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10화 (18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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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8권 월광천추(月光千秋)편 : 10화


제187장. 부자고사(父子故事)

“으아아…… 이럴 수는 없어!”

한 사나이가 절규하고 있었다.
그의 외침은 방안을 지나 건물 전체를 뒤흔들 것만 같았다.

“이건 내게 너무도 잔인한 일이야!”

비통에 가득 찬 표정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사람은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약관은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두 눈에서는 금시라도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만 같았고, 붉게 상기된 얼굴은 너무도 처량해 보여서 누구라도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나 그에게 날아든 것은 누군가의 발길질과 거친 욕설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별 지랄을 다 하는군!”

청년은 발길질에 쓰러지면서도 처절한 소리를 내질렀다.

“어제 간 건 무효예요! 다시 가야 돼요!”

“이놈아! 가긴 어딜 다시 가?”

“난향원! 정난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중인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길질을 했던 전흠은 아예 소맷자락을 걷어붙인 채 살벌한 얼굴로 다가왔다.

“오냐, 아예 거기서 평생 살도록 해주마! 두 다리와 두 팔을 모두 부러뜨려 줄 테니 난향원인지 매향원인지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기녀들 뒷바라지나 받으며 살아라!”

손풍은 바닥을 뒹굴며 발버둥을 치다가 전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자 찔끔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동중산의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게 아니라…… 전 사숙께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렵사리 관문을 통과하여 그 만나기 힘들다는 정난향과 술 마실 기회를 잡았는데 술에 취해 그녀가 왔다 간 것도 몰랐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네놈보고 장문인 앞에서 멋대로 술 퍼먹고 뻗으라고 했느냐?”

“그건 장문인께서 저의 호탕함을 칭찬하시며 술을 마시라고 지시를 하시는 바람에……”

손풍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꾸 말대답을 하자 전흠은 동중산을 향해 거칠게 말했다.

“비켜라. 오늘 저 자식을 죽여 본파의 법도를 똑바로 세우고야 말겠다.”

동중산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전 사숙……”

“비켜라, 동중산. 네가 정녕 본파의 제자라면 더 이상 내 말을 거역하지 마라.”

여느 때와는 다른 전흠의 살벌한 말에 동중산의 표정도 무겁게 굳어졌다.
전흠이 단단히 결심을 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흠을 말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는 없다.
그리고 다행히 때맞춰 그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진산월이 모습을 나타내자 조마조마한 얼굴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전흠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놀라 새파랗게 질려 있던 손풍은 부처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색을 하면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장문인,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방이 떠나가라 외치는 그의 속셈이 너무도 훤히 들여다보여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속은 괜찮으냐?”

손풍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 정도 술은 열 살 때부터 마시고 지냈습니다. 어제는 비록 먼 길을 걸어온 여독(旅毒) 때문에 조금 일찍 잠이 들었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진정 통쾌하게 마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장문인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쪽으로는 집요하리만치 끈질긴 손풍이었다.

“풋!”

낙일방은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간신히 눌러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졌고, 동중산은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억눌렀다.
하나 전흠은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근거렸다.

“장문인, 오늘은 제발 나를 막지 마시오. 장문인이 자꾸 저놈을 감싸고도니까 저놈의 버르장머리가 저따위란 말이오. 남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본파를 얼마나 무시하고 조롱하겠소?”

전흠의 표정이 어찌나 험악했던지 진산월이 거절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였다.
진산월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막지 않을 테니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겠느냐?”

손풍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가운데, 전흠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그게 정말이오? 부탁이란 게 뭐요?”

“그를 데리고 한곳에 갔다 와야겠다.”

“어디 말이오? 설마 난향원인지 뭔지라면 무조건 거절이오.”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곳은 서점이다.”

“서점?”

“중앙대로를 따라 쭉 가다가 남문(南門)에 거의 도달할 쯤 되면 우측에 풍림서각이라고 하는 커다란 서점이 보일 것이다. 손풍과 함께 그곳에 갔다 오거라.”

전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점이라면 나보다 동중산이 더 적합하지 않겠소?”

“그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럼 낙 사제를 시키든지……”

“일방은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전흠은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제길. 그럼 서점에 간다는 건 핑계고, 결국 나보고 저 망할 놈이나 돌보고 있으란 말 아니오?”

“너는 그곳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뭐요?”

진산월은 나직한 음성으로 그에게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듣고 있던 전흠의 표정이 겨우 풀어졌다.

“정말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요?”

“그렇다.”

“그런 일을 하는 데 굳이 저 망할 녀석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지 않소?”

“만약 일이 잘못되면 누군가는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전흠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건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리군.”

손풍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전흠이 자신을 힐끔 쳐다보며 쾌재를 부르는 듯하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제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진산월은 말을 마친 다음 전흠에게 물었다.

“어쩌겠느냐? 내 말대로 하겠느냐?”

전흠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은 저놈을 데리고 풍림서각에 갔다 오겠소. 그 다음에 내가 저놈을 손봐주는 건 절대로 말리면 안 되오.”

“알겠다.”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손풍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장문인! 저는 전 사숙과 풍림서각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난향원으로 보내 주십시오!”

전흠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저놈이 끝까지 매를 버는군.”

전흠이 흥분하여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이 염려되었던 동중산이 손풍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손풍은 끌려가면서도 계속 소리쳤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난향원까지 가서 정난향의 코빼기도 못 보고 술만 먹고 돌아왔다고 하면 서안의 모든 풍류아들이 저를 비웃을 겁니다. 제발 제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

그의 마지막 말은 동중산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제대로 맺어지지 못했다.

낙일방이 웃으면서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저렇게 애원하는데 난향원에 한 번 더 갔다 오시죠. 그곳에서 친구분도 사귀셨다면서요.”

진산월은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갔다 오도록 해라.”

“예? 장문사형. 그게 무슨 말씀…….”

“장문인으로서의 명령이다. 오늘 저녁에 손풍을 데리고 난향원을 다녀오도록 해라.”

낙일방은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고 한편으로는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채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진산월은 유소응을 데리고 방을 벗어났다.

낙일방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흠을 돌아보았다.

“전 사형, 장문사형께서 제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흠은 못마땅한 눈으로 낙일방을 쏘아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대체 문파 꼴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왜 모두들 이런 멍청한 놈을 절세의 기재라고 추켜세우는지 모르겠군.”

그는 낙일방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산월이 유소응에게 무공을 가르친 후 잠시 쉬고 있을 때 동중산이 찾아왔다.

“장문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깐 시간이 나십니까?”

“들어오너라. 무슨 일이냐?”

동중산은 방안으로 들어온 후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낙 사숙께 들으니 어제 난향원에서 친구분을 새롭게 사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

“친구분 성함이 손검당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지요?”

“그렇다. 아는 사람이냐?”

“만난 적은 없지만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었느냐?”

“엄밀히 말하면 손검당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입니다. 손검당의 아버지는 석교(石鮫)라는 인물입니다.”

진산월은 흠칫 놀랐다.

“석교? 손씨가 아니고 석씨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는 석가장의 현 장주인 석곤의 동생입니다.”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왜 손씨가 되었느냐?”

“석가장에 도선출재라는 기이한 전통이 있다는 건 장문인도 잘 아실 겁니다. 석교는 그 도선출재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도선출재는 석가장에만 있는 특이한 가법(家法)이었다. 석가장의 자식이 스무 살이 되면 자신이 투자할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오년 동안 투자를 해서 원금의 세 배 이상을 벌지 못하면 탈락하고 마는 가혹한 방식이었다.

이 도선출재를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가주의 자식이라고 해도 석가장의 후예로서 어떠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다.

“당년에 석교는 성질이 너무 편협하고 잔인해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도선출재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탈락했는데, 결국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석가장을 박차고 나와서 성씨마저 어머니의 성인 손(孫)으로 바꾸었다고 하더군요.”

그 일은 오래 전의 일인지라 진산월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호에서 큰 파장을 일으킬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어서 별로 아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 낙양에서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라면 삼십 년 전에 석가장을 벌컥 뒤집어 놓았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석교는 도선출재에 실패하여 석가장에서에서도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다시피 했다. 성격이 잔인하고 편협했던 석교는 그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야밤에 칼을 들고 자신의 형인 석곤의 방에 침입을 했다. 당시 석곤은 이미 몇 년 전에 도선출재를 훌륭히 통과하여 석가장의 소장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다.

결국 석교는 석곤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모진 매질을 당했고, 그날 밤에 거의 알몸으로 석가장을 도망치듯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 뒤로 석교는 나름대로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석가장에서 쫓겨난 그를 반겨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모두들 쉬쉬하고 있었으나, 그가 자신의 형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은밀히 퍼지자 아무도 그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석교는 성마저 바꾼 채 새로운 기회를 잡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두 번째 기회는 결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석교는 낙양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해서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석교의 아들이 바로 손검당입니다.”

“……!”

“손검당은 날 때부터 검술에 비상한 재질을 발휘해서 석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당시 석교는 없는 살림에 무리를 해서 손검당을 낙양의 제일고수인 천풍검객 동방표응에게 보냈는데, 동방표응은 단번에 손검당의 재질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더군요.”

진산월은 묵묵히 동중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동중산은 특유의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손검당은 놀라운 속도로 동방표응의 무공을 습득해서 한때 낙양의 제일기재(第一奇才)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면 손검당은 사부인 동방표응을 능가하는 검객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군.”

“예. 삼년 전에 손검당은 동방표응에게 파문을 당했습니다. 동방표응은 비록 손검당의 무공을 폐(廢)하지는 않았으나 두 번 다시 자신에게서 배운 검법을 펼치지 말라는 단서를 달았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파문을 당한 것인가?”

“그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손검당은 물론이고 동방표응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 뒤로 손검당의 신세도 자기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습니다.”

동중산의 말이 모두 끝나자 진산월은 한동안 침음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들 부자에 대해서 자세히도 알고 있군.”

“석교, 아니 손교(孫鮫)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알아봤습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동중산은 잠깐 머뭇거렸다. 아마도 진산월이 친구로 삼은 손검당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손교는 한때 ‘석가장의 수치(羞恥)’라고까지 불렸던 인물입니다. 석가장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형을 죽이려고 한 것도 문제지만 평상시의 그의 행실이나 성격이 너무도 잔인하고 흉폭했던 게 더 큰 이유였습니다.”

“…….”

“그런데 우연히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손교가 소문과는 많이 다른 인물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손교를 만나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란다고 하더군요. 그가 너무도 예의바르고 온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손교에 대한 소문이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손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자는 그런대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이어서 흥미가 조금 생기기는 했지만 저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오년 전에 낙양을 지나다가 저는 아주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날은 유달리 눈발이 심하게 날리던 한겨울이었다.
낙양의 유명한 빈민가(貧民街)인 서원로(西苑路) 부근을 지나던 동중산은 커다란 돌을 등에 짊어진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제법 심하게 내리는데다 날이 추워서 맨몸으로도 걷기 힘들었는데, 그 사람은 거의 오십 근은 족히 나가는 돌덩이를 등에 메고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동중산은 그가 짊어진 것이 돌덩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하나 그 사람이 미끄러운 눈길을 걷다가 길 한복판에 나자빠졌을 때, 그의 등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은 분명 돌덩이였다.
세상에 어떤 미친 작자가 엄동설한에 돌덩이를 지고 길을 다닌단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머리에 쓴 두건이 벗겨졌을 때였다. 두건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의 그것이었다.
중늙은이는 낑낑거리면서도 돌덩이를 다시 등에 지고는 힘겹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중산은 하도 신기한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중늙은이의 뒤를 따라갔다. 중늙은이가 고생고생 하여 도착한 곳은 서원로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허름한 창고였다.
아니, 창고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방의 벽이 훤히 뚫려 있는 공간이었다. 지붕에는 거적때기 하나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문짝은 아예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휑하니 뚫린 창고 안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달달 떨면서 서로 몸을 부여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늙은이는 지고 온 그 돌덩이를 창고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창고의 한쪽에는 중늙은이가 지고 온 듯한 돌덩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동중산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늙은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날 중늙은이는 열두 번이나 더 돌덩이를 지고 왕복을 했다. 돌이 어느 정도 쌓이자 중늙은이는 그제서야 그 창고의 부서진 벽을 대신해 돌벽을 쌓기 시작했다.
아이들 몇몇이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돌벽을 중늙은이 혼자의 힘으로 쌓아올렸다.
돌벽이 완성된 것은 이틀 후였다. 그때까지도 중늙은이는 혼자의 힘으로 돌을 운반해 와서 무너진 창고의 돌벽을 쌓고 나무를 구해 와 지붕을 만들어 씌웠다. 나중에 동중산은 그 아이들이 중늙은이와는 일면식도 없는 떠돌이 고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삼 일 후에 동중산은 급한 사정이 생겨 낙양을 떠나야 했으나 한동안 그 중늙은이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노인이 바로 손교한 말이냐?”

“그렇습니다. 한 달 후쯤에 다시 낙양을 지날 일이 있을 때 그 노인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는데,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 엄동설한에 돌벽을 쌓느라 무리한 게 원인이었던 모양입니다.”

항상 침착함을 유지했던 동중산의 음성에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장문인도 생각해 보십시오. 생면부지의 고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축내면서까지 돌벽을 쌓은 사람이 자신의 형을 죽이려 한 악독한 인물이었겠습니까?”

진산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동중산도 그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손교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던 것뿐이다.

“손교 부자는 그토록 혹독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낙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안에 필시 어떤 곡절(曲折)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

“손검당은 우리가 석가장에 간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

“그가 무슨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동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장문인께서 난향원에서 손검당을 만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일부러 장문인께 접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공교롭기 때문이지요. 장문인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로서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생각이 어떻든 나는 그를 친구로 인정했다는 것이지.”

동중산은 아까부터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그도 장문인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진산월의 대답은 확고한 것이었다.

“틀림없이.”

동중산은 진산월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진산월이 저렇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이상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걱정은 잊는 게 좋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다.”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석가장에는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내일이 적당할 듯하다.”

“가시게 되면 석곤을 만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다.”

“석곤이 장문인을 만나려고 하겠습니까?”

“그는 반드시 나를 만나려 할 것이다.”

진산월이 단정 짓듯 말하자 동중산은 황급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석곤은 이미 내가 이번 살인 사건을 조사하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낙양에서 그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과연 얼마나 알아냈는지 궁금해서라도 나를 만나려 할 것이 아니겠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그들이 원래 만나기로 했던 석지명과 석곤은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석곤은 절대로 상대하기 수월한 자가 아닙니다.”

동중산이 여전히 노파심을 거두지 못하자 진산월의 담담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거부가 상대하기 수월할 리 있겠느냐?”

그 미소를 보자 동중산은 진산월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 되겠군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문득 동중산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본파를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입니다. 가야 할 곳은 아직도 아득한데 해는 지고 있으니(日暮途遠) 불현듯 답답한 생각이 드는군요.”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중산은 결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자도 그렇게 되길 충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19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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