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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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4화


제 159장 월하빙인(月下氷人)

호원무사들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남삼을 입은 유순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낙일방은 그 중년인이 일전에 천봉금의 고수들과 함께 종남파로 찾아온 적이 있는 인들임을 알아보았다. 남삼중년인의 뒤에는 지일환이 무언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귀하는 종남파의 문하도 아닌데 왜 굳이 이곳에 들어가려는 거요?”

호원무사 중 우두머리가 싸늘한 음성으로 쏘아붙였으나 남삼중년인은 넉살좋게 웃었다.

“허허…..그러는 당신은 이곳의 주인도 아니면서 왜 굳이 내가 들어가려는 걸 막으려는 거요?”

호원무사는 남삼증년인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어 되묻자 약이 올랐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신은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시비를 걸고 있는 거요?”

“어디긴, 강호에서 명문세가로 이름이 높은 이씨세가지. 그리고 시비는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걸고 있는 거 아니오? 종남파 장문인을 긴히 뵈올 일이 있어 찾아가는데 무작정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아무리 이곳이 이씨세가라 해도 엄연히 초대를 받고 온 손님에게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 있단 말이오?”

남삼중년인의 조리 있는 언변에 우두머리 무사는 약간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기저기서 사림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기웃거리고 있어 자칫하면 예상치 못했던 소동이 벌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총관인 갈종의에게서 종남파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되도록이면 주위에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일을 진행시키라는 추가 지시가 있었다.

우두머리 무사는 종남파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으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남삼중년 인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그의 심정을 짐작했는지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위에서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남의 명령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구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편의를 봐주면 안 되겠소?”

우두머리 무사는 그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에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귀하를 보낸 사람이 누구요?”

남삼중년인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나는 천봉궁의 부탁을 받고 왔소”

우두머리 무사는 흠칫 놀랐다.

“그들이 무슨 일로 귀하를 종남파 장문인에게 보낸단 말이오?”

우두머리 무사의 질문은 자칫 생각하면 남의 문과의 기밀을 알아내려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으나, 남삼중년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에게만 솔직히 말해 주겠는데‥‥ 그들은 나에게 월하빙인(月下氷人)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소”

“월하빙인?”

“쉿‥‥‥ 목소리를 낮추시오”

우두머리 무사는 깜짝 놀랐다가 남삼중년인이 질색을 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남삼중년인은 질책하는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만한 일로 왜 그렇게 놀란단 말이오?”

“아니‥‥월하빙인이라면‥‥‥그러니까 천봉궁에서 당신에게 중매를 부탁했단‥‥‥”

“글쎄 목소리를 낮추라니까.”

우두머리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결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리듯 물었다.

“장문인이 아니라 그의 사제요”

우두머리 무사의 뇌리에 조금 전에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젊은 종남파의 고수가 떠올랐다 확실히 드물게 보는 미남자 중의 미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그 정도 미남이라면 천봉궁의 팔선자가 아무리 당대의 기녀(奇女)들이라고 해도 혹하러 않을 수 없겠지.’

남삼중년인은 슬쩍 자신의 뒤에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 지일환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건 혼인 예물이오. 이런 일을 꼭 큰소리로 떠들어야겠소?”

확실히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이런 일은 가급적 소문나기 전에 은밀하게 처리하는 게 상례었다. 만에 하나 한쪽이 거절하여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한쪽은 창피막심한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 무사는 일이 참 공교롭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남삼중년인이 간곡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비켜섰다.

“사정이 그러니 할 수 없구려. 그런데 천봉궁의 어느 선자인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구려. 나중에 종남파로 가도 될텐데 굳이 본가에서 중매인을 보내다니‥‥‥”

남삼중년인은 히죽 웃었다.

“그러길래 딸아이는 공들여 키워 봤자 남의 품속으로 훌훌 날아가 버린다고 하지 않소? 당신도 나중에 딸을 키워 보면 알게 될 거요”

“흐흐…… 나는 아들놈 하나뿐이오”

“다행이구려”

남삼중년인은 그에게 고개를 까닥거린 후 지일환을 돌아보았다.

“물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게.”

지일환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두 사람은 호원무사들을 지나 종남파의 숙소로 들어섰다. 그들이 문을 열고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낙일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외눈박이 동중산이 빙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말솜씨가 대단하구려.’

남삼중년인도 마주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비천호리만하겠소? 그런데 낙 소협은 어디 있소? 아까 보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동중산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분은 자신에게 중매인이 왔는데 태연히 앉아 있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하오”

남삼중년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생긴 것도 곱상하더니 옥면신권이란 별호가 무색하군. 너무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시오”

동중산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역시 혼사 운운한 것은 연막이었소?”

“아주 없는 얘기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구 확실히 천봉선자 중에서 낙 소협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중매인을 보낼 정도는 아니오 단지 이분, 지 형이 이씨세가 무사들이 이곳의 출입을 통제하고있다고 해서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었을 뿐이오”

그제서야 동중산은 일의 추이를 짐작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과연‥‥‥ 호반유객의 지략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여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려.”

남삼중년인, 이동정은 움찔했다.

“나를 알고 계시오?”

“일전에 본파에서 보았을 때 관심이 있어서 나름대로 알아보았소 호반유객이라면 천하제일의 신비인인 변신봉황 이 대협의 하나뿐인 동생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소?”

이동정은 한 대 맞은 듯한 얼굴로 울상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일환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 같군. 참, 지 형 무거운데 이리 가져와서 내려놓으시오”

지일환이 붉은 보자기로 싼 물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동중산이 다가왔다.

“이건 뭐요?”

이동정은 히죽 웃으며 보자기를 풀었다.

“뭐긴. 이곳에 갇혀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까 봐 요깃거리를 가져왔소”

풀어 보니 과연 그 안에서 몇 가지의 요리와 술 한 병이 나봤다.

동중산은 이 음식 보따리를 혼인 예물이라고 속여 들고 들어온 이동정의 넉살좋은 모습을 떠올리고는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허허‥‥ 그렇지 않아도 출출했던 참인데 잘되었군.”

그때 대청에서 내실로 향하는 문이 열리며 진산월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뒤에는 낙일방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이동정의 말을 모두 들었는지 얼굴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굳어 있었다.

이동정은 웃음보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그를 향해 포권을 하고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이어 그의 시선은 지일환에게 향했다.

“수고해 주어서 고맙소”

지일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한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냥 조용히 나가서 천봉궁의 숙소로 갔더니 정 소저께서 이 대협을 보내 주셔서 따라왔을 뿐이오”

이동정이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정 소저가 따라갈 필요 없다며 더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해도 부득부득 쫓아온 사람이 마치 억지로 끌려온 것처럼 말하는구려.

지일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우물거리고 있자 동중산이 눈치 빠르게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정 소저께서 일부러 보낸 음식이니 진미(珍味)일 게 분명합니다. 장문인께선 우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거절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동중산이 술을 따르자 은은한 술 향기가 퍼져 나오며 호박색 액체가 술잔에 담겨졌다. 진산월은 천천히 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여아홍(女兒紅)이로군’

여아홍은 혼인(婚姻)을 상징하는 술이었다.

명문기에서는 집안에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뒤뜰에 술항아리를 묻어 둔다. 나중에 여자아이가 커서 혼인을 할 때가 되면 뒤뜰에 묻어 둔 술항아리를 꺼내어 축하주로 쓰는데, 그것을 여아홍이라고 한다. 오래 묵혀 둔 술이기 때문에 자연히 술맛이 좋아서 나중에는 누구나가 즐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혼례 때는 꼭 여아홍을 쓰는 것이 상례였다.

혼인 예물이라며 가지고 온 술이 여아홍이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무언가 은밀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원래 혼인에는 육례(六禮)라는 단계가 있다. 납채(納采), 문명(問名), 남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이 그것인데, 지금처럼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청하는 것을 납채라고 한다.
납채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하는 것으로, 기러기나 붉은 명주를 예물로 사용한다. 공교롭게도 음식을 싼 보자기는 붉은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안주 중에는 기러기를 연상케 하는 삶은 닭도 있었다. 게다가 술마저 여아홍이됐으니 비록 여자측에서 보내기는 했으나 단순한 요깃거리라고 하기에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동중산도 이 점을 눈치 챘는지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으나, 순진한 낙일방만이 아무것도 모르고 음식을 넙죽넙죽 집어먹고 있었다.

“이거 상당히 맛있는데요. 천봉궁에 솜씨 좋은 숙수(熟手)가 있는 모양입니다.”

마침 시장했던 낙일방이 양볼이 미어터져라 음식을 집어넣으며 말하자 동중산과 지일환은 폭소라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이 이상하게 변 했다.

이동정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에게 술을 따랐다.

“숙수가 아니라 여섯째 선자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오 한 잔 받으시오”

“어? 그래요? 육선자(六仙子)가 누구더라?”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동정이 내민 술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 술맛도 좋군. 예전에는 본파에도 이런 좋은 술이 많았었는데‥‥‥ 이번에 산으로 들아가면 술을 좀 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문사형!”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하자꾸나.”

진산월이 이동정에게 말을 돌리지 많았다면 이동정도 더이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엄 소저도 합류한 모양이구려. 엄 소저는 언제 왔소?”

이동정은 웃음을 참느라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허험‥‥‥ 엄 소저는 어제 서안에 왔습니다. 밤늦게 도착하셨기 때문에 연회에 참석치 못해서 진 장문인께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고 안부의 말씀을 전하더군요”

그제서야 낙일방은 이동정이 말한 육소저가 남봉(藍鳳) 엄쌍쌍(嚴雙雙)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뇌리에 문득 몇 년 전에 보았던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아무리 떠올려도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나치 않았다. 워낙 짧은 순간에 만났던 여인인지라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기억 나는 것이라고는 떠날 때 자신들에게 보냈던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 담긴 영롱한 눈망울 뿐이었다.

‘천봉선자는 모두 콧대가 높고 오만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음식 솜씨가 좋은 여자도 있군. 그러고 보니 그녀는 그래도 제법 예의를 아는 여자였어.’

그녀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자 다른 천봉선자들과는 달리 차분하고 수줍음 많은 여인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하나 그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종남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있었다. 삼년 전에 잠깐 보았던 여인에 대한 인상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낙일방의 무심함과는 달리 진산월은 일이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복잡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쌍쌍은 과거에 신목령의 습격으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가 종남파의 도움으로 구원받은 여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준수한 낙일방에게 흠모의 눈빛을 여러 번 보냈으며, 진산월은 나중에 다른 천봉선자들의 말을 듣고 그녀가 낙일방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삼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가 그런 감정을 유지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서안까지 와서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까지 보내 올 정도라면 단순한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문제는 낙일방이 여인 관계에 거의 무지(無知)하다는 것이었다.

무지할 뿐 아니라 무심하기도 해서 간혹 그에 게 추파를 보내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기분 나빠 하고는 했던 것이다.

엄쌍쌍이 이토록 분명한 호감의 신호를 보내 왔는데 낙일방이 그녀의 성의를 무시해 버린다면, 그녀는 몰라도 자존심 강한 천봉궁의 다른 인물들이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 자칫하면 그로 인해 천봉궁과 원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급한 것은 이세적의 죽음에 관한 일이다’

진산월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동정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 소저는 이번 일을 어렇게 보고 있소?”

진산월이 정소소의 의견을 묻는 형식을 취했으나, 그것은 이동정의 생각을 물어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소소가 이동정을 보낸 것은 곧 이동정의 생각이 자신과 같음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동정은 주저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취미사 혈겁의 흉수로 이존휘를 지목하게 된 경위부터 그를 추궁하기 위해 소림과 화산, 개방의 고수들이 서안으로 왔다가 암습을 당하게 된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파에 첩자가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으며, 미처 이존휘를 추궁하기도 전에 이세적의 죽음으로 사태가 급전직하(急轉直下)되어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운 미궁(迷宮)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소상하게 밝혔다. 이어 그는 오전에 이세적의 시신을 조사한 일과 그때 논의된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세세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어젯밤에 벌어진 이세적의 즉음에 이존휘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이존휘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존휘가 이번 일을 사전에 계획한 것이라면 그때 누군가를 함정으로 몰아넣었어야 했는데, 그는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종남파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

“이존휘는 심계가 치밀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존회가 종남파를 목표로 이번 일을 벌인 것이라면 허술한 면이 너무도 많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선 그는 이세적의 죽음에 종남파나 진 장문인이 관련되어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또 그럴 의향도 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비록 무사들로 하여금 출입을 통제했다고 해도 이곳을 감시하는 방비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

“‥‥!”

“그렇다고 종남파 외에 특별한 누군가를 흉수로 지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시 나는 처음부터 우리가 이번 사건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

모처럼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세적의 죽음이 이존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이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종남파에 대한 이존휘의 어설픈 대응으로 보아 이존휘도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종남파에게 손을 쓸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면 ‥‥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종남파는 상당한 곤궁에 빠져 있을 겁니다. “

낙일방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차례 그를 쏘아보았으나,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지 담담한 눈으로 이동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동정은 강호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하고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진산월의 눈빛을 받자 기분이 묘해졌다. 당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한때는 삼절무적이라 불리며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었다고 하더니 확실히 그렇군.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이와 같은 침착함은 확실히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

이동정은 자신이 진산월을 만나겠다고 할 때 정소소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호에서 어떤 소문이 퍼져 있든, 진 장문인은 용의주도하고 심계가 깊은 사람이에요 그를 절대로 경시하지 마세요

이동정은 그녀의 당부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동정은 처음부터 진산월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을뿐더러 그에 대해서는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삼년 만에 무너져 가는 문파의 별 볼일 없는 장문인에서 당대 무림을 위진(威震)시키는 절대의 고수가 된 인물을 어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지금 보니 그녀의 말에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진산월은 단순히 무공만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침착 했으며, 어지간한 일에는 한 점의 동요도 없는 굳건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말을 아꼈다.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짤약한 질문을 한번 던졌을 뿐 자신의 의견을 함부로 밝히지 않았다

마음 씀씀이가 깊은 사람이 말까지 아낀다면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심계와 언변, 배짱이 좋아 삼절무적이라고까지 불했던 인물이 아닌가?

이런 사람을 적(敵)으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동정은 자신이 운(運)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이존휘로서는 불운(不運)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동정은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정소저는 이존휘가 무언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제가 알 수 없는 건 이존휘가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종남파를 감시하기 시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용의주도하여 꼬리를 잡기 힘들었던 그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어설프고 허술하게 말입니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세적이 단 일검(一劍)에 살해당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이 일대에서 그 정도의 검법을 익힌 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소?”

“그야‥‥‥‥”

이동정은 말을 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서안이 비록 기인이사들이 많고 강호의 거대문파들이 도처에 있다고 해도 이세적 같은 절정고수를 단 일검에 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검법을 가진 사람이 결코 많을 리 없었다. 그중에서도 현재 이씨세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던 더더욱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화산파의 매장원이었다. 하나 매장원은 익히고 있는 검법의 유형이 이세적을 죽인 흉수가 쓴 살검(殺劍)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어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문득 이동정은 매장원보다 오히려 더욱 뛰어난 검법의 소유자를 한 사람 떠올리게 되었다. 그 인물은 일단 검을 쓰면 주위를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고, 실제로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여 당금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진산월은 이동정의 얼굴이 점차로 굳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존휘는 그 검흔(劍痕)을 보고 나를 의심하는 것 같소. 그것으로 볼 때 이존휘가 처음부터 이번 일을 계획하지 않았을 거라는 당신의 추측은 맞다고 생각하오”

이어 진산월은 초가보의 배후 조직이 이씨세가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심증(心證)을 얻게 된 경위부터 지일환을 이씨세가의 후원에 있는 뇌옥에서 두 번씩이나 구출한 일에 대해 담담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었다.

이동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의 말이 모두 끝나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동안 어딘가 톱니 바퀴의 아귀가 맞지 않은 것처럼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제 진 장문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전후 사정을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겠군요”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이동정은 평소의 여유 있고 낙천적인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진지하면서도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을 일으킨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몰라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그의 목적이 혹시 신목령과 천봉궁을 서로 싸우게 하여 삼잔(相殘)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가 그린 그림은 더욱 거대하고 치밀한 것이었군요”

“이존휘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이존휘가 진장문인의 말씀대로 초가보의 배후와 연관이 있다면 필시 서장(西藏)의 세력과도 끈이 닿아 있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취미사 혈겁은 단순히 소림이나 화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중원무림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 가서 그 힘을 소진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취미사에서 비록 화산파와 소림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살해당했다고 해도 그건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취미사 혈겁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보십시오 처음 서안의 한구석에서 벌어진 일이 섬서성은 물론이고 강북무림 전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특히 취미사 혈겁말고도 검보의 정예인 해천팔검이 실종된 일이나 개방의 서안분타주인 소방방이 급사한 일 등이 계속 벌어져서 사건이 확대 일로에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이세적이 살해당함으로써 이제 한바탕의 피바람을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세적의 죽음은 이존휘와 관계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렇습니다. 하게만 그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세적의 죽음은 끊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존휘가 모든 일을 다 안다고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동정의 마지막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행히 진산월은 이런 식의 대화에는 누구보다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이존휘가 이번 일의 주모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보시오?”

이동정의 눈가에 언뜻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 속뜻을 꿰들어 본 진산월의 예리함에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던 것이다.

“만약 이존휘의 배후에 서장무림이 있다면 그가 이번 일을 모두 총괄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라고 봅니다. 취미사 혈겁 자체는 이존휘가 주도했겠지만, 전체적인 틀을 짜는 일은 다른 자가 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진산월은 이동정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존휘의 나이는 자신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가 아무리 천부적으로 심계가 깊고 서안 제일의 명문가의 후예라고 해도 이번 일을 모두 계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가보가 생긴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넘는데, 이존휘가 열 살 때부터 그 일을 지시 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진산월의 시선이 이제껏 아무 말도 않고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중산에게로 향했다.

“중산. 네가 보기에 이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으냐?”

이런 시기에 진산월이 동중산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진산월이 동중산을 얼마나 신임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이동정 또한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원래 종남파 같은 역사가 오래된 명문정과일수록 신분에 대한 처우는 엄격한 법이었다. 사문의 어른 앞에서는 허락을 받기 전에는 다음대로 앉을 수도 없고 식사를 하거나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문파의 장문인이 중요한 안건에 대해 아랫사람의 의견을 물어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껏 아랫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시를 받거나 수집해 온 정보들을 보고하는 일 정도였다.
동중산은 잠시 외눈을 반짝이며 숨을 고르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가 생각하기에 이존휘가 취할 행동을 예측하려면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서가 필요합니다.”

진산월은 계속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동중산의 말이 이어졌다.

“우선 이존휘는 이세적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들째로는 이존휘가 초가보의 배후 세력에 속한 인물일 것, 셋째로는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이며, 천봉궁을 비롯한 소림과 화산. 개방에서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 마지막으로 이존휘는 혼자가 아니며 상당수의 믿을 만한 수하들을 가지고 있을 것.”

동중산이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이동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중산이 말한 것들은 하나같이 현재 서안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아울러 지금까지의 조사로 가장 사실에 근접해 있다고 믿고 있는 사항들이었다.

“그 전제 조건들이 확실하다면 앞으로 이존휘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부친인 이세적을 죽인 흉수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고, 둘째는 초가보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뒤를 추적하는 본파를 정리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취미사 혈겁을 원래의 목적대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동정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이며,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존휘가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를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일이 될 것 같소.”

동중산은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세 가지는 모두 다른 일이지만, 일맥상통하는 연결고리가 하나 있소이다.”

이동정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바로 본파의 장문인 이시오.”

이동정은 머리를 쓰는 면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기 머리가 둔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 장문인이 공통점이란 말이오.”

동중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들어 보시오 이존휘는 이세적을 죽일 만한 검술의 고수는 본파의 장문인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가 본파를 감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또한 그는 초가보의 복수 때문에라도 언제고 한번은 본파와 결판을 내어야 하는 실정이오.”

“그 점은 이해하겠소. 그런데 취미사 혈겁과 진 장문인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현재 본파는 서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본파의 중심인물은 누가 무어라 해도 장문인 이시오. 그리니 만약에 장문인의 신상(身上)에 무언가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본파는 삽시간에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며, 서안 일대의 세력도 힘의 공백이 생겨 이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 것이오. 당신이 말한 대로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을 일으킨 목적이 무림을 최대한 혼란케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소?”

이동정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동중산의 말은 정확하게 사태의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진산월은 이존휘가 이루려는 목적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건 현재의 상황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존휘가 진산월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의 목적은 대부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이 이세적을 죽인 흉수건 아니건, 이존휘가 그를 흉수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동정은 한동안 물끄러미 동중산의 외눈을 바라보았다가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헛살았군. 나는 정말 헛살았어.”

이번에는 동중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눈앞에 태산이 있어도 높은 줄 모르고, 바다가 있어도 깊은 줄 몰랐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허탈해서 하는 소리요.”

그제서야 동중산은 이동정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그건 아마도 네가 자신보다 좀 더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오. 당신에게 이번 일은 모처럼 만나는 흥미있는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몰라도 우리에겐 생존(生存)이 달린 문제요.”

이동정은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중산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소. 하지만 나같이 머리 하나만 믿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위안이 되지 않는구려. 오히려 너무 안이하게 매사를 판단해 온 나를 꾸짖는 소리로 들리오.”

“그럴 리가 있소? 이번에는 당신 의견을 들어 봅시다. 나는 이존휘의 다음 목표가 본파의 장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가 어떤 식으로 본파의 장문일께 위해를 가해 오리라고 보시오?”

동중산의 물음에 이동정의 얼굴이 진지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에 동중산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고, 음성에도 전에 없던 기백이 느껴졌다.

“이존휘가 진 장문인을 제거하려 한다면 막상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소. 우선 살수(殺手)를 보내 암습(暗襲)을 할 수도 있소. 하지만 그것에는 두 가지 결함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진 장문인 길은 절정고수를 쓰러뜨릴 만한 살수가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이오. 아마 깅호 전제를 뒤져 보면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존휘가 거느린 자들 중에서 그런 자가 있을지는 의문이오“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동증산의 뇌리 속으로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풍도라는 청년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동중산이 더 생각을 잇기도 전에 이동정의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는 그가 수하들을 보내 이곳을 감시하도록 했기 때문에 진 장문인이 이미 경각심을 느끼고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오. 솔직히 진 장문인이 경계를 하고 있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살수라 해도 암습을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소. 그런 면에서 봐도 이존휘의 이번 행동은 무척이나 경솔한 것이었소”

동중산은 그 점에는 수긍을 했다. 이존휘의 의중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수하들을 보내 이곳을 감시토록 한 것은 확실히 어설프고 성급한 일이었다.

“살수를 보내지 않는다면 또 어떤 방법이 있겠소?”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진 장문인을 이세적을 죽인 흉수로 몰아 공개리에‥‥‥ 흠‥‥‥ 처단하는 것이오”

‘처단’이라는 단어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낯짝이 두꺼운 이동정도 한차레 어색찬 헛기침을 토했으나, 낙일방만이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을 뿐 동중산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진산월 마져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동정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사용하기는 힘들 거요 진 장문인을 흉수로 몰아갈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가짜 증거를 조작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경과해 버렸소. 그럴 생각이었다면 오늘 오전에 군웅(群雄)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증거를 제시했어야 했는데 그는 시기를 놓쳐 버렸소.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말이오.“

다시 낙일방이 그를 노려보았으나, 이동정은 모른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존휘가 진 장문인에게 일 대 일의 결투(決鬪)를 신청하는 것이오. 핑곗거리야 만들면 한도 끝도 없을 테고, 비무(比武)형식을 취하면 진 장문인도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 그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증 하나요. 문제는‥‥‥“

이동정의 시선이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는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그가 진 장문인과 정면 승부를 하여 이길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겠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것도 그리 가능성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이존휘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기 전에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오”

이동정이 계속 의견을 말해 놓고는 자기 입으로 그것을 부정하자 듣고 있던 닉일방의 얼굴에 조금씩 짜증이 어렸다. 그때 동중산이 시의 적절하게 물었다.

“이제 대층 가능성이 떨어지는 방법은 다 나온 것 같은데, 당신이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때가 되지 않았소?”

이동정의 입가에 모처럼 엷은 미소가 어렀다. 유쾌하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동 형은 보면 볼수록 무서운 사람이오. 내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내 생각을 훤히 읽고 있으니 말이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말해 보시오”

“동 형도 이존휘가 쓸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을 거요”

동중산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한 가지 있긴 하오”

“그러니 각자의 생각을 글로 적어 동시에 펼쳐 보는 것이 어떻겠소?”

동중산은 이동정의 의중을 파악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누구 생각이 더 옳은지 가려 보자는 말이오?”

“허허‥‥‥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지만, 나의 작은 도락(道樂)이라고 여겨 주시오”

“도락이라‥‥‥ 아쉽게도 내겐 그런 도락을 즐길 만한 여유가 별로 없구려.”

이동정은 입맛을 다시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글로 적는 것이 번거롭다면 동시에 말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것도 못하겠소?”

강호에서 자신보다 훨씬 명성이 높은 이동정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동중산도 더 이상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좋소 그럼 천천히 셋을 센 후 같이 말합시다.”

이동정은 동중산의 마음이 바뀔까 봐 두려운지 재빨리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이독제독(以毒制毒)!”

“차도실인(借刀殺人)”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누가 먼저 할 것도 없이 빙그레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말한 단어는 달랐지만, 그 뜻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동정은 흡족한 듯 연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과연 동 형은 기꺼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오.

동 형은 이존휘의 칼(刀)이 될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오?”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내 경륜이 미흡해서인지 아직 뚜렷한 대상자를 생각해 내지 못 했소 당신은 어떻소? 이존휘를 위해 독(毒)이 되어 줄 자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아쉽게도 나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소. 모처럼 동 형을 눌러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구려.”

동중산은 이런 순간에까지 승부욕을 불태우는 이동정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동중산은 무공이 약하기 때문에 고수가 고수를 상대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이동정에게 이존휘가 써 올 방법을 물어 본 이유도 자신의 무공 실력으로는 미리 알지 못할 위험 요소들을 그를 통해 알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동정은 적어도 무공 방면에서는 동중산보다 그다지 나은 고수가 아님이 분명했다.

두 사람 모두 이존휘가 진산월을 상대할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면서도 이존휘가 사용할 패(牌)가 누가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강호 경험이 풍부했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녀야만 진산월 같은 절대고수를 상대로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존휘의 승부패를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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