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4화
1409화
이드는 검후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살짝 늦은 대답.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보는 거지? 검왕 말이야.”
“그렇죠. 놈이 날 찌른 게 마지막이었으니까요.”
“이번에 보면 입장이 바뀌어 있겠어. 놈이 찔릴 차례니까.”
재판에 따른 형벌을 집행한다면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대전에서 검후를 마주한 검왕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얌전히 목을 내놓을까? 검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드로서는 예상이 어렵다.
“마음이 바뀐 건 아니지?”
“당연히. 그리고 이제 와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왜 그래?”
“그냥 좀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원인은 검왕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한 미련은 없는데.
왜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다를까.
검후 본인도 자신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싱숭생숭? 무슨 재회한 첫사랑이냐.”
불퉁하게 던진 이드의 말에 검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대화에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첫사랑이라는 단어.
이내 그 뜻을 상기한 검후가 폭소를 터트렸다.
미소를 머금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14살 소녀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깔깔 웃어 댔다.
“꺄하하하하! 첫사랑! 맞아요, 첫사랑! 아하하하!”
“뭐, 뭐야? 이 반응. 진짜 첫사랑이었어?”
이드는 종잡을 수 없는 검후의 모습에 여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첫사랑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당연히 아니죠! 아하하, 정말 오랜만에 배가 아프도록 웃었네요. 고마워요, 이드.”
“・・・・・・ 고마우면 좀 같이 웃지? 첫사랑이라는 말이 그렇게 웃겨?”
“웃기죠. 첫사랑은 아니지만, 차근히 생각해 보니까 놈도 제 첫 남자긴 했더라고요.”
“……어떤 의미로?”
눈을 가늘게 뜬 이드가 말을 가렸다.
지금 반응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남녀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자칫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는 한 대 맞을 수 있다.
“놈이 제가 처음으로 들인, 첫 제자였어요. 다른 평범한 스승과 제자 관계와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과거를 떠올린 것일까.
연무장을 바라보던 검후의 눈이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한다.
이드는 그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첫 제자, 무림 식으로 말하면 대제자란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정도 더 클 것이고, 서로에 대한 관계도 끈끈했으리라. 열 손가락 중에 특히 이쁜 손가락이라고나 할까.
제자는 자식과 같다고 했고, 자식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저울로 잰 듯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런 부분이 크게 작용하는 때가 바로 ‘처음’이라는 의미가 붙는 순간이다.
첫인상, 첫사랑, 첫 등원, 첫 이별, 첫 경험 등.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한 사람의 인생에 확실하게 영향을 끼친다.
하물며 짧게 스쳐 지나는 것들도 그러한데, 시작된 순간 평생을 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어떻겠나.
그것도 첫 제자.
첫사랑과 달리 이 관계는 단순히 싫다고 해서 끊어 낼 수도 없다. 그야말로 가족과도 같은 사이.
하지만 서로가 신중하게 고심하여 선택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관계가 무너졌을 때의 충격은 가족보다 더 클 수도 있었다. 스스로 판단력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첫 사제지간은 이렇듯 무거운 관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검후의 경우 무수히 많은 제자가 있다. 그레센에 퍼진 무공이 그녀에게서 시작된 특이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
한데 바로 이런 제자 중 페시딘이 첫 번째라는 말이다.
제일 특별하고, 가장 정이 가며, 가장 지켜 주고 싶은 대제자.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그 파괴력은 첫사랑보다 클지도 몰랐다.
그러나 영향은 있어도, 결국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드는 검후가 스스로 마음을 훌륭히 잘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긴 무림 역사를 봐도 사승 관계의 파탄으로 무너진 문파가 어디 한둘인가.
잘해야 봉문이고, 어찌어찌 유지하더라도 그 힘이 크게 쇠퇴하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곳이라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 문파에 누가 머물고 싶을 것이며, 누가 새로 들어오려 하겠는가.
다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랜 시절을 버텨 온 대문파는 지혜롭게 위기를 넘기는 방법을 알았다. 그 긴 역사에 미친놈 한둘이 없었을까.
그리고 또 다른 경우로는, 스승이나 제자를 해하고도 들키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아무렴 많고 많은 문파 중에 그런 음흉한 인간이 없을까.
더욱이 대놓고 피를 보기 좋아하는 사파까지 포함하여 생각해 보면 말이다.
아마이드가 없었다면 검왕도 이런 경우에 해당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가정을 떠올려 보면 지금 검후의 상황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계획대로 마무리만 된다면 소드 팰러스도 잘 지켜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힘내라. 실연은 본래 아픈 법이잖니.”
“・・・・・・뭐래? 이별도, 첫사랑의 아픔도 없는 애송이 주제에 아는 척 마시죠?”
이드는 자신의 응원에 비릿한 비웃음으로 답하는 검후를 보고 분노했다.
이 녀석이 힘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감히 자신을 보고 첫사랑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야! 나 유부남이야! 누굴 보고 애송이래!”
“첫사랑에 대한 대답이 유부남인 건 뭐래? 유치하다, 유치해! 통하지 않는 변명은 사절이에요. 나도 다 알거든요?”
“네가 알긴 뭘 아냐? 어떻게 아는데?”
“당연히…… 라미아에게 들어서 알죠. 일리나하고 같이 들었답니다. 애달픈 첫사랑도 모르는 애송이 씨! 오호호호호!”
“야!”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인격적으로 참을 수 없는 매도다.
이드는 그 자리에서 튕기듯 몸을 날려 배를 쭉 내밀고 있는 검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닥파닥!
직후 두 사람 사이로 하찮은 주먹질이 오갔다.
나이에 맞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아랫사람에게 보여 주기 민망한 장면이었다.
스폴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유치하게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식식거리며 손을 거뒀다.
“너, 이번엔 내가 봐준 거다.”
이드는 손가락을 들어 검후를 가리켜 보이고는 다시 창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한편 내심 라미아에게 이를 갈았다. 아무리 여자들끼리의 수다라지만, 자신의 첫사랑을 주제로 삼다니.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괘씸한 대죄였다. 영혼이 통해서 좋은 점이 수없이 많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디까지 뒤져 본 거야?’
결단코 두 사람이 알아서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굳이 두 사람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경험도 많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아내라지만 남편의 프라이버시를 이렇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라미아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를 고민하는 동시에, 이드는 마주 앉은 검후를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
“그래서, 사람들 앞엔 언제 나설 생각이야?”
“놈이 대전으로 드는 날이요.”
“그러면 소란이 클 텐데. 그 전에 밝힐 생각은 없고?”
사건이 사건인 만큼 큰 혼란을 가져올 일이었다. 거기에 검왕까지 반론을 시작하면 대전이 뒤집어지지 않을까?
“어쩔 수 없어요. 황제에게도 경고를 했지만, 놈은….. 하아, 검왕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에요. 만약 대신들에게 먼저 알렸다가는 중간에 사라질 가능성이 커요. 무엇보다, 누가 검왕에게 경고를 날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너와 내가 알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비밀에는 급이 있다. 몇 명이 알고 있느냐에 나뉘는 급.
그 기준에서 보자면 대신들에게 밝히는 순간, 세상도 알게 된다고 봐야 했다.
그들이 정말 심복에게만 공유해도 금방 비밀을 아는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대신, 황제가 원한다면 몇몇 주요 인물 정도는 미리 만나 볼 생각이에요.”
“황제 입장에선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편하지.”
물론 황제도 검후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검후의 발언을 보자면 굳이 반대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럼, 며칠 후엔 대전이 뒤집어지겠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어쩌면 폭삭 무너져서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검왕이 검을 들고 대항하려 한다면 말이다.
물론 이드가 나선다면 아무런 소란 없이 검왕을 제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내가 나서는 건 바라지 않겠지?”
“네, 제가 키웠으니까요. 거두는 것도 제가 해야죠. 마음만 받을게요. 대신 황제와 다른 사람들을 부탁드려요.”
“그건 황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황제도 검왕이 대전에 드는 날의 위험성을 알고, 그에 따라 만반의 준비 중일 게 분명했다.
검후도 그런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하는 까닭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드가 그 만약을 대비해 준다면 자신은 정말 온전히 검왕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아, 맞다. 검왕에 집중하고 있어서 깜빡했는데, 삼검왕 중 남은 하나는 어쩔 거야?”
“마르텔이요?”
“지금 소드 팰러스에 남아 있잖아. 대전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아마 그쪽에서도 바로 알게 될 거야.”
검후의 영향이 크지만, 제국과 소드 팰러스는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싶을 정도로 가깝다.
검후와 검왕의 전투가 끝이 날 때쯤이면 마르텔에게도 정확한 소식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마르텔이 도주 혹은 잠적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저항이라는 경우의 수는 애초에 가능성이 없었다.
그가 농성을 해도, 얼마나 많은 기사가 따라 줄 것인가.
아마 외부의 공격을 걱정하기 전에, 삼검왕의 목적을 알지 못했던 소드 팰러스 내부 기사들과 수련생의 반발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이드의 의견에 대해 검후는 고개를 저었다.
“마르텔이라면 괜찮아요. 검왕만 정리되면 녀석은 알아서 항복할 거예요. 원래 그런 녀석이거든요. 순수하고 의리가 깊죠.”
“……단순 무식한 게 아니고?”
그리고 의리가 깊다니. 의리가 깊은 놈이 스승을 배신하나?
하지만 이드는 굳이 그에 대해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페시딘과 마찬가지로 마르텔 역시 그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럼 됐고, 뭐, 슬슬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침 메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