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3화
1438화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저는 차라리 이놈들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싶어요.”
스폴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답게 쉴라의 눈총에도 불만을 담아 툭 튀어나온 입술은 쉬지 않았다.
“그러니?”
“네! 일단 죽어야 할 놈이라면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성에 틀어박힌 놈들이라도 반드시 저희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단장도 제 말이 옳다고 했어요!”
“너어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한 방에 넘겨 버리는 스폴.
그에 쉴라는 말아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맘 같아서는 이 사고뭉치의 뒤통수를 날려 버리고 싶지만, 그러자니 보는 눈이 많은 탓이다.
하지만 쉴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검후는 스폴의 말에 동의한 그녀의 생각을 더 궁금해했다.
“정말 그랬니?”
자신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기 때문인지, 그녀가 자신에게는 저와 같은 뜻을 비친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는 거잖니.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소드 팰러스에 더러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은 검후님의 바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납득할 최소한의 피는 흐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의 죄가 영원히 비밀로 묻힐 것이라면 몰라도, 곧 공식적으로 발표될 일입니다.”
황제는 소드 팰러스가 검후에 의해 정상화된 후 삼검왕의 죄상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저들의 죄목은 반역. 그에 대한 처벌은 죽음. 이건 어딜 가나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도 궁금해할 것입니다. 과연 삼검왕은 어떻게 죗값을 치렀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대중은 때에 따라 잔혹한 면이 있다.
목숨을 건 검투를 사랑하며, 죄인의 목이 떨어지는 것에 환호하고, 정상에 선 누군가의 추락에 기뻐한다.
그런 면에서 반역자가 된 삼검왕의 추락은 대중들이 씹고 뜯기 딱 좋은 자극적인 소재였다. 특히 그 속에는 검후의 위기와 탈출, 부활과 복귀라는 전형적인 영웅 스토리까지 첨가되어 있는 상황.
그야말로 수십 년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이야깃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야기의 핵심 중 하나인 삼검왕의 최후는 대중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될 거라는 말이다.
그런데 삼검왕의 최후에 대한 소식이 없다? 반역에 호응한 그 많은 죄인이 심판을 받지 않았다?
그야말로 김빠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어째서 반역자들이 처벌받지 않는가. 왜 죽어야 할 놈들이 죽지 않는가. 왜 단두대에 목이 걸리지 않고, 피가 흐르지 않는가!
그렇게 쌓인 불만은 자칫 무엄한 의혹을 낳을 가능성이 있었다. 바로 검후에 대한 의심 말이다.
물론 반역이라는, 어떤 명목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목에 대해 검후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뒷받침하는 증거도 한둘이 아니니까. 대신 이런 소문이 나돌지도 몰랐다.
검후가 나약해졌다고.
정에 휘둘려 중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검후의 높은 명망을 생각하면 그다지 가능성이 크지 않은 극단적인 예시일지 모르지만, 일부러 그런 논란의 가능성을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더욱이 반역의 핵심 주역인 검왕이 이미 잠적해 버린 상태라면 그 빈자리를 메꿀 만한 피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쉴라.
검후는 그러한 모습을 신기하고 대견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네 말을 들으니, 네가 이 문제를 얼마나 깊이 고심했는지 알겠다.”
“그저 제 짧은 생각일 뿐입니다.”
“아니다. 네 말에 틀린 것이 없다. 백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물론입니다. 옆에서 들으면서 역시 은색 기사단장이다 싶었습니다.”
검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클라인 백작이었다.
검은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그도 이런 부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몰랐다는 것처럼 쉴라를 칭찬했다.
그에 민망해진 쉴라가 더 참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늘로 돌렸다.
평소 위엄차던 모습과 상반되는 태도에 너도나도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가까이서 이 현장을 목격한 은색 기사단 소속의 여기사들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훈련 중에 목이 잘릴지도 몰라!’
그럼에도 웃음이 쉬이 그치지 않자, 쉴라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만들 웃으십시오. 민망해 죽겠습니다.”
“알았다. 그래도 네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다음에도 이러한 일이 있다면, 그때는 네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도록 해라. 내가 깊이 참고하겠다.”
검후의 이러한 말에 감동한 쉴라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
이전이라고 검후가 쉴라의 의견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쉴라가 내놓는 의견과 말을 신뢰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영역에서의 일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 검후의 말은 공적인 영역에서도 쉴라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색 기사단 중 검후와 가장 가까이 있어 특별했던 은색 기사단의 위치가 더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옳은 결정이십니다, 주군.”
이런 결정에 대해 클라인 백작은 손뼉까지 치며 축하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그가 살핀 쉴라는 분명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검후에게 좋은 일이었다. 자신도 언제나 검후에게 최고의 조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렴 쉴라처럼 항시 옆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쉴라가 그런 자신을 대신해 준다면 그로서도 마음에 놓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내성에 틀어박힌 자들을 어찌 처리할지는 정해졌으니. 이 앞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백작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코랄이 가져온 전언과 편지에는 기사다운 마지막을 원하는 마르텔의 바람이 담겼을 뿐, 정확히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도 거기까지는 도를 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검후가 보여 줄 수 있는 자비의 선을 넘을 수 있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클라인 백작은 코랄에게 똥 덩어리를 들려 보내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다.
“모든 일은 내일 날이 밝기 전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지에 그리 적은 것인가?”
“마침 오늘이 달이 가장 밝은 날이더군요. 그래서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테무른 대족장.
갑자기 언급된 이름에 여럿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검후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쉴라마저 처음 듣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아는 사람이 없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검후는 기억이 떠오른 듯 살짝 놀란 얼굴로 클라인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그 전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니, 놀랍군. 벌써 40년도 전의 일인데.”
“주군의 일이라면 이 클라인,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쯧, 징그러운 소리는 그 정도로 하게. 그보다, 굳이 그때 일을 언급한 이유가 있나?”
“당연히 마르텔 때문입니다. 굳이 그 작자에게 구구절절 적어 보내기도 귀찮았고, 빈 기사단 놈들이 뜯어 보는 것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적은 것이 그 전투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마르텔이라도 그 전투라면 모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모를 수가 없지. 자신이 참가했던 전투인데. 더욱이 본인이 죽다 살아난 전투를 어떻게 잊을까.”
옛 기억을 떠올린 검후의 눈빛이 아련하다.
그에 주변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테무른 대족장은 누구이며, 어떤 전투를 치렀단 말인가. 더욱이 저 거칠 것 없는 마르텔이 죽다 살아난 일이 있었다니?
“테무른이 누굽니까? 대족장이라는 지위를 가진 것을 보면 어떤 부족을 이끄는 자인 모양인데. 제국에 그런 집단이 있었습니까?”
그저 설명을 기다리는 기사들과 달리, 이드는 궁금증을 참지 않았다.
그에 검후가 나서기 전에 클라인 백작이 잽싸게 나섰다.
검후의 위업에 대해 자랑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은 것인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당연히 제국 얘기가 아닙니다. 외딴 깡촌에야 부족 단위의 마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자들도 스스로 제국민이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럼 테무른이란 자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입니다. 그것도 그레이트 오크로서 10만의 오크를 이끄는 대족장이죠.”
“오크 10만!!”
10만의 오크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크라면 몬스터 중에서도 인간에 가장 큰 해악이 되는 몬스터다.
어지간한 용병이 상대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산적 수준이기는 하나, 그것도 작은 무리에 한정된다.
특이하게도 오크는 무리가 커질수록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무리의 숫자가 수백이 넘으면 용병단이 필요하고, 수천이 넘으면 영지의 정예병이 함께 나서야 했다.
그런 오크가 10만이다.
그런 규모라면 이미 용병이나 영지 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때는 제국의 정예들, 바로 기사와 정규군이 필요할 때다.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몬스터 토벌이 아니라, 전쟁이 된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제가 알기로 40년 전엔 그런 규모의 오크 토벌은 없었습니다.”
쉴라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클라인 백작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 부분이 주군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런 공을 세우고도 세상에 널리 알리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토벌은 있었습니다.”
“그럼 왜 저희가 모르는 것입니까?”
“그거야 오크들이 본격적으로 준동하기 전에 제국에서 먼저 토벌에 나선 덕분이었지요.”
오크 부족은 의뢰를 받아 맹수를 사로잡고자 나선 용병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때 오크 무리는 인간들의 영역에서 멀리 벗어나 자신들만의 영역 안에서 부족을 키우고 있었다.
애초에 10만의 오크가 모일 때까지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용병들이 아니었다면 더 커졌을 테니 제국의 입장에선 그나마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오크 부족으로서는 불운이었겠지만 말이다.
보고를 받은 제국은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오크 부족에 대한 토벌을 결정했고, 그에 검후와 삼검왕이 속하게 된 것이다.
제국이 아닌 오크 영역에서 벌어진 오크 토벌이었기에 제국민의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마저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당시 전투는 쉽지 않았다.
무공이 보급된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오크 부족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다.
특히 부족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에 비례해서 힘이 강해지는 대족장과 샤먼의 지혜는 기사들로서도 골치가 아플 정도였다고.
그래서였을까.
제국은 몇 번이나 테무른 대족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놈을 쫓아 더욱 험지 깊이 들어가야 했고, 마지막 전투에서 마르텔은 치명적일 정도의 중상을 당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에게 치명상을 안긴 것이 바로 테무른 대족장이었다.
“물론 그런 놈도 결국엔 주군의 일검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잘렸지만 말입니다.”
“・ᆞ일검은 아니었네,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