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11화 (17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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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7권 재출강호(再出江湖)편 : 11화


제 177 장. 심야격변(深夜激變)

앞을 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밖으로 뛰어나온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촌장 집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왔습니다.”

동중산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진산월은 전흠과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중산과 내가 갔다 올 테니 너희들은 이곳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거라.”

이어 그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동중산과 함께 촌장 집으로 신형을 날렸다. 전흠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낙일방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만약의 사태란 게 뭐야?”

낙일방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릅니다.”

전흠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아직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서 있는 손풍과 유소응을 노려보았다.

“결국 우리보고 저 녀석들을 지키고 있으란 말이잖아.”

잠자다 말고 얼떨결에 따라 나왔던 손풍은 전흠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이 그때 전흠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풍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유소응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 모자란 잠을 마저 청했다.

하나 일단 잠이 깬 상태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손풍은 몇 번 뒤척거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기랄.”

그는 투덜거리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한 사람이 방문 앞에 등을 보인 채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뜻밖에도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뒤를 돌아보고는 손풍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더 자지 않고 왜 일어난 건가?”

손풍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지만 항상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는 낙일방이 그리 싫지 않았기에 자신도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잠이 오지 않는군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불안하기도 하고요.”

“장문인이 가셨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깨울 테니까 들어가서 자도록 하게.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지 않나?”

손풍은 운자개를 때리다가 다친 손이 아무는 통증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흔들리는 배에서는 더욱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모처럼 간만에 깊은 잠에 빠졌는데 깨어나게 되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 없었다.

“어차피 잠이 깨 버려서 쉽게 잠들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낙 사숙께선 안 주무십니까?”

낙일방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장문사형이 오시면……”

낙일방은 끝까지 말을 맺지 않았으나 손풍은 알아들었다.

‘정말 장문인을 끔찍이도 따르는구나. 나도 이렇게 따라 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은 특별히 마음을 터놓고 사귈 만한 친구도 없었고, 믿고 따르는 선후배도 없었다.

그저 함께 술 마시고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만 있을 뿐이었다.

손풍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낙 사숙께선 장문인을 좋아하시죠?”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하얀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이지.”

“왜 그렇게 장문인을 좋아하세요? 장문인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낙일방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는 장문인이 무서운가?”

“뭐 장문인이 겉모습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럽더군요.”

“지금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예전의 장문인은 정말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었어. 넉살도 좋았고, 항상 잘 웃었지.”

손풍은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낙일방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아련한 빛을 감돌고 있었다.

“그래, 그때의 장문인은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따로 없었어.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나보살(懶菩薩)이라고 불렀을까?”

“정말 장문인의 별호가 나보살이었습니까?”

“그렇다니까. 그때의 장문인은 마음씨 좋은 큰형 같았지. 항상 믿음직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감싸 줄 것 같은 사람…… 반면에 나는 성질 급한 사고뭉치였지. 마치 지금의 자네처럼 말야.”

낙일방의 하얀 이가 싱긋 드러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손풍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그렇게 사고뭉치입니까?”

“하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자신의 그런 모습이 개성 있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손풍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낙일방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나도 남자라면 잘못된 일을 참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보고도 참는다면 그건 남자로서 살아 있었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손풍은 참지 못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진짜 사나이 아닙니까?”

낙일방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네.”

“그럼 진짜 사나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진정한 남자란 참을 때 참을 줄 알아야 하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아무리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어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루어 내고야 마는 거야. 난 많은 실수와 후회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

“……!”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장문인이야. 장문인이야말로 참고 또 참았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느냐고 남들이 물어도 그냥 웃기만 했어. 나는 그때 장문인의 심정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지. 장문인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남자다운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손풍은 비록 낙일방의 말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가슴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는 솔직히 얼굴에 칼자국이 있고 늘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장문인이 항상 남에게 당하고 참기만 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두려워하는 장문인에게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장문인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낙일방의 말 또한 선뜻 공감할 수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장문인과 낙일방이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모르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자신이 보는 것은 이들의 현재 모습뿐이다. 이들의 과거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의 끝은 낙일방의 차가워진 음성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소응을 데리고 나오게.”

손풍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낙일방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게 굳어 있었다.

“빨리 소응을 데리고 나오게.”

손풍은 그 말에 실린 냉기에 놀라 황급히 방안으로 뛰어들어 유소응을 깨웠다. 유소응과 함께 방밖을 나오니 언제 일어났는지 전흠이 낙일방과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손풍과 유소응도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안색이 굳어졌다.

전흠이 낙일방과 시선을 교환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심상치 않지?”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사형이 우리에게 연락도 못한 것으로 보아 일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전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몇 놈이나 되는 거 같아?”

“제가 파악한 것은 일곱 명입니다.”

“나도 그래. 그중 몇 놈은 정말 만만치 않겠는걸.”

낙일방은 묵령갑을 낀 양손을 가볍게 주물렀다. 특별할 게 없는 동작이었는데도 왠지 강렬한 투기(鬪氣)가 느껴졌다. 전흠이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실력이 무섭게 느는군. 이제 나 정도는 상대로 안 되겠는 데?”

“그럴 리가요? 전 사형의 성라검법이 거의 절정에 달했다고 장문사형께서 칭찬하시더군요.”

전흠의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이 우두커니 서 있는 손풍과 유소응을 훑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저 두 녀석들은 어떻게 하지?”

“사형이 먼저 한 사람을 고르십시오.”

전흠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짤막하게 말했다.

“내가 소응을 맏지.”

낙일방은 손풍을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럼 손풍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손풍은 자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물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으나, 그나마 낙일방이 자신을 책임진다는 말에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흠에게 끌려 다닐 바에는 차라리 이곳에서 칼을 맞는 게 나을 것이다.

이제는 손풍과 유소응도 자신들이 있는 집 주위에 감도는 기이한 살기들을 알 수 있었다. 그 살기는 너무나 진득해서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의 몸에서 이런 지독한 살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전흠은 유소응을 손짓해 불렀다.

“소응, 이리 와라.”

유소응이 가까이 다가오자 전흠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소응은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전흠의 차가운 얼굴에 엷은 미소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도 겁먹지 않았구나. 역시 넌 자랑스런 본파의 제자다.”

유소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흠은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넌 내가 지켜 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유소응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병기를 가지고 있느냐?”

유소응은 품속에서 한 뼘쯤 되는 단도를 꺼내 들었다. 외할아버지인 부쿠 메르겐의 유품(遺品)이었다. 전흠은 유소응의 손에서 단도를 건네받아 단도집에서 뽑아 보더니 푸르스름한 검날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를 다시 유소응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 장문인을 찾으러 가자.”

전흠은 유소응의 작은 몸을 왼쪽 팔에 안은 채 어둠 속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유소응은 한 손에 단도를 들고 다른 손은 전흠의 허리춤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낙일방은 손풍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딱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말게.”

그러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흠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손풍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뒷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막 집의 대문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전흠과 낙일방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격전이 벌어졌다.

파앗!
어둠 속에서 전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것은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시퍼런 도광(刀光)이었다. 그 도광의 날아드는 속도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하나 전흠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어느새 뽑아 든 장검으로 맹렬하게 맞서 갔다.

까깡!
검과 도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하며 시퍼런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공격했던 인영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은 우람한 체구의 사내였다. 눈빛이 얼마나 살벌한지 짙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이 마치 인광(燐光)을 보는 것 같았다.

삼베옷의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차 도를 날렸다. 그의 도는 수비는 일체 없이 오직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공격만 있는 수법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고 매서워서 전흠은 처음부터 성라검법의 절초들을 펼쳐 그의 도에 맞서야만 했다.

삽시간에 그들은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사이에 전흠은 왼쪽 어깨에 일도(一刀)를 맞았고, 대신 사내의 왼쪽 옆구리에 구멍 하나를 뚫어 놓았다.

그 일도는 악독하게도 전흠이 왼쪽 팔로 안고 있는 유소응을 노리고 날아든 것이라 전흠으로서도 무작정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유소응의 머리통이 그대로 잘려져 버렸을 것이다.

전흠은 사내의 칼을 왼쪽 어깨로 받고 동시에 사내의 옆구리를 검으로 찔러 버렸던 것이다.

똑같이 상처를 입었으나 누구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약세를 보였다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맹렬하게 병기를 마주치기 시작했다.

전흠에 비하면 낙일방이 처한 상황은 훨씬 복잡했다.

낙일방을 향해 덤벼든 사람은 모두 두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창(槍)을 사용했는데, 한 명의 창에는 붉은 홍실이, 다른 한 명의 창에는 푸른 청실이 매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낙일방은 그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홍쌍귀(靑紅雙鬼) 연씨형제(延氏兄第)!’

청홍쌍귀 연씨형제는 최근 들어 무서운 살명(殺名)을 날리는 유명한 살수들이었다.

그들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불과 이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벌써 수십 명의 고수들이 그들의 무시무시한 창법(槍法)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누구도 그들의 정확한 신분 내력을 알지 못했으나, 청실과 홍실이 묶여진 창을 보게 되면 강호인들은 모두 안색이 변한 채 멀찌감치 피하기 일쑤였다.

낙일방의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드는 창은 청귀(靑鬼) 연일명(延一命)의 청살창(靑殺槍)이었고,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드는 것은 홍귀(紅鬼) 연일혼(延一魂)의 홍혈창(紅血槍)이었다.

낙일방의 뒤에는 손풍이 있었기 때문에 낙일방으로서는 피할 수도 없었다. 낙일방은 태산처럼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선 채 두 주먹을 빠르게 양쪽으로 찔러 갔다.

꽈릉!
마치 뇌전(雷電)이 이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이 순간적으로 훤하게 밝아지며 몇 가닥의 섬광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절정의 낙뢰신권이 펼쳐진 것이다.

청귀 연일명은 막 낙일방의 관자놀이를 찔러 가다가 한 가닥 섬광이 자신의 콧등을 향해 폭사해 오자 슬쩍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그러면서도 찔러 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나 그는 이내 내뻗었던 창을 거두고 황급히 몸을 옆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섬광이 다가오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상대를 찌르기도 전에 먼저 격중당하게 생겼던 것이다. 그 섬광이 검은 장갑을 낀 상대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권풍(拳風)임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홍귀 연일혼은 연일명보다는 조금 더 운이 좋았다. 그는 낙일방의 옆구리를 찔러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낙일방이 날린 권풍이 얼굴 쪽으로 날아오자 피하는 대신 바닥으로 몸을 잔뜩 숙였다. 그 바람에 낙일방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던 홍혈창이 조금 아래로 내려와 낙일방의 오른 다리를 찌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연일혼은 창을 거두지 않고 계속 찔러 갔다.

막 낙일방의 오른쪽 허벅지가 홍혈창에 관통당하려는 찰나, 낙일방의 두 다리가 기이하게 움직이며 홍혈창이 그대로 허공으로 벗어나 버렸다. 낙일방은 절세의 어운보로 연일혼의 창을 피하자마자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서며 두 주먹을 질풍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장창(長槍)을 사용하는 그들에게 가급적이면 거리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어느 정도 적중해서 연일명과 연일혼은 장병기(長兵器)의 위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낙일방의 주먹에 조금씩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청홍쌍귀는 자신들 두 사람이 동시에 덤비고도 아직 약관에 불과한 낙일방에게 뒤로 몰리자 분기탱천한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단 놓친 승기(勝機)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낙일방의 낙뢰신권은 변화가 다양하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빠르고 강력하기에 가히 가공스러울 정도여서 한번 공격하면 질풍노도 같은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낙일방의 우측에 있는 어둠 속에서 달려들었다. 그때 낙일방은 두 주먹을 활짝 내뻗어 연일명과 연일혼의 창에 정면으로 맞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느닷없는 공격에 앞가슴이 거의 무방비로 비어 버린 상태였다. 낙일방은 양쪽으로 내뻗었던 주먹을 회수할 겨를도 없이 어운보를 펼쳐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두 발로 달려들던 상대를 걷어찼다.

파팡!

상대의 손바닥과 낙일방의 발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상대는 몸을 휘청이며 물러났으나, 낙일방 또한 중심을 잃고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그 순간 청홍쌍귀의 창이 무서운 기세로 낙일방의 몸을 향해 쏘아져 갔다.

“앗?”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풍은 낙일방의 몸이 산적(蒜荻)처럼 두 개의 장창에 꿰뚫리는 것만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절체절명의 순간, 낙일방이 굳게 쥐었던 주먹을 풀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창을 덥석 잡아 버렸다. 연일명과 연일혼은 그야말로 혼백(魂魄)이 나갈 듯 놀라 버렸다. 자신들의 장창을 맨손으로 잡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강기를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자신의 창날을 어찌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낙일방은 두 개의 창을 양손으로 잡은 채 그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들은 미처 몰랐으나 낙일방의 손에는 묵령갑이 끼어져 있어 신검보도(神劍寶刀)라 할지라도 베어지지 않았다. 단지 묵령갑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피범벅이 되는 것은 낙일방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파파팍!

낙일방의 발길질은 금강퇴(金剛腿)라는 것으로, 강력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연일명과 연일혼은 안색이 변한 채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연일명의 이마가 발에 스쳐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고, 연일혼 또한 뒤통수의 머리 피부가 한 치쯤 벗겨졌다.

낙일방은 그 여세를 몰아 양손으로 움켜잡은 창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두 사람의 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권법의 고수에게 주먹이 닿을 만큼의 가까운 거리를 허용했으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하나 그때 조금 전에 달려들었던 인물이 다시 강력한 장공(掌功)을 날리며 접근해 왔다. 그와 함께 시퍼런 도끼 하나가 낙일방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네 번째 사람이 공세에 합류한 것이다.

제아무리 낙일방이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해도 무서운 실력을 지닌 네 명의 합공을 받게 되자 일순간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낙일방은 양손과 발을 미친 듯이 움직여 그들에 맞서 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전흠은 백여 초 만에 다시 삼베옷의 사내에게 이검(二劍)을 격중시킬 수 있었다. 삼베옷의 사내는 왼쪽 팔뚝과 허벅지에 검을 맞아 거의 온몸이 피투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이렇게 몇 초만 더 흘렀다면 전흠은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때 또 다른 자가 장내에 뛰어들었다. 그자의 손에는 붉은색의 극(戟)이 쥐어져 있었다.

극도 붉고, 사람도 붉었다. 전신에 핏빛 홍의를 걸친 그 인물의 극을 휘두르는 솜씨는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로 빨라서 전흠은 순식간에 세 걸음이나 물러나야만 했다. 덕분에 한숨을 돌린 삼베옷의 사내는 이를 갈아붙이며 전흠을 향해 덤벼들었다.

전흠은 간산히 두 사람의 공세를 막았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전혀 우세를 점할 수가 없었다. 전흠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모옥을 찾아온 괴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중 두 명이 자신을 상대하고 있다면 다른 다섯 명이 모두 낙일방에게 덤벼들었다는 소리였다. 이들의 실력으로 보아 아무리 낙일방이 젊은 층의 고수들 중 권법의 일인자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세 명 이상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나타났는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낙일방이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며 한 명이라도 먼저 쓰러뜨리기 위해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손풍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처음 낙일방이 창을 든 두 명의 고수들을 상대할 때만 해도 상당히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고 나갔는데, 그들이 불리할 때마다 한 명씩 더 나타나더니 종내에는 네 명의 고수들이 낙일방 한 사람을 합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비겁한 놈들이라고 속으로 맹렬하게 욕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낙일방의 무공은 정말 놀라웠다. 손풍과 비슷한 나이의 낙일방은 네 명의 고수들의 합공 속에서도 물러설 줄 모르고 당당하게 맞서 나갔다. 아마 상대가 세 명만 되었더라도 그들은 낙일방의 가공할 주먹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고,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낙일방도 조금씩 몰리고 있었다.

낙일방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몸의 움직임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이를 어쩌지?”

손풍은 혹시나 하여 전흠이 싸우고 있는 곳을 돌아보았으나, 전흠도 두 사람의 합공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었다. 오히려 손풍을 뒤로 두고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고 있는 낙일방에 비해 유소응을 안고 싸우는 전흠은 훨씬 불리한 상황이었다.

손풍이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어둠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 나쁜 놈들! 한 사람에게 네 놈이나 덤비는 것도 모자라 또 나타난단 말이냐? 대체 몇 놈이나 숨어 있는 거냐?’

손풍은 속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이내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의당 낙일방을 상대하기 위해 나타나 줄 알았던 다섯 번째 사나이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숨에 오십여 장을 달려 촌장 집으로 온 진산월과 동중산을 맞이한 것은 두 구의 처참한 시신이었다. 시신은 모옥의 앞마당에 쓰러져 있었다. 둘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진산 갈삼을 입은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박박 깎은 험악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슴이 갈라져 있었는데, 보아하니 누군가가 단 일검에 이들을 쓰러뜨린 것이 분명했다. 진산월이 시신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촌장 집으로 뛰어들어갔던 동중산이 다시 뛰쳐나왔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에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비명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에 양중초 일행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두 명을 쓰러뜨린 사람의 흔적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촌장과 그의 식구들은?”

동중산의 얼굴에는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바닥에 누워 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이들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

진산월의 물음에 시신들을 내려다보던 동중산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처음 보는 자들입니다.”

“흠……”

“양 대협 일행이 이미 변(變)을 당했을까요?”

“양중초는 만만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니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져 버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우리에게 무슨 말이라도 남겨야 정상일 텐데 아무런 기척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게 여러모로 미심쩍군요.”

진산월도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들이 머물렀던 모옥까지는 불과 오십 장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달려오기 힘들더라도 소리라도 크게 지른다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실제로 그들도 이곳에서 울린 비명 소리를 듣고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들이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촌장네 가족들은 무공도 모르는 일반인들인데 그들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때 갑자기 주위를 살펴보던 동중산이 모옥의 입구 부근에서 진산월을 불렀다.

“이걸 보십시오.”

진산월은 동중산이 가리킨 바닥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거무스름한 핏자국이 나 있었다. 시신들은 앞마당에 쓰러져 있고 이곳은 대문을 지난 곳이었으니 시신들이 흘린 핏자국일 리는 없었다. 진산월은 핏자국을 만져 보았다.

“아직 굳지 않은 것을 보니 흘린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진산월은 눈을 빛낸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곳에서 다른 핏자국을 발견한 진산월은 동중산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핏자국이 떨어진 방향을 따라 신형을 날렸다.

“너는 숙소로 돌아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해라.”

그의 몸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중산은 지금의 상황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듯 외눈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숙소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두 개의 인영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인영들을 보자 동중산의 외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들은 다름아닌 조금 전만 해도 앞마당에 쓰러져 있던 시신들이 아닌가?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시신들이 어떻게 제 발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시신 중 머리를 박박 깎은 중년인이 동중산을 향해 징그러운 미소를 흘렸다.

“흐흐…… 놀랐느냐?”

“너…… 너희들은 죽은 게 아니었구나.”

“물론 아니지.”

대머리 중년인은 아직도 벌어져 있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벌어졌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지더니 이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침착하기 그지없는 동중산조차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놀랄 것 없다. 구마회혼신공(九魔廻魂神功)을 익히면 목이 잘려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이런 피육(皮肉)의 상처야 애들 장난일 뿐이지.”

갈삼청년의 가슴도 어느새 아물어져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상처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었다. 동중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대머리 중년인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철독응(鐵禿鷹) 호황(胡荒)이라고 하고, 저쪽은 혈비응(血飛鷹) 희표(希豹)라고 한다.”

동중산은 그들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으나 어디서 들었는지는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스스로를 철독응 호황이라고 밝힌 대머리 중년인이 다시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 신강(新疆)에서는 우리들을 철혈쌍응(鐵血雙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신강…… 그리고 철혈쌍응! 그제서야 동중산은 그들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내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철혈쌍응은 서장의 절정고수들인 십육사(十六邪)에 속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핏자국을 쫓아 몸을 날린 진산월은 이내 막다른 길에 처하게 되었다. 핏자국이 근처에서 멀지 않은 숲 속으로 이어지더니 이내 끊겨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안력을 돋구어 주위를 자세히 살폈으나 더 이상의 핏자국은 없었다. 진산월은 이것이 일부러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피를 흘리며 쫓기던 사람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숲을 둘러보았으나, 나무가 우거져 있는 평범한 숲일 뿐이고, 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진산월은 추격할 실마리를 잃어버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명 양중초 일행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텐데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양중초 일행은 애초에 자신들 때문에 이번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만에 하나 그들 신상(身上)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진산월로서는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진산월이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

그 웃음소리는 마치 유령의 호곡성(號哭聲) 같기도 했고, 여인의 흐느낌 같기도 했다. 또 어찌 들으면 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게다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어 정확히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밤에 인적 없는 숲 속에서 이런 웃음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오히려 표정이 담담해졌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실마리가 끊기는 것이지 새로운 실마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거의 끊겼던 단서가 새롭게 나타났는데 그가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그의 속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흐느끼는 듯한 음향이 다시 들려왔다.

“흐흐…… 진산월…… 네 묘 자리를 네 발로 찾아왔구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왔다. 진산월은 그것이 최상승의 내가수법(內家手法) 중 하나인 육합전성(六合傳聲)임을 깨달았으나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진산월이 반응이 없으니 호곡성의 주인은 오히려 당혹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진산월…… 죽을 때가 되니까 갑자기 말을 잃었느냐? 너는 양중초와 그의 마누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

진산월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살아 있소?”

“궁금하면 숲 안으로 들어와 보아라.”

“야심한 밤에 숲을 산책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구려. 당신이 나오는 게 어떻겠소?”

“으흐흐…… 네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원혼이 되어 구천(九泉)을 떠돌게 될 것이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을 풀어 주겠소?”

호곡성이 더욱 켜졌다.

“으흐흐흐…… 이미 죽은 자들을 어떻게 풀어 준단 말이냐?”

진산월의 얼굴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굳어졌다.

“그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흐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진산월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말장난을 하기 위해 나를 이곳까지 유인한 거요?”

“흐흐…… 말장난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천하의 누구라도 그들을 살릴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마찬가지일지 몰라도 똑같은 건 아니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알고 싶다면 숲으로 들어와라.”

진산월은 호곡성의 주인이 왜 이토록 자신을 숲 속으로 유인하려고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만큼 경각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만약 내가 들어가지 않겠다면?”

순간 호곡성이 갑자기 뚝 그쳤다. 호곡성이 그친 장내는 짙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정적에 잠기자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괴이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잠시 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진산월! 너는 임영옥이 죽는 꼴을 이대로 보고만 있을 셈이냐?”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그토록 냉정을 유지하던 진산월의 얼굴이 크게 변해 버렸다.

(1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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