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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07화


1442화

“일찍 쉬어 두렴.” 

검후가 말했다.

해가 지기 전, 일행은 검후가 말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말을 쉬게 하고 간단히 짐을 풀었다. 검후는 그런 기사들에게 일찌감치 휴식을 명령했다.

예정된 기습은 새벽에 있을 것이니 일찍 쉬어 두라는 의미였다. 기사단은 이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편히 무장을 풀고, 조금은 이르지만 풍성한 저녁을 준비했다.

잘 준비된 검후의 행차에 소홀함은 없었다. 재료와 요리는 모두 황궁에서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간 영지의 초대를 받아 꺼낼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제 역할을 할 기회가 된 것이다. 정말 끝까지 꺼낼 일이 없었다면 검후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메인 쉐프가 몰래 울어 버렸을지도?

어쨌든 덕분에 혀가 즐거운 식사를 마친 이드는 입가심용으로 나온 찻잔을 들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지자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과 검게 물드는 산이 눈을 가득 채운다.

“야영지로 쓰기에 좋은 장소긴 하네.”

자신들이 짐을 푼 야영지는 높지 않은 산의 품에 반쯤 안겨 있는 형태였다. 낮지만 산세가 복잡해서 비가 와도 빗물이 흘러들지 않는 형태가 정말이지 절묘했다.

이런 환경이라면 겨울에도 제법 따뜻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자주 왔던 곳인가 봐?”

“처음엔 가족과 같이 왔었고, 이후에는 제자들과 함께했죠.”

천천히 다가온 검후가 이드 옆에 나란히 서며 답했다. 그녀의 손에도 이드의 것과 같은 찻잔이 들려 있었다. 안티로스를 떠난 이후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쉴라와 스폴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이드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나라면 그런 곳에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굳이 여길 고른 이유라도?”

“야영하기 좋고, 기습하기 좋은 곳이니까요. 따로 깊은 이유는 없어요.”

“뭐, 몸을 숨길 곳도 충분해서 나쁘지는 않지. 나쁘지는 않은데…”

기습하는 놈들을 왜 신경 써 줘야 하나?

검후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 이드가 눈을 껌뻑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후는 들고 있던 찻진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좋았던 추억은 겨우 이런 땅에 묻혀 있지 않아요. 남편과 아이가 보고 싶으면 차라리 영상을 보는 게 편해요. 그 안에선 내 아이의 선한 눈망울도 볼 수 있고, 반짝이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야영지에 혼자 와서 우울하게 궁상떠는 건 자기 취향이 아니란다.

“영상 세대인가 지구보다 몇백 년이 빠른 거야?”

마법의 이용이 비교적 자유로운 상류층만이 가능한 사치다. 그럼에도 영상물을 이용한다는 부분은 도대체 지구보다 얼마나 빠른 것인지. 이후 지구와 같이 발전한 미래에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이번에 오는 놈들의 처리는 어떻게 할 거야?”

“자비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될 뿐이니까.”

역사에 나름 성군으로 기록된 군주들도 가끔 무의미할 정도로 피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속을 자세히 살피면 목적은 하나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

“호구는 모르겠고, 저 아이들에게도 그간 쌓인 분노를 풀 기회는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당연하게도 여기서 검후가 말하는 아이들이란 저기 은색 기사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 은색 기사단은 든든히 배를 채우고 각자 개인 정비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파츠 아머의 끈을 조이고, 검에 기름을 먹이고, 간단히 검식을 점검한다.

각자 하는 일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다. 새벽에 있을 전투에 대한 준비 말이다.

사실 은색 기사단이 싸움에 굶주린 것은 아니었다. 검후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엔 영혼의 관 처리 작전에서도 질릴 만큼 겪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전투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들의 가슴 한편에 꾹꾹 눌러 담아 둔 분노는 지금까지 온전히 풀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긴, 참으면 병 되지. 그럼 마르텔도?”

어려운 상대일지언정 쉴라와 스폴이라면 오히려 반길 것 같지만.

“무슨 소리예요? 마르텔은 이드라도 안 줘요. 녀석은 제 몫이에요.”

검후가 먼저 침 발라 두었다며 확실히 주장했다.

새초롬히 자신을 노려보는 검후의 모습에 이드는 두 손을 들었다.

“안 뺏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난 그냥 보조에 충실할 거야.”

“그래 주면 고맙죠.”

“어쨌든, 이 밤이 밝으면 이제 소드 팰러스는 원래 주인을 찾는 건가. 문제 해결?”

“검왕과 그를 따르는 반역자들이 남았으니, 반만 해결이죠. 바람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이대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렵지. 그만한 야망을 가졌던 인간이 모든 걸 잃고 초야에 묻혀 산다는 건……”

말이 좋아 초야에 묻혀 산다고 말하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힘이 없어 포기한 것을 듣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다.

검왕은 겁쟁이라는 조롱을 겁내지 않고 꼬리를 말았다. 싸워 보지도 않고 패배를 자인한 것이다. 덕분에 그 자신이 무사했고, 자신의 지지자들도

대부분 지켜 낼 수 있었다.

어딜 가서라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반은 지켰다는 말이다.

그러니 검왕은 분명 다시 재기할 것이다.

“대신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당분간은 말이야.”

그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당분간은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곧 황제에 의해 삼검왕의 죄가 밝혀질 것이고, 검왕이 싸우길 포기하고 도망친 사실도 알려질 것이다. 부끄러워서라도 당분간은 나서지 않으리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런 이드의 말에 검후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저 조용히 찻잔을 입에 댈 뿐이다.

호로록.

타닥. 타다닥.

붉은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과 함께 밤이 깊어 간다.

이제 전투까지 대략 여덟 시간이 남았다.

호로로록.


고요한 새벽이다.

고즈넉이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멈췄다. 들리는 거라고는 야영지 곳곳에서 은은하게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뿐.

그야말로 깊은 잠에 들기 딱 좋은 환경이지만,

“…..”

편히 누워 있는 기사 중 정말로 잠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불속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야영지 주변으로 퍼진 은은한 살기와 투기를.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전날부터 예고된 전투가 아니던가. 기사들은 몸속 내력을 돋우는 한편, 즉시 발검할 수 있도록 몸에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기사들은 전투의 시작을 기다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자, 와라’

‘너희 겁쟁이들을 놀라 기겁하게 만들어 주마!’

‘이거 묘하게 두근거리는 게, 재밌을 것 같아!’

뭐, 개중에는 분노보다 상황 자체에 더 큰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모두의 투기가 정점까지 달아올랐을 때였다.

지금인가 싶은 순간.

“기사앙!”

천둥 같은 고함이 새벽의 고요와 숨 막히는 전열을 산산조각 내며 야영지를 뒤흔들었다.

“우와!”

그에 깜짝 놀래 주려다 되레 화들짝 놀라 버린 기사들이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함은 계속되었다.

“다른 아이들의 수작이면 귀엽기라도 하지, 너희들이 하는 수작질은 징그러울 뿐이란 말이다.”

“마, 마르텔 경!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 기습이! 겨우 준비한 기습이이!”

고함을 따라 잡음이 섞이긴 했지만, 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누워 있던 기사들은 모두 일어나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거기에 각자 편한 곳에 서 있는 듯하지만 묘하게 구멍이 없는 위치다.

그렇게 기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 가운데, 곰이 연상될 정도의 커다란 그림자가 수풀을 헤치며 야영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야영지 곳곳에 피워진 불길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비추자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

언제나처럼 거칠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마르텔이었다.

그 뒤로 난감하고 당혹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따라 나오는 자들. 그들은 은색 기사단을 보고는 입술을 질끈 깨무는 한편, 마르텔을 향해서는 원망에 찬 눈빛을 보냈다.

“이게 어딜 봐서 기습이란 말인가.”

“저기 은색 기사단을 보시오. 다 틀린 거요. 다 틀렸어.”

“마치 기습을 예상한 듯한 저 모습은 어떻게 된 것이오. 은색 기사단이라 그런 거요, 아니면 이미……..”

자신들 이상으로 완벽한 전투 준비를 마친 은색 기사단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누군가의 의문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기습이 있을 것을 알았다면, 그 사실을 누가 알려 주었겠는가. 의심과 불안이 순식간에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제 살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것뿐.

“전원 전투 준비! 상대는 은색 기사단이오. 절대 방심하지 마시오. 펜타고니움!”

서로를 향해 눈빛을 주고받은 상황에서 선두에 선 기사가 외쳤다. 그에 따라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이 각자 미리 약속된 팀원과 함께 오 인으로 이뤄진 작은 방진을 형성했다. 오 인의 소형 방진. 그리고 소형 방진 셋을 모은 중형 방진. 마지막으로 중형 방진이 모여 만들어진 대형 펜타그램 방진까지.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과 달리, 마르텔은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뚜벅뚜벅 야영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르릉 그에 따라 은색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역시 검을 뽑아 든 쉴라가 앞으로 걸어 나와 마르텔의 앞을 막아섰다.

차가운 냉기를 두른 듯한 쉴라의 모습에 걸음을 멈춘 마르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은 그런 모습이 어울리지. 잠자는 척이라니.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희들이 하면 징그럽단 말이지.”

그의 말투는 친근했다.

마치 제자를 앞에 둔 것처럼, 배신이 없던 과거의 그때처럼.

동시에 저쪽 뒤에서 불만 가득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다른 사색 기사단이면 몰라도 우리가 왜 징그럽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혼잣말이라기엔 충분히 큰 목소리. 스폴이었다.

그에 마르텔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쉴라의 눈은 살짝 흔들리는 듯하더니 더욱더 진한 냉기를 뿌려 댔다.

그에 마르텔이 혀를 찼다.

“딱딱하기는, 너는 여전하구나.”

“변하지 않아야 기사가 아니겠습니까. 기사에게 허락된 변화는 오로지 실력뿐입니다.”

“세상 모르는 교수들이나 할 소리로군.”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요. 그걸 잊은 당신에게는 헛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헛소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쉬운 것이다. 그 간단하면서 중요한 것을 지키지 못한 게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자신만만하던 마르텔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말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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