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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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9화


제 217장 여심난측

정양으로 가는 길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여남에서 예정보다 한참을 더 지체하기는 했으나 종남파 고수들의 마음은 흥겹기만 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던 전흠이 부상 전보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낙일방이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그야말로 진정한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중인들의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했던 며칠 전을 되돌아보면 상전벽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모든 게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날씨 또한 화창해서 파란 하늘이 중인들의 마음을 더욱 상쾌하게 만들었다.
뇌일봉도 기분이 좋은지 모처럼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낙일방에게 농을 던졌다.

“어떠냐, 진짜 고수가 된 기분이? 세상이 전부 자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낙일방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뇌 숙부께서 어찌 아십니까?”

뇌일봉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 전하에서 임독양맥을 타통한 자가 너 하나뿐인 줄 아느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임독양맥을 타통한 자가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세상이 전부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라고 하더구나.”

낙일방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강호를 진동시키는 이름난 고수가 되었으면서도 쑥스러움을 느낄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습관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분이 들기는 했습니다.”

“그것 봐라. 하지만 조심하거라. 그 기분에 너무 오래 취했다가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만심에 빠지게 되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낙일방은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분은 누구십니까?”

“임독양맥을 타통한 후 천하가 전부 눈 아래로 보였다는 그 사람 말이냐?”

“예.”

뇌일봉의 얼굴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너는 혹시 ‘신창조화 의기천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낙일방의 두 눈에 신광이 번쩍였다.

“물론입니다. 그건 바로 강호제일의 호한이며 천하제일창인 환상제일창 유중악 대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 유중악은 십이 년 전,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창의 극의를 깨달아 무림구봉의 자리에 올라섰지.”

유중악의 이름이 나오자 낙일방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의 이목이 모두 뇌일봉에게 집중되었다. 그만큼 유중악은 강호의 무인들에게는 관심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는 무림구봉 중의 창봉으로 유명했지만, 사실은 철담호협하는 성품과 폭넓은 교우 관계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한마디만 해도 그를 위해 달려와 줄 고수들이 어지간한 방파의 수보다 많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인물됨이 공정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아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림구봉에서 그의 무공은 중간 정도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강호인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낙일방이 약간은 들뜬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뇌 숙부께선 유 대협과도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친분 정도까지는 아니고 곽자령을 만나러 갔다가 몇 번 그와 술자리를 같이했을 뿐이다.”

곽자령은 팔비신살이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안탕산의 괴걸로, 임장홍의 살아생전에 그들 세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 정도면 친구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그런데 유 대협은 어떤 인물입니까?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너무 좋은 이야기만 알려져서 긴가민가 할 때도 있습니다.”

뇌일봉은 빙긋 웃으며 분명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그는 소문 그대로의 인물이다. 인품은 옥수와 같고, 언행은 태산과 같으며, 마음은 명경과도 같았지.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정말 즐거웠었다.”

낙일방의 두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정말 사귀어보고 싶은 사람이로군요.”

“그래서 모든 무림인들이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유 대협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정말 창을 한번 내지르면 풍운이 변색하고 환상 같은 조화가 일어납니까?”

뇌일봉은 무언가를 고대하는 듯한 낙일방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와는 술자리에서 술 몇 번 같이 마신 것이 전부인데 내게 무얼 더 바라느냐? 그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나도 본 적이 없구나.”

낙일방은 조금 실망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다시 질문을 던지려 했다.
그때였다. 그들이 가고 있는 관도의 저편에서 자욱한 먼지구름과 함께 몇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두두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질주해오는 기마의 수는 모두 네 기였다. 그들은 모두 먼지를 막는 피풍의를 전신에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이남이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 일행은 관도의 한편으로 물러서서 기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한데 막 진산월 일행을 지나치던 기마들 중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앗?”

그와 함께 기마 중 하나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히히힝!
나머지 세 마리의 말은 달려오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오륙 장쯤 더 달려가다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제일 먼저 멈춰선 말 위에 있던 인물이 종남파 고수들에게로 다가왔다.
동중산이 재빨리 앞으로 나와 말을 막아섰다.
말 위에 있던 인물은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피풍의를 벗었다. 그러자 화려한 용모의 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를 본 동중산은 흠칫 놀랐다.

“누군가 했더니 누 소저였구려.”

그녀는 뜻밖에도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인 옥봉 누산산이었다. 누산산은 먼지로 뒤덮인 피풍의를 탁탁 털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들을 찾아가던 참이었는데 운이 좋았네요.”

의외의 말에 동중산의 외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소저가 우리를 찾고 있었다니 놀랍구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쓸 거 없어요.”

누산산은 도도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치더니 이내 진산월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진 장문인, 오랫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진산월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낙양에서 만난 지 보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겠소?”

“어머, 있지 않구요. 그 사이에 중원무림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고 계시지 않아요.”

그녀가 깜직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으나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오.”

누산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쳇, 무뚝뚝하기는. 요새 이름을 좀 얻었다고 내가 우습게 보인단 말이지? 나같이 예쁜 여자가 애교를 부리면 미소라도 보여주는 게 남자의 도리 아닌가?’

그녀가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세 사람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산아야, 아는 사람들이냐?”

그들 중 체구가 건장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인이 진산월 일행을 슬쩍 살피며 누산산에게 물었다.

“숙부님, 이 사람들은 종남파의 고수들이에요. 그리고 이분이 바로 우리가 찾던 종남파의 장문인이시구요.”

중년인은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말에서 내려 포권을 했다.

“반갑소. 나는 천봉궁의 팔대신장에 속해 있는 추혼무상 갈혁이라 하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마주 인사를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중년인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남녀 중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내 동생인 갈휘라 하오.”

갈혁보다 서너 살 젊어 보이는 남자는 빙긋 웃으며 말없이 포권을 했다. 그도 또한 팔대신장 중 한사람이며, 그의 별호는 소면무상이었다. 이들 두 형제는 천봉궁에서 쌍무상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총관인 차복승이 수족처럼 아끼는 인물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여인은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한쪽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갈혁이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어서 와서 인사를 드리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여인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채 진산월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반갑소, 엄 소저. 서안에서 보고 처음이구려. 그때 보내준 음식은 아주 잘 먹었소.”

그녀의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아예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여섯째인 남봉 엄쌍쌍이었다. 예전에 진산월이 낙일방과 함께 서안의 이씨세가에 갔을 때 엄쌍쌍은 지일환의 편으로 음식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진산월은 지금 그에 대한 사례를 한 것이다.
하나 당시의 일에는 남녀간의 미묘한 일이 겹쳐 있어서 단순히 음식만을 보낸 상황은 아니었다.
엄쌍쌍은 거의 기어들어가듯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살짝 고개를 들어 종남파의 고수들을 살폈다. 그러다 그들 중 낙일방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밝아졌다.
낙일방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별생각 없이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수줍음이 많지? 저런 성격으로 용케도 강호를 행도하고 있구나.’

낙일방은 그녀가 너무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자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다. 천봉팔선자 중 그나마 그녀에 대한 인상이 가장 좋았기에 모처럼 인사를 했는데 홍시처럼 얼굴을 붉힌 채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공연히 자기 자신마저 쑥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두 일행간의 인사가 끝나자 갈혁은 누산산을 향해 말했다.

“진 장문인께 배첩을 드리도록 해라.”

누산산은 퍼뜩 생각이 난 듯 품속에서 곱게 접은 한 장의 배첩을 꺼내들었다. 배첩은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한쪽에 금시라도 날아오를 듯한 봉황이 수놓아져 있어 언뜻 보기에도 평범한 배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공주님께서 진 장문인께 직접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남들에게 보이지 말고 혼자만 조용히 펼쳐보세요.”

누산산이 두 손으로 배첩을 내밀며 입을 열자 진산월의 얼굴에 모처럼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단봉공주가 보냈단 말이오?”

“본 궁에 그분말고 공주가 또 있는 줄 아세요?”

누산산은 공연히 기분이 나빠져서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가 이내 후회를 했다. 갈혁이 한쪽에서 험상궂은 얼굴로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갈혁은 추혼무상이라는 별호답게 성정이 사납고 까다로워서 천방지축 같은 그녀도 얼마쯤 꺼려하는 형편이었다. 그에 비해 동생인 갈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그녀가 삼촌인 누굉표 다음으로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진산월은 배첩을 받아들고 잠시 망설였다. 단봉공주는 삼 년 전의 소림사에서 잠깐 보았을 뿐인데, 그녀가 팔대신장과 천봉선자들을 보내 배첩을 전달해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뇌리에 문득 하나의 눈이 떠올랐다.
붉은 망사에 가려진 눈이었다. 그 눈을 본 순간, 진산월은 생전 처음으로 임영옥 외의 여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음성. 조용하면서도 한없이 그윽한 그 음성은 삼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은 줄 알았는데 단순히 그녀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떠올려지는 것을 보고 진산월은 속으로 씁쓸한 탄식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배첩을 내려다보았다. 배첩에는 사람의 마음을 앗을 듯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첩을 펼치자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한 아름다운 여인의 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만남을 청합니다. 승낙하신다면 이들을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짤막한 글귀 아래 ‘단봉’이라는 서명이 씌어져 있었다.
누산산이 남에게 보이지 말고 혼자 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진산월은 배첩을 다시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런 다음 누산산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소?”

누산산은 아직도 심통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단봉공주에 대한 일은 아무리 그녀라도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노군묘가 있어요. 그분은 그곳에 계셔요.”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동중산을 불렀다.

“이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마향현이 나온다. 알고 있느냐?

“예, 장문인.”

“나는 아무래도 그녀를 따라가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너는 다른 일행과 마향현으로 가서 가장 큰 주루에 머물러 있도록 해라.”

동중산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누산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그곳의 노군묘는 제법 크니까 이 정도 인원이 몰려가도 충분히 머무를 수 있어요.”

진산월은 다소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동행해도 괜찮소?”

“뭐 어때서요? 우리가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이대로 헤어졌다가는 저 소심하고 부끄럼만 많은 여섯째 언니는 평생 가도 낙일방인가 하는 녀석에게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할 거야. 그곳에서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만들어주면 아무리 목석같은 놈이라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지.’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자기 자신이 기특해 보였다.

‘정말 나같이 예쁘고 착한 동생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아무도 이런 걸 몰라주느냔 말이야.’

진산월은 도도하기 그지없어 몇 년 전만 해도 자신들을 버러지 보듯 하던 천봉선자가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누산산이 엄쌍쌍과 낙일방을 번갈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는 이내 그녀의 속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일방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겠구나. 이런 식의 미적거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산월은 낙일방이 엄쌍쌍과 정식으로 교제를 하든, 아니면 그녀의 은근한 연정을 뿌리치든 결정을 내릴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산산의 제의를 선뜻 승낙했다.

“알겠소.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소.”

그제서야 누산산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절 따라오세요.”

몸을 돌리던 그녀는 슬쩍 갈혁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제멋대로 내린 결정에 갈혁이 딴지라도 걸까봐 은근히 걱정했으나, 갈혁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뿐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웬일이람? 내가 무슨 행동만 해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꾸중을 하더니… 진 장문인이 있으니 신경이 쓰이나 보지?’

그녀는 속으로 혀를 날름거리고는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군묘는 태상노군을 모시는 도교의 사당이었다.
중원의 도처에 노군묘가 있지만, 이곳의 노군묘는 유달리 크고 화려했다. 아마 하남성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큰 규모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상시에는 노군묘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향화객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화려한 붉은빛 단청으로 치장된 건물들 앞에 향로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노군묘의 중앙 공터는 늘 인파로 북적거렸었는데 오늘은 몇 사람만이 조촐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공터의 한편에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붉은색 향차가 매어져 있었다. 향차의 사방 벽은 정교하게 새겨진 봉황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고, 입구는 은은한 붉은 빛깔의 진주 주렴이 매달려 있어 그야말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사치스럽다기보다는 은은한 품위가 느껴지는 것은 벽에 새겨진 봉황 문양의 신비로움 때문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노군묘로 들어서자 중앙 공터에 서성거리고 있던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앞을 막아섰다.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서 있는 것 같아도 그들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누산산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이분들은 종남파의 진 장문인과 일행분들이에요.”

앞을 막아선 인물들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하고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버렸다. 그들의 행동이 어찌나 표횰하고 민첩했던지 사전에 치밀하게 연습이라도 한 것 같았다.

“저들은 공주님을 호위하는 십이태세들이에요. 열두 명 중 여섯 명이 오늘 이곳으로 따라왔지요.”

누산산은 묻지도 않았는데 그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노군묘의 중앙에 있는 공터를 지나자 몇 채의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진산월 일행을 안내했고, 누산산과 갈혁 등은 단봉공주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그들과 헤어졌다.
진산월 일행이 안내된 곳은 노군묘의 후원에 자리한 널찍한 단층짜리 전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듯 방마다 태상노군을 모신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전각에는 모두 다섯 개의 방이 있어서 일행들은 비교적 넉넉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진산월이 단봉공주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난 늦은 오후였다. 이번에 그를 안내한 사람은 천봉팔선자 중의 영봉 금교교였는데, 그녀를 보자 진산월은 문득 삼 년 전에 처음 단봉공주를 만날 때도 그녀가 옆에 있었음을 떠올리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금교교는 좀처럼 표정이 없던 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르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산 매의 말로는 진 장문인께서 예전과는 달리 잘 웃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지금 보니 산 매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요.”

진산월이 이내 담담한 신색을 회복했다.

“별일 아니오. 단지 예전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을 뿐이오.”

금교교의 두 눈이 유달리 영롱하게 반짝였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저도 알고 싶군요.”

“별로 재미있는 일은 아닐 거요. 그저 타인의 강압 때문에 문파의 제자를 위협해야 했던 한심한 장문인에 관한 이야기니 말이오.”

금교교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두뇌가 총명한 그녀답게 진산월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 장문인이 한심하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군요. 그는 현명했고,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던 거에요.”

“살아남기 위한 미약한 몸부림일 뿐이었소.”

금교교는 침착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 장문인은 지금은 강호의 전설이 되었어요. 그러니 과거의 불행한 기억쯤은 포용하고 넘어갈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건 그가 판단할 일일 뿐,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할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소.”

금교교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진산월을 빤히 응시하더니 돌연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진 장문인은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졌군요. 그때는 아무리 험악한 상황에서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 하는데…”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금교교는 다시 가느다란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뒤로 단봉공주의 거처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단봉공주가 머물러 있는 곳은 노군묘의 후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전각이었다. 전각의 입구에 혼원전이라고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혼원전 입구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갈혁과 갈휘 형제가 나란히 서 있다가 진산월을 맞았다.
금교교는 진산월이 갈혁 형제를 따라 혼원전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조용히 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그녀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혼원전 안의 대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봉황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사람의 넋을 앗을 듯한 붉은색 봉황 한 마리.
봉황 무늬의 붉은 궁장을 차려입은 단봉공주는 한 마리 봉황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붉은색 망사가 씌워져 있었고, 뒤에는 예의 금포를 걸친 노파가 우뚝 서 있었다.
삼 년 전의 그 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이 눈이다. 한없이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면서도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 이 눈을 떠올릴 때마다 진산월은 임영옥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은 이 눈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상 이 눈을 보았는데도 전혀 가슴이 떨리거나 두근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눈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는데 대체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변한 것은 나인가, 그녀인가? 아니면 그저 세월이 흘러간 것일 뿐인가?
그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녀의 매혹적인 음성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진산월은 깨달았다. 변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임을.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여자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리고 음성에 매혹을 느끼는 풋내기 장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할 수 있었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길기는 길었다는 생각을 했소.”

그녀의 망사 너머로 비치는 눈빛이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지요. 문파를 이어받고 막 강호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장문인을 강호의 절정고수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진산월은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의도를 잠시 생각해보았으나 특별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고수가 된 것이 중요한 건 아니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요?”

“이제는 나도 내 앞가림을 할 줄 안다는 거요.”

단봉공주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도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 말뜻은 무엇인가요?”

“남들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이오.”

단봉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물었다.

“내가 진 장문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 반대요.”

“반대라면?”

“공주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내 자신의 판단만으로 행동한다는 뜻이오.”

단봉공주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진산월에게서 텅 빈 허공으로 이동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처음과 똑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진 장문인을 만나자고 한 건 한 가지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아무래도 진 장문인은 내 부탁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군요.”

“삼 년 전에 공주가 나를 만난 것은 봉황금사를 회수하기 위해서였소. 그래서 오늘 나를 만나려는 것도 비슷한 용무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소.”

단봉공주는 순순히 그의 말을 시인했다.

“내가 진 장문인을 만나자고 한 건 천룡궤 때문이에요.”

진산월은 그러지 않을까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그녀의 입에서 천룡궤의 이름이 나오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대체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기에 강호제일의 청부집단인 쾌의당뿐 아니라 자존심이 드높은 천봉궁에서마저 욕심을 낸단 말인가?
진산월은 자신이 차 한 잔의 대가치고는 너무 무거운 책임을 떠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차 한잔을 보수로 받았다는 말에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철혈홍안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진산월이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있자 단봉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룡궤를 달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묻고 싶은건 진 장문인이 천룡궤를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는 것이에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 물었다.

“내가 천룡궤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강호의 일은 실타래가 뒤엉킨 것과 같아서 어느 한쪽을 잡아끌다 보면 어느 쪽 실이 끌어당겼는지 알 수 있지요.”

“천룡궤가 나한테 있다는 건 알았으면서도 그것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는 모른단 말이오?”

“물건의 행방은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지만, 인간의 의도는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까요.”

“공주의 말뜻은 물건을 나에게 맡긴 자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천룡궤를 어디로 운반할 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오?”

“바로 그래요.”

“천룡궤를 원하지도 않는다면서 그 행방을 알려는 이유는 뭐요?”

“천룡궤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철혈홍안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왜 그녀의 의중을 그토록 알려고 하는 거요?”

이번에는 단봉공주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에 그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본 궁의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군요.”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말없이 허공을 올려다본 채 상념에 잠겨 있었고, 단봉공주 또한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진산월이었다.

“나에게 천룡궤를 맡긴 사람은 철혈홍안이 아닌 석가장주 석곤이오. 그는 구궁보의 모용 대협에게 천룡궤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소.”

단봉공주는 그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이 이토록 순순히 말해주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어요.”

“석곤은 나에게 천룡궤의 행방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소.”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로군요.”

“그 행간의 의미를 찾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닌 듯하오.”

“그렇지요. 아무튼 고마워요. 진 장문인 덕에 본 궁은 큰짐을 덜게 되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감사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나 진산월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가 막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은 사매가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나요?”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매서운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의 전신에서 거친 기세가 흘러나왔으나 단봉공주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에요. 사매인 임 소저가 다시 종남파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나요?”

진산월은 번뜩이는 안광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살기가 담겨 있지 않는 눈빛이었는데도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 같았다. 단봉공주의 뒤에 서 있던 금포노파가 두 눈을 부릅 뜬 채 그를 쏘아보았다.
단봉공주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조용한 시선으로 그의 따가운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진산월은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돌아올 거요, 반드시.”

“나는 진 장문인의 희망이 아니라 소원을 물어보고 있는 거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끊임없이 부딪쳤다. 마침내 진산월은 짤막하게 물었다.

“원한다면?”

단봉공주는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강호에서는 모용 공자가 천양신공을 대성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진산월은 그녀가 왜 갑자기 모용봉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했으나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천양신공이 대성을 앞두기는 했으나 아직 십일성에 머물러 있어요. 진 장문인이 사매를 되찾으려면 반드시 그가 천양신공을 십이성 완성하기 전에 그녀를 데려와야만 해요.”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그녀가 본 파로 돌아오는 것과 모용 공자가 천양신공을 대성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그건 진 장문인이 알아볼 일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진산월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망사 너머로 비치는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으나 그녀는 이내 눈 마저 감아버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명백한 축객령의 의미였다.
한동안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신형은 이내 대청을 벗어나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제서야 단봉공주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닫혔던 장막이 걷히든 보석처럼 영롱한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군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노파가 처음으로 주름진 입을 열었다.

“노신이 보기에는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무공이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군요. 조금 전에 기세를 일으킬 때는 노신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으니까요.”

“무공은 높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삼 년 전에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요.”

노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기풍도 많이 변했고, 제법 준수했던 얼굴도 비쩍 말라 볼품이 없어진 것 같은데.. 게다가 뺨에는 흉측한 칼자국까지 나 있어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왜 공주께서 그자가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노신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내가 말하는 건 외양이 아니라 내면이에요. 그의 내면은 여전히 예전처럼 고요하고 부드럽군요.”

노파의 주름진 시선이 단봉공주에게 향했다. 하나 그녀의 망사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돌연 노파는 어깨를 들썩이며 괴상하게 웃었다.

“끌끌… 남자 보는 눈이야 공주께서 이 늙어 꼬부라진 노신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그런데 그 녀석에게 굳이 모용 공자의 비밀을 말해줄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는 단지 그가 천룡궤의 목적지를 순순히 알려준 대가를 갚았을 뿐이에요.”

노파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끌끌… 물론 그러셨겠지요. 모용 공자와 그 종남파의 애송이 장문인 중 누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십니까?”

“아직은 모르겠어요. 다만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삼 년 전의 그때는 그의 가능성이 전무했는데, 이제는 모용 공자도 무작정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지요.”

노파는 잠시 그녀의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그놈이 정말 대단하긴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니 말이에요.”

단봉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한동안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녀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튼 이제 그 늙지도 않는 마녀의 의중을 알았으니 하루속히 구궁보로 가야겠군요. 그 애송이 장문인이 모용 대협을 만나기 전에 말입니다.”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난 종남파의 고수들은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밤사이에 천봉궁의 인물들이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던 것이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있지?”

밖에 아무런 기척이 없기에 나와 보았던 낙일방은 노군묘가 자신들이 머무르는 곳 외에는 텅텅 비어 있음을 알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껏 사람들을 불러놓고는 잠자는 사이에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이것은 완전히 종남파를 무시하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낙일방의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왔던 동중산이 천봉궁 고수들이 머물렀던 숙소를 뒤져보고는 이내 봉투 하나를 찾아냈다.
봉투 겉면에는 <진 장문인 친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동중산이 봉투를 진산월에게 가져가자 진산월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짤막한 문구가 적힌 붉은색 종이가 담겨져 있었다.

<진 장문인께 갑자기 본 궁에 급한 일이 생겨 인사도 없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잠깐이라도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인 줄은 아오나, 늦은 밤에 깊은 잠에 빠진 분들을 깨우는 것은 못할 짓이라고 생각되어 그냥 떠납니다. 진 장문인의 넓은 해량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금교교 올림>

진산월은 인사도 없이 떠날 정도로 천봉궁에 생긴 급한 일이란게 무엇일지 궁금해졌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들 문파의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굳이 자신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낙일방과 엄쌍쌍 사이의 일을 제대로 매듭짓기도 전에 그녀가 훌쩍 떠나버린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데 낙일방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준수한 얼굴에 붉은기가 감돌면서 좀처럼 평정을 찾지 못하고 흥분해 있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태도였다. 낙일방의 그런 모습을 힐끔거리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낙일방 또한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알고는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진산월이 참지 못하고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이리 오너라.”

“예, 장문인.”

동중산이 다가오자 진산월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제 일방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동중산은 외눈으로 낙일방을 힐끔거렸다. 낙일방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으나 진산월이 쳐다보자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동중산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장문인께서도 아시게 될 테니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낙 사숙.”

낙일방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산월이 더욱 영문을 몰라 할 때 동중산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장문인께서 단봉공주를 만나러 가신 사이에 천봉선자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산책을 가는데 호위가 필요하다며 굳이 가지 않겠다는 낙 사숙을 반강제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어찌된 일인지 알아차리고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산책을 나가자마자 다른 두 선자는 일이 생겼다며 돌아가고, 낙일방 혼자 선자 한 사람과 산책을 즐겼단 말이겠지?”

동중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문인의 말씀대로입니다.”

“낙일방과 마지막까지 있던 사람은 필시 육선자인 엄 소저겠구나?”

“그렇습니다.”

“그건 아마도 누산산의 생각일 것이다. 유치하긴 하지만 일방 같은 순진한 녀석에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지.”

“낙 사숙께서도 엄 소저와 산책을 다녀오신 것이 그리 싫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왜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거냐?”

“사실은 낙 사숙께서 오늘도 엄 소저와 산책을 하기로 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 소저께서 말도 없이 떠나버리셨으니 낙 사숙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진산월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이 너무 급진전되었구나.”

“장문인께선 엄 소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일방이 여자 경험이 너무 없어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을지 걱정될 뿐이다.”

“그건 낙 사숙께서 하나씩 경험해 가면서 깨닫게 되실 겁니다.”

동중산의 말을 듣고 보니 진산월은 자신이 너무 낙일방을 어린아이 취급하여 감싸 안으려고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상처도 입고 좌절도 겪으면서 성장해 가는 법인데, 진산월은 낙일방이 어떠한 시련이나 좌절도 겪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의 시련과 좌절이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통이 너무나 심했기에 자신이 아끼는 사람만큼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한 가지는 정리되었군.’

적어도 낙일방이 엄쌍쌍을 어떻게 대할지는 분명하게 정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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