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7화
제 215장 비전행공
청의방과 비무가 벌어진 지 삼 일이 지났는데도 진산월 일행은 여남에 머물러 있었다. 전흠이 좀처럼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중산은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전흠의 상태를 살피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장호의 칼에 격중될 때 심맥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가슴의 상처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이 쓰이는군요.”
뇌일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도기에 당했다고 이토록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리는 없는데.. 혹시 그들이 독을 사용한 것은 아닐까?”
“중독된 증상은 없습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해독할 방법이라도 찾아볼 텐데 지금은 원인을 모르겠으니 더욱 난감한 형편입니다.”
“이것 참… 아무튼 전흠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당분간 비무행을 하지 못하겠구나.”
뇌일봉의 말은 당연한 것 같았는데, 의외로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비무행은 계속될 겁니다.”
뇌일봉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런 상태에서도 비무행을 계속 하겠다는 말이냐?”
동중산이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진산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틀 후에 길을 떠날 계획입니다. 다음 목표는 애초에 정한대로 정양에 있는 흑기보가 될 것입니다.”
뇌일봉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까지 전흠이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마차에 침상을 설치할 생각입니다.”
“설사 깨어난다고 해도 그의 몸으로 비무는커녕 먼 길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것이냐?”
“유월 일일까지 안휘성을 거쳐 호북성으로 가기에는 일정이 빠듯합니다. 여남에서 오 일을 지체하게 되면 저희들에게 더 머뭇거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비무행을 중지하든가, 아니면 늦어도 이틀 후에 길을 떠나야 합니다.”
뇌일봉은 진산월의 생각이 확고한 것을 깨닫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로구나.”
“애초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전흠이 빠진다면 비무에 나설 인원이 모자라지 않겠느냐?”
진산월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전흠의 몸을 회복할 때까지는 중산이 대신 나설 겁니다.”
“그의 머리는 나도 인정한다만, 무공은 아무래도 손색이 있지 않겠느냐?”
“저와 일방이 조금 더 힘을 내면 됩니다.”
그 말에 뇌일봉은 문득 고개를 돌려 낙일방을 쳐다보았다. 낙일방은 아직도 며칠 전의 비무에서 입은 상처가 낫지 않아 이마에 붕대를 메고 있었다. 그런데도 뇌일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태연하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뇌 숙부. 장문사형과 저,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두 사람만 패하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 비무를 벌인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뇌일봉은 그의 태평해 보이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다른 종남파 고수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 중 누구도 걱정스런 빛을 띠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사려 깊고 조심성이 많은 동중산조차도 비무 자체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단지 전
흠의 부상이 빨리 회복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주인은 느긋한데 객이 먼저 나서서 법석을 떤 격이로군.’
뇌일봉은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동중산이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청의방과의 비무는 득과 실이 뒤섞여서 정확한 손익계산을 하기가 힘들군요. 장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얻은 건 세 가지이고 잃은 건 하나이니 이번 일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이득을 본 셈이다.”
“잃은 건 알겠는데, 얻은 게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은 것 같습니다.”
“첫째로 본 파의 비무행이 단순한 과시욕이나 허장성세가 아니라 강호무림을 향한 진지한 도전임을 무림인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 점은 동중산도 선뜻 수긍을 했다. 청의방과의 비무는 강호 거파들간의 비무치고는 지나치게 유혈낭자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전흠은 물론이고 낙일방의 부상도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청의방의 타격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들 문파의 최고고수 두 사람이 당분간 활동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중상을 입었고, 방주인 곽존해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비무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종남파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비무에 임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본 파의 무공 수준을 강호에 널리 알렸다는 것이다. 앞으로 웬만한 수준의 고수들로는 본 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인정할 것이다.”
확실히 청의방과의 비무에서 종남파 고수들이 보여준 무공은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들과 동행했던 뇌일봉조차도 전흠과 낙일방의 진정한 무공 실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더구나 하남성의 유력한 문파인 청의방의 방주를 불과 십초 만에 격파한 진산월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셋째로는 개인적인 이득이다.”
“개인적인 이득이라니요?”
“이번 비무에 나섰던 자들은 크든 작든 얻은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진산월의 마지막 물음은 낙일방을 향한 것이었다. 낙일방은 눈을 반짝이며 선뜻 시인을 했다.
“사실 조만간 장문사형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눈치채고 계셨군요. 저는 이번에 태인장을 익힐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그 말에 동중산이 반색을 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태인장은 종남파 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동경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태인장은 한때 종남파가 천하에 자랑했던 최고의 장공으로, 대성할 수만 있으면 강호무림의 어떠한 장공과 자웅을 겨루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알려진 최고의 절학이었다.
하나 이백 년 전의 소선 우일기 이후 종남파에서 태인장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인장의 구결은 남아 있었지만, 특이한 운용 방법이 실전되어 버린 것이다.
한때 종남파 부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십오대 장문인 풍운신룡 담명이 오랜 참수 끝에 태인장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간만 넉넉했다면 아마도 담명은 백년 만에 처음으로 태인장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토굴 사건으로 인해 그가 자결하는 바람에 그 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진산월 또한 몇 차례나 태인장을 익히려 했으나 도저히 낙일방이 입수한 비급에 적힌 방법대로 내공이 운용되지 않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나마 종남파 고수들 중 가장 먼저 태인장을 접하고 오랫동안 수련한 낙일방조차도 태인장의 초식 변화만을 절반 정도 터득했을 뿐 실제로 태인장을 펼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공이 움직여야 익히든 말든 할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낙일방이 태인장의 운용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며칠 전부터 특이한 행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본 파의 무공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여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게 태인장의 행공이었느냐?”
진산월의 물음에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겠느냐?”
“사실 이번에 곽승의 진공검을 상대할 때 마지막의 결정타로 옥잠지를 사용할지 아니면 낙뢰신권의 일점천뢰를 쓸지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무심결에 오른손으로는 옥잠지의 공력을 끌어올리고, 왼손으로는 천단신공의 폭섬결을 운용했습니다. 폭섬결로 펼쳐야 일점천뢰의 진정한 위력이 나타나거든요.”
중인들은 모두 낙일방의 말에 정신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공력을 끌어올리자마자 몸속의 내공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치는 겁니다. 이거 큰일났구나 싶어 다급한대로 먼저 옥잠지를 발출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폭섬결의 공력을 거두자마자 금시라도 폭발할 듯했던 내공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리는 겁니다. 당시에는 비무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날 밤 숙소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옥잠지와 폭섬결의 공력을 끌어올려 보았습니다.”
“그건 너무도 경솔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
낙일방은 멋쩍게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그때는 옆구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것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밤을 꼬박 새울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두 공력을 끌어올렸는데 그때와는 달리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저도 이상해서 몇 번이나 공력을 끌어올렸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반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무시에는 오른손에 옥잠지의 공력을, 왼손에는 폭섬결을 운용했었는데, 그때는 오른손에 폭섬결을, 왼손에 옥잠지를 운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익은 순서대로 운용하고 있었던 거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동중산이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렇다면…”
낙일방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래요. 비무 때처럼 오른손에 옥잠지를 끌어올리고 왼손에 폭섬결을 운용하자 다시 내공이 미친 듯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겁이 덜컥 나서 곧 공력의 운용을 취소했지만, 몇 차례 반복해도 내공이 요동치기만 할 뿐 역류하거나 폭발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계속 그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이렇게 내공이 들끓은 상태에서 장력을 펼치면 어떠한 위력이 나타날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어요.”
동중산은 황급히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날 밤에 몰래 밖으로 나가 인적이 없는 강변에서 두 개의 공력을 운용하여 장력을 날려보았어요.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어요. 단순히 일장을 내뻗었을 뿐인데도 사람의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바위가 송두리째 박살나고 말았으니까요.”
동중산의 외눈이 크게 띄여졌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 정도 위력이라면 능히 천하제일장이라 할 만 합니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어요. 장력을 펼친 순간 들끓었던 내공이 손바닥을 따라 모조리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 같았거든요. 결국 일장을 펼치고는 진력이 바닥나서 한참 동안이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어요. 결국 그건 일회용 무공인 셈이었지요.”
“그것이 태인장이었습니까?”
낙일방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몸이 회복된 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만약 한 번에 진력이 바닥나지 않고 장력의 위력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태인장을 떠올렸어요. 태인장의 비급에 적힌 방식이라면 한 번에 진력이 모조리 빠져나가지 않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태인장의 구결을 암송해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토록 꼼짝도 않던 태인장의 행공이 이루어진 거에요.”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발했다.
“아! 강호의 절학들 중에는 특이한 행공법을 모르면 익힐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했는데 본 파의 태인장이 그런 종류였군요.”
“그래요.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으로, 우연히 끌어올린 두 가지 공력의 운용법이 바로 그토록 찾아 헤맸던 태인장의 행공법이었던 거지요.”
동중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연이라고 해도 그 작은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한 낙 사숙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태인장의 행공법은 영원히 미궁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진산월이 동중산의 말을 거들었다.
“중산의 말이 맞다. 태인장의 행공법을 알아낸 것은 전적으로 너의 공이다.”
낙일방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닙니다. 태인장의 행공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태인장을 온전히 펼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행공법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비급에는 아무런 언급도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 어렵지 않다는 점 때문에 비급에 적기보다는 은밀히 믿을 수 있는 자에게만 구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인정받은 자들만 익힐 수 있다고 알려진 것일 테고.”
“그래도 겨우 이런 간단한 운용법 때문에 지난 이백 년간 아무도 태인장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공연히 억울한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무엇이든 알고 나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 법이다. 간단하다고 했지만, 본 파의 많은 무공들 중 옥잠지와 폭섬결을 오른손과 왼손에 나누어 끌어올려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익힐 수 없으니, 비전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낙일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답지 않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전에 담명 조사께서도 이 방법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그분이 불의의 변을 당하지만 않으셨어도 본 파는 진작에 태인장을 복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진산월도 그 점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종남파의 절학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전이란 문파의 절학을 보호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절학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위험천만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가 오래된 명문정파일수록 비전에만 의존하지 않고 알려진 무공을 발전시키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중인들이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장문인!”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손풍이었다.
동중산은 그의 버릇없는 행동에 무어라고 한마디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안으로 들어온 손풍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던 것이다.
“큰일났습니다. 수웅이… 아니 유 사형이 납치당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중인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웅이 납치당하다니…”
손풍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제가 유 사형과 함께 여남의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웬 이상한 죽립인이 자꾸 따라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죽립인에게 무어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그 죽립인이 갑자기 유 사형의 팔을 잡더니 쏜살같이 달아나버렸습니다.”
동중산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차근차근 말해보게. 소웅은 뒤쪽의 후원에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언제 자네와 거리 구경을 나갔단 말인가?”
손풍은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그게… 나 혼자 방안에 있으려니 너무 갑갑해서 산책이라도 나가려고 방을 나왔다가 유 사형이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걸 보게 되었소.”
“그래서?”
“자기 키 만한 장검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 잘 휘두르기에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당과라도 사줄 생각에 거리로 나갔소.”
“자네 혼자 말인가?”
“당연히 유 사형도 함께 나갔지요.”
동중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웅이 무공을 익히다 말고 당과를 사먹겠다고 밖으로 나갔단 말인가?”
손풍이 답답하다는 듯 자기의 가슴을 탁탁 쳤다.
“유 사형이 사먹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사주겠다는 거였소.”
그제서야 동중산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자네가 억지로 소웅을 끌고 나갔다는 말이로군.”
동중산의 눈빛이 냉엄해지자 손풍은 움찔거리다가 한풀 꺾인 음성으로 말했다.
“쪼끄만 게 어찌나 고집이 세던지 내가 몇 번이나 타일렀는데도 자기는 계속 무공을 익혀야 하니 나 혼자 나가라고 하지 않겠소? 홧김에 그가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서 것을 빼앗아 달려갔더니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내 뒤를 따라왔소.”
동중산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멀거니 손풍을 쳐다보았다.
“혼자 나가서 사오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소웅을 데리고 가려고 애를 썼나?”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 거리를 혼자 무슨 재미로 돌아다닌단 말이오? 그래도 사형이라고 내 딴에는 신경을 써서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으로만 골라 다녔소. 그런데 무슨 아이가 군것질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구려.”
“납치 되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들어보시오. 내가 유 사형을 데리고 여남의 거리를 구경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누군가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란 말이오. 내가 그런 쪽으로는 보통 예민한 게 아니지 않소? 물건을 사는 척하며 슬쩍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웬 죽립을 깊게 눌러쓴 자가 거리 한편에서 우리를 뚫
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소.”
“그래서?”
“그래서는? 당장 그자에게 달려가 왜 우리를 훔쳐보느냐고 호통을 쳤지.”
동중산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자가 뒤를 쫓아왔으면 숙소로 돌아오면 될 일이 아닌가?”
“난 누가 뒤를 쫓아오면 찝찝해서 견디지 못하는 성미요.”
“알았네. 빨리 소웅이 납치당한 경위를 말해보게.”
“지금 말하고 있지 않소? 자꾸 엉뚱한 말만 하게 하고는…”
손풍은 구시렁거리다가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험악해지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 호통을 듣자 그자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소. 그러더니 나보고 종남파의 제자냐고 묻는 게 아니겠소? 당연히 그렇다고 하자 그자가 갑자기 불쑥 손을 내밀었소. 나는 악수라도 하려는 줄 알고 마주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자는 다시 손을 거두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거였
소.”
“그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나?”
“아직 유운비수도 배우지 않았단 말인가? 뭐 그런 말 같았소.”
그때 묵묵히 손풍의 말을 듣고만 있던 진산월이 불쑥 물었다.
“그가 분명히 유운비수라고 말했느냐?”
손풍은 움찔하여 동중산을 대할 때와는 달리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장문인.”
진산월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풍은 목이 타는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그자는 그 뒤로 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유 사형을 쳐다보았소. 그러다 유 사형이장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아까처럼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소.”
동중산이 황급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유 사형은 옆으로 움직이더니 장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그자의 손을 탁 쳤소. 이렇게 말이오.”
손풍이 유소웅의 흉내를 내려는 듯 왼손을 아래에서 위로 쳐들자 낙일방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영양괘각이로군.”
손풍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낙일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라.”
손풍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차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죽립인은 오른손을 비틀어 유 사형의 손목을 잡으려 했소. 유 사형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손목을 잡히기는 싫었던지 다시 옆으로 움직이며 이번에는 팔꿈치로 그의 손등을 찍으려 했소. 죽립인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손그림자가 여러 개로 번져 보이더니 유 사형의 손목이 어느새 그의 손에 잡혀 있었소.”
이번에도 낙일방이 중얼거렸다.
“낙성연적을 삼환투일로 제압했군.”
손풍은 그를 힐끗 쳐다보다가 그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자 내심 투덜거렸다.
‘제길.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든지. 꼭 내가 한마디 할때마다 말을 막고 있으니…’
손풍은 아직 장괘장권구식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낙일방이 말한 것들이 모두 장괘장권구식의 초식들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손풍은 속으로 불만을 삭이고는 재빨리 입을 놀렸다.
“유 사형은 그제서야 검을 사용할 생각을 했는지 검을 뽑으려 했으나, 죽립인이 먼저 유 사형의 마혈을 제압했소. 그리고는 그대로 유 사형을 안고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린 거요.”
동중산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자네는 무얼 했나?”
“무얼 하긴, 열심히 지켜봤지. 아무튼 그자는 무공을 익힌 고수란 말이오. 내가 따라가려 했으나 그자의 뒤통수도 제대로 보지 못했소.”
동중산이 재차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죽립인이 떠나기 전에 다른 말은 없었느냐?”
손풍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뼉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제가 멍하니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귓전으로 깨알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어라고 했느냐?”
“오늘 저녁에 찾아올 테니 술상을 봐놓으라고…….”
손풍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말을 해놓고도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았다. 수고했으니 네 방에 가서 쉬도록 해라.”
손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유 사형을 구하러 가지 않을 셈이십니까?”
“그럴 필요 없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동중산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네 방으로 가세.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겠네.”
동중산이 아직도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 손풍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자 낙일방이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군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본 파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남은 아닌 것 같은데…….”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있는데,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구나.”
“누굽니까?”
진산월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잠시 후에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혹시라도 내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