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9화
1434화
클라인 백작의 등장은 시원한 바람 같았다. 꿉꿉하고 우울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되었다. 이게 꽃중년의 힘일까.
먹구름 가득하던 검후의 얼굴도 맑아졌다. 이드도 반가운 미소로 반기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클라인 백작. 오랜만입니다.”
“하하하. 실례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인사가 늦었습니다. 명예 후작님의 활약은 잘 듣고 있습니다.”
“에이, 다 압니다. 제 소식은 검후님에 관해 챙기는 김에 겸사겸사 들으신 것이잖습니까.”
“이런! 들켰나요.”
멋쩍은 듯 대답하지만, 얼굴에선 싱글벙글한 미소가 시종 떠나질 않는다. 그 상태로 손을 마주 잡는 클라인 백작.
이드는 악수하며 그 맘을 헤아렸다.
“제가 본 모습 중 가장 기뻐 보이십니다.”
“사실 너무 설레어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코앞에 다가오니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클라인 백작의 모습은 마치 생일 선물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이드는 마주 잡은 손을 놓았다.
“일단 검후께 인사부터 올리시죠.”
당신이 진짜 보고 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으냐.
그런 이드의 태도에 클라인 백작이 한 번 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저 모든 게 즐겁고 기쁜 날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클라인 백작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이드 옆 코랄을 향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도 코랄은 클라인 백작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엔 놀람이 가득했고,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속내를 감추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는 말이다. “후후후. 좋은 낯짝이지 않은가.”
웃으며 건넨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꼭 뱀이 속삭이는 것처럼 쉭쉭거리는 소리로 들린다.
그 덕에 흠칫 정신을 차린 코랄이 클라인 백작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마…… 날 미행했던 겁니까?”
“왜? 아닐 것 같은가?”
빠드득.
코랄은 상대의 비아냥에 분노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겉모습이 그러할 뿐, 정작 내심은 폭풍을 만난 배처럼 흔들리는 중이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계획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클라인 백작이라니. 그는 많고 많은 변수 중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었다. 이유는 검후의 복귀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검후의 복귀는 곧 축제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바빠질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생각할 것도 없이 소드 팰러스의 살림을 책임지는 검은 여우다.
검후의 도착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시점에서는 당연히 소드 팰러스 자신의 집무실에서 예산안을 붙들고 골머리를 앓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검은 여우가 눈앞에 있을 수 있는가.
지금 상황은 미행이라는 그 짧은 단어 하나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미행을 했다는 건,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말이 아닌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섬뜩한 의문이 남지만, 그래도 이건 납득할 수 있었다. 검왕의 배신 이후 클라인 백작은 쉼 없이 검왕을 의심하고 경계해 왔으니까. 어쩌면 그런 과정 속에서 빈 기사단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의문은 해결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자신이 전령으로 움직일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변덕 같은 거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르텔의 고집이 낳은 갑작스러운 임무.
도대체 클라인 백작은 이 임무를 어떻게 예측하고 자신에게 따라붙은 것인가.
‘혹시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검후에 의해 계획된 일이란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문 의심은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감히 확인할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경우.
까득.
힘껏 깨문 이빨에 씹힌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고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오늘 하루 벌써 몇 번을 놀라고 있는지.
코랄은 정말이지 그냥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어 동료들로부터 거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지만, 오늘만큼은 그 별명이 무색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런 코랄의 모습에 클라인 백작은 전혀 반대의 기분을 만끽했다.
이내 그는 침묵에 빠진 코랄을 뒤로했다. 그를 농락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지금 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겨우 저딴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표정과 의복을 바로 한 그는 곧 황금마차 앞에 섰다.
그의 등장에 따라 어느새 마차 밖으로 나와 있는 검후. 그런 검후를 눈부신 듯 바라보던 클라인 백작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한다.
“저러다 펑펑 우는 거 아니에요?”
검후를 따라 내린 라미아가 묘한 기대를 품고 눈을 반짝인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혹시 둘뿐이었다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곤거리는 사이, 클라인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쿵!
검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클라인 백작이 잔뜩 잠긴 목을 억지로 열어 말을 이었다.
“대륙 모든 기사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상징하는 검이시며, 소드 팰러스의 정당한 주인이신 나의 주군, 위대한 검후! 시르피 드 아이넬 아나크렌 혼 님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짧지만 하나하나 강렬한 의미를 담은 칭송. 그리고 그 속에 든 의미보다 차고 넘치는 클라인 백작의 진심.
그 앞에 선 검후의 눈길에 친애의 감정이 스며 나왔다.
왜 그렇지 않을까.
조건 없는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기쁘고 감사하게 만든다. 거기에 지금은 그렇게 믿던 제자들에 배신을 당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기다린 자신의 신하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검후는 직접 클라인 백작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그대의 말에는 언제나 미사여구가 가득해서 과하다 여겼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저 반갑기만 하구나. 잘 와 주었다.”
“그저 황공할 뿐이옵니다.”
검후의 손을 잡고 일어난 클라인 백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마 일전 은밀히 소드 팰러스를 찾았을 때 묵혀뒀던 이야기를 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클라인 백작의 말이 이 정도로 끝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과연 은색 기사단 중에서도 일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클라인 백작의 뒤를 이어, 그와 함께 앞으로 나선 세 명의 기사가 검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들은 클라인 백작의 호위를 맡은 흑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검후가 그들의 인사까지 하나하나 받아 준 후, 이드가 나섰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마중 나오신다는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황제가 소드 팰러스에 인력을 밀어 넣었음은 알고 있었다. 또, 그들을 통해 여전히 검후에게 충성하는 이들과 연락 중이라는 사실도 연락관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당장 검후의 복귀에 대해서도 이미 안티로스에서 출발하는 시점에 클라인 백작 등에는 통지가 닿은 상태였다.
하지만 바로 오늘까지도 클라인 백작이 직접 마중을 나온다는 소식은 들은 것이 없었다.
아무렴 검후를 위한 깜짝 이벤트일 리는 없고.
“원래는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검후님을 맞이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어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려고 하지 뭐겠습니까. 그래서 잡으러 나왔지요.”
“그런데 왜 진작 잡지 않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단순히 미꾸라지는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다.
코랄이라는 인물이 제법 단련된 기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오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과 실력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다.
흑색 기사단 소속의 세 기사 정도라면 짧은 순간 제압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클라인 백작은 그러지 않고 결국 여기까지 미행만 이어 온 것이다. 아무렴 검은 여우라 불리는 양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리가 없다.
“가만히 앞뒤 상황을 따져 본 결과, 그냥 두는 것이 검후님의 뜻에 부합할 듯했기 때문입니다. 제 독단적인 결정에 대해 늦게나마 용서를 구하옵니다.”
“염려치 마라. 이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나는 그대의 결정을 항시 존중하는 바이다. 분명 이 또한 나를 위함이겠지?”
“당연히 그러하옵니다.”
마치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검후를 위함이라고 말할 것 같은 클라인 백작.
검후가 없을 때보다 검후 앞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덕심에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백작께선 저자의 목적을 대충 예상하시는 모양입니다.”
“검후께서 출발하셨다는 연락을 받은 후, 소드 팰러스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배신자들을 쉼 없이 주시 중이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저자였고, 마침 마르텔 경과 독대를 했더군요. 그래서 대충 상황을 짐작했습니다.”
클라인 백작은 그리 말하며 코랄을 눈 아래로 깔아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명예롭게 끝내고 싶다고 했겠지요.”
“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총관으로 있으면서 그 배신자 놈들과 부대낀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 세월이면 상대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돈과 관련이 되면 더 노골적인 욕망이 보이는 법이지요.’
말과 함께 우쭐한 표정을 짓던 클라인 백작.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굳히고 혀를 찼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욕망을 알고서도 설마 검후를 배신할 걸 예상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든 것이다.
그라나 그게 어찌 그의 잘못일까.
욕망은 어디까지나 욕망이다. 마음속에 음습한 욕망 한둘 품지 않은 인간이 누가 있을까. 하나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을 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더욱이 삼검왕 정도 되는 존재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위험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번 일과 같은 사건을 실행에 옮긴다고 생각하기는 당연히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