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1화
1436화
두구둑두구둑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코랄이 문득 고삐를 당겼다.
잘 훈련된 말은 평소 같지 않은 주인의 손길에도 군말 없이 정확히 멈춰 섰다.
푸르륵!
코랄은 거칠게 콧김을 뿜는 말의 목을 습관처럼 두드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여전히 방진을 유지하고 있는 은색 기사단과 그 중심에 멈춰 선 황금마차. 그리고 황금마차 옆에 서 있는 몇몇 인물들.
너무 멀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 저들 사이에 있었던 코랄은 누가 누구인지 단번에 구분할 수 있었다.
마침 저들도 언덕 위에 멈춰 선 자신을 알았는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 하나 가벼운 인물이 없지만, 그중 특히나 신경이 쓰이는 인물이 있었다. 클라인 백작.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보이지 않아야 할 클라인 백작의 얼굴이 선명해지며, 그의 입가에 떠오른 비릿한 비웃음까지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게 역겨운 인간!”
차마 면전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답신을 받았으니 돌아가라면서 자신을 떠나보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축하한다. 넌 살아서 돌아간다.’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말해라. 기쁜 마음으로 내가 직접 그 목을 잘라 줄 테니.’
“…..”
‘역시 죽긴 싫은 모양이군. 그럼 가라. 가서 확실하게 답신을 전달해라.’
‘좋습니다. 답신을 받았으니, 떠나겠습니다. 그 전에 딱 하나만 답해 주십시오.’
‘하하하. 전령 주제에 질문이라니. 참 대단한 전령 나셨군.’
‘백작께선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겁니까?’
‘흥, 이거 자존심 상하는군. 네놈들은 내가 정말 그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빈 기사단’
‘도대체 언제…… 아니, 그렇다면 왜……………’
‘그만! 내가 허락한 질문은 하나뿐이다. 그 이상을 듣고 싶다면 그 목을 내어놓든가. 그렇다면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
목을 자르겠다는 말은 결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비록 소드 팰러스의 살림을 관리하는 총관으로서 깐깐하고 신경질적이며 관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그 근본은 기사. 클라인 백작의 검에서 뿜어지는 서늘한 냉기에 코랄은 목까지 올라온 의문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 뒤,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말을 타고 떠나오는 길이었다.
최악에는 죽음까지 각오했다. 그런데 그 위기를 피하고 임무를 완수. 그리고 드디어 돌아가는 중이다. 당연히 발걸음이 가벼워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저들과 멀어질수록 마음이 몇 배로 무거워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이 찝찝한 기분을 안고,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은 거냐.”
이성과는 다른, 본능에 따른 감성이 끊임없이 던지던 질문, 결국에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엔 그에 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자문자답도 하지 못한 코랄이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무력하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없다.
며칠 전, 멍청한 쭉정이들을 말 몇 마디로 설설 기게 만들던 기억에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자신이 그 멍청한 쭉정이들과 같은 급으로 떨어진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따지고 보면 자신의 처지는 쭉정이들보다 더 초라하다.
그놈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당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분명 어떤 흐름에 따라 자신의 뜻이 아닌, 상대의 뜻에 따라 임무에 성공했지만, 그에 대해 의심이 있어 봤자 따질 수도 없고, 물을 수도 없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마르텔의 요청에 대한 허락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다.”
되돌아보면 마르텔의 행태에 대한 분노와 혐오는 있었지만, 그의 요청에 대한 거부의 말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심지어 이후에 도착한 클라인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짜증 나게도 저들은 자신을 상대로 무언가를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뒤늦게 등장한 클라인 백작은 따로 검후의 허락도 없이 그 빌어먹을 똥 덩어리를 만들어 주었고, 검후는 그런 그를 일절 막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 일의 주관주임을 생각한다면, 그건 허락의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날 미행만 한 이유가…… 검후의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클라인 백작이 말하는 ‘검후의 뜻’이란 무엇인가.
눈을 부릅뜬 코랄은 생각에 골몰했다.
자신을 향한 클라인 백작의 비웃음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과연 그는 어째서 빈 기사단의 존재와 자신의 정체를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일까.
빈 기사단의 존재를 안다면 현재 소드 팰러스에 일어나는 일의 목적도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은 여우로 불리던 그라면 그 뒤에 숨은 목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클라인 백작은 자신들이 탈출하는 것을 보고 있을 생각이었던 것일까.
자신을 미행만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면?
그리고 그 계획에 더해, 마르텔이라는 변수가 가져온 요청을 허락한 이유를 더해서 나온 답은・・・・・・
“끄아악!! 모르겠다! 도대체 짐작조차 되질 않아! 대체 검후는 무슨 생각인 것이냐!”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던 코랄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 해답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차피 그래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번 짜증을 쏟아 낸 코랄이 훅 하고 숨을 뱉어 냈다.
“일단은 돌아간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보고가 시급하다.”
자신도 이렇게나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 필히 그에 대한 이중, 삼중의 대비가 필요했다. 그러자면
한시가 급했다.
무엇보다 검후는 이미 소드 팰러스의 영역에 들어선 시점이 아닌가.
“미안하지만 고생을 좀 해 줘야겠다. 히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코랄은 있는 힘껏 말을 달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쉭쉭!
그에 따라 말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달리는 속도는 조금씩 올라갔다.
“제법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허당이로군요.”
흙먼지를 날리며 순식간에 언덕 위에서 사라지는 코랄의 모습에 스폴이 냉소를 날렸다. 그 눈빛엔 코랄에 대한 깔보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일리나가 부른 바람의 정령이 코랄의 혼잣말을 여기까지 옮겨 와 준 덕분이었다.
딱히 그를 감시할 목적은 아니었다. 갑자기 언덕 위에 멈춰 선 모습에,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다는 스폴의 호기심을 풀어 주려는 간단한 의도였다. 그런데 혼자라 생각한 코랄이 속내를 그대로 쏟아 낸 덕분에 그 생생한 내심을 필터 없이 들어 버린 것.
만약 코랄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수치심에 목을 매달았을지도 모른다.
“왜, 그래도 저 정도면 똘똘하잖아, 스스로 머리도 굴릴 줄 알고, 대부분의 기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데.”
기사와 병사의 공통점이라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내려진 명령을 최우선 하는 것이 기사다.
그 때문에 명령 이외의 것에는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기사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지휘관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일반 평기사로 커리어를 마감한다.
“그렇잖아요. 이 간단한 걸 눈앞에 두고도 모르는데 바보죠. 지들 정체를 알고도 눈감아 줘, 어처구니없는 요청도 허락해 줘. 아니, 생각해 봐요. 감히 배신자 무리의 전령을 살려 보내주는 경우가 어딨냐구요.”
스폴의 주장은 그랬다.
이렇게나 눈치를 주고 단서가 많은데, 어째서 바로 코앞에 있는 답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그러니 멍청이죠.”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스폴 경. 이건 그가 똑똑하냐, 멍청하냐의 문제가 아니라네.”
“머리의 문제가 아니면요?”
멍청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에 의문을 가진 것은 스폴뿐만이 아니었다. 클라인 백작은 자신을 향한 눈길에 싱글벙글 헤프게 웃었다.
코랄이 있을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의 웃음이다. 오로지 믿음과 신뢰 위에서 피어날 수 있는 미소.
“머리보다는 발상의 전환. 일종의 혁명 같은 것이 필요하지.”
“어…… 백작님, 듣기 싫어졌어요.”
어쩐지 어려워 보이는 단어의 출현에 스폴이 슬쩍 발을 빼려 했지만, 클라인 백작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자, 들어 보게, 스폴 경. 저들에 있어서 적이란 무엇인가. 죽이고 항복을 받아 내야 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네.”
“그거야・・・・・・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은색 기사단에 있어서도 적이란 지금 클라인 백작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무엇보다 기사단이란 도구다. 도구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검후가 결정할 일이고.
은색 기사단은 그녀의 뜻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리고 이건 세상 모든 기사단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특히 소드 팰러스를 눈앞에 둔 은색 기사단이다. 당장 그들 앞에도 베고 항복을 받아야 할 적이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아, 오해는 말게.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틀에 고정되어 있다 보면 뻔히 보이는 것도 볼 수 없게 된다는 의미였네. 항상 적을 쓰러트려야 할 상대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그들을 살리려는 검후 님의 넓으신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지.”
갑자기 왜 뜬금없이 사랑?
중간에 조금 이상한 단어가 섞이긴 했지만, 스폴은 곧 떠오른 의문을 꺼내 놓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숨통을 열어 주는 경우는 많은데요?”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희망이 사라진 적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일부러 도망칠 최소한의 구멍은 일부러 만들어 주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의 전력이 비슷하거나, 적에게 비장의 수를 꺼낼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 있을 때의 경우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검후님과 명예 후작의 힘이 부족해 보이나? 적에게 일부러 숨통을 열어 줘야 할 정도로?”
“그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