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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51화


1386화

용도를 다한 바이트 타블렛이 사라졌다.

소멸하는 바이트 타블렛을 뒤로한 채 가슴을 쑥 내민 라미아가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헴, 하고 걸어왔다.

‘왜 저래?’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이드는 곧 일리나가 라미아를 마중하며 하는 말을 듣고는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에 있어 바이트 타블렛의 완성은 더도 덜도 아닌 혼돈의 파편의 계략을 막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나 결과의 가치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바이트 타블렛으로 새로운 법칙을 정립하는 일은 길고 긴 마법의 역사 속에서도 세 번을 넘지 않은 어마어마한 대 이벤트였다. 그야말로 마법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위대한 업적이란 말이다.

그러니 저 정도 우쭐한 것은 차라리 겸손이라고 봐야 옳았다.

“고생했어. 역시 마법은 라미아가 최고야.”

“후훗, 이 정도야 별거 아니라고요.”

별거 아니라면서 어깨는 더 벌어진 것 같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모으는 동시에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진리로 통하는 문이 너무 허술한 거 아냐? 가짜를 써도 열리고.’

진짜 바이트 타블렛의 조각은 여전히 자신들의 손에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에 라미아는 어쩔 수 있냐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혼돈의 파편이 손을 댔으니 어쩌겠어요.”

“그게 어쩌겠어요, 하고 끝날 문제인가? 분명 세계도 혼돈의 파편을 싫어했잖아.”

어디 싫어하는 정도일까. 큰 효과는 없었지만, 초인을 낳아 혼돈의 파편을 대적하게 만들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혼돈의 파편을 막지 못하면 자신이 품은 모든 생명이 죽고, 자신도 죽어야 하는 만큼 세계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 세계가 품고 있는 법칙에 손을 대는 일을 허락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싫어도 창조신 회장님이 허락한 권한을 거부할 수는 없는 거죠. 서로 입장이 달라도 결국 회장님 아래서 일하는 부하 직원일 뿐이잖아요? 거부하고 싶으면 회장님의 허락을 받아 와야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업으로 따지면 대략 감사실장급이란다. 혼돈의 파편이 하는 일 말이다.

“어렵다 어려워.”

이드는 어깨를 떨며 진저리를 쳤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치 꼬이고 꼬인 복잡한 인간사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자 항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문장 중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진리는 단순하다.

무공을 수련함에 있어 깨달음을 전해 주는 문장이었고, 이드도 주기적으로 되새겨 보는 글이었다.

하지만 무공에는 잘 들어맞던 이 문장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법칙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개의 세상을 거치고, 차원의 인과 혼돈의 파편 그리고 신의 존재를 확인한 지금의 이드가 보는 세상은 단순하기는커녕 복잡하기만 했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교하고, 냉혹한 법칙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극복하지 못하면 멸망’이라는 혼돈의 파편이 훌륭한 증거다. 당장 여기서 말하는 극복의 방법도, 극복의 주체도 법으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만 해도 이 세계에 속한 인물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니 산속에 틀어박혀 도를 닦는 도사들조차 등선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겠지.

아무튼, 이러는 사이 바이트 타블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에 다시 없을 장관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검후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치 비어 버린 디저트 접시를 본 아이의 표정 같았다.

제국의 황녀로서 세상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을 그녀가 이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이드는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갔다.

바이트 타블렛이 사라질 때의 광경은 정말이지 다시 없을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하늘까지 닿은 바이트 타블렛은 그 하나하나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며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수백억의, 그 수를 다 셀 수 없는 빛 알갱이가 여기 모인 일행들을 감싸고 지났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환상적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빛 알갱이가 피부를 스치는 순간의 느낌은 물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했다. 세상에 빛의 감촉이라니. 그런 걸 느껴 본 사람이 있기는 할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경험을 통해 모종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있을 듯했다.

‘불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시각화하면 이런 느낌일 것 같거든.’

수련자들은 티끌만 한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건다. 그리고 이드가 방금 본 광경도, 목숨은 아닐지언정 긴 시간을 투자해 볼 정도의 가치는 충분했다.

“감상이 끝나셨으면 자리부터 옮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나같이 감동에 빠진 가운데, 라울이 툭 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그 정도로 감성이 메마른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우선하고 있을 뿐.

그리고 그의 이성에 따르면 지금 이 장소는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죠. 곧 이 땅의 주인들이 달려올 테니 귀찮아지기 전에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네요.”

이드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놀랄 정도로 요란을 떨어 놓은 참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산봉우리가 날아가고, 하늘은 녹색으로 변하는 지랄을 떨었다.

눈과 귀를 막은 사람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 사달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원래 이 자리에서 영혼의 관을 지키고 있던 타란 백작과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만약 그들이 검왕에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아마 지금쯤 얼굴이 터질 정도로 전력을 다해 달려올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나설 것도 없이 바벨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단지 귀찮을 뿐.

가장 중요한 것은 불필요하게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뭐, 우리 손에 죽지 않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주변을 둘러본 이드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흔적만 남은 상황.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영혼의 관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받은 타란 백작일 것이다. 결국 그가 죽고 사는 일은 그의 정치력과 평소 인망에 달린 셈이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굳이?”

앞에 나서는 플레타를 검후가 멀거니 바라봤다.

압박을 주거나 비꼬려는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

“오늘 작전에 참여해서 제대로 활약한 것도 없으니, 고생하신 분들 길이라도 편히 열어 드려야지요.”

멋쩍은 얼굴로 쩝쩝 입맛을 다시는 플레타의 모습에 여기사들 사이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사실 말이 그래서 그렇지, 그와 그의 부대가 왜 한 일이 없겠나. 그렇게 따지면 은색 기사단 역시 놀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옳았다. 그들도 열심히 피 흘리고 싸운 전사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벌어진 전투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들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이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이드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플레타는 쉬이 이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검후는 이런 플레타의 모습에 내심 고소를 짓고는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이었지만 함께 검을 든 동료가 아니던가. 과연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굳이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부탁하지. 앞장서게.”

“그럼! 부대 전속 이동을 시작한다!”

“선두는 길을 열고, 장애물을 정리한다. 이동 시작!”

플레타의 명령에 따라 선두에 선 부대원들이 달려 나갔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난장판이 된 길이 편하게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선명하게 그들의 행적을 남기는 행위였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하지. 이 난장판에 저게 더해진다고 달라질 게 있겠냐고.’

그런 생각과 함께 이드도 조용하고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해가 빼꼼히 얼굴을 내비치고 있으니,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이드와 그의 일행은 순식간에 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이십 분 후.

사라진 이드 일행을 대신하듯 그 자리에 나타난 타란 백작과 기사들은 재앙이 몰아친 현장의 모습에 암담함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십 분. 그들은 그렇게 정지한 듯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타란 백작과 기사들에게 예고된 충격을 선사한 이드와 일행들은 곧 영지를 완전히 벗어나서는 그들이 1차로 합류했던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때마침 해가 완전히 떴다.

영혼의 관 파괴라는 목적을 이뤘으니, 굳이 여기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플레타 부대와는 그 숲에서 이별했다.

굳이 그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검후 님, 이드 님. 두 분과 함께할 수 있어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부디 다시 뵐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보다 더 정중히 예를 표하는 플레타였다.

그에 검후가 대표로 나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아무렴 이 자리에 그녀 말고 이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늘 그대의 실력, 제법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검에 재능이 있다는 점이 좋았다. 다시 보는 날, 그대의 실력이 성큼 발전해 있기를 바라지. 그것은 부대에 속한 그대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영광이옵니다, 검후!”

도열해 있던 부대원들이 절도있게 예를 표했다. 그렇게 부대원들의 배웅을 받는 가운데, 이드와 일행들은 라미아의 마법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마법의 규모가 큰 덕분에 마법광이 꽤 강렬했지만, 그보다 강렬한 태양 덕분에 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나의 흔적을 추적해 올 놈들이 있을 테니, 저희도 빠르게 이동하시죠.”

“어, 그래야지. 후~ 대단한 밤이었다. 그렇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플레타의 물음에 오탄이 손짓으로 부대원을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뭐 합니까. 솔직히 우리가 굳이 필요했나 싶던데요. 뭐, 우리 쪽에서 계획하고 주도한 일인 만큼 전력이 필요했다는 건 알겠는데…” 

막상 자신들이 들러리가 된 느낌은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다.

“대신 굉장한 걸 봤잖아.”

“그렇기는 합니다. 흔해 빠진 식상한 개소리를 제가 할 줄은 몰랐지만, 확실히 세상은 넓은 것 같습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진 우리도 운이 좋았죠.”

작전 중에 그런 괴물과 마주했다면 부대는 순식간에 전멸했을 것이다.

“크크큭. 인마, 그거 쓸데없는 걱정이다. 괴물도 상대를 봐 가며 나선다. 우린 급이 안 돼!”

“……그게 자랑입니까?”

“당연히 아니지. 우리도 괴물급이 되자는 각오다!”

“하려면 혼자 하십시오. 저는 손톱만큼도 자신 없으니까. 응원은 해 드리겠습니다.”

“야! 우리 부대는 하나야. 해도 같이…….”

“아~ 모릅니다, 몰라요. 부대, 준비 끝났으면 대장의 헛소리가 더 심해지기 전에 이동한다!” “이동!”

“이 자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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