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4화
제25장. 형산검파(衡山劍派)
팽파진(彭婆鎭)은 원래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름 그대로 처음에는 팽씨(彭氏)들만의 집성촌(集姓村)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이제는 제법 큰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팽파진이 소림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남성 이북에서 소림사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는 길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졌던 것이다. 하나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평소에는 소림으로 가는 향화객(香火客)들만의 모습만 보일 뿐, 그다지 번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팽파진이 부쩍 소란스럽고 번잡해졌다. 곳곳의 주루와 객잔이 사람들로 미어 터졌을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낯선 여행객들로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들 중 대부분이 병장기를 착용한 무림인(武林人)들이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별로 크지 않은 팽파진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와 고함 소리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림인들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져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던 팽파진은 풍파(風波)가 그치지 않는 무림의 격전지를 방불케 했다. 진산월 일행이 팽파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는 정오 무렵이었다. 그들은 비좁은 팽파진의 거리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요? 설마 이 사람들이 모두 소림사로 가려는 것은 아닐테고…”
정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혀를 내두르자 진산월은 고소를 머금었다.
“왜 아니겠느냐?”
“예? 그럼 이들이 정말 이번 소림사의 집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숭산의 집회는 사십 년전 아미산(峨嵋山)에서 열린 대집회 이후 무림 최고의 큰 행사다. 무림인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번 대집회에 참석하려고 할텐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겠느냐?”
진산월의 말마따나 이번 소림사 오유봉에서 벌어지는 집회는 당금의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평소에 문파(門派)나 지역을 따라 서로 거리를 두었던 무림인들이 서장의 천룡사에 대항하기 위해 모이자는 소림과 무당 장문인들의 격문(檄文)에 흥분해 벌떼같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그 행렬은 소림사에 가까워질수록 급속도로 불어나서 사십 년 전의 아미대집회를 훨씬 능가하는 그야말로 무림사상 초유의 대성회(大盛會)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형편이니 외진 팽파진에도 인파들로 북적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저기 있군요.”
모두 정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멀지 않은 곳에 <화평객잔(和平客棧)> 이라는 간판이 걸린 이층 건물이 있었다. 정해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하하… 모르긴 해도 일방 녀석이 우리를 기다리다 코가 한 자나 길어졌을 겁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화평객잔을 향해 다가갔다. 한데 중인들이 화평객잔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콰창!
갑자기 화평객잔의 이층 루각 창문이 박살나며 하나의 인영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층에서 바닥으로 사정없이 틀어박힌 인영은 짙은 청의 무복(武服)을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청의 장한은 바닥에 호되게 나가 떨어진 후 한동안 사지(四肢)를 활개친 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끄응…”
그는 벌떼처럼 모여든 채 자신을 내려다 보는 중인들을 둘러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놈을…”
하나 그가 채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하나의 인영이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아악!”
제법 구슬픈 비명까지 내지르던 그 인영은 공교롭게도 막 몸을 일으키려는 청의 장한의 몸 위로 덮치듯 떨어지고 말았다.
쾅!
“어이쿠!”
“아악!”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뒤엉켜 바닥에 나뒹굴자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 틈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와하하!”
나중에 떨어진 장한도 처음 장한과 마찬가지로 청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옷색깔과 복장이 똑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방파(幇派)에 속한 인물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두 명의 장한은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숨을 시근덕거리며 다시 객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이 들어간 객잔 입구에 우르르 모여 들었다. 정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진산월을 향해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저들은 정주(鄭州)에서 제법 세력을 떨치고 있는 청의방(靑衣幇)에 속한 인물들 같군요.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화평객잔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의 안색은 아직도 약간의 파리한 빛이 남아 있었는데, 비룡옥패에 담긴 운자추의 내가공력이 예상보다 더욱 위력적이어서 내상을 완벽하게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상이 완치되지 못한 상태로 강호를 떠도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무모한 일이었으나, 진산월은 낙일방과 합류하는 것을 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어느 정도의 무리를 감수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정해가 진산월의 앞에서 길을 트고, 임영옥과 동중산이 호위하듯 그의 뒤쪽에 양 쪽으로 나뉘어서 걷고 있는 것도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진산월의 부상 재발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화평객잔은 이곳 팽파진에서는 가장 큰 객점이자 주루였다. 앞쪽의 이층 건물은 음식과 술을 파는 주루였고, 그 뒤쪽으로 제법 넓은 후원을 가진 객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팽파진에 모여든 무림인들 중 상당수가 이곳 화평객잔에 머무르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화평객잔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볼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덟 명의 청의인들이 병장기를 꺼내든 채 하나의 탁자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벌한 안광을 뿌리며 금시라도 덤벼들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해는 그들 중 제일 뒤에 있는 두 사람이 조금 전에 이층 밖으로 떨어졌던 청의인들임을 알아보았다. 여덟 명의 청의인 중에서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힌 텁석부리 장한이 고리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청의방의 고수들을 건드리다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청의인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탁자 쪽에서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청의방 따위가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큰소리냐? 청의신(靑衣神) 곽존해(藿尊海)가 직접 나온다 해도 본 공자가 눈 하나 깜박할 줄 아느냐?”
이 말에 청의인들의 얼굴이 분기로 가득찼다. 청의신 곽존해는 하남성에서 손꼽히는 절정의 고수로, 현재 청의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였던 것이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감히 방주님을 능멸하다니…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
텁석부리 장한은 이를 갈아 붙이며 다른 장한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네 명의 장한이 거의 동시에 탁자를 향해 몸을 날렸고, 나머지 네 사람도 금시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동작으로 보아 조금 전에 호되게 당한 뒤라서 제법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합공을 하려한 것 같았다.
하나 그들의 의도는 너무도 맥없이 허물어졌다.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던 네 명의 장한들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으억!”
“어이쿠!”
미처 합공할 사이도 없이 처음 공격했던 네 명이 쓰러지자 뒤이어 달려들려고 했던 다른 네 명의 장한들은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네 명의 장한들의 오른손에 각기 하나씩의 젓가락이 꽂혀 있는 것을 본 정해는 내심 깜짝 놀랐다.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내공에 잔인한 솜씨를 지녔구나.’
젓가락을 날려 사람을 살상(殺傷)하는 것은 무림의 고수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네 개의 젓가락을 날려보내는 일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람의 손등을 젓가락으로 관통시키는 것은 어지간히 마음 씀씀이가 매서운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하지 않을 일이었다. 정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내밀고 탁자에 앉은 사람을 살펴보았다. 네 명의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청의인들 사이로 보이는 인물은 의외로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홍안(紅顔)의 소년이었다. 전신에는 가을 하늘처럼 푸른 청삼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입술이 여자처럼 붉었다. 소년의 이마에는 옷 색깔과 같은 색의 두건이 묶여 있었고, 두건 아래 두 개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날카로운 인상에 총기가 똑똑 떨어지게 생긴 소년이었다. 하나 소년의 허리춤에 푸른 색 수실이 달려 있는 검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보자 정해는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청삼에 청건, 푸른색 수실은 강호무림에서 하나의 거대한 문파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청의인들이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나, 청의방에게나 불운(不運)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닥을 뒹굴고 있던 네 명의 청의인들은 한 사람씩 일어났으나, 그들의 얼굴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청삼 소년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치켜 올라가며 냉랭한 비웃음이 가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 공자에게 무슨 맛을 보여주겠다고 한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맛이란 건 언제 보여줄 생각이지?”
텁석부리 장한은 덤벼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어깨를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더듬거리듯 물었다.
“소… 소협은 누구요?”
청삼 소년은 싸늘하게 웃었다.
“흐흐… 이제 와서 그런 걸 물어보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곽존해가 직접 와서 무릎을 꿇고 빈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
청삼 소년의 오만무도한 말을 듣자 텁석부리 장한의 얼굴이 다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텁석부리 장한은 몇 차례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비록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청삼 소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주위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둘째로 치더라도, 방주인 곽존해를 무시하는 말을 듣고도 그대로 물러난다면 더 이상 강호에서 청의방이란 이름을 걸고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텁석부리 장한은 남은 세 명의 장한들과 시선을 주고 받다가 서서히 청삼 소년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른 장한들도 병장기를 든 채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몸을 움직였다. 중인들은 한 차례 피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을 느끼고 모두들 숨소리를 죽인 채 장내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황달(黃達), 어서 손을 멈춰라!”
한 소리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객잔 밖에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텁석부리 장한, 황달은 움찔 놀라 들어온 인영을 돌아보다가 반색을 하며 황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향주(香主)님. 어서 오십시오.”
나타난 인영은 세 가닥 수염을 기르고 체구가 앙상하게 마른 사십 대 중반의 청의인이었다. 청의인의 복장은 텁석부리 장한과 똑같았으나, 단지 왼쪽 가슴에 하얀 실로 <지(地)>라고 씌여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황달은 죽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반가운 얼굴로 청의인에게 황급히 다가가며 손가락으로 청삼 소년을 가리켰다.
“잘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 꼬마 녀석이…”
짝!
황달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청의인은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괘씸한 놈. 그토록 입조심을 하라고 신신당부 했건만 함부로 아가리질을 하다니… 네놈은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단 말이냐?”
청의인이 손이 어찌나 맵던지 황달의 뺨은 금새 퉁퉁 부어 올랐다. 황달은 왼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햐… 향주님…”
청의인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저 분 소협께 용서를 빌지 못하겠느냐?”
“하… 하지만…”
황달이 머뭇거리자 청의인은 다시 그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짝!
금새 황달의 입술이 터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황달은 정신이 번쩍 든 듯 청의인을 한 차례 쳐다보더니 이내 청삼 소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 소협. 죄송합니다. 모두 우리의 잘못입니다.”
청삼 소년은 여전히 의자 위에 앉은 채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으나, 청삼 소년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몹시 잘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청의인은 한쪽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다른 장한들을 돌아보았다.
“네놈들도 어서 사과드리지 못하겠느냐?”
장한들은 움찔하여 황급히 청삼 소년을 향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나이 많은 장한들이 어린 소년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광경은 일견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이었다. 청의인은 그제서야 나직하게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청삼 소년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나는 청의방에서 지환향(地環香)을 맡고 있는 쾌조수(快爪手) 하량(夏良)이라 하오. 소협은 혹시 형산(衡山)에서 오지 않으셨소?”
청삼 소년은 거의 알 듯 말듯하게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황달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청삼 소년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다가 청삼 소년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푸른색 수실이 묶인 장검을 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맙소사. 이제 보니…’
그제서야 황달은 평소에 거만하기 이를데 없던 지환향주 하량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앞의 어린 소년에게 굽신거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청삼, 청건, 그리고 푸른 수실의 장검… 그것은 바로 구대문파(九大門派)의 하나이며 강남(江南)에서 손꼽히는 검술(劍術)의 명문(名門)인 형산파(衡山派)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형산파! 달리 형산검파(衡山劍派)라고도 한다. 형산파는 대대로 호남성(湖南省)의 형산에 그 세력을 두고 있으나, 그들의 놀라운 검술에 대한 소문은 강남을 넘어 이곳 강북에까지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호북의 무당파(武當派)와 쌍벽을 이루는 검술의 일대종가(一大宗家)였으며, 십여 년 전부터 종남파를 밀어내고 구대문파의 반열에 오른 후 그 세력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여 현재는 당금 무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량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단번에 청삼 소년의 특이한 복장을 보고 그가 형산파의 제자임을 알아차리고 불문곡직, 황달을 꾸짖은 것이다.
청의방이 비록 하남성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는 하나, 감히 형산파에 비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청삼 소년의 장검에 매달린 푸른 수실의 매듭이 세 개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대제자(二代弟子) 이상의 신분임이 분명했다. 형산파는 특이하게도 장검에 매달린 매듭의 숫자로 서로의 지위를 구분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신분만 높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신(本身)의 검술이 어느 경지에 다다랐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의 매듭을 얻는 것조차 커다란 영광이라고 했다. 심지어 입문(入門)한지 십 년이 넘은 제자들중에도 검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해 매듭 하나 없이 다니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형편이었다. 매듭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들의 신분과 무공은 천양지차가 나서, 다섯 개의 매듭을 지닌 고수라면 형산파는 물론이고 강호무림에서도 최일류의 검객(劍客)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형산파에는 다섯 개의 매듭을 지닌 인물이 모두 열 다섯 명이나 있다고 한다. 그 이상의 매듭을 지닌 자가 몇 명이 있는지는 형산파 장문인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청삼 소년의 매듭은 두 개에 불과하지만, 지금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주위에 있던 중인들은 청삼 소년의 정체가 대명이 자자한 형산파의 고수임을 알자 모두들 수근거리며 경탄과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량은 청삼 소년이 자신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의 발단이 어찌 되었든 부하들이 사죄했으니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 했으면 하오만…”
청삼 소년은 돌연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발단이 어찌 되다니… 당신네 방의 쓰레기들이 본 공자에게 먼저 시비를 건 것을 알고나 하는 소리요?”
하량은 재빨리 황달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황달은 찔끔하여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우리가 저분 소협의 자리에 합석을 해달라고 말을 했었는데…”
하량은 그 말만 듣고도 대충 어떤 사정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루에 빈 자리가 없자 황달 등은 혼자 커다란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청삼 소년에게 같이 앉자고 말했다가 거절을 하는 바람에 시비가 벌어진게 분명했다. 물론 황달의 평소 성질로보아 처음부터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부탁했을리는 없었다.
‘이거 낭패로군. 아무래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데…’
하량은 기분 같아서는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켜 화를 자초한 황달을 요절내고 싶었으나 지금은 우선 청삼 소년을 달래는 것이 먼저인지라 황달을 험악한 눈으로 한 차례 노려보고는 다시 청삼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수하들이 시장기가 급한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모양이구료. 사해(四海)는 모두 동도(同道)라 했으니, 소협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하오.”
그의 말은 거의 사정조에 가까웠다. 청의방의 일개 향주라면 그래도 상당한 지위의 인물인데, 나이도 어린 소년에게 이토록 굽신거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량도 내심 쑥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만에 하나라도 이 일로 형산파와 원한이라도 맺게 된다면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평소의 성질을 억누르고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청삼 소년은 그의 말 몇 마디로는 도저히 화를 풀 수 없다는 듯 냉랭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나는 한 번도 당신네 방을 동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하량의 안색이 홱 변했다. 청삼 소년의 말은 청의방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모욕을 참고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강호에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에서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하량의 미간에 붉은 빛이 떠올랐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고 있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형산파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이 너무 강했다. 사실 주위에 구경하는 사람만 없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주위의 눈이 너무 많았다. 설사 꼬마 놈을 죽여 분풀이를 한다해도 그 소문이 형산파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청의방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강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량은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리고는 짐짓 태연자약한 표정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무래도 소협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구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오늘 식사는 내가 대접해 드리리다.”
청삼 소년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하량이 계속 저자세로 일관하자 얼굴에 떠올랐던 냉랭한 기운은 많이 가셔진 상태였다. 하나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차가운 음성 하나가 불쑥 들려왔다.
“필요없다. 본파의 제자들은 쓸데없이 남의 식사 대접 따위는 받지 않는다.”
그 소리에 하량은 움찔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객잔의 입구에 두 명의 청삼인들이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청삼 소년과 마찬가지로 짙푸른 청삼에 청의 두건을 쓰고 청색 수실이 달린 장검을 차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우측의 청삼인이 조금 더 체격이 건장하고 키가 컸다. 약간 각진 얼굴에 유난히 부리부리한 눈을 지니고 있어서 사나이 다운 당당함을 느끼게 했다. 그에 비해 좌측의 청삼인은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이 유난히 새하얗고 입술이 얄팍해서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자 지금까지 오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청삼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두 분 사형, 오셨습니까?”
청삼 소년의 태도는 더할 나위없이 공손하면서도 정중했다. 우측의 청삼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반면, 좌측의 청삼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좌동(左董). 이자들이 먼저 네게 시비를 걸어왔느냐?”
그의 음성으로 보아 조금 전에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 임이 분명했다. 좌동이라 불리운 청삼 소년은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일은…”
좌측의 청삼인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하량을 비롯한 청의방의 인물들을 한 차례 훑어 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하량 등은 모두 안색이 변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삼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전신이 얼음굴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섬뜩한 한기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 청삼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두 귀 한짝 씩을 떼어내고 떠나라.”
그 음성에 실린 냉혹한 기운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량은 머뭇거리다 무어라고 입을 열려했다. 하나 그때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안색이 핼쓱하게 변한 채 나오려던 말을 눌러 삼켰다. 청삼인의 허리춤에 매어 있는 푸른 수실에는 세 개의 매듭이 달려 있었다. 삼결(三結)! 언뜻 볼 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 매듭이 형산파 고수들의 검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형산파에서 삼결의 고수란 적어도 강호무림에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놀라운 검술의 소유자임을 뜻하는 것이다. 한순간 하량의 얼굴에는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형산파 삼결의 고수를 상대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귀를 자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하량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청삼인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다음 순간,
파앗!
새하얀 섬광 한 줄기가 허공에 피어오르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거푸 터져나왔다.
“아악!”
“악… 내 귀!”
중인들이 놀라 보니 황달을 비롯한 여덟 명의 청의방 인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귀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뺨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봇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바닥에는 잘려진 귀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실로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광경이었다.
무사한 것은 오직 하량, 한 사람 뿐이었다. 하량은 얼굴을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힌 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설마 당당한 구대문파 중의 하나인 형산파의 고수가 이토록 성급하고 잔인하게 손을 쓰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그의 왼쪽 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하량은 거의 반사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뒤로 제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팟!
차가운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하량은 자신의 왼쪽 뺨을 타고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뺨을 손으로 만져본 하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시뻘건 선혈이었던 것이다. 왼쪽 귀 부근이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은 그 직후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려진 왼쪽 귀가 발 밑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이… 이럴 수가…”
하량은 지혈(止血)할 생각도 잊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떤 채 자신의 귀를 자른 청삼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히 상대의 검을 피했다고 생각했건만, 대체 자신의 귀가 어떻게 잘려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청삼인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장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방금 전에 단지 이검(二劍)만으로 아홉 사람의 귀를 잘랐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찰칵!
그의 장검이 검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은 그만큼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장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억눌린 듯한 음성이 조그맣게 들려왔다.
“휴우… 정말 놀라운 쾌검(快劍)이구나.”
그 말을 시작으로 중인들 틈에서 경악과 감탄의 소리가 거푸 흘러나왔다.
“과연 대단하군.”
“저것이 바로 그 유명한 형산파의 원공검법(猿公劍法)이 아닐까?”
장내에 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무림인들이었기 때문에 청삼인의 검술이 얼마나 가공할 것인지를 한 눈에 알아 보았던 것이다. 하량은 청의방의 수뇌급 고수는 아니었지만 향주라는 지위를 맡고 있는 만큼 무공이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 하량 조차 자신이 언제 당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고 날카롭게 그의 귀를 잘랐다는 것은 청삼인의 검법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청삼인이 단지 삼결에 머물러 있다는 것만 보아도 형산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청삼인은 아직도 자신의 귀를 부여잡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하량을 힐끗 쳐다보며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목이라도 잘라야 정신을 차리겠나?”
그 말에 하량은 퍼뜩 정신이 든 듯 한 차례 진저리를 치더니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청삼인을 쏘아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수하들을 데리고 주루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홉 명이나 되는 장한들이 모두 왼쪽 귀를 잘린 채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모습은 왠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막 주루를 벗어나기 전에 하량은 문득 청삼인을 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귀하의 이름은 어떻게 되오?”
청삼인의 얼굴에 귀찮다는 빛이 떠올랐다.
“왜? 복수라도 하고 싶은가?”
하량은 눈썹을 찡그렸으나 음성은 의외로 침착했다.
“오늘의 일을 방주님께 보고 드리기 위함이오.”
청삼인의 입꼬리가 냉랭하게 치켜 올라갔다.
“나는 형산파 십삼대 제자인 조뢰명(趙雷鳴)이다. 복수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지.”
“조뢰명… 반드시 기억하고 있겠소.”
하량은 그의 이름을 나직히 뇌까리고는 그대로 주루를 내려갔다. 조뢰명은 얄팍한 입술을 꿈틀거리고 있다가 좌동의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우측의 청삼인이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며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좌동을 불렀다.
“너도 앉아라.”
“예, 사형.”
좌동이 자리에 앉자 조뢰명은 즉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절대 순순히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만일 형산파라는 이름 석 자에 먹칠을 하는 경우에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좌동은 찔끔하여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기세등등해 보였던 그가 조뢰명 앞에서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행동했다. 조뢰명은 여전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본파의 영예는 선조들의 검과 피로 이룩된 것이다. 그 검의 영예를 모독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좌동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한데 그때 어디선가 여인의 쌀쌀맞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쉽군요. 형산파라는 이름이 겨우 조무라기들을 위협할 때나 쓰이고 있다니…”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세 사람은 모두 공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기에 똑똑이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조뢰명은 날카로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들에게서 세 탁자 건너편에 한 명의 여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어다.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자주색 저고리에 짙은 남색 바지를 입고 있어서 깜찍하면서도 발랄해 보였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는 붉은 수실이 달린 장검의 손잡이가 삐죽 올라와 있었다. 좌동은 그녀를 쏘아보며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얼굴이 각진 청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좌동은 내심 움찔 놀랐다. 얼굴이 각진 청삼인은 황일기(黃逸麒)란 인물로, 평소의 행동거지가 침착하고 냉정해서 좀처럼 섣불리 손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조뢰명의 행동이었다. 평상시라면 다른 사람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결코 참지 못했을 조뢰명이 지금은 단지 눈쌀만을 찌푸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황일기는 소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빙긋 웃으며 포권을 했다.
“오랫 만에 뵙는군요, 장소저(章少姐).”
이제 보니 그녀는 황일기와 안면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했으나, 황일기의 정중한 인사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소협은 여전하시군요.”
황일기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장소저께서 이곳에 계신 것을 미처 몰라보았으니 우리의 불찰이 큽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정해는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 남색 바지의 소녀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도도하던 형산파의 고수들이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것일까?’
장소저라 불리운 소녀는 황일기과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나 황일기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빙긋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峨嵋)에서는 언제 내려오셨습니까?”
“한 달쯤 됐어요. 그나저나…”
그녀의 시선이 힐끗 조뢰명에게로 향했다.
“당신들의 기파는 정말 대단하군요. 나같이 마음 약한 사람은 간이 떨려서 감히 당신들 앞에 서 있지도 못하겠어요.”
조뢰명의 안색이 다시 변했으나, 그는 용케도 발작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황일기의 얼굴에도 고소가 떠올랐다.
“방금 전의 일은 확실히 조사제가 조금 과하게 손을 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청의방의 고수들이 곳곳에서 말썽을 피우는 광경을 목격했는지라 조사제가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따끔한 훈계를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장 소저가 있는 줄 알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함부로 검을 휘둘렀겠습니까?”
은근히 자신을 치켜 세워주는 그의 말에 그녀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사실 그녀는 황일기나 조뢰명보다 나이도 어렸고, 강호에서의 배분도 비슷한 위치였다. 그런데 황일기가 계속 예의를 지키며 공손히 대하자 조금 전에 조뢰명의 인정사정없는 손속과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불만이 솟구쳤던 마음이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황일기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 수그러진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으면 우리와 합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황일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권하자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지만… 좋아요. 그때까지는 합석하죠.”
황일기는 그녀를 자신들의 탁자로 안내했다. 그는 호기심과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좌동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인사드려라. 아미파 결진사태(潔塵師太)의 고제자이신 장옥연(章玉燕), 장소저이시다.”
그 말에 좌동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결진사태라면 아미파에서도 일곱 명 밖에 없는 장로(長老) 중의 하나로, 공력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고 인물됨이 추상(秋霜)과 같이 날카롭다고 소문난 일세의 기인(奇人)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그녀는 특히 아미파의 비전절기 중에서도 익히기가 어렵다는 주비홍삼십육격(珠飛鴻三十六擊)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여, 아미파 전체를 통털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세고수라고 했다. 특히 그녀의 성정은 괴팍하고 냉엄해서, 자신의 눈밖에 벗어난 자는 추호도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런 결진사태의 제자였기 때문에 황일기가 이처럼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던 것이다. 좌동은 자신이 조금 전에 하마터면 장옥연을 향해 욕설을 퍼부을 뻔한 것을 상기하고는 한 차례 식은 땀을 흘리며 황급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형산파 십삼대 제자인 좌동이라 합니다.”
장옥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이어 그녀의 시선이 조뢰명에게로 향했다. 조뢰명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무시하는지, 아니면 조금전의 일로 기분이 상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그의 안색이 얼음을 한겹 씌워놓은 것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옥연 또한 그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조소협은 그동안 무슨 무서운 무공이라도 익힌 모양이군요. 그래서 이제 나 정도는 안중에도 없나 보죠?”
그녀가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조뢰명의 입꼬리가 한 차례 실룩거렸다. 황일기는 그가 그녀에게 무례를 범할지 몰라 황급히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려 그를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조사제의 성격이 원래 이런 것은 장소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대신 사과 드리지요. 앉으십시오.”
장옥연은 못마땅한 눈으로 조뢰명을 쏘아보다가 황일기의 거듭된 권유에 못이겨 의자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앉은 자리는 조뢰명의 맞은편이어서 싫든 좋든 그녀는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고 있는 조뢰명의 얼굴을 계속 보아야만 했다. 장옥연은 그의 밉상스런 얼굴을 보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설까도 생각했으나, 그때 황일기가 재치있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오유봉의 대집회에 아미에서는 어느 분들이 참가하십니까?”
장옥연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같은 구대문파에 속해 있는 그들에게는 말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붉은 입술을 살짝 열며 대답했다.
“복호오승(伏虎五僧)과 세 명의 일대제자들이에요.”
황일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파의 복호오승이라면 소림사(少林寺)의 사대금강(四大金剛)에 비견되는 아미파의 최고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배분은 다소 특이해서 장문인보다는 반 배(輩)가 낮았으나, 일대제자들에 비하면 오히려 반 배가 높았다. 그들은 절대로 사내(寺內)에서 어떠한 지위나 직책도 맡을 수 없고, 오직 아미파의 발전을 위해서 일신(一身)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아미파의 최고 무공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장옥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섯 째 사숙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거에요.”
그 말에 황일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섯째 사숙이시라면 혹시 흑미륵(黑彌勒) 원정(圓丁) 대사가 아니십니까?”
장옥연은 그의 반응에 그제서야 만족한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황일기는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 분께서 다시 나타나신다니 강호가 한바탕 들썩이겠군요. 십오년전에 그 분께서 황산(黃山)의 천도봉(天都峯)에서 일세거마였던 흑옥신마(黑獄神魔)와 이주야(二晝夜)동안 싸운 끝에 그를 제거한 일은 당시 무림의 일대쾌사가 아니었습니까? 그분을 다시 뵈올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군요.”
황일기의 말마따나 흑미륵 원정은 아미파에서 배출한 고수들 중 명성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강호에 출도한 후 사마외도(邪마外道)들을 척결하는데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치다시피 했다. 거무잡잡한 피부에 화가 나면 눈알이 온통 흰자위로 번들거리는 그를 당시의 마도인들은 지옥의 염라대왕보다도 더욱 두려워했다. 오죽했으면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지언정 흑면백안(黑面白眼)을 만나지는 마라.’ 라는 말이 무림에 파다하게 퍼졌겠는가? 당시 그의 별호는 흑면백안염라승(黑面白眼閻羅僧)이었다. 하나 그도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젋었을 때의 과격한 성질이 한풀 꺾여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유한 성격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를 염라승이라는 무서운 별호 대신 흑미륵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장옥연은 황일기의 놀라는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가 살짝 입을 열어 물었다.
“형산파에서는 어떤 분들이 나오시나요?”
황일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본파를 떠날 때까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어느 분이 나오실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군요.”
“그래도 짐작가는 사람이 있을거 아니에요?”
황일기는 아무런 언질도 안주는 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파를 떠날 때 얼핏 오결(五結)의 고수중에서 서 너분이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군요.”
형산파의 오결검(五結劍)이라면 아미파의 복호오승에 못지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세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절세(絶世)의 검객(劍客)들일 뿐 아니라, 자존심이 강하고 고고해서 좀처럼 무림에 몇 사람씩 몰려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런 오결검을 서너 명씩이나 보내는 것으로 보아 형산파에서 이번 오유봉의 대집회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옥연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형산에서 소림사로 가려면 굳이 이쪽 길로 올 필요가 없는데 이곳으로 온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 말에 이제껏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뢰명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조사제!”
황일기가 황급히 나무라는 투로 그를 제지했으나, 이미 장옥연의 쌍심지는 하늘높이 솟구친 후였다.
“뭐라고요?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조뢰명은 더 무어라고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탁자 밑으로 황일기가 그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황일기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제. 그녀가 누구의 제자인지를 잊지 마라.’
그 말을 듣자 조뢰명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장옥연의 사부인 결진사태는 강호에서도 성질이 매섭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워낙 괴팍하고 날카로운 성정을 지닌데다 무공 또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여 무림인들치고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형산파의 오결검객(五結劍客)중 한 사람이며 황일기와 조뢰명의 사부이기도 한 칠지신검(七枝神劍) 좌군풍(左君風)조차도 그녀에게는 얼마쯤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황일기이기에 조뢰명이 장옥연과 쓸데없이 시비를 벌이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는 것이다. 황일기는 장옥연이 미처 성질을 부릴 사이도 없이 그녀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사실 저희가 이쪽으로 온 것은 한 가지 용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장옥연은 고운 아미를 상큼히 치켜 뜨며 조뢰명을 노려 보다가 다시 황일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소협의 사제는 정말 무례하군요. 형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저렇게 오만하고 버릇이 없나요?”
고개를 돌린 조뢰명의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했다. 하나 황일기는 계속 탁자밑으로 그의 허벅지를 움켜쥐어 그의 발작을 억제시키는 한편,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사제의 성격이 다소 직선적이어서 그런 것이니 장소저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그보다 장소저께서는 혹시 요즘 강호에 들리는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황일기가 재치있게 말머리를 돌리자 장옥연은 잠시 화를 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마음을 결정했는지 그를 향해 반문했다.
“소문이라뇨? 무슨 소문 말인가요?”
“사실은 저도 얼마 전에 들은 것인데… 오랫동안 강호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종남파의 고수들이 이번에 강호에 나왔다는군요.”
지금까지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해는 이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속으로 불안한 생각 한 가지가 번개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나 그는 이내 자신의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장옥연은 화제가 종남파로 넘어가자 조금은 흥이 깨어진 듯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나도 그 말은 얼핏 들은 것 같군요. 전대 장문인인 태평검객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상당히 젊은 사람이 장문인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 사람 이름이…”
장옥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자 황일기가 웃으며 말했다.
“진산월이라고 합니다.”
장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하지만 별로 대단한 인물은 못된다고 하던데…”
“그래도 무언가 특출난 곳이 있으니까 장문인이 될 수 있었겠죠. 사실 하남성에 와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자는 제법 심기가 뛰어나고 무공도 상당하다고 하더군요. 신목령의 고수 한 사람도 낭패를 당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장옥연은 피식 웃었다.
“설마 그럴리가요.”
“강호의 소문은 왕왕 와전(訛傳)되기 마련이라 저도 그다지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더군요.”
장옥연은 그제서야 무언가를 눈치챈 듯 묘한 눈으로 황일기를 응시했다.
“당신은 제법 종남파에 대해 관심이 많군요?”
황일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하하… 이 근처에 와서 그자에 대한 소문을 몇 번 들어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별로 신경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 장옥연은 황일기의 말과는 달리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종남파의 고수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형산파에서 종남파를 밀어내고 구대문파의 지위를 차지한 이후로 종남파의 고수들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해서 그들을 보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모욕을 준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았다. 이곳 팽파진은형산에서 소림사로 가는 길의 반대편에 있는데, 황일기 등이 일부러 길을 돌아 이곳에 온 이유가 단순히 종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의 얼굴이나 한 번 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잘 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장옥연의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떠오를 때, 한쪽 구석에서 이들의 대화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해는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과연 저들은 일부러 우리를 찾아 시비를 걸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군.’
그는 아무쪼록 그들이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대로 지나치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형산파의 고수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금은 진산월의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상황이 자신들에게 너무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세상 일이란 결코 원하는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장문사형. 이곳에 계셨군요!”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주루의 입구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낙일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