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49화
1484화
라일론 행이 정해지고 사흘.
검후에게서 출발 허가가 떨어졌다.
“오래 걸렸네.”
나라에서 파견하는 공식 사신이라면 사흘도 굉장히 빠르다고 할 것이다. 고위 인사들을 위한 선물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드는 공식 사신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검후의 부탁으로 움직이는 사적인 연락책 정도였다.
물론 중요도나 무게로 따졌을 때, 누구도 그저 단순 연락책으로 취급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소리 말아요. 이것도 최대한 간소화해서 빠르게 준비한 건데.”
“그래 봤자 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지. 어차피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면서.”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보다 준비가 길어지자 조금 싫증이 난 이드가 대놓고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도 알기에 길게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럼 국경까지는 공간이동으로 바로 날아가면 되는 거지?”
“맞아요. 오늘 하루는 해당 지역의 국경에 펼쳐진 공간 장막도 내려두기로 했어요.”
공간 장막은 말 그대로 허가 없는 공간이동을 감시, 방해하기 위한 마법 결계를 의미했다. 물론 모든 국경에 이 공간 장막이 설치된 것은 아니다. 제국의 국토가 얼마나 넓은데 그 전체에 경계를 깐단 말인가. 그렇게 했다가는 아무리 제국이라도 국고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공간 장막은 주요 길목에 설치한 고정식과 주기적으로 장소를 변경하는 이동식으로 나뉜다.
이렇게 되면 구멍이 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결계의 범위가 넓고, 마나가 흐르는 길목은 확실히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크다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국경을 넘을 것도 아니고.”
라미아가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국경을 넘나든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공간 장막? 그게 뭐야? 라는 식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공간을 넘어 다닌 것이 바로 그녀다.
“없으면 편하지 뭘.”
하지만 굳이 결계를 거둬준다면 굳이 나서서 거부할 일도 아니긴 했다. 그 정도로 거대한 결계라면 껐다 켜는데 만도 적잖은 노동력이 투입될 일이기 때문이다. 즉, 그만큼 이드의 이번 사신행을 황제가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표시기도 했다.
하진 새삼 그런 표시가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이드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황제는 알게 모르게 이드와 두 아내에게 최선의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목적지에 가면 다른 건 다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
“네, 목적지는 크람. 도착만 하면 이후 라일론의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이드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에요.”
“크람, 이전에 에단에게 들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가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안티로스나 소드 팰러스보다는 작지만 제법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에요.”
일전의 에단처럼 크람이라는 국경 도시에 대해 자랑하는 검후에 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 누구 덕분에 사신이라는 감투도 쓰고 있어서.”
“흥, 이드가 쉬겠다면 아무도 재촉할 사람은 없거든요? 계속 헛소리할 생각이면 빨리 가버려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라미아?”
“네, 언제든 이동할 수 있어요.”
지름 오 미터짜리 마법진 중앙에 선 라미아가 대답했다. 일리나도 어느새 그 옆에 서 있다. “일리나?”
“저도 준비 끝났어요.”
“좋네요. 그럼 갔다 올게.”
“조심해요. 사고 치지 말고.”
걱정인 척 은근히 따라붙는 잔소리가 제법 정겹다. 이 땅에서 그에게 저런 소리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이드는 질색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애도 아니고 쓸데없는 걱정이네요.”
“애가 아니니까 하는 걱정이라고요. 이드가 치는 사고는 매번 규모가 너무 크단 것 명심해요!”
규모가 크다는 말에 이드도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성 하나는 기본이고, 도시 하나를 초토화 시켜버린 전적도 있기 때문이다.
“아, 알았다고.”
그에 억지로 답하며 돌아서려는 이드에게 이번에 쉴라가 고개를 숙였다.
“세 분 모두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쉴라 단장도 고생해요.”
검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배웅 자리에 함께 나온 게 쉴라였다. 이드의 외유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배웅은 거절했다. 그리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것도 아니고, 굳이 번거로운 일을 벌이기 싫어서였다.
곧이어 이드가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라미아를 중심으로 이드와 일리나가 양옆에 나란히 선 모습. 그리고 이런 세 사람의 모습은 바로 다음 순간.
풋.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천천히 희미해지는 마법진의 마나광.
검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자꾸나.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검후다. 비록 그 기간 검왕이 소드 팰러스를 잘 이끌기는 했지만, 그중에는 검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검후는 그렇게 바뀐 부분을 시작으로 그간 미뤄왔던 일을 빠르게 처리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면 외유에 동행하겠다로 떼를 쓴 것도 그렇게 쌓인 일거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이지 않을까.
“하아~ 정말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젠 완전히 어두워진 지하실을 나서며 슬쩍 돌아보는 검후의 혼잣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방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공간이동에 따르는 특유의 마나광과 함께 순식간에 바뀐 주변 풍경.
“명예 후작과 두 분 후작 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경 도시 크람의 마법담당관 베올 베오론 남작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중히 예를 올리고 있는 베오론 남작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그가 이드 부부가 넘어오기를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굳이 이런 일로 사람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이드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에 도착하면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말씀하신 마차라면 아침부터 준비된 상태입니다만.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먼 거리를 이동하셨으니,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시겠습니까?”
베오론 남작은 미리 당부를 받은 것이 있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국경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로부터 따로 명령을 받은 것이 있는 듯했지만, 차마 강하게 권유하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렴 영주의 명령이 아무리 무서워도 황궁에서 내려온 황명보다 무서울까.
“어차피 공간이동입니다. 힘든 건 없군요.”
이드는 빠른 출발을 원했다.
피곤할 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휴식을 요청했다가는 귀찮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더 피곤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드의 요구에 베오론 남작은 두말하지 않고 세 사람을 밖으로 안내했다.
밖으로 나오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국경 도시 크람의 규모는 사뭇 대단했다. 보통 국경 도시의 용도라면 방어와 함께 교역에 있지만, 크람은 그중에서도 교역 쪽으로 많이 치우친 모습이었다.
조금은 낮은 성벽과 활짝 열려 있는 성문과 수없이 늘어선 가게들과 그 사이로 쉼 없이 움직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부분적인 인구밀집도만 따지면 안티로스보다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에단이 괜히 우쭐해서 자랑스러워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야말로 잠깐이었다.
굳이 저 많은 사람들 사이로 섞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이드는 앞선 베오론 남작은 따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내성 앞 공터.
그곳에는 검후가 말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일전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는 길에 탔던 마차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귀한 재료와 장신의 솜씨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마차 옆에 서 있는 사람.
“스폴 경? 경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랬다. 스폴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드 부부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곧 정중한 기사의 예를 보이며 자신의 임무를 밝혔다.
“사신으로 임명되신 명예 후작님의 호위를 맡게 된 스폴 세이벤입니다. 세 분 명예 후작 내외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이거 참.”
척하고 가슴에 손을 올린 스폴의 모습에 이드는 기가 막혔다. 사실 예상했어야 했다. 마차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막말로 진짜 마차만 타고 갈 일이겠는가. 그에 맞는 호위기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신경을 써서 친분이 있고, 말이 잘 통하는 스폴을 호위대장으로 임명한 모양이었다.
이드는 굳은 듯 예를 풀지 않는 스폴을 보며 말했다.
“나도 잘 부탁합니다. 스폴 경.”
“하하하. 감사합니다. 혹시 당장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설마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그럴 리가 있나.
무엇보다 자신도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말이 잘 통하는 스폴이 호위대장인 것이 나았다.
그때 라미아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그랬다.
사흘 전까지 스폴은 소드 팰러스에 있었다. 사흘 동안 마차를 준비하는 사이 스폴도 크람으로 이동한 것이다. 말을 탔다고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
“마법의 힘을 좀 빌렸죠. 게으른 마법사들이 제법 열심히 연구를 한 모양이더라고요. 세 분을 모실 이 마차도 사실 안티로스에서 그런 식으로 옮겨온 겁니다.”
마차 기둥을 탁탁 두드리는 스폴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요.”
“뭐야, 알고 있었어?”
“우리가 이용한 공간이동이요. 그 대응 마법진이 미리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혹시나 했었죠. 전 단순히 황궁에 설치된 걸 그대로 복제한 건가 싶었는데.”
마법이 어디 단순히 따라 그린다고 해서 되는 일이던가.
하지만 라미아가 황제의 이동을 위해 황궁에 설치한 마법진이 제국 마법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차원진에 의해 공간이동이 막힌 마법사들은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애를 썼고, 그러는 중에 결국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재능있는 마법사가 한둘도 아니고, 무려 제국의 지원을 받는 마법사들이 차원진 때문에 공간이동을 아예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 마법사들은 차원진을 극복하고 공간이동에 성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성공하고야 만 것.
그리고 눈앞의 마차가 그 해법의 결과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