하! 최곱니다. 최고예요! 명예 후작님, 당신에게 특대의 사랑을 보냅니다!”
그는 미친놈처럼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옷을 벗고 날뛰기라도 했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플레타가 시큼털털한 눈빛이 되었다.
“아주 숨넘어가겠다.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할 정도로 그렇게 좋냐?”
“좋지! 어떻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냐. 최근 삼 년 하고 칠 개월 12일 중 이보다 기쁜 날은 없었다.”
확신에 찬 라울의 말에 플레타는 진저리를 쳤다.
“이 변태 같은 새끼야. 그딴 사소한 걸 왜 기억하는데. 그리고 좋으면 얌전히 손뼉이나 칠 것이지. 저기 봐라. 임자 있는 분에 대한 사랑 고백에 분노한 분이 한둘이 아니시다.”
아닌 게 아니라 라울의 고함 소리에 은색 기사단을 시작으로, 그를 향한 일리나의 눈빛이 결코 곱지 않다.
특히 그중에서 검후의 눈빛이 가장 압권인 것이, 화가 난 듯하면서도 짜증스러운 한편으로는 한심스럽기도 한 양 매우 복잡미묘했다.
하지만 라울은 이런 눈빛들 속에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와 그 위에 뚫려 있는 구멍만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속도만 유지될 수 있다면 검후에 등을 찔려도 좋을 것 같으니까.”
“……진짜 미쳤냐?”
“그만큼 기쁘다는 소리다.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더라도 이대로라면 금방 최상층까지 길이 열린다. 곧 있으면 탑주를 잡을 수 있다는 거다. 베이몬의 침묵과 같은 것이 세상에 퍼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단 말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 못 하겠어?”
“내가 아무리 아둔해도 그걸 모르겠냐.”
“그럼 기뻐해라. 말마따나 손뼉이나 치라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상황인지 끊임없이 확인하란 말이다. 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도록.”
라울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흥분을 가라앉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플레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발 물러섰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저거, 좀 진짜 돌아버린 건 아니겠지?”
“제가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데요.”
“……어디가?”
믿고 있던 부대장의 충격적 발언에 플레타가 콧방귀를 끼었다. 반대로 오탄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진지하기만 했다.
“전부 다요. 솔직한 맘으로 저도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탄은 진심을 가득 담아 답했다.
사실 그도 영혼의 관, 미완의 마탑을 우습게 본 사람 중 하나였다. 초인 마법이라는 그들의 마법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 봤자 기존 마법의 변형 정도일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직접 경험한 저들의 힘은 어떠했던가. 실로 무서운 지경이었다.
인공 초인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바벨에 속하지 않고 그저 갑자기 각성한 초인기에 취해 미친 짓을 하는 작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중에는 용병이나, 도적단처럼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놈들도 적지 않다.
그들을 상대한다 생각하면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베이몬의 침묵은 달랐다.
전신에 족쇄가 채워진 것 같은 감각. 몸속에 충만하던 힘이 사라진 것 같은 상실감. 그간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한 것 같은 좌절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그나마 자신은 괜찮은 편에 속했다. 그래도 초인기를 완전히 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베이몬의 침묵에 처음 당했을 때 그의 부대원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도 진땀 흐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