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9화
제153장. 오귀수혼(五鬼搜魂)
야심한 밤이었다. 진산월은 이씨세가의 후원 한구석을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에 반월(半月)이 떠 있기는 했으나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주위는 칠흑 같이 어두웠다. 회갑연이 끝난 지도 몇 시진이 흘러 어느덧 삼경(三更)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이씨세가도 지금은 고요한 정적(靜寂)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이 목표로 하는 곳은 얼마 전에 들렀던 제심전이었다. 당시 이씨세가는 제심전 안에 지하뇌옥을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아직도 뇌옥이 그곳에 있는지는 진산월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진산월은 아무리 이씨세가라 하더라도 그러한 뇌옥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 수 없는 만큼 그들이 쉽게 그곳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대신 경계가 한층 삼엄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신법으로 후원의 어둠을 따라 몸을 움직여 나아갔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유연하던지 누가 보더라도 한 마리 야조(夜鳥)가 지나친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진산월이 몸을 멈춘 곳은 제심전으로 가기 전에 위치한 작은 동산 앞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런 동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동산은 그가 다녀간 후 생겨났다는 뜻이었다. 동산은 비록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작은 건물 두 개를 붙여 놓은 크기 정도는 되었다. 이 동산 안에 얼마든지 사람들이 매복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동산의 위치는 교묘해서 그가 있는 곳에서 제심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만 했다.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가야 할 뿐 아니라, 반대쪽에도 이와 같은 곳이 없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진산월은 동산에서 십여 장 떨어진 수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산은 나무들과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 이씨세가에서 단순히 풍광(風光)을 위해서 이런 동산을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천이통(天耳通)이나 천안통(天眼通) 같은 불가육통(佛家六通)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의 공력으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주위에 아무런 매복이 없든지 아니면 이곳의 경계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서운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진산월은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을 했다. 둘 중 어느 선택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물러나자니 이씨세가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뚜렷한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가자니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愚)를 범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선택을 도와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숨어 있는 반대쪽 수림 속에서 한 줄기 검은 인영이 동산 쪽으로 날아왔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인영은 동산이 자연적인 경관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 없이 몸을 날린 모양이었다. 검은 야행인(夜行人) 복장을 한 그 인영은 한 번에 사오 장씩 도약하며 놀라운 속도로 동산을 가로질러 갔다. 한데 그가 동산을 채 반도 지나기 전에 갑자기 수십 개의 싸늘한 광망(光芒)이 그에게로 폭사되었다.
“엇?”
야행인은 그것이 동산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속에서 튀어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고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신형을 끌어올렸다.
파파파팍!
솜털 같은 암기들이 그의 발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야행인이 채 신형을 가다듬기도 전에 이번에는 반대쪽에 있는 나무 위에서 차가운 검광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야행인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하나 자신이 피하는 방향에서 다시 섬뜩한 도기(刀氣)가 다가옴을 느끼고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제서야 그는 이 동산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수많은 매복이 숨어 있는 용담호혈(龍潭虎穴)임을 깨닫고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으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오른발을 축(軸)으로 몸을 선회하였다.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다섯 개의 섬광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따땅!
다섯 개의 섬광 중 세 개가 시퍼런 도기에 격중되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나 나머지 두 개는 각각 도기와 검광을 날렸던 두 명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팟!
“큭!”
검광을 날렸던 자는 용케도 비수를 피했으나 도기를 날렸던 자는 너무 거리가 가까웠는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짤막한 신음과 함께 허리를 꺾었다. 야행인 또한 완벽하게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도기에 왼쪽 어깨를 스쳤는지 팔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나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돌려 돌아온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이 동산에서 뼈를 묻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동산을 되돌아가는 길도 수월한 것도 아니었다. 들어올 때는 두 군데의 암습밖에 없었는데 나가려는 그를 막아선 것은 무려 다섯 군데의 매복이었다. 야행인은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눈부신 섬광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짧은 순간에 그는 거의 이십여 개에 달하는 비수를 날려댔고, 네 명의 매복자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나 그 대신에 그는 몸에 세 번의 칼질을 당했고, 등에는 암기까지 맞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 몸으로도 그는 쓰러지지 않고 요행히 동산을 빠져 나와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동산에 숨어 있던 매복자들 중 몇 명은 야행인의 뒤를 추적했고, 나머지는 다시 동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언제 치열한 싸움이 있었냐는 듯 동산은 다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미 동산의 매복이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를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매복은 무려 열두 군데에 달했고, 하나의 매복에 두 명씩 잠복해 있었다. 그중 일곱 군데가 야행인을 제지하는 데 참여했고, 나머지 다섯 곳은 끝까지 종적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산월이 그 다섯 군데 매복의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일곱 군데에 있는 매복자들이 교묘하게 상대를 그 다섯 군데의 매복지로 몰아넣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마 야행인이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꼼짝없이 그 함정에 빠져들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크기의 동산에 열두 군데의 매복이라면 들키지 않고 통과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품속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눈 아래를 가렸다. 일파의 장문인으로는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나, 아직 이씨세가와 초가보의 관련 사실이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런 다음 신중한 동작으로 매복과 매복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단숨에 돌파해야 한다.’
그는 오늘 크게 살계(殺戒)를 열어서라도 기필코 제심전 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다. 이곳에 이와 같은 삼엄한 매복이 있따는 것은 제심전이 아직도 중요한 뇌옥으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이었다. 충분히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공력을 끌어올려 가볍게 일주천(一週天)하고 나자 정신이 더욱 맑아지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진산월은 허리춤의 장검을 언제든지 뽑을 수 있게 검집째 꺼내어 왼손에 들고는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찰나, 그의 신형은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십여 장 밖의 동산으로 쏘아져 갔다. 부광약영(浮光掠影)의 초절정 신법이 모처럼 강호무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매복은 너무도 어이없이 붕괴되었다. 그들은 진산월이 지척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겨우 그를 발견하고 뛰어나오다가 제대로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모두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세 번째 매복부터는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수중에 들린 용영검이 눈부신 검광을 발하자 화려한 피비가 뿌려졌다.
파파팍!
순식간에 십여 명의 매복자들이 비명도 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진산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복지에서 뛰어나오는 고수들을 가차 없이 살해했다. 아미 매복지의 위치를 모두 파악한 그에게 달려드는 것은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멈추고 않고 계속 그를 공격했다. 숨 몇 번 내쉴 사이에 진산월은 열한 개의 매복을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통과했다. 하나 마지막 매복을 앞에 두고 그는 돌연 몸을 멈추었다. 마지막 매복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미 상대가 매복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음을 깨닫고 정면으로 대응하려는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매복자들과는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 자체가 틀렸다. 한 사람은 창(槍)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편(鞭)을 들고 있었다. 은밀한 위치에 매복해 있다가 침입자를 저격하는 암습자가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병기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런 자세로 창과 편을 들고 서 있었다. 진산월은 그들의 병기를 들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그들이 지금까지의 매복자들과는 차원이 틀린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상대편의 목적이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는 판국에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한 줄기 밤바람이 장내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의 몸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창은 진산월의 목덜미를 일직선으로 곧장 찔러 들어왔고, 편은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진산월의 허리춤을 쓸어 왔다. 그 공세만 보아도 이들은 오랫동안 손을 맞춰 온 것이 분명했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각기 다른 두 종류의 공세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불행히도 그들의 상대는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세의 검객이었다.
진산월은 목덜미를 찔러 오는 창을 슬쩍 목을 움직여 피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창은 헛되이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허리를 감아 오는 채찍은 아예 피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용영검을 앞으로 내밀어 휘둘러 오는 채찍에 갖다 대었다. 채찍은 무서운 기세로 용영검을 감아 챘다. 그 순간 용영검이 가늘게 떨리더니 시퍼런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그 검기는 채찍을 가닥가닥 끊어 놓았고, 채찍을 든 인영의 몸뚱이마저 그대로 갈라 버렸다. 창을 든 인영의 입에서 듣기 힘든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분노와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도 채찍을 든 인영과 그는 생각 이상으로 친밀한 사이임이 분명했다. 하나 다음 순간에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채찍을 든 인영을 베어 넘긴 검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와 그대로 그의 가슴마저 관통해 버린 것이다. 창을 든 인영은 진산월을 쳐다보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진산월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결코 중원의 말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창을 든 인영의 눈에서 급격히 신광이 사라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진산월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짧은 순간에 이십 명에 가까운 인원을 도륙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는 제일 마지막에 쓰러진 창을 든 인영과 채찍을 든 인영을 잠시 내려 보더니 이내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비록 달빛이 흐리기는 했으나 그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고통에 가득 일그러진 그 얼굴들은 몇 년 전에 보았던 서장인(西藏人)들과 유사한 용모였다.
동산을 지나자 곧 낮은 지붕에 창문이 없는 제심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적어도 제심전의 겉모습은 얼마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나 전에 없던 동산이 생겨난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제심전에 들어가는 방법이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진산월에게는 차분히 생각하거나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동산의 매복을 모두 해치운 것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길어야 일각(一刻) 정도면 동산의 매복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그 안에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추호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즉시 제심전으로 가서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는 암호가 바뀌었다 할지라도 인적을 느끼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을 것이다.
똑똑똑…. 똑똑!
문을 두드린 후 진산월은 제심전의 짙은 그늘 속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벽의 한쪽이 갈라지며 암문(暗門)이 드러났었는데 지금은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진산월은 그 자리에 꼼짝도 없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반각(半刻)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제심전의 한쪽 구석이 살짝 열리며 조그마한 구멍이 나타났다. 그 구멍은 사람의 머리 하나가 간신히 들락거릴 정도로 작았다. 그 구멍 사이로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그 눈은 날카로운 신광을 발하며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하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진산월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눈의 주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느낀 듯 황급히 창문을 닫으려 했다. 하나 진산월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진산월은 허공을 격해 한 쌍의 눈 사이로 지풍(指風)을 날림과 동시에 축골공(縮骨功)을 전개해 몸을 작게 축소한 후 그대로 창문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도 순식간에 이어졌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뿌드득!
창문 안으로 들어간 진산월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느라 뼈마디 부딪치는 소르릴 냈다. 진산월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 앞에는 이마에 구멍이 뚫린 흑의인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자신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는지 두 눈에 당혹스런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곳은 아주 작은 방이었다. 반경이 한 장 조금 넘어서 혼자 머무를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기에는 비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의 한쪽에는 몇 개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밖의 신호에 따라 입구를 여는 장치 같았다. 진산월은 한쪽에 검은 철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가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뽑혀 나온 용영검이 섬뜩한 검광을 뿌려대더니 이내 어느 한 곳을 찔러 갔다.
“자… 잠깐만….”
다급한 소리와 함께 용영검이 향하던 곳에서 하나의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분명 겉으로는 평범한 벽면이었는데, 사실은 그 안에 교묘한 장치가 설치되어 한 사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흑의인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영검을 계속 찔러 갔다.
팟!
흑의인은 이제 죽었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마혈(痲穴)을 점하는 것을 보고 놀란 눈을 부릅떴다.
‘마… 맙소사! 검… 검기로 점혈을 하다니…!’
흑의인은 이런 검도(劍道)의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기에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괴인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냉정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에 아직도 사람들이 갇혀 있소?”
흑의인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전신이 빙굴(氷窟)로 빠진 듯 온몸이 떨려 왔다.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른 고수만이 발출하는 무형지기(無形之氣)에 심혼이 압도당한 것이다.
“그… 그렇소.”
“몇 명이나 남아 있소?”
“칠팔 명쯤 되오.”
얼마 전에 진산월이 왔을 때는 이십 명쯤 되는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인원이 다른 곳으로 빼돌려졌거나 죽었다는 말인데, 둘 중 어느 것도 진산월에게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예의 무덤덤한 시선으로 흑의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흑의인은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이미 마혈을 제압당해 무공을 끌어올릴 수 없는 그로서는 절대고수의 무형지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무… 무엇을 알고 싶은 거요?”
흑의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묻자 그제서야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의 기관장치를 아는 대로 말해 주시오.”
흑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전부는 모르오.”
“그건 기대하고 있지 않소.”
흑의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지하뇌옥의 기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흑의인의 말마따나 그가 알고 있는 곳은 지하뇌옥의 입구 부근까지였다. 그 안은 그도 거의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산월보다 오히려 아는 것이 없었다. 진산월은 흑의인의 수혈(睡穴)을 짚어 재운 후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왔을 때는 지하뇌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철문을 열고 기다란 통로를 지나면 자연히 뇌옥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아마도 계단을 없애고 완만한 경사를 지닌 통로로 대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길게 이어져 있는 통로는 괴괴한 어둠에 잠겨 흡사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보는 것 같았다. 흑의인의 말로는 이 통로에는 모두 다섯 가지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고 무서운 것이어서 그들도 기관이 설치된 후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단지 처음 기관을 설치했을 때 그 위력을 시험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대략 어떤 기관들이 설치되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관은 통로의 입구에서 삼 장쯤 되는 곳의 바닥에 설치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여타의 바닥고 똑 같은 것 같았지만, 그곳을 밟게 되면 반경이 장 부근이 통째로 무너지며 함정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그 부근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첫 번째 관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하나 두 번째부터는 그다지 수월하지 않았다. 두 번째 기관은 오 장에 걸쳐 펼쳐져 있었는데, 사람이 지나가면 양쪽 벽면에서 수백 개의 철전(鐵箭)이 쏘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철전은 특수한 강철로 만든 것이어서 일단 격중되면 호신강기(護身?氣)라도 그대로 꿰뚫어 버리는 살인적인 위력이 있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열 번 가까이 휘두르고 나서야 그 화살비 속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같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거의 직각으로 꺾여 있는 통로가 바로 그곳인데, 바닥을 밟기만 해도 강침(鋼針)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강침은 한철(寒鐵)에 오금(烏金)을 섞어 만든 것으로, 극독(劇毒)이 발라져 있어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가는 일 장 높이에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무형은사(無形銀絲)에 전신이 난자당하게 되는 것이다. 뚫고 나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강침과 무형은사 사이의 약 여덟 치 높이의 공간을 날아가는 뿐이었다. 그런데 통로 자체가 직각으로 꺾여 있으니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해도 단숨에 통과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한 번은 바닥이나 벽면에 발을 대어야 하는데,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벽면에도 강침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 피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진산월은 한차례 숨을 고른 후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스읏!
그의 신형은 허공을 유영(遊泳)하는 비조(飛鳥)처럼 유연한 모습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다 통로를 지나 몸이 거의 벽면에 닿을 정도가 되자 진산월은 용영검을 뽑아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직각의 통로를 향해 세차게 집어던졌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던져진 용영검을 쫓아 한 줄기 유성(流星)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이 수법은 검을 던진 여세를 빌어 몸을 날리는 것으로, 검수비행(劍隨飛行)이라 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검을 던지는 속도가 가공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몸이 검세를 탈 정도로 가볍지 않으면 불가능한 신법이었다. 순식간에 진산월의 신형은 직각으로 꺾인 통로를 지나 바닥에 내려섰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진산월의 몸이 바닥에 닿자마자 갑자기 앞의 짙은 어둠 속에서 시퍼런 창날 다섯 개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이 통로에 설치된 다섯 개의 기관 중 가장 무서운 오귀수혼(五鬼搜魂)이었다. 이 기관을 설치한 자는 침입자가 진산월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최악의 살수를 배치했던 것이다. 검수비행은 빠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수법이다. 자연히 검수비행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기관을 돌파했을 때는 자신의 전력을 이끌어 최고의 속도를 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다섯 개의 창이 정면에서 쏘아져 들어오니 어느 누구라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하기는커녕 자신이 무엇에 당하는지도 모르고 쓰러질 가능성도 높았다.
진산월조차 지금 순간만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오귀수혼의 관(關)은 흑의인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막연히 세 번째와 네 번째 관문을 지나면 마지막 관문이 나타난다고만 설명했던 것이다. 막 그의 몸이 다섯 개의 창에 꼬치처럼 꿰뚫릴 순간, 진산월의 신형이 갑자기 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파파팟!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다섯 개의 창날이 텅 빈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뒤이어 진산월의 몸이 다시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진산월은 천근추(千斤墜)의 공력을 끌어올려 바닥을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비록 창망중에 순간적인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진산월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조금 전의 상황은 흉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돌로 만든 바닥에는 그의 몸이 파고들었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빠져 나온 구멍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관을 설치한 자는 틀림없이 엄청난 무공의 고수일 것이다.’
오귀수혼은 절세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낸 기관이었다. 자기 자신이 그 정도 수준의 고수가 아니라면 아무리 뛰어난 기관의 천재라 할지라도 이런 기관을 생각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존휘일까? 아니면 그의 배후 세력에 있는 누군가일까?’
뛰어난 무공에 이 정도 기관을 만들어 낼 두뇌를 가진 자라면 실로 두려운 능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문득 혹시 그 사람이 창(槍)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설치되었던 낙백삼창관이나 지금의 오귀수혼 모두 창을 이용한 기관들인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석문(石門)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지하뇌옥의 입구가 나타난 것이다. 진산월은 천천히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