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7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19권 천룡고궤(天龍古櫃)편 : 7화


제 194장 유령무영

낙일방과 사인기는 앞서의 두 사람처럼 불문곡직하고 성급하게 비무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이 장쯤 떨어진 곳에 선 채 서로를 묵묵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사인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옥면신권과 손을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려.”

낙일방은 피식 웃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름이오.”

“낙 소협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스물하나요.”

“정말 좋은 나이요.”

“당신은?”

“조금 많소. 스물일곱이오.”

낙일방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인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데 놀랍소.”

사인기는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워낙에 보잘것없게 생긴 얼굴이라 그나마 조금 젊어 보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소.”

“무인에게는 얼굴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소?”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나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분이 나빴을 텐데, 낙 소협의 입에서 나오니 왠지 위로가 되는구려.”

“나는 그런 일로는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오.”

낙일방은 천천히 묵령갑을 낀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이 두 주먹으로 당신의 검을 상대할 생각이오.”

사인기의 시선이 낙일방의 손에 끼어 있는 묵령갑을 향했다.

“무척 특이한 장갑이구려. 그 모용도 대단할 것 같은데, 이름이 무엇이오?”

“묵령갑이라 하오. 이걸 끼면 맨손으로도 검기를 잡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거요.”

“좋은 물건을 가졌구려. 본파의 회풍무류검과 분광십팔수검은 조금 전에 보았을 테니 나는 이번에 타루검법을 사용하겠소.”

“사일검법은?”

사인기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단순한 비무를 벌이려는 것이지 서로 죽이려는 게 아니지 않소?”

“옳은 말이오. 그럼 나도 묵령갑을 사용하지 않겠소.”

낙일방이 양손에 끼었던 묵령갑을 벗자 사인기는 물론이고 중인들이 모두 술렁거렸다. 사인기는 묘한 눈으로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을 응시했다.

“맨손으로 내 검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오?”

낙일방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단순한 비무를 하자고 하지 않았소? 비무를 하는데 신병이기의 도움을 받는 건 공평하지 못한 일 같아서 말이오.”

사인기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커다란 웃음이었다.

“낙 소협의 기개와 배짱은 정말 마음에 드는구려.”

“다들 기다리기 지루해하는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좋소.”

사인기는 수중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한차례 휘둘렀다. 예리한 검광이 번뜩였다 사라졌으나 낙일방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인기가 지금 펼친 것은 사양무광이라는 초식으로, 비록 빠르기는 했으나 낙일방이 아닌 그 옆의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검날을 옆으로 뉘어서 상대를 상하게 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이것은 상대와 겨루기 전에 미리 예의를 표하는 것으로, 각 파에는 이러한 예전 초식이 하나씩 존재했다. 소림사의 고수들은 동자배불을 주로 썼고, 무당파에서는 휘진청담이라는 초식을 자주 사용했다. 종남파에도 물론 비슷한 초식이 존재했다.

낙일방은 오른 주먹을 슬쩍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 가슴을 보호했다. 원래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조운육환이라는 초식이었으나, 지금처럼 여섯 가지의 변화 중 다섯 가지를 없애고 한 가지 변화만을 일으키면 조운일환이라는 예전 초식이 되는 것이다.

각기 상대에게 비무 전의 예의를 표한 두 사람은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갔다.

먼저 공격을 한 사람은 낙일방이었다.

권격의 고수가 검을 사용하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후공을 취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먼저 받은 다음, 그것을 피하며 반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낙일방은 그 상식을 깨고 자신이 오히려 사인기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며 오른 주먹을 힘차게 휘둘렀다.

그 호탕한 모습에 잔뜩 긴장된 얼굴로 보고 있던 뇌일봉이 자신도 모르게 짤막하게 탄성을 토해냈다.

“잘한다!”

뇌일봉도 권격과 수공의 달인이기 때문에 검을 든 상대에게 먼저 공세를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옷자락을 펄럭이며 상대에게 돌진해 들어가는 낙일방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었다.

사인기는 피하지 않고 검을 세차게 휘둘러 검풍을 일으켰다.

팡!

검풍과 권풍이 마주쳐 한차례 폭음이 터졌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며 맹렬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낙일방은 장괘장권구식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뇌성이 울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에 비해 사인기는 무질서할 정도로 난잡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격식도 없는 마구잡이 같아도 자세히 보면 일정한 흐름 속에 괴이무쌍한 변화가 담겨 있었다.

지금 사인기가 펼치는 것이 바로 타루검법이었다. 타루검법은 점창파의 고수 중 허리를 다쳐 꼽추가 된 기인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변화가 다양하고 검로의 방향이 종잡을 수 없어서 방비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검법이었다.

사인기의 타루검법에 대한 조예는 거의 절정에 도달해 있어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이면서 괴이한 검초를 날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유연해 보였다.

중인들은 처음에는 다정스레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이들의 비무가 시시하게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막상 눈앞에서 펼쳐지는 맹렬한 격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서도 뇌일봉은 다른 누구보다도 흥분하여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된 채로 장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조심해!”

마치 자신이 직접 비무를 벌이는 것처럼 뇌일봉이 계속 중얼거리자 진산월이 조용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방은 잘해 낼 겁니다.”

뇌일봉은 여전히 장내의 격전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

“저 녀석의 무공이 놀랍도록 늘긴 했다만, 점창파 놈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구나. 일방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자신이 없었다면 일방은 결코 묵령갑을 벗지 않았을 겁니다.”

뇌일봉이 흠칫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일방도 이제 예전같이 앞뒤를 분간 못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풋내기가 아닙니다. 그가 묵령갑을 벗은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뇌일봉은 흥미가 이는지 재빨리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나는 상대와 피를 보는 위험한 승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그건 상대방이 일방의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일검법을 펼치지 않는 점창파의 제자라면 어떤 공격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뇌일봉은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자만하는 게 아니냐?”

“뇌 대협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방도 그동안 적지 않은 싸움을 치러 왔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상대를 경시해서 자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뇌일봉은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낙일방과 사인기의 격전에 쏠려 있었다.

종남파의 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불안해하거나 낙일방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낙일방을 의지하는 그들의 눈에는 믿음직한 신뢰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뇌일봉은 자신이 어렴풋이 들은 옥면신권의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ㅡ 종남파에는 신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권도 있다.

ㅡ 옥면신권은 약관의 젊은 나이에 두 주먹으로 강호의 절정 고수들인 현음상인과 신편을 물리쳤으니, 앞으로 강호제일권은 바로 그가 될 것이다.

낙일방은 뇌일봉이 자신이 귀엽게만 생각했던 홍안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초가보와의 처절한 싸움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강호의 절정고수였다. 결코 점창파의 일개 제자에게 낭패를 당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뇌일봉은 흠칫 놀라 상념에서 깨어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낙일방은 천신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데 비해, 사인기는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서고 있었다. 사인기는 곧 신형을 똑바로 세운 채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놀라운 공력이오. 낙 소협의 나이에 그 정도의 공력을 지닌 자는 당금 천하를 뒤져도 찾기 힘들 것이오.”

낙일방은 두 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타루검도 쓸 만한 솜씨였소. 확실히 본파의 장괘장권구식만으로 막기는 벅찬 감이 있더군. 그래서 조금 과하게 공력을 사용했소.”

사인기는 번쩍이는 눈으로 낙일방을 응시했다.

“장괘장권구식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무공을 사용하면 될 게 아니오?”

“내가 그렇게 하면 당신도 다른 검법을 펼쳐 보일 거요?”

“타루검법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오?”

“타루검법은 이미 질리도록 견식했소. 당신이 사일검법을 펼친다면 나도 본파의 제대로 된 절학을 보여 주겠소.”

사인기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꼭 사일검법을 보고 싶단 말이오?”

낙일방은 빙긋 웃었다.

“모처럼의 비무인데 이대로 끝내기에는 당신도 서운하지 않겠소? 좀 더 어울려 보는 게 어떻겠소?”

사인기는 낙일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상황을 봐서 타루검법으로 힘들다고 생각되면 사일검법을 펼치겠소. 대신 당신도 그 장갑을 착용하도록 하시오.”

“이를 말이오?”

낙일방은 사양하지 않고 품에 집어넣었던 묵령갑을 다시 꺼내어 천천히 양손에 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인기의 얼굴에 감탄하는 빛이 떠올랐다. 검은 장갑을 낀 채로 양손을 어루만지는 낙일방의 모습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가공할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세는 결코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으로, 절정고수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무형지기의 일종이었다.

사인기도 엄숙한 표정으로 수중에 들고 있던 검을 한차례 떨쳐냈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삼엄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의 그토록 치열했던 격전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막중하면서도 맹렬한 기운이 장내의 공기를 압도해 버렸다. 이제 곧 제대로 된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하나 그들의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만하면 됐네. 인기, 자네는 이만 돌아오게.”

고천동이 큰소리로 외치며 장내로 뛰어들었다. 사인기의 얼굴에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사인기는 그의 말에 거역하지 않고 검을 회수했다.

“아무래도 종남파의 진짜 절학은 다음 기회에 봐야 할 것 같소.”

낙일방은 아쉬운 빛이 역력했으나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기회가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라오.”

“나도 바라고 있겠소.”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한차례 응시하고는 이내 몸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고천동이 헛기침을 하고는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비무가 자칫 격해질까 염려되어 중지시켰소. 내 행동이 자칫 진 장문인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았을까 걱정되는구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분을 위한 비무라면 이쯤에서 그치는 게 옳소.”

그제야 고천동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고천동은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나저나 종남파의 실력이 이토록 뛰어날 줄은 미처 몰랐소. 문파 제자들의 솜씨가 이 정도이니 진 장문인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능히 짐작이 가는구려.”

진산월은 조용히 고천동을 응시했다.

“내 솜씨를 보고 싶소?”

고천동은 찔끔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소. 아무래도 오늘은 진 장문인의 심기가 편치 않은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소.”

진산월도 특별히 그들과 연회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므로 형식적으로라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결국 고천동을 비롯한 점창파의 고수들은 제대로 식사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그들과 함께 온 구양전월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석성에게 재빨리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무가 이상하게 끝나는 바람에 내기의 결과를 따지기가 우습게 되었군요. 내기는 없던 것으로 하는 게 좋겠지요?”

석성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냐? 일단 내기를 했으니 당연히 끝을 봐야지.”

“어떻게 말이오?”

“까마귀와 봉황이 승부를 가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렇소. 그런데 무슨 수로 그들을 싸우게 한단 말이오?”

석성은 구양전월을 바라보며 웃었다. 가뜩이나 뚱뚱한데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네는 아직 세상을 덜 살았다는 말을 듣는 걸세. 방법은 많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구양전월은 다소 굳어진 얼굴로 석성을 응시하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내기는 아직 유효한 거요?”

“물론일세. 내기꾼은 결코 중도에서 내기를 중지하는 일이 없는 법일세.”

“그럼 나는 석 대형만 믿고 이만 일어나겠소.”

“배웅하지 않겠네. 사실 나는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 직전일세.”

석성은 원래 자리로 옮겨지는 요리들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구양전월은 석성의 관심이 이미 자기를 떠나 음식으로 향했음을 알고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켜 점창파 고수들과 함께 정연각을 벗어났다.

그들이 나가고 음식상이 다시 차려진 후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불청객들이 모두 사라져서인지 장내의 분위기는 조금 전보다 한결 화기애애했다.

그 와중에서도 뇌일봉은 낙일방을 붙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조금 전에 보니 공력이 적어도 한 갑자는 되어 보이더구나. 그 정도면 노부도 쉽게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하겠구나.”

낙일방은 찔끔하여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뇌 숙부님의 상대가 될 수 있습니까?”

“노부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다른 건 몰라도 공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끌어올릴 수 없는 것인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노부 못지않는 공력을 쌓은 것이냐?”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뇌일봉은 낙일방이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자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진산월이 옆에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방은 본파의 기연을 얻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파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 일방이 공개된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뇌일봉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는 낙일방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노부를 속이려 한단 말이냐? 고얀 녀석 같으니……”

낙일방은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알밤을 맞으면서도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에 거처에 돌아가면 따로 찾아뵙고 자세한 말씀을 올리려 했습니다. 뇌 숙부께서 너무 성미가 급하셔서 저를 재촉하셔놓고 그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놈이 머리통이 커졌다고 대놓고 노부에게 대드는구나. 어디 이번에도 노부와 한번 겨루어 보겠느냐?”

뇌일봉이 금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걷어 붙일 듯하자 낙일방은 금세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뇌 숙부님. 그저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 모습에 뇌일봉은 참지 못하고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이 녀석, 엄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그래, 점창파의 무공을 직접 상대해 보니 어떻더냐?”

처음으로 낙일방의 얼굴에 한 줄기 무거운 빛이 떠올랐다.

“무서웠습니다.”

뇌일봉은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가 그의 표정에 진지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 정도였느냐? 하지만 노부가 보기에는 본신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네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만.”

“타루검법은 솔직히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다. 비록 변화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본파의 유운검법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 무공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건 타루검법이 아니라 사인기, 그자입니다.”

“그놈이 어때서?”

“저는 장괘장권구식으로 타루검법을 상대했습니다. 변화는 적어도 장괘장권구식의 변초들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과연 십여 초가 지날 때까지는 어렵지 않게 타루검법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여 초가 지나자 사정이 달라졌단 말이냐?”

“사정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자의 움직임이 달라졌습니다.”

“움직임이 달라지다니?”

“분명히 조금 전과 같은 초식을 펼치고 있건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막을 수가 없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똑같은 초식을 사용하는데도 전혀 다른 방향, 다른 각도에서 검이 날아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펼치는 공세는 오히려 그의 몸에 접근조차 못하고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뇌일봉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강호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뇌일봉은 낙일방의 말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의 몸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더냐?”

낙일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분명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특별한 건 모르겠지만, 두 발의 위치가 조금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초식을 펼칠 때마다 두 발의 내딛는 동작이 어딘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뇌일봉은 납이라도 단 듯한 무거운 표정으로 낙일방을 응시했다.

“혹시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자세는 아니더냐?”

낙일방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바로 그겁니다. 그자는 양발의 발꿈치를 들고 있었습니다. 워낙 바닥에서 살짝 뛰어진 상태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지금 뇌 숙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자의 발뒤꿈치가 시종일관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순간부터 그랬겠지?”

“예. 처음에는 분명히 두 발을 정상적으로 움직였으니까요.”

뇌일봉은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네가 갑자기 공력을 끌어올린 이유가 그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제 공격은 자꾸 빗나가고 상대의 공격은 막기가 힘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공력을 끌어올려 천성탈두의 식으로 반격한 겁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자의 검에 낭패를 당했을 겁니다.”

“그자는 너의 막강한 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지. 적어도 공력 면에서는 네가 우월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뭐가 무섭다는 거냐?”

낙일방의 얼굴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괘장권구식이 아니라 본파의 다른 무공을 펼친다고 해도 그자의 신형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신형을 잡으려면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자나 저, 둘 중 한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음…….”

뇌일봉이 침음하자 낙일방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뇌 숙부께선 그자의 그 특이한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뇌일봉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너는 혹시 유령무령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것이다. 유령무령은 십여 년 전에 알려졌던 이름이었으니……”

뇌일봉의 시선이 이번에는 진산월에게 향했다.

“너는 들어 보았겠지?”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바로 점창파 사상 최고의 고수라는 십방랑자 사효심을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 당시 사효심은 검으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기이하다 할 정도로 신묘한 보법으로 더욱 명성을 떨쳤지. 당시 그의 몸놀림이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다고 하여 유령무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낙일방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사인기의 움직임이 사효심의 무공에서 나온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발꿈치를 든 상태로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자신의 공격은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효심이 가진 무공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라면 사인기의 무공은 사효심의 그것과 똑같지 않느냐?”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성도 똑같이 사씨로군요. 두 사람이 서로 친척인가요?”

“노부도 그 점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사씨는 흔한 성이 아닌데다 같은 점창파 출신에 사용하는 무공마저 비슷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

“그렇다면 사인기가 사효심의 아들이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것이다.”

“사효심은 벌써 오래전에 실종되었다면서요?”

“정확히는 십오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사효심은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의 상태였다. 당시 그의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이었으니 나이로 보아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리 사효심이라도 십오 년 만에 스물일곱이나 먹은 아들을 만들 수는 없겠지.”

“대체 사효심의 그 무공이 무엇입니까?”

“무림인들 중 누구도 정확한 내막은 모른다. 다만 점창파의 비전무공 중 하나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

뇌일봉의 말에 낙일방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대답이 들려왔다.

“사인기가 펼친 것은 응조칠식경공의 운기공인 대응경일 겁니다.”

중인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뜻밖에도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던 석성이었다.

낙일방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오?”

석성은 양손으로 닭다리를 하나씩 들고 입 주위는 기름으로 범벅이 된 채로 낙일방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낙 소협은 내 말이 믿어지지 않소?”

이번에는 뇌일봉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노부도 믿지 못하겠네. 자네는 무림인도 아닌데, 어찌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석성은 뜯고 있던 닭다리를 아쉬운 듯 쳐다보다가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품속에서 깨끗한 손수건 하나를 새로 꺼내어 입 주위의 기름기를 닦았다.

“후우…. 좀 더 먹었으면 했는데, 우선 여러분들의 궁금증부터 해결해 줘야겠군요.”

“어서 말해 보게.”

“별거 아닙니다. 사인기는 점창파의 당대 최고수인 싱응검협 조빙심과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사이입니다.”

그 말에 뇌일봉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있나? 조빙심과 같은 항렬이라면 점창파의 일대제자가 아니라 장로뻘인데, 겨우 스물일곱 살짜리 장로는 들어 본 적이 없네.”

뇌일봉의 말마따나 이십 대 장로는 점창파 같은 명문정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점창파 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다는 조빙심조차도 당시에 그의 나이가 서른셋이었다.

석성은 기름기로 범벅이 된 손수건을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손수건을 꺼내 목덜미의 땀을 닦아냈다.

“뇌 대협도 참 성미가 급하시군요. 제가 언제 사인기가 조빙심과 같은 항렬이라고 했습니까?”

“방금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사인기의 항렬은 점창파의 일대제자입니다. 다만 그는 특혜를 받아 조빙심의 사부에게서 대응경을 전수받은 것이지요.”

조빙심의 사부라면 점창파의 최고 어른인 점창일독 백리궁을 말한다. 백리궁은 나이가 백 세에 가까운 인물로, 점창파뿐 아니라 강호에서도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뇌일봉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인기의 신분이 무엇인데 점창파에서 그에게만 그런 특혜를 베푼단 말인가?”

항렬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에게 절학을 알려주는 것은 명문정파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석성의 대답은 중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사인기는 십랑방자 사효심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사효심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은 후 사효심의 아버지가 새로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지요.”

사효심은 점창파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그가 나중에 무슨 이유로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점창파 내에서 그의 위치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것이었다. 또한 사효심은 백리궁의 제자였다. 다시 말해서 조빙심은 사효심의 사제였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사효심의 동생인 사인기도 사효심과 마찬가지로 백리궁의 제자가 되었어야 옳았으나, 하필이면 그의 어머니가 백리궁의 조카녀라서 항렬을 무시하고 제자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리궁은 나중에 따로 사인기에게 응조칠식경공만을 가르쳐 준 것이지요.”

뇌일봉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대응경이란 말은 처음 듣는군. 그건 무슨 무공인가?”

“응조칠식경공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백리궁이 창안한 독문무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응조칠식경공은 워낙 동작이 화려해서 무림인들이 쉽게 알아보지만, 대응경은 기공의 일종이기 때문에 눈썰미가 탁월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지요.”

“…….!”

“응조칠식경공도 무섭지만 진짜 무서운 건 바로 이 대응경입니다. 대응경을 완벽하게 익힌 상태에서 응조칠식경공을 펼치게 되면 어떠한 무공으로도 격중시키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당년에 사효심이 강호무림에서 그토록 놀라운 위력을 떨쳤던 것도 사일검법과 현천진기뿐 아니라 응조칠식경공과 대응경을 완벽하게 익힌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뇌일봉은 부지불식간에 신음을 흘렸다.

대응경에 응조칠식을 더한 상태에서 현천진기를 섞는 사일검법을 펼치는 사효심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자 모골이 송연해졌던 것이다.

뇌일봉뿐 아니라 종남파의 고수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에 비하면 요새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조빙심은 응조칠식경공에 비해 사일검법의 조예가 다소 떨어지는 편입니다. 점창파로서는 아쉬운 일이지요.”

석성이 마치 품평회라도 하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하자 뇌일봉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용케도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군.”

석성은 볼살을 출렁거리며 웃었다.

“헤헤… 제 직업이 바로 장사꾼 아닙니까? 장사꾼은 모름지기 정보가 생명인지라 제가 남들보다 귀가 넓은 편이지요.”

“단순히 귀만 넓은 것 같지는 않군.”

뇌일봉이 무언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석성은 더욱 크게 웃어 보였다.

“헤헤… 저도 제 스스로가 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뇌 대협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저 일개 장사꾼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도 가끔은 제가 장사꾼인 게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게 저의 참모습인 걸 어쩌겠습니까?”

“사인기의 정체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구양전월과 그런 내기를 했나?”

석성은 한 방 먹었음을 알려주려는지 양쪽 어깨를 크게 들썩거렸다.

“어이구… 귀도 밝으시군요. 구양전월과 나눈 이야기를 다 들으셨습니까?”

“강호인들의 호기심을 무시하지 말게. 자네 두 사람이 그렇게 바짝 붙어서 속닥거리는데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석성은 움찔하여 진산월을 힐끔거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전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노부보다 귀가 밝은 몇 사람은 들었을 걸세.”

“이거 민망스럽군요. 그 내기는 저의 작은 도락에 불과하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뇌일봉은 그가 낙일방을 두고 내기를 건 것을 굳이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장사꾼에게 강호인의 도리를 바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네는 사인기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양전월의 내기에 순순히 응했나?”

석성은 다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히죽 웃었다.

“저의 영업 비밀 하나가 공개되는군요. 제가 알고 있다는 걸 상대가 모르는 것만으로도 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패를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내기에 응하지 않는다면 장사꾼 자격이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사인기의 내력을 알면서도 그가 낙일방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단 말인가?”

“제 말씀을 들었다면서 왜 자꾸 곤란한 질문만 하십니까?”

“말 돌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보게. 정말 낙일방이 승리할 거라고 확신했나? 그러지 않았다면 자네 성격에 내기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

“어이구, 이제 제 성격까지 꿰뚫어 보시는군요.”

“노부를 화나게 할 셈인가?”

뇌일봉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제야 석성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재빨리 입을 나불거렸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심장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제가 믿는 건 구양전월에게도 말했다시피 진 장문인이었습니다.”

뇌일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산월을?”

“아까 모두 들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진 장문인이 절대적인 승산이 없다면 낙 소협을 비무에 내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설사 그 상대가 대응경을 익힌 점창파의 숨겨진 고수라고 해도 말입니다.”

뇌일봉은 석성의 말의 진실 여부를 파악하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으나 알 수 있는 건 석성이 정말 보기 드물게 뚱뚱하며 땀을 엄청나게 흘리는 체질이라는 것뿐이었다. 결국 뇌일봉은 쓴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자네가 그렇게나 그를 믿고 있다니 의외로군. 부디 자네 말이 사실이길 바라겠네.”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제 말에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걸 천지신명께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자네는 아무도 믿지 못한다며?”

“천지신명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석성의 웃음 띤 말에 뇌일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낙일방이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진산월이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낙일방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사인기가 펼친 대응경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느냐?”

낙일방의 얼굴에 무거운 빛이 감돌았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정말 괴이하고 신묘해서 단순히 두 주먹만으로 제압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움직임에 사일검법이 가세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되겠지요.”

낙일방은 한 줄기 고소를 머금었다.

“사실 조금 전에 사인기에게 사일검법을 펼쳐 보라고 했지만, 막상 그가 승낙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습니다. 정면으로 맞서 보자고 결심했지만, 만약 싸웠다면 제가 패했을 겁니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조금 전에 비무를 계속했다면 결국 이기는 사람은 바로 너였을 것이다.”

낙일방은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주시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인기의 대응경만큼이나 너의 심후한 공력도 사인기에게는 커다란 벽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상태에서라면 누구의 체력이 더 강하고 대전 경험이 풍부한지로 승부가 가려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가지는 사인기보다는 네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들이지.”

낙일방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가요?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한 것이로군요?”

“하지만 다음에 싸우게 되면 네가 패할 것이다.”

낙일방의 환해졌던 얼굴이 그 상태 그대로 굳어졌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사인기는 오늘 네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공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반드시 네 공력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의 대응경에 대한 대비책이 아직 없으니 당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지.”

낙일방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역시 그렇군요.”

낙일방은 그동안 적지 않은 강호 경험을 쌓으면서 침착하고 담대한 성격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쉽게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런 낙일방이 귀여운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가 너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한다면 너도 그에 대한 대비책을 연구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의 대응경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고민하는 것은 사인기의 움직임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변을 제압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낙일방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진산월의 입을 주시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는 다변이다. 상대의 변화보다 더욱 많은 변화를 일으키면 어렵지 않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낙일방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취하기 힘든 방법이로군요.”

“둘째는 무변이다. 상대의 움직임에 동요하지 않고 그 움직임 속의 허점을 파악해 내면 무난히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제 안목이 아직 그 정도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낙일방이 계속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진산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세 번째는 강격이다. 상대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지. 아무리 무궁한 변화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자신을 압도하는 강한 힘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낙일방은 눈을 크게 뜨며 손뼉을 세게 마주쳤다.

짝!

“바로 그겁니다. 그거야말로 제가 원하는 방식입니다.”

“강격으로 변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대보다 월등히 강한 내공이다.”

“그건 자신 있습니다.”

“둘째는 반드시 상대를 꺾고야 말겠다는 필사의 각오다.”

“저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산월은 낙일방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대가 어떤 변화를 일으켜도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이다. 마침 나는 부동심을 키우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알고 있지.”

낙일방은 황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다. 오늘부터 너는 하루에 세 번씩 비무를 하도록 해라.”

낙일방은 멍하니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누구와 비무를 합니까?”

진산월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었다.

“전흠, 뇌대협, 그리고 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