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0화
1425화
그 밤.
은밀한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밤거리를 헤매는 인원은 점점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검후에 대한 소문에 마음을 졸이던 사람들은 코랄의 말에 너무도 쉽게 휩쓸렸다.
코랄을 따르는 인원이 순식간에 이백 명이 되었다.
“저런 멍청한 것들이 나와 같은 소드 팰러스 출신이라니.”
“…….”
칼모레는 쯧쯧 혀를 차는 동료의 말에 일부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 앞에 신중하라. 소드 팰러스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중 하나다.
하지만 저들의 행동 어디에서도 신중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덕분에 자신들이 저들을 편하게 이용해 먹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검후를 배신하던 그 순간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니, 앞으로는 또 얼마나 남의 손에 이용당하며 살 것인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같은 기사단에 소속된 동료라면 몰라도, 저들을 위해 나설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 칼모레다.
그리해 결국 이날 새벽.
이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마르텔의 저택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르텔을 붙잡고 대책을 요구함과 동시에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리고 불같은 성격만큼이나 의리가 깊은 마르텔은 그런 기사들을 냉정하게 떨치지 못했다.
그러길 두 시간.
칼모레들의 노림수는 완벽히 적중했다. 기사들의 애원을 무시하지 못한 마르텔이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가타부타 조건을 붙이지도 않았고, 어떠한 대책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도 없었지만 당장 매달릴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리고 뱀이 허물을 벗듯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온전히 마르텔에 떠넘긴 코랄은 한 걸음 물러서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파렐의 억지를 상대할 때와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그야말로 내심을 읽기 힘든 얼굴.
너무도 변화 없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아쉽게도 그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마르텔의 승낙을 받아 내는 것을 확인한 코랄은 저택 너머 건물의 옥상으로 눈을 돌렸다.
옥상에 자리해 있는 두 사람.
비록 밤이고 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모습은 물론 눈빛까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가는 눈빛.
‘임무 완료’
‘수고했다. 그럼 우린 계획대로 다음 준비를 이어 간다. 너도 적당히 상황을 살피고 빠져나와.’
‘나중에 보자.’
짧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칼모레 등은 곧 옥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후 그들의 행선지를 예측하던 코랄은 곧 사람들 가운데 선 마르텔을 향해 눈을
돌렸고,
“…….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마르텔과 눈을 마주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본 마르텔은 기사들의 하소연을 듣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어쩌면・・・・・・ 기분 탓이 아닐지도,’
마음이 불편해진 코랄이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아무튼, 이 일을 기점으로 소드 팰러스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곧 시작될 축제에 들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내성 주변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숨길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내성으로의 출입을 막거나 그 주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방어 태세까지 갖추는 등 오히려 대놓고 티를 냈다.
물론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성에 접근할 권한이나 일이 있는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검후의 복귀를 위한 준비겠거니 쉽게 넘긴 것.
그러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상황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면 아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상황은 칼모레 등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소드 팰러스의 변화는 황금 마차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소드 팰러스까지 하루 반나절 거리를 남겨 둔 시점의 대로.
은색 기사단은 다급히 말을 몰고 나타난 황제의 연락관에 의해 말을 멈췄다. 연락관의 신분을 확인한 스폴이 그를 기사들 중앙에 있는 황금 마차로 이끌자, 곧 창문이 열리며 검후의 모습이 나타났다.
“황제가 보냈다고?”
“제국의 기사가 검후를 뵈옵니다. 충!”
감격한 얼굴로 예를 표하는 기사 역시 소드 팰러스 출신.
열심히 말을 달린 그의 몸에서 먼지가 피어올랐지만, 누구도 그것에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만큼 임무에 충실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급한 소식인 모양이구나.”
“긴급한 상황 변화가 있을 시 검후께 직보하라는 사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금 전달드리는 건은 그에 따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쯧, 좋은 일은 아니라는 말이로군.
“황공하옵니다.”
희소식이라면 이렇게 긴급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 자고로 나쁜 일일수록 급한 법.
검후의 눈초리에 씁쓸함이 담겼다.
“그대가 황공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늦지 않게 전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잘 알겠다. 가져온 소식을 이리 주겠느냐.”
검후의 말에 연락관이 품에서 두꺼운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스폴이 봉투를 받아 확인 후 검후에게 전달했다.
두꺼운 종이에 단단하게 봉인된 봉투.
“먼 길 달려오느라 고생했으니, 일단은 편히 쉬도록 하라. 단장이 연락관을 잘 챙겨 주고.”
“여, 영광이옵니다.”
검후에게 치하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라도 은색 기사단 사이에 머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일까.
감격한 연락관의 얼굴을 일별한 검후가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었다.
조용한 서재처럼 변한 마차 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고 있던 주사위를 내려놓은 이드가 봉투에 관심을 보였다.
“연락관이라니. 마법 통신을 두고 굳이 사람을 쓸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그렇겠죠. 마법 통신은 시간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런데 이 정도의 긴급이면, 검왕이라도 돌아온 건가?”
검후에게 직보하라는 말은 그만큼 급한 일로, 현장의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보나 마나 좋지 않은 내용이 분명할 테지만, 무언가 그 이상의 예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봉투를 노려보는 검후의 표정이 굉장히 우울하다.
“내가 뜯어 볼까?”
“아니요. 직접 확인해야죠.”
슬쩍 눈치를 본 이드의 말에 검후가 봉인을 뜯어 안에 든 내용을 살폈다.
조용한 가운데 종이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잠시 후,
내용을 확인한 검후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는다. 그리고는 말없이 이드를 향해 들고 있던 편지를 내민다.
그것을 받아 든 이드 옆으로 일리나와 라미아가 머리를 가져다 붙이고는 편지에 적힌 내용을 같이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긴급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물론 내용이 짧다고 해서 충격이 작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이 짧을수록 충격이 큰 경우가 더 많은데, 이번에도 그랬다.
“어・・・・・・ 보자. 마르텔 경이 기사들을 규합, 내성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축. 요새화를 진행 중. 검후에 대한 저항 의지를 확실히 하는 정황으로 보인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리저리 살펴도 그 이상의 내용은 없다.
이드 일가 세 사람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과연 검후가 이마를 싸매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라고 할까.
“이러면 도망자 유도는 실패로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너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
이드가 라미아를 향해 눈치를 줬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뻔히 현실로 드러난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라미아의 말처럼 편지 어디에도 도망자에 대한 말은 티끌만큼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소드 팰러스의 반응은 검후의 의도와는 백팔십도 다르다는 내용뿐이다.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아니면 연락관이 도망자에 대한 정보는 빼먹었나?”
“그럴 리가 있겠냐.”
무려 검후에게 직접 하는 보고다. 어지간히 멍청하거나, 어지간히 대범하지 않으면 그따위로 일을 처리하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황제가 그런 인물을 책임자로 보냈을 리도 없고.
“그럼 아직도 도망자가 없단 건데. 이러면 우리 계획은 망했네요. 그쪽이 먼저 우리 의도를 파악한 건가?”
“반반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드는 마르텔이 이쪽의 의도를 읽었다고 보진 않았다.
어차피 성에 숨어 봐야 그 결과는 뻔했으니까. 도망에 성공하는 것 말고 현실적으로 검후의 심판을 피할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급하게 몰아붙여서 이런 걸까요?”
“그럴 리가. 시간은 충분했다고.”
빈말이 아니라 검후의 시간 배분은 절묘했다. 중간중간 영지에 들러 머무는 시간까지 확실하게 배분해서 최대의 압박감을 줬다. 문제라면 그 결과가 원하는 바와 다르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원하는 도망자는 나오지 않았잖아요. 아니면 좀 더 여유 시간을 추가해 줘요?”
“아니요. 그건 오히려 이상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요.”
툴툴거리는 라미아의 말에 검후가 툭 하고 끼어들어 왔다.
복잡하던 생각을 정리한 듯, 한 손에는 얼음만 남은 컵이 들린 상태였다. 원래는 차가운 얼음물이 담겨 있던 컵이다.
검후는 안에 든 얼음 하나를 꺼내 와드득 씹으며 말했다.
“그리고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실패라고 보기도 힘들어요. 결국 썩은 사과를 분류하는 일에는 성공했잖아요.”
검후가 도망자의 발생을 유도한 이유는 간단했다. 꼭꼭 숨어 있던 배신자들이 알아서 튀어나와 주길 바란 것이다.
지금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지만, 목적은 이룬 바나 다름없었다. 마르텔을 중심으로 모여든 인물들이 바로 ‘썩은 사과’이기 때문이다.
썩은 사과들이 알아서 한자리에 모여 있다면 그것만 따로 정리해 버리면 되는 일이다. 오히려 뒷일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깨끗한 감이 없잖아 있다.
뿔뿔이 흩어지는 도망자의 경우 살아서 도망치는 경우가 생기겠지만, 이렇게 내성에 틀어박혀 있다면 놓치는 경우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후에게는 그런 자신이 있었다.
지금 그녀에겐 은색 기사단이 있고, 소드 팰러스에서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적색과 흑색 기사단이 있으며, 무엇보다 이드와 일리나, 라미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라리 지금 상황이 좋은 일인가 하면 그건 꼭 그렇지는 않다.
도망자를 유도했던 또 다른 이유.
소드 팰러스의 동료들끼리 피 흘리게끔 만드는 상황을 피하려던 의도가 완전히 실패한 셈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