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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89화


1424화

스르릉. 납검하는 코랄.

방금 한 사람의 목을 잘랐음에도 무심하게 반짝이는 검에는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다.

그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동지들부터 모아야 합니다. 갑시다.”

짧은 말로 사람들을 재촉한 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코랄.

사람들은 그런 그의 등을 멍하니, 또는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설마 그가 파렐을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사람의 죽음 자체는 그들에게 매우 익숙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살인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목숨을 걸고 싸우는 크고 작은 전장이 많았다는 소리다.

당장 영지전만 벌어져도 수백이 죽어 나가는 것이 전장이다. 목이 잘려 나가는 인간의 죽음 따위? 그런 건 닭 다리를 뜯으면서도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자신을 향해 검을 든 적일 때 이야기다. 그들의 검은 상대를 철저하게 가릴 줄 알았다.

그 기준에서, 지금 죽어 있는 파렐은 적이 아니다.

비록 행동이 천박하고 불쾌한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뜻을 함께한 동료고 동지였다.

그런데 그런 파렐을 경고도 없이 죽여 버렸다.

그와 함께 언성을 높이던 크펠로가 살기를 뿜기는 했지만, 그 역시 진짜로 파렐을 죽일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코랄이 파렐의 목을 잘라 버렸다.

직전까지 파렐의 난장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파렐과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들은 노골적인 분노까지 드러냈다.

“미쳤군. 코랄!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파렐 경을 죽인단 말이오!”

“동지를 죽인 인간을 순순히 따르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신들의 말은, 내가 잘못했단 말이오?”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문고리에 손을 대고 있던 코랄이 몸을 돌렸다. 차분한 목소리에 반해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

그런 코랄을 마주한 순간, 기사들이 저마다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무런 경고 없이 파렐을 죽인 상대가 아닌가. 그 과단성과 뛰어난 검술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을 믿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잘했다는 소리요? 파렐 경은 우리 동지요. 그런 그를 아무런 경고도 없이 비겁한 기습으로 죽이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소드 팰러스의 기사요?!”

“동지라. 과연 그가 우리의 동지가 맞소? 그런 자가 한시가 다급한 이 상황에 분란만 일으킨단 말이오? 나는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첩자인 줄 알았소.”

“처, 첩자라니! 당신, 그게 할 말이오!”

“같은 의미에서, 굳이 지금 계속 따지고 나서는 당신들도 의심스럽군.”

“이・・・・・・ 이 작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몰아가는 코랄의 말에 상대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파렐의 억지만큼이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이었지만, 코랄의 말에는 사람들이 동조할 것 같아 두려웠다. 파렐의 목을 베어 버린 사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코랄은 더 이상 피를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의 언행은 모든 동지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었고, 나는 동지들을 위해 검을 뽑았을 뿐이오. 그에 대해서는 다른 동지들이 판단할 일. 마지막으로,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 돌아오고 있소. 검후가 돌아오는 순간부터 우린 더 이상 소드 팰러스의 기사가 아닌, 검왕의 기사가 되는 거요. 갑시다. 시간 없소.”

끼이익.

말을 마친 코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사람들이 하나둘 코랄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파렐의 목을 자른 일을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임은 인정해야 했다.

동시에 ‘소드 팰러스가 아니라 검왕의 기사’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신들이 현재 어떤 입장인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달까.

제일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멍하니 멈춰 선 파렐의 지인들 등을 떠밀었다.

“가세. 그의 말처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우선은 살 궁리부터 해야지 않겠나.”

“……알고 있습니다.”

그에 코랄과 각을 세우던 남자들은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코랄의 과감한 손속에 감정이 욱해서 나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반대할 정도로 파렐과 친분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우선 살고 보자는 말에 대해 그들도 생각이 같았다.

당장 오늘 이 자리에 그들이 모인 것도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마법 등을 피해 은밀히 움직였다.

그들의 행적은 규칙이 없었다. 큰길, 작은 길을 복잡하게 돌았다. 중간중간 잠시 멈추는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인원이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인원이 백 명이 되었을 때.

이들의 무리는 둘로 나뉘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의 인원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둘로 나뉜 무리는 다시 밤거리를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인 덕분에 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들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눈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초조함이 낳은 실수는 아니었다. 상대는 그들이 최선을 다해 경계했어도 알아차릴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애초에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모든 행동이 바로 그들에 의해 유도된 것이라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코랄이야. 순식간에 사람들을 휘어잡았어.”

“굉장한 연기력이지. 기사가 아니라 아나크렌에서 배우를 했어도 성공했을걸? 재주도 많아. 부럽다니까.”

“흥, 그런 자네도 재주가 많잖아. 그나저나, 이대로 문제는 없겠지?”

“검후? 마르텔? 어느 쪽?”

“당연히 둘 다. 그게 따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아니면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래서, 어느 쪽?”

끝까지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친구의 모습에 그림자에 숨은 남자, 칼모레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넌 다 좋은데, 그 고집은 진짜 어떻게 좀 해야 한다. 우선은 마르텔 경 쪽. 그쪽은 확인했냐?”

“완벽히 코랄이 저 멍청이들을 끌고 들이닥치기만 하면 일은 끝나. 마르텔은 절대 피하지 못해.’

“그렇겠지. 불같은 성격이지만 책임감은 확실한 분이니까.”

“흥, 책임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정말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면 검후를 배신하지 않았겠지. 그럼 지금의 사태도 없었을 거 아니냐고.” 

“그래서, 불만이야?”

“당연하지. 그랬다면 우리도 이렇게 숨어 있지 않았다고. 벌써 세상에 나섰겠지.”

“글쎄다. 그렇게 세상에 나설 때 과연 빈기사단의 이름을 달고 나설 수 있었을까? 저 구질구질한 오색기사단에 끼어서 나갔겠지.”

“우리가 왜? 당당히 빈기사단으로 나서야지. 우리 빈기사단이 오색기사단에 힘이 밀려, 자금이 밀려, 뭐가 아쉬워서 오색기사단으로 기어들어 가냐?”

“쯔쯧, 넌 그 말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거야.”

아무리 삼검왕의 명성이 높아도 검후보다 높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검후가 인정하는 기사단은 오직 다섯 개 기사단뿐. 당연히 빈기사단이라는 근본도 없는 기사단이 허락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훗,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잖아.”

“잘났다. 그나저나, 저렇게 모아 두면 검후의 발걸음도 잠시는 멈춰 둘 수 있겠지?”

“배신을 당하기 전이었다면 그렇다고 하겠는데, 지금은, 글쎄・・・・・・ 모르겠군.”

사람은 종종 무언가를 계기로 변한다.

나이를 먹으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배신이 가져오는 충격은 되레 나이를 먹은 사람일수록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제자인 동시에 기사였던 삼검왕의 배신이 아닌가. 하물며 깔끔히 목을 자르지도 않고, 당시 손을 잡은 바벨에 검후를 넘기는 치욕을 주었다. 검후의 성향이 변할 이유로는 차고도 넘쳤다.

“이래서 그날 검후를 죽이자고 했던 건데. 나는 분명히 바벨에 검후를 넘기는 걸 반대했었다고.”

칼모레는 상대의 잘난 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이 옳기는 했다. 그날 검후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지난 일을 언급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현재 그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전력의 보전이다. 코랄이 사람들 앞에 나선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칼모레는 마르텔이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과연 지금 마르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그를 찾아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마르텔 경이 처음부터 저항을 결심해 주셨다면 이런 일을 꾸밀 필요는 없었는데. 안타깝군.”

“안타깝기는 뭐가?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검후를 찌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순순히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다니. 도대체 그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너같이 인간성이 메마른 놈은 모른다.”

“그런 너는 알고?”

“…….”

칼모레는 가치 없는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사실 심정적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차마 말로는 정의 내리기 힘든 ‘감정’이라는 놈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며칠 전 마르텔을 찾아갔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은밀히 전해진 검왕의 밀명을 받아 마르텔을 찾은 날. 마르텔은 그들이 가져온 검왕의 지시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떠나지 않는다. 너희들이 기사들을 데리고 떠나라.”

변명도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낼 때의 마르텔의 표정과 눈빛은 말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칼모레는 마르텔을 설득하기 위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긴, 상대가 언제고 말로 한다고 들을 인물이기는 했던가.

오히려 의외였던 건 이 사실을 전했을 때의 검왕의 반응이었다. 검왕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의 탈출을 명령했다. 빈기사단은 그 명령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검후의 발길을 막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런 결론을 내린 데에는 은밀히 소드 팰러스에 대한 포위를 준비하고 있는 병력을 발견한 이유가 컸다.

검왕의 명령인 ‘전력의 보존’을 위해서는 저들의 눈과 귀를 돌릴 필요가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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