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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57화


1492화

야영이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병사들이 주변을 정리한 후 천막을 쳤고, 하인들은 솥을 내려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드가 주변을 살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는 것이, 근처에 물만 있으면 야영지로 썩 나쁘지 않은 지형이다. 하지만.

“노숙을 결정하기엔 시간이 이르지 않나?”

하늘을 살피면 저기 산봉우리에서 한 뼘 위에 멈춘 해가 보인다.

쨍~

일몰까지는 제법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말이다. 분명 여정을 멈추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 의문에 대해 스폴이 멀리 산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 산이 보이시죠? 그 아래 숲이 있는데, 그거 때문입니다.”

이어진 스폴의 말에 따르면 그 근처가 모두 몬스터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몬스터는 모두 이 근처에 있는 캐론 협곡에서 온 놈들로 이 거대한 협곡은 그야말로 몬스터의 천국이라고 한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면 제국에서도 토벌을 포기하고 있을 정도라고. 그래도 이놈들이 협곡 밖으로는 잘 기어 나오지는 않아서 협곡 주변 일대를 비우는 것으로 피해를 줄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대신 이 협곡과 이어진 저 산들과 숲까지는 몬스터들이 종종 나타나곤 하는데. 이대로 계속 움직였다가는 그 숲과 가까운 지역에서 멈추게 될 것이고, 이럴 경우 몬스터의 습격이 예상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위험은 둘째치고 잠자리가 사납죠.”

스폴이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질색했다.

그렇다. 위험이 아니라 불편이다.

솔직히 몬스터 수십 마리 정도가 이들에게 무슨 위협이 될까. 굳이 이드가 나설 것도 없다. 어지간한 놈들은 호위 기사들 선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할 소란이 문제였고, 피비린내도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조금 일찍 쉬는 쪽이 낫다.

“혹시 이것도 그 일정표에 포함된 내용이에요?”

“물론! 일정대로입니다.”

놀라는 라미아에 스폴이 일정표의 한 부분을 짚어 보였다. 거기에는 방금 스폴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옆에서 일정표를 들여야 본 이드는 솔직히 놀랐다.

시간 단위로 세심하게 일정을 짠 클라인 백작? 물론 그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이 세세한 일정표를 제대로 지켜낸 스폴에 더 놀랐다. 출발하고 벌써 며칠째인가. 그런데도 아직 일정표대로 움직이고 있다니.

대단했다.

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계획을 짜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그에 진심을 담아 칭찬의 말을 했더니,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기쁨을 숨기지 않는 스폴이다. 그러더니 곧 눈치를 보며 한마디 한다.

“이 문제로 전날 길 소영주와 의견충돌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일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길 소영주는 캐론 협곡을 멀리 둘러 가길 원하더라고요. ‘명예 후작님을 숙소도 아닌 곳에 쉬게 할 순 없습니다’라고.”

“음, 협곡 주변을 비운 때문이군요?”

“네. 이 주변엔 작은 마을도 없으니까요. 당연히 숙소도 없죠.”

“그런데도 거절했네요?”

“네, 돌아가면 최소 이틀 정도 일정이 늘어나거든요. 이드 님이라면 야영보단 시간일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틀렸나요?”

분명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는 선택이었지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했습니다. 야영을 어려워하는 건 어디 고상한 귀족들이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우린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휴~’

“알았다면서 한숨은 왜 쉽니까?”

“그러게요. 키득키득.”

이렇게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런 스스로의 변화가 웃겼는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스폴이었다.

그렇게 스폴과 이야기는 나누는 사이, 천막 설치를 마친 기사가 다가와 이드 부부가 사용할 천막을 칠지를 물었고, 이드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침실로 사용할 수 있는 이 좋은 마차를 두고 굳이?

덕분에 병사들의 일이 크게 줄었다.

명예 후작의 천막이라면 일반 천막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하나 설치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필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해는 빠르게 저물어 산봉우리 위가 아니라 그 아래 걸렸다. 일행들은 하인들이 정성 들여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명예 후작을 위해 준비한 식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음식들은 풍성하고 맛도 좋았다.

거기에 이드는 고생한 병사와 기사들을 위해 차가운 맥주도 꺼내 놓았다. 덕분에 생각도 못 한 술을 마주한 병사들의 때아닌 환호성이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채웠고, 그렇게 그날 하루도 평화롭게 저물어 갔다.

“오늘 일찍 쉰 대신, 내일은 조금 일찍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캐론 협곡을 빠르게 통과하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일정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드는 스폴이 보여준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수도 가일라 아래 있는 거대한 수림. 캐론 협곡을 포함한 그 수림의 끝자락을 스쳐 지나가려면 정말 하루 종일 열심히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숲의 영역은 넓고 깊었다.

이드는 이 점이 신기했다.

“길 소영주. 내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또 어떤 질문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가.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길은 내심 울상이 되었다.

차라리 검을 마주하는 것이 낫지.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어진 질문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제국은 왜 저 위험한 수림 가까이에 수도를 두고 있는 겁니까?”

“아, 아! 그것이라면 간단합니다. 언제나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칼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투가 필요할 것처럼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검을 뽑아두면 조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군요.”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수림.

그것을 옆에 두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경계하고 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몬스터는 정말 아무런 예고 없이 습격해오니까. 하지만 달리 보면 몬스터에 대해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다 보면 인간의 습격도 쉽게 막아 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어처구니없는 방심으로 기습을 당하는 일을 방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욱이 수림이 수도와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아, 큰 피해를 당할 일이 없다는 점도 중요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애초에 큰 피해를 당할 일도 없다.

정말 대단한 몬스터 웨이브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수도를 지키는 그 어마어마한 전력을 미개한 몬스터들이 뚫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분명 그런 의도를 가지고 수도를 건설했다는 부분은 진심 대단하게 느껴졌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

“라일론을 세우신 황제께선 대단한 분이셨군요.”

“・・・・・・ 제국의 역사 내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는 분이시지요.”

물론 이런 일면뿐 아니라 초대 황제의 다양한 면을 알고 있는 길의 대답은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인물이든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몬스터 소굴 옆에 수도를 건설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라일론의 초대 황제는 가끔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똘끼를 품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이 나온 부분에 대해서만 칭송할 뿐이었다.

“덕분에 가일라는 건립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른 저녁을 마친 일행은 불침번을 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스폴의 명령대로 내일 일찍 출발하기 위해선 일찍 쉬어야 했다. 그리해 이드 부부도 마차에 들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난 후였다.

티딕따닥!

불꽃이 튀며 장작과 함께 얼마간 시간이 타들어 갔을 때였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자정이 넘은 시간.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는 구름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었다. 놈은 눈이 상당히 좋은지, 까마득한 상공에서도 야영지의 작은 모닥불은 그 노란 눈에 선명하게 담아 넣고 있었다.

놈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저런 불길 옆에는 신선하고 맛 좋은 먹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놈은 본능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개를 접어 소리도 없이 빠르게 활공하여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먹이를 낚아채지 않았다는 말이다.

꾸어억.

어쩔 수 없었다. 놈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본능대로 움직이려 해도 목에 걸린 목줄과 몸에 트고 있는 그림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배고프다는 놈의 울음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그림자가 목줄을 당기며 소리쳤다.

“크허헝!”

그리고 이런 소리 뒤에는 항상 먹음직한 먹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 난 놈의 힘찬 날갯짓에 그림자를 태운 놈은 순식간에 야영지의 상공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펄럭펄럭!

그 방향은 오후에 스폴이 몬스터 출몰지라며 가리켜 보인 산이 있는 방향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던 불침번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은 아니었다.

“그냥 떨어트려 버릴 걸 그랬나?”

라미아와 일리나 가운데 누워 있던 이드의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그의 기감은 선명하게 하늘을 날고 있는 두 개의 생명체를 인지하고 있었다.

“자던 사람들 다 깨울 일 있어요?”

“그렇긴 하지만. 저대로 돌려보내면 내일 상당히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데.”

단순히 와이번 한 마리였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을 타고 있는 와이번 라이더가 존재하는 이상 단순한 우연일 수가 없다. 이건 어떻게 봐도 정찰이었다.

정찰이 뭔가.

공격하기 전에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닌가.

더욱이 와이번 라이더의 기질. 그건 정련된 인간의 것이 아닌 거칠고, 난폭한 몬스터의 것이었다.

“이래서야 여길 야영지로 삼은 게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오히려 몬스터에게 정찰만 당했다.

수십을 피하려다 수백 마리를 마주하게 생겼다. 아무렴 와이번 라이더까지 정찰을 보내는 놈들의 무리가 적을까.

“대신 잠을 방해받진 않았잖아요.”

그러고 보면 야영지를 일찍 고른 것도 그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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