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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72화


1407화

드래곤들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가웠다.

그중에는 검후만큼이나 반가운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 인연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다. 드래곤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그만큼 라미아의 해석은 지금껏 그녀의 입을 통해 들었던 말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동시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그레센 땅을 밟은 후 경험한 것이 얼마인데, 아직도 인간의 고정 관념을 벗어던지질 못하고 있는지. 무엇보다 자신은 인간의 왕국에서 인간들과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는 다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바쁘게 세상을 뒤집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를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당장 자신의 아내인 일리나만 해도 인간이 아니지 않던가. 그리고 자신의 숙적인 혼돈의 파편.

그들 역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무언가. 몬스터도 아니고, 이종족도 아니다. 중간계 최강이라는 드래곤을 비웃는 존재. 굳이 말하자면 중간계의 육신을 걸친 신에 가까운 놈들. 애초에 인간의 틀에 가두는 게 불가능한 놈들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놈들을 인간의 기준에서 판단해 버렸다.

만약 진짜 그렇다면 끔찍한 소리였다. 세상을 인간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신이라니.

‘・・・・・・ 거긴 무슨 지옥이야?’

인간처럼 분노하고, 배신하고, 욕망하는 혼돈의 파편이 날뛰는 세상을 상상해 본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계약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정말 그들이 인간처럼 탐욕스러웠다면 이 세상은 색다른 형태의 멸망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이런 걸 보면 확실히 혼돈의 파편에게 인간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존 워스를 보면 인간의 물이 전혀 들지 않는 건 또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나쁜 물이 들기 전에 빨리빨리 나와서 죽어 줘라, 좀!’

그렇게 아무도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을 빌며 열심히 딴생각 중인 이드.

그를 다시 원래 자리로 끌어온 것은 일리나의 목소리였다.

“그럼 결국 이드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더 크겠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죠.”

라미아가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제가 말한 상황을 가장 크게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도 바로 혼돈의 파편일 테니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드래곤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이드에 있어 반가움이었다. 물론 이제는 든든한 지원군의 느낌이지만.

아무튼, 이드가 그저 반가웠다면 혼돈의 파편 입장에서는 발등의 불이었다.

드래곤들의 복귀를 막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문을 지키고 있던 힘의 균형이 깨어졌으니, 문이 뚫리는 것은 그야말로 기정사실.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드래곤들이 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넘는 그 순간은 생각보다 평온할 가능성이 크다.

“어째서?”

이드의 물음에 라미아가 양손으로 크고 작은 원을 그렸다.

“전력 차가 압도적이잖아요. 패배가 확실한 전투에 집착하는 건 바보들뿐이에요. 어차피 그렇게 싸워봤자 드래곤을 얼마나 잡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라도 숫자를 줄이면 이득이잖아. 어차피 그 과정에서 죽더라도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

혼돈의 파편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이드 뿐이다.

그가 아니라도 혼돈의 파편을 죽일 수는 있지만, 결국 그때뿐. 그렇게 죽은 놈들은 되살아나 돌아온다.

‘진짜 끔찍한 일이지. 그러고 보면 신은 이렇게 끝없이 부활하는 놈들과 어떻게 싸워 이기라고 이런 놈들을 심어 둔 거지?’ 

이드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차원의 인을 가진 자신이 마침 운명처럼 찾아오지 않았다면 과연 이 그레센은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을까.

과연 멸망이라는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

현명한 마법사들과 수많은 이종족, 그리고 드래곤들이라면 늦더라도 방법을 찾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있어서는 ‘글쎄’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뭐, 어차피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없었을 때의 가정이니까.

지금 그레센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혹시 다른 차원에서는 그 차원에 있는 혼돈의 파편이 깨어나 멸망의 시련을 안겼을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이드는 혹시 힘겹게 멸망을 이겨 내고 있을 어떤 차원을 위해 응원을 보내는 것으로 깔끔히 마음을 접었다.

자신 스스로도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한계는 분명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신이 아니다. 당장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고민해 봤자 늘어나는 것은 한숨과 흰머리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렴 사랑스러운 아내들을 위해서라도 흰머리가 생기는 일은 피해야지 않겠는가.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집중했다.

마침 라미아도 정말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하고서는 이드를 바라보는 중이다.

“무슨 소리. 손해가 큰 게 당연하죠. 전투를 포기하면 당장 돌아와 더욱 큰 결전을 준비할 수 있지만, 죽으면…..”

“죽으면?”

“진짜 몰라서 물어요?”

“확인하고 싶은 거지.”

“칫, 죽으면 부활에 시간이 걸리죠. 당연히 전력이 늘어난 우리와 드래곤의 반격에 즉각 대응하기 어려워질 테고요. 그리고 하나 더!”

“하나 더 있어? 아니, 그보다 그 얼굴은 뭔데?”

이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마를 까고 검지를 세운 라미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를 흉내 낸 것 같은데. 누구야?

이런 이드의 반응에 김이 팍 새 버린 라미아가 이드의 배를 두드렸다. 단단한 근육으로 둘린 배에서 퉁 하고 북소리가 났다.

“바보! 지구 사람이 이것도 모르고!”

“야, 난 지구가 아니라 중원 사람이고!”

갑작스럽게 출신지 세탁을 당한 이드가 억울해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말이야.

그때였다.

일리나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난 알 것 같아요. 라미아가 보여 준 영화에서 나왔어요!”

“역시 일리나는 기억하네요. 으이그, 일리나도 아는걸!”

“……”

라미아의 조용한 핀잔에 이드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지구에 가 보지도 않은 일리나가 아는 걸 자신이 모른다니.

아니, 그보다 1:2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탓이 맞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렇게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패배를 받아들인 이드는 다시 라미아의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하나 더는 뭔데?”

“부활의 위험이죠. 죽은 혼돈의 파편을 부활시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자, 생각해 봐요. 만약 제가 죽은 혼돈의 파편을 부활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이드는 라미아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

그저 생각만 해도 재밌고 즐거운 상황이 아닌가. 이건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뻔하지. 눈을 뜬 순간, 네 옆에 있던 내 손에 죽겠지.”

알을 깨고 나온 그 순간이 가장 약하다고 했다. 옆에 어미가 없다면 금방 얼어 죽기 때문이다.

설마 신과 같은 혼돈의 파편에도 이런 자연의 법칙이 해당될 줄이야.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물론 반대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거지만..”

가능성이 적다.

드래곤의 복귀는 이드 역시 신경 쓰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뭇 간절하기까지 하다.

당연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없다.

신경 쓰며 기다릴 것이다.

만약 그레센에 남아 있는 혼돈의 파편이 드래곤들의 진입을 막으려 한다면 그 즉시 이드도 그곳으로 뛰어들 것이다.

순식간에 이드와 드래곤 대 혼돈의 파편이라는 커다란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다.

그만한 규모라면 전투의 결과와 상관없이 혼돈의 파편도 몸을 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차원의 경계라는 위치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각각의 혼돈의 파편을 마크하고 추적에 나설 드래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대일의 전투라면 혼돈의 파편에 밀릴 수 있는 드래곤이지만, 추적에만 집중한다면 제아무리 혼돈의 파편이라도 드래곤을 뿌리칠 수는 없을 테니까.

즉, 확실한 카드가 없는 이상에는 그 전투는 혼돈의 파편에게 있어 그야말로 개미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아,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면 오히려 이쪽에서 조심해야겠지.”

부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잠시 무거운 눈빛을 뿜어내던 이드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나의 모습에 얼른 얼굴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일리나의 이마를 쓰다듬고는,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날로 먹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확실히 땡긴다. 그렇지?”

“음, 연락해 볼까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달라고.”

의향을 묻는 라미아에 이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드래곤들 입장에서도 일부러 놓아줄 일은 없겠지만, 가능하면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해 보자.”

기회는 있을 때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대충 어중간하게 ‘되면 좋고’라는 마인드로 기다리는 건 성공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어쨌든, 잘만 되면 혼돈의 파편을 또 하나를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드래곤들이 돌아오는 날이 더욱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이거, 벌써 두근거리네. 로드의 얼굴이 더 보고 싶어졌어.”

“어쭈, 지금 이렇게 예쁜 아내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맞을래요? 죽을래요?”

자신을 따라 웃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손톱을 세우는 라미아.

이드는 억울했다.

“야, 그건 그 뜻이 아니잖아!”

“흥, 그래서요?”

콧방귀를 날리는 라미아의 옆으로 일리나가 일어나 앉는다. 단단히 팔짱을 낀 모습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박력이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드는 억울한 모습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항상 이야기하지만 1:2는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다.

“이드는 정말 가끔 너무 무신경해요!”

‘・・・・・・ 반대로 두 사람이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 이건 생트집이라고!’

“아! 혹시 지금 속으로 억울해한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이드는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그대로 넙죽 엎드렸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강적을 상대로 승리한 이드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릎 꿇은 상태에서 철저히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건 물 건너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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