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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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6화


제150장. 칠살추혼(七煞追魂)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방취아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서문연상은 샐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번에는 정말 사고가 알려 준 대로 했단 말이에요. 내가 보기엔 완벽한 것 같았는데….”

방취아의 고운 아미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그럼 네가 잘하고 있는데 내가 공연히 생트집을 잡고 있단 말이냐?”

방취아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리자 서문연상은 찔끔하여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고님.”

여기서 말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하루 종일 그녀의 끔찍한 잔소리에 시달려야 한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서문연상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그늘 아래서 느긋한 표정으로 두 여자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장승표가 히죽 웃었다.

“임자는 따로 있다니까. 저 말괄량이가 꼼짝을 못하는군.”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 음성을 들었는지 서문연상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나 그녀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방취아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냐? 안 되겠다. 지금부터 너는 그 자세를 다 익히기 전에는 아예 밥 먹을 생각을 하지 마라.”

서문연상이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비록 음식을 탐하는 습성은 없었으나, 식사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때는 문파의 제자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놀려먹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고된 수련의 연속인 하루 일과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활기에 차 있는 시간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그녀가 우거지상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승표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정말 이번엔 제대로 걸렸구나!”

장승표가 발까지 구르며 큰소리로 웃어대자 서문연상이 표독스런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하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고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앞에 버티고 있으니 무어라고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잔뜩 벼르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두고 보자. 다음에는 기필코 저 수염을 몽땅 뽑아 버려 털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 버릴 테니…. 그때도 웃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그녀의 흉심(?)을 짐작도 못한 채 장승표는 자신을 괴롭히던 그녀가 쩔쩔매는 광경을 그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방취아는 자신의 꾸중에도 그저 눈알만 굴린 채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는 서문연상을 한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분명 재질이 뛰어난데 왜 이런 간단한 초식조차 익히지 못하는 거냐? 내가 널 잘못 본 거냐? 아니면 너를 가르치는 내 방식이 잘못된 거냐?”

서문연상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재빨리 입을 조잘거렸다.

“사고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그저 제자가 불민(不敏)하여 실망을 끼쳐 드렸을 뿐입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구나.”

“제자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그동안 제자가 익혔던 무공과 본파의 무공이 워낙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제자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취아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문연상은 검(劍)에 관한 한 당금 무림에서도 내노라하는 문파인 검보(劍堡)에서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으로 검법을 수련해 온 여인이었다. 비록 아직 일류 고수라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조금만 더 경험을 쌓고 노력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한 사람의 고수로서 무림에서 당당히 행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권장지각(拳掌指脚)을 주로 사용하는 장괘장권구식을 배우려니 여러모로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본파의 무공의 근간(根幹)이 되는 장괘장권구식을 건너뛰고 무작정 검법부터 가르칠 수도 없고….’

방취아는 저 사고뭉치를 자신에게 떠넘긴 진산월이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같은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넘어가기에는 서문연상 때문에 생기는 고민거리가 너무 많았다. 항상 수련을 대충 넘어가려고 잔꾀를 부리고, 조금만 방심해도 여우 같은 말솜씨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게다가 기본 실력도 상당하여 자칫 소홀했다가는 약세를 보이게 될지 몰라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방취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자 서문연상은 조잘거리려던 입을 급히 다물었다. 눈치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는 방취아의 심기(心氣)가 불편하다 싶을 때는 항상 지금처럼 요조숙녀로 변하고는 했다. 이럴 때 방취아의 신경을 건드려 보았자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방취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서문연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서문연상을 방취아에게 맡긴 진산월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방취아도 자신 말고는 그녀를 제대로 통솔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자연히 그녀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핑계는 없다. 무조건 오늘 안으로 그 초식을 다 익혀라.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나오도록 혼을 내주고야 말겠다.”

그녀는 서문연상이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휭하니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서문연상은 울상을 하고 그녀에게 사정하려 했으나 찬바람이 감도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는 찔끔하여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속을 송두리째 긁는 장승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 이제 오늘부터 맘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오늘 저녁은 무얼 만들까? 양반포어를 할까? 내유어시를 할까? 기분도 좋은데 아예 홍배웅장을 만들어 버릴까?”

서문연상이 분기탱천하여 표독스런 얼굴로 돌아보니 이미 장승표는 그녀의 심중을 알고는 저 멀리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속을 박박 긁는 한 마디를 내뱉는 걸 잊지 않았다.

“이왕이면 한 달 정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익히라구. 더 길면 더 좋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장승표의 뒤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 털복숭이야! 여자를 놀려먹는 게 그렇게 재미있냐? 그러다 콱 뒤로 자빠져 코나 깨져 버려라!”

그런데 그녀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희희낙락하며 달려가던 장승표가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져 버렸다.

“어?”

서문연상은 하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도 했으나 의아한 마음이 더욱 강해 황급히 쓰러진 장승표에게로 다가갔다.
장승표는 비록 코가 깨어지지는 않았으나 달려가던 상태에서 바닥을 굴렀는지라 전신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게다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선불 맞은 멧돼지 같아 서문연상은 조금 전의 분노도 잊고 피식 웃고 말았다.
서문연상은 장승표가 일어나지 않은 채 계속 바닥에 엎드려 씩씩거리고 있자 생글생글 웃으며 조잘거렸다.

“지금 너무 창피해서 그러고 있는 거 다 알아요. 엉덩이를 걷어차기 전에 빨리 일어나요.”

그런데 장승표는 오히려 진땀까지 뻘뻘 흘린 채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내가 용서할 줄 알아요? 좋아요. 귀밑에 있는 수염 다섯 가닥만 뽑는 걸로 봐줄게요. 원래는 몽땅 다 뽑으려고 했는데 이 아가씨가 오늘 큰 선심을 쓴 거예요.”

장승표는 숨을 헐떡이며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하나 입만 뻥긋거릴 뿐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제서야 서문연상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의 몸을 뒤집었다.

“악!”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장승표의 아랫배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문연상이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유혈이 낭자한 장승표의 아랫배에 비수 하나가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이게 대체….’

그녀는 놀라운 마음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이 그녀의 목숨을 살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차가운 섬광 한 줄기가 그녀의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팟!

섬뜩한 빛을 발하는 비수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장승표의 몸을 안은 채 비닥을 굴렀다.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목이 꿰뚫릴 뻔했던 것이다.

“웬 놈이냐?”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굴리면서도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몸을 멈추기만 하면 예의 그 무시무시한 비수가 날아올 것이 두려웠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그녀의 의도가 적중했는지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몇 개의 인영이 장내로 날아왔다.

“암습을 조심하세요. 누군가가 비수를 던지고 있어요!”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장내에 내려서던 인영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제서야 숨을 돌린 서문연상이 바라보니 달려온 사람들은 전흠과 방화였다.
전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한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이 향한 곳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전각의 지붕이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가는 그의 몸은 마치 한 마리의 비응(飛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펼친 것은 종남파의 무공이 아니라 해남파에서 전해 내려오는 창천비응신법(蒼天飛鷹身法)이었다.
그의 몸이 채 전각의 지붕에 올라서기도 전에 한 줄기의 섬광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흥!”

전흠은 냉소를 날리며 날아가는 신형을 멈추지 않은 채 수중의 장검을 슬쩍 흔들었다.

땅!

비수가 검광에 격중되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틈에 전흠은 무사히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한데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록 비수를 튕겨내기는 했으나, 비수에 담긴 역도(力道)가 생각보다 강력했던 것이다.

지붕 위에는 한 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전신에 짙은 흑포(黑袍)를 걸친 그 인영은 허리춤에 특이하게 생긴 요대(腰帶)를 차고 있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 요대에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길이의 비수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전흠은 상대를 일견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로 짓쳐들었다.
비수를 날려 문파의 제자를 공격했다면 그건 적(敵)이라는 소리였고, 상대가 적이라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보다는 무조건 베어 넘기고 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흑포인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요대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어느새 세 개의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흑포인은 허깨비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며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세 개의 비수가 세 가닥 섬광이 되어 전흠의 상반신을 향해 폭사되었다. 흑포인의 비수를 던지는 솜씨는 그야말로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 했다. 하나 상대가 너무 나빴다. 전흠은 원래의 실력이 출중한데다가 최근에 거듭되는 격전을 치른 후 무공에 대한 안목이 크게 개화(開花)되어 하루가 다르게 절정고수의 수준에 육박해 가고 있었다. 예전의 전흠이었다면 상대의 놀라운 암기술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을지 모르나 초가보의 고수들과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혈전(血戰)을 치렀던 지금의 그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전흠은 피하지 않고 곧장 흑포인에게 달려들며 세 줄기의 섬광을 하나하나씩 검으로 쳐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식의 효과적이면서도 대담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섬전 같은 속도로 날아드는 암기를 일일이 쳐낸다는 것은 단순히 무공 이전에 담력의 문제였다.

흑포인은 설마 전흠이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달려들 줄은 몰랐는지 짤막한 경호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나 전흠의 달려드는 속도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질풍노도처럼 흑포인의 코앞으로 접근한 전흠의 검이 벼락 같은 섬광을 줄기줄기 뿜어내었다. 성라검법 중의 절초인 낙성빈분(落星濱粉)이 무서운 기세로 흑포인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흑포인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번개 같은 속도로 허리춤에서 무려 일곱 개의 비수를 뽑아 던졌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그의 손이 요대 주위를 훑고 있다고 느낀 순간에 일곱 줄기의 섬광이 전흠의 전신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따따따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부서진 비수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飛散)되었다.

“큭!”

그와 함께 흑포인은 앞가슴이 피범벅이 된 채로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전흠 또한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비록 여섯 개의 비수를 쳐냈으나, 마지막 비수를 왼쪽 팔꿈치에 맞고 말았다. 하나 전흠은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태연히 팔꿈치에 박힌 비수를 뽑아 멀리 던지고는 피를 지혈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거침없던지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던 흑포인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으… 지독한 놈!”

전흠은 비수가 박혀 있던 팔꿈치를 몇 번 움직여 보더니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어 가슴이 갈라진 채 헐떡거리고 있는 그를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옆구리에 끼고는 아무 말도 없이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붕 아래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종남파의 대다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흠은 그중 소지산을 발견하고는 흑포인을 그에게 집어던졌다.

“나는 사람을 심문(審問)하는 데는 재주가 없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소지산은 흑포인을 받아든 채 전흠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흑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흠의 성격이 어떤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였으나, 가끔은 알면서도 적응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아무리 문파의 제자를 암습한 자라 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상자를 짐짝처럼 취급한다는 것은 소지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지산은 흑포인의 가슴이 쩌억 갈라져 아직까지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 그의 상처부터 지혈시켰다. 그런 다음 흑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누군데 본파에 와서 함부로 살수(殺手)를 쓴 거요?”

흑포인은 비쩍 마른 얼굴에 거무스름한 피부를 지닌 삼십대 초반의 장한이었다. 눈이 쭉 찢어지고 입술이 얇아서 냉혹한 인상이었으나, 의외로 눈빛은 맑고 차가웠다. 흑포인은 소지산의 물음에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누구인지 묻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 아니겠소?”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나 소지산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옳은 말이오. 내가 너무 성급했구려. 나는 소지산이라 하오.”

흑포인은 소지산의 침착한 대응이 의외였던지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당신이 신검무적의 제일 큰 사제라는 대해검(大海劍) 소지산이란 말이오?”

“내 이름이 소지산이란 것은 맞지만 대해검이란 별호는 처음 들어 보는구려.”

“대해검은 종남혈사 이후 당신에게 붙여진 별호요. 평상시에는 숨죽인 바다처럼 조용하지만, 일단 화를 내면 성난 바다처럼 사납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소.”

듣고 있던 전흠이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쳇, 같다 붙이기도 잘하는군. 별호 하나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소지산은 흑포인을 향해 처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제는 당신 차례요. 당신은 누구이며, 무슨 일로 본파의 제자에게 암습을 한 거요?”

흑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소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마정기(馬丁起)라는 사람이오.”

소지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제 보니 서안의 유명한 고수인 칠살추혼(七煞追魂) 마 대협이셨구려. 몰라뵈어 죄송하오.”

마정기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이런 꼴이 된 주제에 대협이란 호칭은 감당할 수 없소.”

칠살추혼 마정기는 서안 일대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사(正邪)가 불명(不明)하고, 행동이 거칠었으나 워낙 비도를 사용하는 솜씨가 탁월하여 누구도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강호를 행도(行道)하고 다니는 그가 종남파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정기는 그 안에 숨은 곡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 한 사람이 있소. 그런데 그 친구가 종남파에 사로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요.”

그의 시선이 한쪽에서 제갈외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장승표와 그 옆에 서 있는 서문연상을 훑고 지나갔다.

“원래는 종남파의 제자 한 사람을 사로잡아 내 친구와 교환하려 했는데, 저 여자가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일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거요.”

“본파는 아직 외부인을 포로로 잡은 적이 없소. 마 대협의 친구가 누구요?”

마정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일환이라 하오.”

전흠이 냉소를 날렸다.

“지일환이라면 일전에 본파의 정보를 초가보에 팔아넘긴 그 쥐새끼 아니야? 정말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군.”

마정기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에서 성난 빛이 흘러나왔다.

“말을 함붑로 하지 마시오. 누구보고 쥐새끼라고 하는 거요?”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지일환인지 뭔지 하는 작자는 본파의 장문인에게 목숨의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 은혜를 모르고 오히려 본파를 배반했으니 그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가 쥐새끼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마정기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게 정말이오?”

소지산은 전흠의 입에서 더욱 심한 말이 나올까 봐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본파의 장문인께서는 이씨세가의 뇌옥에서 그를 구출하셨는데, 그는 본파가 초가보와 싸우기 직전에 본파의 작전 계획을 듣고 초가보에 그것을 누설했소.”

마정기는 눈가를 실룩거리다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줄은 까맣게 몰랐군. 나는 다만 지일환이 귀파로 간다는 말만 전한 후 소식이 끊겨 귀파에 의해 감금되었는 줄로만 알았소.”

“본파가 무엇 때문에 그를 감금하겠소?”

“그렇다면 지금 지일환은 귀파에 없단 말이오?”

“그렇소. 초가보와의 싸움 전날 본파를 떠난 후로 그를 보지 못했소.”

마정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소지산을 쳐다보았다.

“혹시 귀파에서 초가보를 공격했을 때 그 싸움의 와중에 변을 당한 것이 아니겠소?”

“우리는 그곳에서 지일환을 보지 못했소.”

“그렇다면 그가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건 모르겠소. 우리는 초가보를 점령한 후 그 안을 수색했으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소.”

마정기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 초가보에서 그를 해치운 것은 아니겠소?”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건 아닐 겁니다.”

소지산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화야, 그게 무슨 말이냐?”

방화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얼굴이 빨갛게 변했으나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초가보의 보주인 초관은 비록 야심이 많은 인물이기는 하나 흉악무도한 자는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정보를 제공하러 온 사람을 죽일 정도로 치졸한 인간이 아니란 말이지요.”

소지산은 초관을 옹호하는 듯한 방화의 태도에 내심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초관은 나름대로 공정한 성격이었다.”

방화는 소지산이 자신의 의견을 찬성해 주자 얼굴에 기쁜 빛이 역력했다. 그러다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이 홍시처럼 변한 채 사람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소지산은 다시 마정기를 쳐다보았다.

“마 대협이 들은 대로요. 지금의 우리로서는 지일환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소.”

마정기는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소지산은 한동안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 대협이 왜 본파에 와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이제 알겠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본파로 무단침입하여 본파의 인물을 상해케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지금까지의 부드러웠던 모습과는 판이한 추상 같은 소지산의 음성에 마정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눈빛이 확 달라졌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자신의 왼팔을 번쩍 쳐들었다.

“자세한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귀파를 어지럽힌 죄는 기꺼이 받겠소. 부디 이 한 팔로 내 죄를 용서해 주기 바라오.”

이어 그는 오른파라로 왼팔을 힘껏 내리쳤다. 바로 그때 어느사이엔가 소지산이 다가와 그의 오른팔을 움켜잡았다. 그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어도 마정기는 외팔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마정기는 눈을 부릅뜨고 소지산을 쏘아보았다.

“왜 나를 막는 거요?”

소지산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 대협이 한 팔을 자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소. 다행히 부상을 당한 사람도 치명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고, 마 대협 또한 그에 준하는 상처를 입었으니 이것으로 마 대협의 잘못을 청산(淸算)한 것으로 합시다.”

마정기는 뜻밖의 말에 눈자위를 실룩거렸다.

“정말 그래도 되겠소?”

“물론이오. 솔직히 마 대협의 잘려진 팔을 가지고 본파에서 무엇을 하겠소?”

소지산의 농담 섞인 말에 비로소 마정기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정기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갑자기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 마 모(馬某)가 오늘 큰 실수를 할 뻔 했구려. 종남파의 고수들이 이토록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넓은 포용력을 지녔으니 앞으로 귀파의 번영은 무궁(無窮)할 거라 믿소.”

“별말씀을. 모쪼록 친구분을 무사히 찾기 바라겠소.”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으니, 그의 명줄이 다하지 않았다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거요.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소지산은 피가 잔뜩 묻어 있는 마정기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도 되겠소?”

마정기는 메마른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강호의 칼바람 속에 사는 사람이 이 정도 상처가 대수겠소? 앞으로 이 상처를 볼 때마다 매사에 경솔하게 처신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생각하겠소.”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

전흠은 낮게 투덜거렸다.

“장문인도 그렇고 정말 마음씨 좋은 사형제들이라니까. 그래서 자기들만 좋은 별호를 얻었겠지.”

마정기의 시선이 전흠에게로 향했다.

“당신에게도 별호가 생겼으니 그렇게 심통 사나워할 것 없소.”

전흠이 눈을 부릅떴다.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마정기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종남파의 고수들 중 당신처럼 빠르고 사나운 검법을 펼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오직 한 사람뿐이오.”

전흠은 갑자기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말해 봐라. 나를 뭐라고 부르더냐?”

“폭뢰검(暴雷劍).”

전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 누구는 바다가 어떻고 하더니 나는 폭뢰라고? 이런 빌어먹을 놈이….”

“내가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소. 워낙 거칠고 사나워서 폭뢰검을 건드리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더이다.”

전흠은 별호 자체는 못마땅했지만 그의 설명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아까부터 계속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서문연상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본파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호가 없나요?”

마정기는 장내에 두 명뿐인 여인인 방취아와 서문연산을 번갈아 보더니 방취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무래도 소저가 신검무적의 하나뿐인 사매인 무영낭랑(無影娘娘) 방취아 소저인 것 같구려.”

방취아의 고운 얼굴에 한 줄기 홍조가 떠올랐다. 자신이 하마터면 마정기의 손에 비명횡사할 뻔 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열띤 표정으로 물었다. 마정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 외에 최고의 미남자이며 또한 권법의 고수라는 옥면신권(玉面神拳)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자리에는 없는 것 같구려.”

사람들은 더 들어 보지 않아도 그 별호가 낙일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뛰어난 권법을 지닌 낙일방에게 너무도 어울리는 별호가 아닐 수 없었다. 마정기가 그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 기색이자 서문연상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다른 사람은요?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워서 옥녀(玉女)라든지 선자(仙子)라는 이름이 붙은 소녀 이야기는 없던 가요?”

그녀는 자신이 하마터면 마정기의 손에 비명횡사할 뻔 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열띤 표정으로 물었다. 마정기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었소.”

서문연상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왜 없어요?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오늘 크게 경을 치게 될 줄 알아요.”

“종남파의 고수들 중 강호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신검무적 외에 조금 전에 내가 말한 네 명이 전부요. 그 외에 몇몇 노강호(老江湖)가 거론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소.”

서문연상의 음성이 표독하게 변했다.

“왜 없어요? 내가 그때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데? 당신 나에게 감정 있지?
어쩐지 나에게 비수를 날릴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녀가 금시라도 마정기에게 달려들 듯 하자 방취아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사고도 아시잖아요. 저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계속 떠든다면 오늘 익혀야 할 초식을 세 배로 늘리겠다.”

그 말에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서문연상이 갑자기 순한 양처럼 조용해졌다. 초식 하나 익히는 것만으로도 진땀을 빼고 있는 그녀로서는 하루에 세 개의 초식을 익힌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마정기는 다시 한 번 소지산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포권을 한 후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앙상하고 비쩍 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당당해 보였다. 그때까지도 전흠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폭뢰검이 뭐야, 폭뢰검이….”

그때 제갈외가 불쑥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비수에 찔렸던 왼쪽 팔을 붙잡았다. 전흠은 팔의 통증으로 눈살을 찡그렸으나 자신의 할아버지와 동년배인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제갈외는 그의 팔꿈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를 따라와라. 치료해 주마.”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보니 비수에 독(毒)이 발라져 있거나 하지는 않더군요. 며칠 지나면 멀쩡해질 겁니다.”

“성격 하나는 제 할애비를 빼닮았군. 누가 그깟 상처로 네놈이 죽기라도 할까 봐 이러는 줄 아느냐? 내가 손을 쓰면 하루면 나을 텐데 뭐 하러 생고생을 한단 말이냐?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말고 고분고분 따라와라.”

그는 우악스럽게 전흠의 팔을 붙잡고는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전흠은 고통을 참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에게 질질 끌려 가야만 했다. 중인들은 모두 웃음을 참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단 한 사람, 방화만은 왠지 우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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