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75화
1410화
은색 기사단에 내려진 휴식 명령이 연장되었다.
새벽 훈련에 대한 벌이었다. 물론 이걸 진짜 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명령을 내릴 때 검후의 얼굴이 싱글벙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명령 때문일까.
식사를 마친 기사들도 그날은 더 이상 수련장을 찾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겼다.
뭐, 그래 봤자 대부분이 적당한 그늘 아래서 어느 여름날의 고양이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수련을 좋아하는 만큼 휴식을 사랑할 줄 아는 기사들이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갔다.
다시 저택을 찾은 라울도 그런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륙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는 그라도 이 저택에선 힘을 쓸 수
없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느긋하게 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황궁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언제 들려올지 모를 소식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폴이 그랬다.
그녀는 사슴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황궁을 열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없던 검왕이 뿅 하고 나타나진 않아.”
그 모습이 한심했던 쉴라가 다가섰다.
“모르는 일이죠. 정말 뿅 하고 나타날지도? 단 몇 시간 만에 마스의 국경을 넘은 인간이잖아요.”
“그거야…….”
쉴라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그녀도 할 말이 없었다.
검후는 수단이 좋다는 말로 간단히 정리했지만, 사실 무슨 수단을 쓴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스폴의 말처럼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경에서 여기 안티로스까지는 검왕이 밤을 달린 거리의 세 배가 넘는다. 아무리 검왕이라도 공간 이동이 막혀 버린 지금 시점에는 빠르게 도착할 방법이 없다.
“그때와 지금은 경우가 달라. 절대 불가능해. 그러니 그만 들어가.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기사들이 불안해하잖아.”
평소 스폴의 행실 때문일까.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눈치를 보는 기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 계속 불안해하라고 해요. 난 여기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단장도 심심하면 날 괴롭히지 말고 비올라나 찾아가 봐요.”
“야! 가, 갑자기 그 인간 이름이 왜 나와?”
“흐응~~ 왜 나왔을 것 같아요?”
“……”
모르겠다면 아주 노골적으로 설명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스폴에 쉴라는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스폴을 잘 아는 만큼 감히 대형 폭탄을 자극하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우리 단장의 취향은 도대체 모르겠다니까.”
스폴은 그렇게 물러나는 쉴라의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은색 기사단장인 그녀에게 접근한 멋쟁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수련생 시절부터 다하면 정말 부대를 꾸밀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많은 매력적인 남자를 마다하고 이제와서 관심을 보인 것이 대머리 괴짜 마법사라니!
이건 뭐 갭이 어지간해야 맘을 돌리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일단 지금은 포기다, 포기.
스폴은 다시 황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회를 노려 검왕의 등에 검을 찔러 넣는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검후님을 배신한 대가는 분명하게 치르게 만들고 말겠어!”
그렇게 혼자만의 다짐을 하는 스폴이었다. 그런 그녀가 황궁을 노려보길 멈춘 것은 해가 지고서였다.
그렇게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한 그녀는 한 가지 기묘한 소문을 듣고 말았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쉴라를 보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 말이다.
“……진짜 갔다고?!”
이를 접한 스폴은 먹고 있던 식사를 내팽개치고 희희낙락 쉴라를 찾아 달렸다. 작게 다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그녀는 평소의 스폴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휴식 명령이 무색하게 기사들은 다시 수련장을 찾았다.
그런 기사들을 위해 이드도 수련장을 찾았다. 그의 주도하에 시작된 새벽 수련은 전날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그야말로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정도의 수련.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모두 수고했다.”
“수, 수고…… 하셨습니다아아…………….”
헐떡임이 멈추지 않는 숨.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어깨.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다리를 후들거리는 기사들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과연 이 모습을 보고 그녀들이 저 고고한 은색 기사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이런 노력이 쌓여 지금 은색 기사단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이드는 지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결코 마지막 한 방울의 근력까지 쥐어짠 자신의 훈련법에 만족한 게 아니다.
이드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수련장을 나섰다.
그러자 수련장 밖에서 안을 살피고 있던 쉴라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저희 기사들을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후의 부탁이었으니까요. 쉴라 단장이 따로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검후께서…… 혹시 화가 나지는 않으셨는지. 기사들의 새벽 수련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묻는 쉴라.
그녀의 생각을 대충 짐작한 이드가 전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나빴다면 휴식 연장이라는 명령 따위를 내렸을 리가 없지 않나. 무엇보다.
“화난 사람이 기사들의 수련을 봐 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저기 창으로 수련장을 내려다보면서 싱글벙글하고 있을걸요.”
“싱글벙글·・・이요?”
“어제도 수련장을 보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몰랐어요?”
하긴, 그런 얼굴은 아무리 아끼는 기사라고 해도 아랫사람에게 보여 줄 모습이 아니기는 했다.
아무튼, 검후가 기꺼워하는 중이라는 것에 기뻐하기 시작한 쉴라. 그 모습을 보던 이드는 문득 전날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쉴라 경.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비올라는 만나 봤습니까?”
“……네? 왜 그걸 제게…….”
비올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과 동시에 굳어 버린 쉴라.
전날 밤늦게까지 스폴에게 시달리며 눈 밑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급격히 진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놈이 돌아온 직후 연구실에 처박혀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요. 슬슬 걱정된다고 할까. 그런데 쉴라 경이 지하실에 다녀가셨다고 하니까 혹시 아시는 게 있나 싶어서 말입니다.”
“아는 것 없습니다. 전 비올라 마법사를 만나지 않았어요. 전 결백합니다!!”
“……어, 그렇게까지 질색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좌우간!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전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과연 자신의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드는 정신없이 부정에 부정을 더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뜨는 쉴라의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쉴라 경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는 말을 알고 있으려나?”
어깨를 으쓱인 이드는 저택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동시에 수련장을 힐끔 돌아보았다. 수련장 입구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한둘이 아니다. 아무래도 쉴라에 관련한 소문이 더 복잡하게 퍼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어째 미안한 질문을 한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가 쓸데없는 소문의 확산을 막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쉴라 단장이라면 이런 고난쯤은 쉽게 이겨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비올라나 찾아가 볼까?”
전날 쉴라 단장이 다녀갔는지에 대한 사실 확인도 겸해서 말이다.
“들었지? 너희도 들었지?”
“응! 응! 분명히 비올라 마법사라고 하셨어!”
“세상에, 미쳤나 봐! 우리 단장님이! 저 단장님이! 비올라 마법사라니! 이건 꿈이야!”
수련장 밖에서 들려온 쉴라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기사들은 대화 내용을 파악한 후 온갖 호들갑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밖에서 들려온 대화 내용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아니, 차라리 세상이 뒤집혀도 이보다 충격적이진 않으리라. 때문에 당연히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진정해, 이것들아. 우리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게 가능하니? 한두 명도 아니고, 단체로 잘못 들었다는 게?”
당연히 마법이나, 초인기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저 대화가 다른 의미일 가능성은? 너희 지금 확증 편향되어 있다는 거 알아?”
“……저년이 지는 아닌 것처럼 그러네. 그리고, 다른 의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쉴라 단장님 반응 봤잖아! 그걸 보고도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
“…….”
없다. 자신이 확증편향에 빠져 있어서 인지 몰라도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비올라 마법사는 아니지 않니?
너희들은 이해가 돼?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실망감이었다. 아무렴 우리 단장님의 남자는 세상이 인정하는 최고의 남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쉴라 단장은 그녀들 모두의 자랑이고, 자부심이었기에 그런 마음이 특히 컸다. 그녀들은 곧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인정할 수 없는 일이야. 반드시 확인이 필요해!”
“스폴 경을 찾아가 볼까?”
“……그거 일을 너무 크게 키우는 거 아닐까?”
과연 스폴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녀들도 뼈저리게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수련장에 드러누워 맥없이 바라보는 기사들이 있었다.
“저것들은 힘도 좋지.”
“헉헉…… 그러게. 나는…… 헉헉…… 주, 죽을 거 같이 힘든데………….”
“끄응, 넌 죽을 거 같지? 난 이미 죽었다.”
“죽었으면 닥쳐! 내가 미쳤지. 검후께서 내린 휴식 명령까지 어기면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끙끙거리며 일어나 앉으려다 팔에 힘이 풀려 쓰러진 기사가 훌쩍거리며 후회했다.
명성 높은 기사를 훌쩍거리게 만들 정도로 이드의 수련은 힘겨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를 불쌍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기엔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가 수련하겠다고 기어 나와 놓고는, 누가 수련하러 나가라고 칼 들고 협박했니?”
“그건 아니지만!”
굳이 찾자면 협박보다 더한 분위기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동료 기사들이었고,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제발 쉴 땐 좀 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