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7화
제151장. 회갑지연(回甲之宴)
이씨세가는 아침부터 인파로 북적거렸다. 평소에는 감히 이씨세가의 앞에 얼쩡거리지도 못할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이씨세가 주위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되자 그 넓던 이씨세가 앞의 대로(大路)조차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제대로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주위가 온통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 간혹 유달리 크게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저길 보게. 저자가 바로 화하(華夏)에서 유명한 쾌검(快劍)의 달인(達人)이라는 질풍마검(疾風魔劍) 소옥(蘇玉)일세.”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중조산(中條山)의 괴걸이라는 천교신(天巧神) 악일환(岳一環)이 아닌가?”
“이 사람들아, 정작 무서운 고수는 따로 있네.”
“그게 누군가?”
“악일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느긋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청의인 보이지?”
“기생오라비처럼 멀끔하게 생긴 청삼문사(靑衫門士) 말인가?”
“쉿! 목소리를 낮추게. 저 사람이 바로 청효(靑梟) 조문방(曹門房)일세.”
“뭐라고? 하룻밤 사이에 회하(淮河) 일대의 수채(水寨) 다섯 곳을 피바다로 만들었다는 그 희대의 살성(殺星) 말인가?”
“목소리를 낮추리나까. 그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큰 소리고 떠든단 말인가?”
사람들의 소곤거림과 탄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씨세가의 정문 근처에 구름처럼 모여든 채 누군가가 이씨세가로 들어갈 때마다 그자에 대해 수군거렸다.
이씨세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청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그저 초청장을 가지고 들어가는 이름난 인물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다시 네 명의 인물들이 입구에서 초청장을 내밀고 이씨세가로 들어가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들 네 사람의 면면이 상당히 특이해서 더욱 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중 한 사람은 키가 무척 큰데다 앙상하게 말라서 멀리서 보고 있자니 마치 고목(枯木)에 옷가지를 걸쳐 놓은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반대로 좀처럼 보기 힘든 미남자여서 더욱 대조가 되었다.
그들 외에 다른 두 사람 또한 한 명은 애꾸눈의 중년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다리를 절고 있는 절름발이 청년이었다.
이들이 한 명씩 있다면 모를까, 네 명이 모여 있으니 가뜩이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보라구,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나?”
“글쎄, 정말 특이하게들 생겼군. 저 미남자는 정말 잘생겼네. 저런 미남자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걸.”
“그 옆의 괴인은 어떻고? 위태할 정도로 크고 말랐는데도 무언지 모를 위엄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나?”
“저들이 누구인지 모르나?”
“저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아! 그러고 보니 저런 모습의 괴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장한이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큰 소리를 내질렀다.
“시… 신검무적! 저 사람은 신검무적이다! 저들은 종남파의 고수들이다!”
그 말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 주위를 온통 뜨거운 용광로처럼 들끓게 만들었다.
“신검무적!”
“당대 최고의 검객이라는 신검무적이 나타났다!”
“저 사람이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인 진산월이다!”
“우와!”
탄성과 고함, 심지어는 박수 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그 옆의 미남자가 바로 옥면신권이겠군.”
“애꾸는 비천호리가 확실하네.”
“그렇다면 절름발이는 누구지?”
“글쎄, 종남파에 저런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인가 보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 말은 이씨세가의 정문을 지나고 있던 응계성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응계성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나 그의 입술은 피가 나도록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낙일방이 그에게 다가오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자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응 사형. 머지않아 저들도 응 사형의 진면목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응계성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낙일방이 머쓱해져서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방, 네가 앞장 서 있다가 배첩을 내밀어라.”
“예, 장문사형.”
낙일방은 다시 한차례 응계성을 보더니 앞으로 걸어나갔다. 진산월은 자연스럽게 응계성의 옆으로 다가가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었다.
“어깨를 펴라, 계성.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잊지 마라.”
응계성의 몸이 움찔거렸다.
“앞으로 저보다 더 심한 말을 무수히 듣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인상을 쓰게 된다면 누구도 너와 가까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신임을 얻는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겠지.”
응계성의 눈자위가 계속 실룩거리며 얼굴에 은은한 붉은 기가 번졋다. 그러다 점차로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오더니 평정을 되찾았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응계성은 억지로라도 웃으려 하였으나, 그의 미소는 너무나 어색해서 차라리 우는 것보다 못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웃도록 해라. 화가 나도 웃고, 슬퍼도 웃어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는 더욱 크게 웃도록 해라. 그래야만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응계성은 몇 번이고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희미하긴 하지만 제법 자연스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 미소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은 변화였으나, 진산월은 응계성이 스스로 노력했다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비록 응계성의 화급한 성격과 사소한 분노도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불 같은 습성은 앞으로도 변하기 힘들 테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화가 날수록 웃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던 소벽력(笑霹靂)의 신화(神話)는 이때 탄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 일행을 안내한 사람은 뜻밖에도 천무공자 이서명이었다. 이서명은 진산월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지 그를 보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포권을 했을 뿐이었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반갑소.”
서로간에 검을 맞대고 싸운 게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인사를 하는 이서명의 모습은 진산월로서도 다소 의외였다. 이서명은 이씨세가에서의 지위로 보아 일개 문파의 안내인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거물(巨物)이었다. 진산월은 이것이 다분히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의례적인 것인지 쉽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존휘가 전후사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서명으로 하여금 나를 마중케 한 것이라면, 이존휘는 보기보단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군.’
이서명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작심한 듯 별다른 말도 없이 그들을 이씨세가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진산월 또한 먼저 그에게 말을 걸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어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이씨세가는 이번 회갑연을 위해 후원 일대를 재정비하여 몇 채의 객방(客房)을 새로 지었다. 며칠 사이에 급하게 지었을 텐데도 겉으로는 깨끗하고 화려해 보였다. 객방은 사이사이에 작은 정원이 있어서 서로 분리가 되어 있었고, 그중 몇 개는 그리 크지 않은 담에 둘러싸여 완벽하게 시선을 차단한 곳도 있었다. 이서명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그중 중간 규모의 객방이었다. 두 개의 방이 서로 붙어 있었고, 주변에 서너 개의 객방들이 작은 화원을 경계로 떨어져 있었다. 좌측의 담벼락에 둘러싸인 제법 커다란 규모의 객방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귀파의 인원이 많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머무를 수 있을 거요. 본가에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시는 터에 객방이 부족하니 널리 이해해 주기 바라오. 유시(酉時) 경에 연회가 시작될 테니 그 전까지 중앙에 있는 대청으로 오시면 되오.”
이서명의 태도는 워낙 예의 바르고 정중해서 예전의 광오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진산월이 문득 물었다.
“저쪽은 어느 분이 머무르고 있소.”
진산월이 가리킨 곳은 좌측의 담벼락에 싸인 객방이었다. 그 객방은 언뜻 보기에도 이곳보다 서너 배는 커 보였다. 이서명은 힐끔 진산월을 주시하더니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화산파의 고수들이 기거하고 있소.”
화산파라는 말에 중인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졌다. 초가보가 무너진 지금 화산파는 종남파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우환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두 문파는 서로간에 숙적(宿敵)이었으며, 지금도 두 파의 고수들간에는 적지 않은 앙금이 쌓여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두 문파의 숙소를 지척에 정했다는 것은 과연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안내해 주어서 고맙소.”
이서명의 시선이 모처럼 진산월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별다른 동요 없는 침착한 시선이었으나, 무표정을 가장한 그 시선 속에는 괴이한 살기와 분노의 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서명은 한동안 진산월을 집요할 정도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그의 신형이 화원 저쪽으로 멀어지자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사람이군요. 분명 겉으로는 예의를 잃지 않았는데, 왠지 우리에게 호의(好意)를 품은 것 같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이씨세가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다.”
“그래도….”
“계성이 낙양 석가장으로 갔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계성은 표물로 위장되어 초가보로 운송되고 있었다. 결국 대응표국의 표사들이 그를 발견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대응표국에서는 그를 풀어 주지 않고 감금해 버렸다.”
낙일방의 짙은 검미(劍眉)가 꿈틀거렸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응계성과 동중산 또한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계성의 친구인 추성이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계성을 구하기 위해 대응표국을 탐색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뜻밖에도 이씨세가의 지하뇌옥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낙일방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씨세가가 대응표국과 내통했다는 말씀입니까?”
“대응표국은 단지 계성을 초가보로 인계하기 위한 중간 다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대응표국은 추성이 이씨세가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추성은 계성이 초가보로 인계되는 걸 막으려 했다. 그걸 알고 이씨세가에서 그를 잡아 가둔 거지. 결국 이씨세가는 초가보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순순히 이씨세가의 초청에 응한 것도 이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낙일방은 머리가 복잡한지 준수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무공 수준은 월등히 상승했는지 몰라도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한 그로서는 복잡한 사건의 실타래를 푸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일에 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낙일방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동중산을 향했다. 마침 동중산이 애꾸눈을 반짝이며 막 입을 열려 하고 있었다.
“이씨세가가 초가보와 연결되어 있다면 두 세력이 같은 배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이씨세가가 그 배후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요. 하지만 이세적이 비록 서안 최고의 유력자라고 해도 단시일 내에 초가보 같은 거대한 세력을 만들 수는 없을 겁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이씨세가에 요즘 정체를 모를 고수들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제자도 그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이 워낙 신비해서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더군요. 제자가 장문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초가보에 가셨을 때 그곳에서 서장의 고수들을 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장의 고수들 몇을 상대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악종기도 서장의 무공을 사용하더군.”
동중산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제자가 들은 이야기 중에 이씨세가에 출입하는 고수들 중 중원인이 아닌 듯한 사람들이 일부 섞여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걸어 보아도 고개만 내젓고 휭하니 사라져 버려 황당해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만 가지고 그들이 서장에서 온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가끔 목격된다고도 하니 의심을 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습니다.”
진산월은 허공을 응시한 채 상념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서장이라…. 초가보에 이어 이씨세가에까지 그들의 입김이 닿아 있다면 대체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할 수 없겠군.”
“우선은 이씨세가가 진짜 초가보의 배후와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게 순서일 듯 싶습니다.”
“그래. 한 가지씩 일을 처리해야겠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낙일방이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걸 조사한단 말입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추성을 구하기 위해서 이씨세가의 뇌옥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추성 외에도 뇌옥에 갇힌 인물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요?”
“그곳부터 다시 조사해 볼 생각이다. 이씨세가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으니 말이다.”
그날 저녁. 이씨세가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전각에서 이세적의 회갑연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씨세가를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둘씩 전각으로 모여들었다. 거의 수백 명에 달하는 고수들이 다채로운 옷을 입고 전각으로 들어서는 광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관(壯觀)이었다.
낙일방은 이토록 많은 고수들이 밀집해 있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이 울적해졌다. 삼 년 전에 있었던 진산월의 장문인 취임식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정파의 장문인 취임식이 일개 가문의 회갑연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다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때 종남파도 서안 일대의 유력인사들에게 모두 초청장을 보냈으나 찾아온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난데없는 불청객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나마 찾아온 손님들까지 모두 쫓겨나듯 가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허망한 취임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인심(人心)이란 이렇듯 야박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흠모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광경을 보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나는 결코 남들이 시선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 것이다.’
낙일방은 새삼 인심의 변화무쌍함을 깨닫고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동중산은 낙일방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이상함을 느끼고 낙일방이 바라본 곳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인상의 남녀 칠팔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지날 때마다 주위의 사람들이 허겁지겁 인사를 하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범상치 않은 자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파(一派)의 존주(尊主)들이거나, 서안의 유력자들안데도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다섯 명의 청년, 그리고 두 명의 중년인들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검은 수염을 기른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을 대하는 중인들의 태도는 마치 황제(皇帝)를 알현하는 신하들을 연상케 했다. 동중산은 그들의 소맷자락에 작은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이내 그들의 정체를 짐작했다.
‘저들은 화산파의 고수들이구나.’
화산파가 아니고서야 이런 대접을 받을 리 없었다. 화산파의 강호에서의 명성과 지위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그들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자처하는 소림이나 무당과도 틀렸고, 고고한 은자(隱者)처럼 행세하는 청성(靑城)이나 공동(??)과도 틀렸다. 수백 년간 그들은 꾸준히 성세(盛世)를 유지해 오고 있었고, 세속(世俗)과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당금의 가아호에서 그들은 무림인들에게는 외경(畏敬)을, 일반인들에게는 흠모를 받는 대상이었다. 누구나가 그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했다. 화산파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원 어디에 가든 환대를 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화산파의 정예고수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장내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낙일방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응계성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응 사형, 저쪽에 빈 자리가 있군요. 저쪽으로 가지요.”
응계성은 낙일방이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몰라 눈살을 찡그렸다.
“왜 이리 수선을 피우는 거냐? 냉정을 잃지 말고 자중하라는 장문사형의 말을 벌써 잊은 거냐?”
“그게 아니라… 저쪽이 전망도 좋고 한적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적당할 것 같아서요.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면 아쉽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도 안 되는 엉성한 이유를 대며 계속 재촉하자 응계성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반쯤 벌렸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냐? 이씨세가에서 이미 각 문파마다 자리를 배정했는데 우리 마음대로 아무 데나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글쎄 그게….”
낙일방이 준수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더듬거리자 응계성이 무언가를 느낀 듯 조금 전에 낙일방이 쳐다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사형!”
낙일방이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응계성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시뻘건 색으로 변하며 눈빛에 흉악한 빛이 떠올랐다. 그의 험상궂게 변한 표정을 보고는 낙일방은 절망 어린 탄식을 토해냈다.
“응 사형, 조금 전에 한 장문사형의 말씀을 잊지 마세요.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응계성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고리눈을 부릅뜬 채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있는 자리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산파의 고수들 중 유난히 뛰어난 용모가 돋보이는 미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미남자는 기개가 헌앙한 화산파의 젊은 고수들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 만큼 중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였다.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힐끔거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미남자는 주변 인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응계성의 핏발 선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안색이 순간적으로 핼쑥하게 변했다. 그의 옆에 있던 입술이 요염한 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제(杜師弟), 왜 그래?”
미남자는 곧 원래의 신색으로 되돌아와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그의 음성은 용모 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해서 듣기만 해도 매혹을 느낄 정도였다. 그때 응계성이 사람들을 밀치고 다리를 절룩이며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낙일방이 뒤에서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응계성의 표정이 워낙 험악하여 어쩔 줄 모르고 따라오고만 있었다.
“어머?”
“뭐야, 저놈은?”
그에게 밀쳐진 사람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거푸 들려왔으나 응계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미남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곧장 걸어왔다.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화산파의 제자들이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개중에는 허리춤에 찬 장검으로 손을 움직이는 자도 있었다. 아마 응계성이 이 장 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검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응계성은 미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크하하하하…!”
어찌나 크게 웃던지 시끌벅적하던 대청 안이 삽시간에 그의 웃음소리로 뒤덮여 버렸다. 화산파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에 찬 눈을 빛내던 주위 사람들이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응계성은 눈물까지 흘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그 웃음 속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크하하하… 아하하하!”
미남자는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선 채 정신없이 웃고 있는 응계성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낙일방이 응계성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응 사형, 이제 그만하세요.”
그러자 응계성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응계성의 얼굴은 핏발이 올라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꼬리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응계성은 그런 눈으로 미남자를 쏘아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저 절름발이는?”
“한가락하는 줄 알았더니 정신 나간 놈처럼 웃다가 그냥 돌아가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놈 아냐?”
여기저기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응계성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절룩거린 채 앞만 바라보고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곧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산파의 고수들 중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미남자를 향해 물었다.
“아는 자냐?”
미남자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전의 동문(同門)입니다.”
“종남파의 고수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의 물처럼 투명한 시선이 미남자의 얼굴에 꽂혔다.
“검을 익히는 자에게 정(情)이나 미련 같은 것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미남자는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당당한 화산파의 제자입니다.”
“본파의 제자는 자신을 모욕하는 자를 절대로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미남자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다시 한차례 미남자를 쓸어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명심해라. 정을 끊지 않는다면 언제고 그것이 네 몸을 칭칭 동여매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미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주위에는 오직 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화산파의 젊은 제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얼굴이 길고 눈빛이 차가운 청년이었다.
“막 사형(莫師兄)…!”
그 청년은 싸늘한 눈으로 미남자를 쏘아보고 있더니 눈빛보다 더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벨 것이다.”
“…!”
“배반자는 상황에 따라 용서할 수 있어도 비겁자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본파의 철칙(鐵則)이다. 다음에 그 절름발이를 만나게 된다면 한 팔을 잘라 오도록 해라.”
미남자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청년의 눈빛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알겠느냐.”
미남자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청년은 다시 한차례 미남자를 노려보더니 이내 돌아가 버렸다.
“후우….”
미남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더니 뜻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