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41화
1476화
상대가 차분히 거리를 벌린다.
이드는 그런 상대를 쫓지 않고 가만히 서서 상태를 살폈다.
훅훅!
최선을 다한 격전에 숨이 거칠다. 어떻게든 억제하고 있지만, 턱까지 차오른 숨에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인다. 그에 따라 힘이 칼끝에 제대로 맺히지 못하고 조금씩 흩어진다.
한참 동안 계속된 격렬한 대련으로 쌓인 충격과 피로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도 결국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인 이상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번 공방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까딱까딱.
이드는 그렇게 판단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망설이지 말고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뿌득!”
그에 네리베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생각하던 것을 멈추었다. 이미 자신의 패는 내보인 상태. 이제 남은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흡흡!
마음을 정한 순간 억누르던 숨이 폭발했다. 숨을 따라 강맹한 기운을 담은 검이 한 마리 말벌처럼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다.
일체의 화려함을 버린 일점돌파.
이드는 이런 네리베르의 결정을 응원했다. 마지막 순간의 선택 또한 용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피잉!
일라이져가 하얀 궤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일라이져는 노련한 낚시꾼이었다. 네리베르의 검은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어느새 일라이져의
꽁무니만 쫓고 있다.
허공을 노니는 두 자루의 검날에 햇살이 부서졌다. 두 자루 검의 간격은 한 치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간격을 좁히는 일라이져는 밀당의 고수였다.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이렇게 술래잡기가 이어지면서 검속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지만, 정작 검을 휘두르는 네리베르는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검의 속도는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수준에 이르며 기묘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스스스
그건 바람이 검날에 잘려 나가는 소리였다. 소리는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닮았다. 다만 그 평온한 소리와 다른 점이라면 가만히 귀를 기울이노라면 사람을 지옥까지 끌어내릴 것 같은 마력이 담겼다는 점일까.
실제로 연무장 밖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케마란의 눈빛이 흐릿해지는 중에.
터엉!
“커윽!”
느닷없는 북소리에 소리가 멈추며 케마란도 정신을 차린다. 그렇게 놀란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일그러진 얼굴로 허공을 날고 있는 네리베르였다.
어딜 어떻게 당했는지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저대로 바닥을 구르며 끝나는 것일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케마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고, 그 답은 옳았다.
네리베르는 강한 기사였다.
또 이제 겨우 은색 기사단에 든 애송이지만 그 애송이가 이드를 따라다니며 경험한 전투는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그 경험은 애송이 기사를 강인한 전사로 바꾸기 충분한 것이었다.
팡!
바닥을 구르기 직전 어떻게든 호흡을 이은 네리베르가 바닥을 쳐 내곤 그 반동으로 몸을 바로 세우며 검을 들었다.
곧바로 이어질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은 훌륭했지만, 안타깝게 힘이 없었다. 그녀를 허공으로 날려 버린 타격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호흡은 완전히 무너졌다. 얼굴은 붉었고, 감추기 힘들 정도로 들썩이는 어깨에 칼끝은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중이다.
저래서야 공격은 반격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방어도 힘들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모습은 마땅히 칭찬받을 만하다.
이드는 대견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뒀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더….. 헉헉! 더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호흡으로 네리베르가 고개를 저었다. 천금과 같은 이드와의 대련이다. 그녀는 이 기회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었다. 은색 기사단에 입단 후 함께 경험했던 전투에서 보여 준 이드의 강력한 힘과 위대한 무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격차.
한때 그런 위대한 무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무엇보다 그때와 지금. 이드를 대한 마음의 자세부터 다르다. 그리고 과연 이런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네리베르는 그런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은 아니다. 이드는 네리베르를 남겨 두고서 느긋하게 연무장을 걸어 내려갔다. 냉수를 건네는 일리나에 감사의 말을 건넨 그가 말했다.
“아니, 이 이상은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다. 남은 아쉬움은 다음 대련에서 풀어.”
“다음 대련이…… 있을까요?”
걱정과 기대가 담긴 반응에 이드는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내일은 일리나가 두 사람을 봐주면 어때요?”
“전 좋아요.”
쉽게 답하는 일리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을 가르친 시간은 일리나가 이드보다 훨씬 길다.
“됐나?”
“가, 감사합니다!”
힘차게 답한 네리베르는 그대로 고꾸라지듯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워 미루고 있던 숨을 헐떡였다. 이런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며 케마란이 나타났다.
“괜찮아?”
“어떻게든…………… 헥헥. 살아는 있긴 한데. 헥헥. 가슴이 터져 죽을 거 같아. 물 좀 줘…………….”
“응, 마셔.”
촤아악!
“어푸푸! 야, 무슨 짓이야! 미쳤니?”
입에서 모래가 씹히는 기분에 물을 요청하며 손을 들었던 네리베르는 난데없이 머리 위로 쏟아진 물로 인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이드의 존재가 신경이 쓰여 급히 목소리를 줄이고는 눈을 부라렸다.
“갑자기 무슨 유치한 장난질이냐고! 미쳤어?”
“미친 건 너겠지.”
“내가 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보처럼 눈을 껌뻑이는 네리베르. 그런 친구의 반응에 케마란은 이를 부득부득 갈아 대며 팔과 다리, 그리고 몸의 여기저기를 내보였다. 어디 찢어져 피가 흐르진 않지만 하나같이 시커먼 멍에 퉁퉁 부어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모두 네리베르에 앞선 이드와의 대련에서 얻은 상처들이었다.
“이거 보여? 나 지금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들어서 다리가 후들거려.”
“그게 뭐? 너만 그런 줄 아니? 나도 여기저기 아파 죽겠거든?”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이러는가?
당장 네리베르 자신도 마지막으로 타격당한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저려 오는데 말이다.
“하아~ 그걸 아는 년이 다음 대련을 졸랐냐? 너 이런 상태로 내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말하는데, 난 자신 없다.”
자신이 마치 잘 다져진 고기가 된 느낌이다. 당장도 문제지만 진짜는 자고 일어났을 때 몰려올 후유증이다. 예상대로라면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내일 일어날 수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예쁜 미친 친구 년이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이드에게 매달려 내일 대련을 잡아 놓지 않았는가.
친구의 괴로운 모습에 얼굴의 물기를 쓸어내리던 네리베르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른 일이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뒤늦게 과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귀하디귀한 기회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뭐어~ 조금 그렇기는 한데, 밤사이 내공으로 잘 달래 놓으면 문제없지 않을까아?”
“문제없기는! 문제 많거든?! 거기에 그딴 썩어 빠진 애교는 먼데!”
“아파파파!”
친구 년의 정수리에 주먹을 데굴데굴 굴려 대는 케마란은 곧 힘이 빠진 듯 푹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앞서 했던 말처럼 네리베르를 괴롭힐 기운도 없던 것이다. 그녀는 우묵한 눈빛으로 물었다.
“진지하게 묻는 건데. 너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지?”
“날 어떻게 보고? 나라면 정정당당하게 칼로 찌르고 말 거야.”
“……그럼 혹시 동반 자살에 대한 로망이라거나?”
“……없던 로망이 생길 것 같긴 해.”
되지도 않는 소리는 적당히 하라는 양 째려보는 네리베르. 그와 함께 아직 손에서 놓지 않은 검을 들어 보였다. 멍청한 소리를 더 했다가는 말이 아니라 검으로 답해 주겠다는 뜻이다.
그에 케마란도 친구에 대한 매도를 멈추고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결코 네리베르가 한번 한다면 하고 마는 성격임을 알아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짜 어쩌냐? 내일 생각만 해도 암담한데.”
투덜투덜.
멈추지 않는 불만의 연속에 처음엔 미안한 표정이던 네리베르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그렇게 불만이면 빠져. 내일은 나 혼자 수련받을 테니까!”
“아니…… 빠지는 건…….”
“당연히 너도 싫겠지. 아무리 멍청해도 이드 님과 일리나 님이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 건지 모를 정도는 아닐 테니까.”
“그걸 누가 모르냐? 너무 급하니까 그렇지. 이젠 여유가 생겨서 기회도 많을 텐데.”
“과연 그럴까?”
“응? 뭐야, 지금 그 반응은? 아니라는 소리야?”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내는 친구의 모습에 케마란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에 네리베르는 검에 묻은 물기를 털어 검집에 넣고는 훈훈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드와 일리나의 모습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다시 친구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팔짱을 꼈다.
주르르륵!
하지만 그와 함께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에 혀를 차고는 팔짱을 풀었다.
“정확하진 않아. 하지만 내 생각이 옳다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지금처럼 두 분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기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아니, 어째서? 가장 골치 아팠던 삼검왕의 문제도 해결했는데? 오히려 여유가 생긴 것 아냐?”
케마란은 그렇게 물으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마른 수건을 건넸다. 역시 친구라면 채찍과 당근을 함께 준비할 줄 알아야 한다.
네리베르는 익숙한 듯 수건을 받아 젖은 머리를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네 말이 틀리진 않지만 오류가 있어. 여유가 생긴 건 우리지, 이드 님이 아니야. 삼검왕은 어디까지나 검후님과 우리 소드 팰러스의 문제였지, 이드 님의 문제는 아니었단 말이거든.”
“어・・・・・・ 그게 그렇게 되나?”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게 되물으려던 케마란.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네리베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이드가 삼검왕과 다투게 된 원인은 검후에게 있었다. 이드는 그저 검후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일 뿐.
따지고 보면 직접적인 은원 관계는 없었다.
“아니지. 존 워스가 있었잖아.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잊은 건 아니지?”
“글쎄. 과연 그가 진짜 삼검왕이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리베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존 워스는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존 워스의 가면을 쓴 알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