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9화
제 175 장. 수상혈투(水上血鬪)
진산월은 차분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포위됐군.”
그 음성이 너무나 여유로워서 도망갈 곳도 없는 강물 위에서 수십 척의 배에 포위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동중산이 외눈을 반짝였다.
“보아하니 저녁때부터 강물 위에 떠 있던 거의 모든 화방들이 저들의 배인 것 같습니다. 저들이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한 게 분명하군요.”
양중초가 혀를 찼다.
“어쩐지 저녁에 아무리 화방을 구하러 돌아다녀도 모두 손님이 찼다며 거절을 하더라니……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생돈을 들여 배를 사야만 했소.”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가 이쪽으로 올 줄 알고 위수에 떠 있는 모든 화방들을 포섭해 놓고 있었다는 말인데, 누가 계획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철저하기 그지없습니다.”
동중산이 이번 일의 음모자에 대해 궁금해하자 진산월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철저할 뿐 아니라 상당히 집요한 인물이지.”
“장문인께선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누구인지 모를 것도 없다. 운문세가를 뒤에서 조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를 제거하려고 이런 일을 꾸밀 정도로 원한을 맺은 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동중산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이었으나, 낙일방이 손뼉을 탁 쳤다.
“아! 혹시 그자가 아닙니까? 삼년 전의 바로 그……”
동중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낙 사숙께선 짐작 가는 자가 있습니까?”
“신목령의 제자라는 조화심, 그자일 겁니다.”
“조화심이라면 옥면절정이라 불리는 신목령의 아홉 번째 제자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때 본파의 제자가 아니었으니깐 그 일을 모를 수밖에 없었겠군요.”
이어 낙일방은 삼년 전에 운자개가 조화심의 지시를 받고 천봉궁의 엄쌍쌍을 뒤쫓다 종남파와 시비가 벌어진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동중산은 무거운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장문인께서도 그자가 이번 일의 배후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자 외에는 특별히 이런 일을 할 만한 자가 없다.”
“조화심은 신목령의 고수이긴 하지만 조옥린을 암습한 신목령의 배반자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신목령의 위세를 빌어 운문세가나 다른 고수들을 부릴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그자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옥린의 말을 들으면 조화심은 서장무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이씨세가와도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
“이씨세가의 배후에 서장무림이 있는 게 거의 확실한 이상, 그들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서안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더 우리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동중산의 외눈이 횃불처럼 반짝였다.
“그렇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집니다. 이번 일은 동원된 고수들의 면면을 보아도 운문세가 혼자의 힘으로 동원했다고는 믿기 힘듭니다. 필시 운문세가 말고 다른 배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이라면 이해가 되는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양중초가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저들의 접근을 더 허용했다가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지도 모르겠소.”
진산월과 동중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쩌면 수십 개의 화방들이 십여 장 밖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화방 위에는 각종 병기와 활을 든 흑의인들이 배마다 십여 명씩 타고 있었다. 화방의 숫자를 적게 잡아도 거의 사오백 명의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것이다. 게다가 물 속에서 연신 파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수중으로 접근하는 무리들도 상당수에 달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종남산을 떠난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할 수 있다니…… 이들의 힘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구나.’
동중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호에 나오자마자 자신들을 노리는 손길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일을 헤쳐 나가야 할지 아득한 심정이었다.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진산월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은 당장의 일에 집중하도록 하자. 물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전흠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도 분발해야 할 게 아니냐?”
동중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일점의 두려움이나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동중산은 상대의 위세에 순간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초가보와의 절망적인 싸움도 이겨낸 자신들이 아닌가? 동중산은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시 단단히 먹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저들의 화살 공격에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맡기고 어떻게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것인지를 궁리하도록 해라.”
이어 진산월은 양중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양 보주께 부탁이 있소.”
“말씀하시오.”
진산월은 손풍과 유소응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을 안의 선실에 있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손풍과 유소응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진산월은 보다 안전한 선실로 그들을 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양중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그때 갑자기 진산월이 용영검을 휘둘렀다. 팟! 어둠 속에서 날아든 화살 하나가 용영검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이 시작인 듯 어두운 하늘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빨리 선실로 가 있거라.”
진산월은 손풍과 유소응이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뱃전에 선 채로 용영검을 휘둘렀다. 삽시간에 어둠 속에서 수십 발의 화살들이 날아왔으나 어느 것 하나 그의 검을 뚫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그때 배의 뒤에서도 화살이 날아오자 맹천익이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저쪽은 천익에게 맡기면 될 것이오.”
진산월이 힐긋 보니 맹천익이 언제 뽑아 들었는지 은빛이 감도는 기형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솜씨가 상당해 보였다. 화방들에서 날아온 화살 공격은 별 효과가 없었으나 양중초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저들이 화공(火攻)이라도 펼치면 조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양중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쓰게 웃었다.
“안 좋은 상상은 꼭 들어맞는다니까.”
양중초는 소맷자락을 세차기 내저었다. 쑤아앙! 그의 소맷자락에서 괴이한 음향이 울려 퍼지며 세찬 경기가 뿜어져 나왔다. 불화살들은 그 경기에 휩쓸려 헛되리 강물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낙일방이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뱃전에 우뚝 선 채로 불화살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한동안 네 사람은 배의 사방으로 날아드는 화살들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 네 사람 모두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이어서 위급한 순간을 없었으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진산월도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진력(眞力)이 고갈되고 말리라고 생각했는지 동중산을 향해 말했다.
“중산, 나뭇조각을 몇 개 구해 보아라.”
동중산은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나 배 위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배의 바닥을 뜯을 수도 없어서 동중산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선실의 휘장이 걷히며 중년미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쓰도록 하세요.”
중년미부가 내민 것을 본 동중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괜찮겠습니까?”
그녀가 동중산에게 건넨 것은 호화로운 장식이 있는 나무함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제법 귀해 보이는 것으로, 속에 패물(佩物)이나 장신구를 담는 함이 분명했다. 중년미부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신외지물(身外之物)일 뿐이에요. 속에 들어 있던 것은 모두 뺐으니깐 부셔서 사용하세요.”
동중산도 사정이 다급한지라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나무함을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부인.”
동중산이 손에 힘을 주자 나무함이 몇 개의 나뭇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동중산은 다시 한 번 중년미부에게 머리를 숙여 사례를 하고는 재빨리 진산월에게 다가갔다. 진산월은 여전히 용영검으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으면서도 귀로 모든 사정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중산에게서 나뭇조각들을 받아들자 중년미부를 향해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인의 친절에 감사드리오.”
중년미부는 조용히 웃었다.
“별 말씀을. 진 장문인의 진짜 실력을 보여 주세요.”
진산월은 피식 웃더니 서슴없이 뱃전을 박차고 강물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갔다. 짙은 어둠 속을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 거조(巨鳥)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어 신형이 물로 떨어지기 전에 그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던져 그 조각을 딛고 재치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는 삼십여 장을 날아 화방 중 하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단한 신법이구나.”
이 광경을 눈으로 훑고 있던 청삼중년인이 짤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신법이 저 정도라면 그의 검은 얼마나 뛰어날지 상상도 안 되는군.”
청삼중년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러더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중년미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굳이 선실을 나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소?”
중년미부 또한 아름다운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강호제일검객의 솜씨를 구경할 기회가 생겼는데 좁은 선실에만 있을 수는 없지요.”
“허허…… 그 심정은 이해하겠소.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보기는 힘들 것 같군.”
아니게아니라 진산월이 오른 화방에서 검광이 어른거리고 비명 소리가 거푸 터져 나왔으나 너무 떨어져 있어서 어떤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물론 상황 자체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 화방에서 비명 소리가 그침과 동시에 진산월의 신형이 다시 그 옆의 화방으로 날아가는 광경이 어스름히 보였던 것이다. 진산월이 몸을 날린 화방에서는 그가 오지 못하도록 화살을 쏘고 병기를 휘두르며 난리법석을 떨었으나 결국 그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크아악!”
삼십 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몇 사람이 검을 휘둘러 대항하는 듯하더니 곧 쓰러지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그 수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진산월의 신형은 다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화방으로 향했다. 양중초는 진산월이 화방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다른 화방으로 갈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해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거의 일검에 서너 명씩 쓰러뜨린다는 말이로군. 무공의 가공함은 물론이거니와 손속의 잔인함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들에게 화살은 날린 솜씨로 봐 흑의인들은 일류와 이류의 중간쯤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자신도 그들 정도는 단 일수에 서너 명쯤 격살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번이지, 지금처럼 수십 번이나 계속 그런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얼마 시간이 되지 않아 전면에 있던 화방들 중 절반 이상이 진산월의 손에 침몰해 버렸다. 그러자 상대들은 방법을 달리하기로 생각했는지 진산월이 올라탄 화방에서 가급적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하나 지금은 진산월이 발을 딛고 강물을 건너갈 충분한 나뭇조각들이 사방에 지천으로 있었다.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강물 위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신검무적인가요?”
어느새 선실을 나왔는지 중년미부의 옆에는 홍의여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홍의여인의 시선을 비조(飛鳥)처럼 화방과 화방 사이를 날아다니며 흑의인들을 쓰러뜨리는 진산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양중초는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살인귀(殺人鬼)로군요.”
짤막한 그녀의 말에 양중초는 피식 웃었다.
“실망했느냐?”
“그럴 리가요. 다만 소문에 듣기로는 신검무적은 대범하고 사람을 감복케 하여 일대종사(一代宗師)로서의 위엄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단순히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누군가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함부로 속단(速斷)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소저.”
두 사람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일방이 어느 사이엔가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채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준수하기 그지없는 낙일방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광망이 번뜩이고 있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구나.’
양중초는 낙일방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보고 내심 침음했다. 사실 강호에 낙일방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져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그의 준수한 용모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비록 초가보의 공봉이었던 신편 갈태독과 현음상인 냉구유를 이겼다고 해도 진짜 자신의 실력으로 이겼다고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의 나이로 보아 갈태독이나 냉구유와의 현격한 내공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양중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본 낙일방의 내공을 그에 대한 소문이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홍의여인은 낙일방을 보자 검은자위가 많은 두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지요?”
낙일방은 그녀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서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웃어 보이자 얼굴을 붉게 물들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대하자 마치 거대한 두 개의 태양이 자신의 눈앞에서 이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낙일방은 그런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할 때는 좀더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하시오. 일단면만 보고 함부로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란 소리요.”
홍의여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군요. 진 장문인에 대해 경솔하게 말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어요.”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양중초와 중년미부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이었다. 홍의미녀가 평소에 얼마나 오만하고 자부심이 강한지 똑똑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녀가 낙일방의 말에 선뜻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사실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낙일방은 홍의미녀가 의외로 순순히 머리를 숙이자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홍의여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낙 소협의 말씀에도 어폐가 있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지내지 않는 한은 결국 그 사람의 언행(言行)이나 생활 습관 등 어느 한 부분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요?”
낙일방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 그건……”
“제가 진 장문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지금 그분이 보여 주는 모습밖에는 없어요. 그리고 그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피비린내 하는 살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군요.”
홍의여인의 딱 부러지는 듯한 말에 낙일방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이번에 낙일방은 쉽게 입을 열지 않고 홍의여인을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미모에 혹해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그는 무언가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홍의여인은 깊은 상념에 잠긴 낙일방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생각에 골몰해 있는 모습은 여인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을 만큼 매혹적인 것이었다. 다행이 낙일방은 이내 상념에서 깨어나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소저의 말씀은 잘 알겠소. 하지만 단 하나의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오. 당분간이나마 우리가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앞으로 본파의 장문인을 좀더 지켜보신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 거요. 그때 가서 소저의 판단이 어떤지를 말씀해 주시오.”
홍의여인은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두 남녀의 대화가 끝이 날 즈음, 주변의 싸움도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들이 탄 배의 앞을 가로막았던 화방들은 대여석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어 버렸고, 뒤에서 화살을 날리며 쫓아오던 배들도 추격을 포기했는지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강물 속에서도 시체들이 속속 떠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중의 격전도 마무리되는 중임이 분명해 보였다.
“푸우……”
배에서 멀지 않은 강물 위에 한 사람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전흠이었다. 동중산은 배에 오르는 전흠을 황급히 끌어올렸다.
“전 사숙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흠의 벌거벗은 상체에는 몇 군데의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긴 했으나, 다행히 치명적인 곳은 없었다. 전흠은 몹시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다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망할 놈들이 물 속에 많이도 숨어 있더군…… 당분간은 물 속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졌어.”
전흠은 벗은 상체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등뒤를 가리켰다.
“이쪽을 좀 봐주게. 아까 등뒤를 분수자(分水刺)에 찔렸는데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더군.”
동중산을 깜짝 놀라 전흠의 등을 살펴보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입니다.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으면 척추가 잘려질 뻔했습니다.”
“그런가? 어쩐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아프더라니……”
전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문인은?”
동중산은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반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쪽에 오고 계십니다.”
전흠은 동중산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물위에서 하나의 인녕이 유연한 신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강물 위에 잔뜩 떠올라 있는 배의 파편들을 밟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왠지 신비스러워 보였다. 전흠은 툴툴거렸다.
“제길…… 누구는 생쥐 꼴을 하고 물에 쫄딱 젖은 채 꼴이 말이 아닌데 누구는 멋있는 행세는 혼자 다 하는군.”
진산월은 순식간에 수십 장을 지나 배 위로 내려서더니 전흠의 말을 들었는지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앞으로는 네가 강 위를 책임지도록 해라.”
전흠은 여전히 퉁명스런 표정이었다.
“일없소. 명색이 그래도 장문인인데 물에 빠져 허덕거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좀더 고생하는 게 낮지.”
그는 진산월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배의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튼 오늘 내 할 일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난 잠이나 자야겠소. 특별한 일 없으면 깨우지 마시오.”
그러더니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코를 골며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겉으로 말은 안 했으나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동중산은 전흠이 물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 놓았던 웃옷을 그에게 덮어 주었다.
“전 사숙께서 고초가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물에 떠오른 시신을 보니 물 속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을 상대한 것 같더구나. 워낙 성격이 강한 놈이라 내색을 안 했지만 죽을 위기도 여러 번 넘겼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진산월 자신도 오늘 삼십여 척의 화방과 백 명이 넘는 고수들을 쓰러뜨린 상태였다. 개중 부상만 당하고 살아난 자들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수가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도 그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운 듯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오늘 크게 살계(殺戒)를 열기로 결심하긴 했지만, 당초 예상보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자들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배 몇 척을 파괴하면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물러날 줄 알았는데, 끝까지 덤벼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과도한 살수를 쓰게 되었다. 나중에 물러날 때를 보니 진퇴(進退)가 분명하고 명령 전달이 잘 되어 있었다. 아마도 상당한 훈련을 거친 동일한 문파의 인물들임이 확실할 것이다.”
동중산은 외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하려면 적어도 몇 개의 문파가 연합을 하지 않으면 힘들 텐데, 장문인께선 이들이 같은 문파의 인물들이라고 보십니까?”
“그렇다. 여러 문파에서 끌어 모았다면 오늘처럼 체계적이고 단합된 행동을 보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섬서성에서는 이런 수준의 조직을 가진 방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저도 특별히 떠오르는 곳이 없군요.”
그때 양중초가 끼어들었다.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하오. 예전에는 확실히 이만한 인원을 가지고 있는 방파가 없었지만 지금은 한곳이 있소.”
동중산이 급히 물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흑갈방이오.”
동중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흑갈방이라면 동관 쪽에서 암약(暗躍)하는 흑도방파가 아닙니까?”
“그렇소.”
“그들이 비록 그 일대에서는 제일 큰 흑도방파라고 해도 운문세가에 비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건 귀하가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갈방은 확실히 강호의 흔한 흑도방파 중 하나에 불과했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소.”
“달라지다니요?”
“작년부터 그들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성장하더니 올해 들어와서는 섬서성 중남부의 흑도방파 스물일곱 곳을 모두 제압하여 명실상부한 섬서 제일의 흑도방파가 되었소. 조만간에 그들이 강북 전체의 흑도를 석권하리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오.”
동중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정도입니까?”
양중초의 표정에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내가 이번에 본보를 떠난 것도 단순한 여행만이 목적이 아니라 요즘 들어 무섭게 세(勢)를 확장하고 있는 흑갈방의 허실(虛實)을 알아보기 위한 것도 있소. 어쩌면 귀파에 무너진 초가보의 빈자리를 그들이 채울지도 모르오.”
그제서야 동중산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표정이 굳어졌다. 초가보는 지금 생각해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문파였다. 그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동중산조차도 가끔은 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양중초는 흑갈방이 그런 초가보에 비견될 만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중초는 강북무림의 최고 세력 중 하나인 삼월보의 수뇌 인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쓸데없이 허언(虛言)을 할 리가 없었다.
“이자들이 흑갈방의 수하들인지는 모르겠으나 흑갈방의 역량이라면 이 정도 고수들을 충분히 동원하고도 남음이 있소.”
“음……”
동중산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새삼 강호란 곳이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실감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방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곳이 강호였기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 문파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문파들조차도 언제 어느 때 허무하게 사라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초가보 같은 문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이 소요되었겠는가? 그런데 다시 또 초가보와 견줄 만한 거대방파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니 강호에서는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때 낙일방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종남산 아래에서 삼년 만에 정해 사형을 다시 만났을 때 흑갈방의 무리들이 습격을 해온 적이 있었습니 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무리들과 지금 무리들의 복장이 비슷한 것 같군요.”
문득 생각이 떠오른 진산월은 배 옆을 떠다니는 흑의인들의 시체 중 한 구를 허공섭물(虛空攝物)롤 끌어당겼다. 흑의인의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가슴에 붉은색 전갈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전갈 문양이 워낙 작았고, 주위가 어두웠던지라 미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막상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들이 흑갈방의 수하들임을 확인하게 되자 오히려 동중산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을 때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일단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운문세가는 그래도 오래된 명문세가인데 흑도방파인 흑갈방과 연계가 되어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일에 개입한 것이 운문세가 전부인지 아니면 운자개만인지도 확실치 않으니 성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단 이 곳을 벗어나서 좀더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진산월은 홀연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운문세가가 그들과 결탁을 했든 하지 않았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 아무리 그들의 세력이 강대하다고 해도 우리가 초지(初志)를 잃지만 않는다면 능히 그들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이 다.”
진산월의 말에 동중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기나긴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새벽이 밝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동터 오르는 여명(黎明)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말끔하게 거두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