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1권 철혈행로(鐵血行路)편 : 10화
제 218장 무정도수
진산월 일행이 정양에 도착한 것은 노군묘를 떠난 다음날이었다.
정양에서 가장 큰 주루에 여장을 푼 일행은 먼저 정양의 유일한 강호 문파인 흑기보에 비무첩을 보냈다. 흑기보는 정양에 있던 열두 개의 크고 작은 문파들을 모두 흡수하여 적어도 정양 일대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천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흑기보에 비무첩을 전하러 간 동중산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본 파와 비무를 하지 않겠다니?”
진산월의 물음에 동중산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가 흑기보의 총관을 만나 비무첩을 전했으나, 그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흑기보주가 외부로 출타중이라 자신의 마음대로 비무를 결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대더군요.”
“그게 정말이라고 보느냐?”
“주변에 알아보니 이틀 전부터 흑기보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희가 여남을 떠난 직후지요.”
“너는 흑기보주가 일부러 우리들을 피했다고 보느냐?”
“흑기보주인 흑기신군 막송은 심계가 깊고 잔꾀가 많기로 유명한 자입니다. 그가 흑기보를 정양 유일의 문파로 만든 과정을 보아도 무력보다는 돈으로 매수하거나 계략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냄새가 나는군. 막송이 우리를 피하려 했다면 다른 곳에 있기보다는 흑기보 내에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
“심증은 가는데 막송이 우리를 피한다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무작정 흑기보로 쳐들어가서 숨어 있는 막송을 끌고 나올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진산월은 생각에 잠겼으나 뚜렷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강호의 비무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무작정 피해버린다면 더 이상 강제할 수가 없게 된다.
진산월은 곧 결단을 내렸다.
“흑기보와의 비무는 취소한다. 내일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도록 하자.”
동중산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문파도 흑기보와 비슷한 행태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흑기보주의 행방을 수소문하러 거리에 나갔다가 일전에 본 파와 청의방과의 비무 여파가 의외로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거라.”
“청의방은 하남성 전체의 패권을 노릴 만큼 강력한 방파였습니다. 그런데 본 파와의 비무로 최고고수 두 사람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방주인 곽존해는 불과 십초 만에 장문인께 패하는 바람에 청의방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비무가 벌어진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
써 청의방의 몰락을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는 형편입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동중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동중산은 외눈을 반짝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 바람에 하남성 일대의 군소문파들이 바짝 긴장해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적어도 하남성 일대에서는 본 파와의 비무를 승낙하는 문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진산월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그건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로군.”
“저도 계속 생각을 굴려보았습니다만, 지금으로선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무행을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결국 군소문파는 건너ㅜ띠고 거대문파만을 상대해야겠군. 그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본 파와의 비무를 거절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하남성에서 비무할 문파를 찾을 수 없다면 안휘성으로 넘어가자.”
동중산이 외눈을 번쩍 빛냈다.
“특정한 문파라도 생각나시는 곳이 있습니까?”
“어차피 구궁보가 있는 구화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안휘성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구화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회남이 있지.”
회남이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동중산은 떠오르는 문파가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고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궁세가!”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그날 저녁.
뜻밖의 손님이 진산월을 찾아왔다.
“면목이 없소. 진 장문인께서 무어라 질책하셔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진산월은 자신을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오십대 중늙은이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동중산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장문인,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산월은 항상 침착해서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동중산의 이런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흑기보주가 장문인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진산월은 예상치 못한 말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고, 나중에는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흑기보주가 나를 찾아왔다고?”
“예. 장문인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까는 다른 곳으로 출타해서 흑기보에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동중산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글쎄 말입니다. 본 파와의 비무를 피하기 위해 술책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발로 직접 찾아왔으니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모시고 들어오너라.”
“알겠습니다.”
동중산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사람은 왜소한 체구에 머리가 반백인 오십대 후반의 중늙은이였다. 매부리코에 다소 강퍅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그가 바로 흑기보주인 흑기신군 막송이었다.
막송은 진산월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 내가 바로 흑기보를 맡고 있는 막모요. 진작에 찾아뵙지 못하고 이제야 온 것을 용서해주시오.”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진산월은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별말씀을. 먼 곳으로 출타를 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신 모양이구려.”
진산월이 오후의 일을 빗대어 넌지시 말을 꺼내자 막송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떠올랐다.
“창피막심한 일이지만, 이 마당에 숨겨서 무얼 하겠소? 사실 나는 계속 흑기보에 머물러 있었소. 다만 진 장문인께서 본 보에 비무를 청할 것이 두려워 엉뚱한 핑계를 대고 만 거요.”
진산월은 의외로 그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진산월이 아무 대답이 없자 막송은 아예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어떠한 질책이든 기꺼이 받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진산월은 막송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과공은 비례라 했소. 그것이 어찌 막 보주만의 잘못이겠소? 다른 문파의 사정을 생각지 못하고 무작정 비무행을 감행한 본인의 실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진산월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제서야 막송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솔직히 진 장문인을 찾아가서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소. 하지만 종남파와 멀지 않은 하남성에 있으면서 언제까지고 진 장문인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어렵사리 용기를 냈소. 정말 부끄럽소이다.”
“잘하셨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본 파는 흑기보와의 비무를 포기하고 내일쯤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소.”
막송의 주름진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구려. 하지만 나로서는 늦게나마 진 장문인에게 사실을 고하고 나니 막힌 속이 뚫리듯 시원함마저 느끼고 있소. 진 장문인이 본 보와 비무를 하든 안 하든 나는 이렇게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소이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동중산이 차를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막송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으나,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용기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은 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확실히 경솔한 행동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막송은 큰 시름을 던 듯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사실 진 장문인이 청의방과의 비무 후에 본 보 쪽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었소. 평상시라면 종남파 같은 거파와의 비무에서 패하는 게 뭐가 두렵겠소만, 현재 본 보는 정양 일대의 문파들을 통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칫 하다가는 간신히 규합해놓은 세력들이 흩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소.”
“그런 사정이 있었구려.”
“본 보는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다른 문파들은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오. 아마 이 일대에서는 종남파와 비무를 하려는 문파는 한군데도 없을 거요. 하남성의 패권을 노리고 있던 청의방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느 문파가 감히 종남파와 비무를 벌일 수 있겠소?”
막송은 종남파의 위세를 칭송하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듣는 진산월로서는 고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결국 종남파의 비무행에 큰 지장이 초래되었으니 말이다.
“요새 정양 일대의 무림인들 사이에는 종남파의 비무행과 구궁보의 마차 사건이 가장 큰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소. 종남파의 다음 비무 상대가 어느 문파인지 알아내려고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소. 본 보가 종남파와 비무를 벌이지 않은 이상 사람들의 이목은….”
그때 진산월이 막송의 말을 제지했다.
“잠시만, 구궁보의 마차 사건이란 무엇이오?”
막송은 몸을 움찔하더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진 장문인은 오늘 오후에 정양에 오셨으니 아직 못 들으셨겠구려. 사실 오늘 오전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수림에서 구궁보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습격을 당한 일이 있었소.”
진산월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 마차가 구궁보의 소속인지 어떻게 아시오?”
“구궁보의 마차들은 모두 여의천둔렴이라는 특이한 주렴을 달고 있소. 그 주렴에는 밖에서는 도저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도검을 막을 뿐 아니라 불도 피해내는 신비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그런데 이번에 습격을 당한 마차가 바로 이 여의천둔려이 달려있는 마차라는 것이오.”
“마차에는 누가 타고 있었소?”
막송은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진산월이 다급한 표정으로 묻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이 아는 바를 순순히 설명해 주었다.
“구궁보의 모용 공자와 무척 가까운 지인이 타고 있었다고 하오.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구궁보에서도 일류급 고수 몇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습격 때문에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고 했소.”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도 변을 당했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소. 나도 오늘 아침부터 퍼진 소문을 들은 것에 불과해서 말이오. 부서진 마차의 잔해와 그 주변에 몇몇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걸 누군가가 발견하고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기만 했던 진산월의 눈빛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끝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모용 공자의 지인이 타고 있던 구궁보의 마차.
그가 임영옥과 헤어진 것은 불과 팔 일 전의 일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그녀가 구궁보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면 그 행적은 진산월 일행과 마찬가지로 이곳, 정양을 지나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산월 또한 구궁보로 가기 위해 그녀와 비슷한 경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근처에서 발견된 구궁보의 마차란 바로…
진산월은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막송을 향해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막 보주,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막송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부탁이 있다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말씀해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드리겠소.”
“나를 구궁보의 마차가 발견된 곳까지 안내해주시면 고맙겠소.”
막송은 진산월의 부탁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임을 알고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렇게 하겠소. 마침 마차가 발견된 곳은 본 보의 관할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그 일대의 지리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다행이구려. 지금 갈 수 있겠소?”
“물론이오.”
진산월은 용영검을 집어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송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나기는 했으나 진산월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객잔을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신법을 펼쳐 빠르게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산월이 막송을 재촉하지는 않았으나 막송은 진산월의 굳어진 얼굴만으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신법을 발휘했다. 그것조차도 마음이 급한 진산월에게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여겨졌으나 진산월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일각쯤 달려가자 제법 커다란 수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송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달려오는 진산월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거의 다 왔소. 저 수림 안쪽에 제법 커다란 공터가 있는데, 마차가 발견된 곳은 바로 그 공터요.”
막송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던 진산월의 신형이 갑자기 앞으로 쭈욱 나아갔다.
“먼저 갈 테니 막 보주는 천천히 오시오.”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온다 싶은 순간, 어느새 그의 신형은 이십여 장 밖의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 기경할 신법에 막송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자신의 실력을 반도 발휘하지 않고 있었구나. 신법이 저 정도일진대 검술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막송은 혀를 내두르며 멀어져 가는 진산월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더니 자신도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수림 안으로 오십여 장쯤 들어가자 과연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한쪽은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있었고, 그 폐허의 한쪽에 부서진 마차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마차 주위에 몇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으나 진산월의 시선은 공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오직 마차의 잔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잔해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진산월은 한달음에 마차의 잔해로 몸을 날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잔해에 파묻힌 시신이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잔해 사이로 여인의 손과 검은 머리카락이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진산월은 떨리는 손으로 마차의 잔해를 치우고는 여인의 몸을 뒤집었다.
여인의 하얀 얼굴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진산월이 안색이 굳어진 채 몸을 피하려 했으나 여인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여인은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용영검을 잡고는 그대로 몸을 굴려 오 장 밖으로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진산월은 설마 여인의 목적이 자신에 대한 암습이 아니라 용영검의 탈취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너무도 어이없이 검을 빼앗기고 말았다.
“호호호! 진 장문인, 이번에는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군요.”
여인의 호들갑스런 웃음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것이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이번 일은 당신이 계획한 거요?”
여인은 수중의 용영검을 신기한 듯 쓰다듬고 있다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이번에는 제법 정성을 들여 계획을 짰는데 진 장문인이 보기에는 어땠어요?”
“아주 훌륭했소.”
여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진 장문인의 입에서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의 고심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즐겁군요.”
“내가 구궁보의 마차에 관심을 가지리라는 건 어떻게 알았소?”
여인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진 장문인은 본 당에서 가장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에요. 당연히 진 장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지요. 우리는 진 장문인이 며칠 전 여하의 강변에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나 아쉽게도 진산월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계획을 짠 거요?”
“다소 즉흥적인 계획이어서 솔직히 나도 꼭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진 장문인 같은 사람이 여인에게 빠져 냉정이 흔들리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군.”
“그래서 지금도 얼떨떨한 심정이에요.”
그대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산월은 돌아보지 않아도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막송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다른 득의만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흐흐… 진산월! 강호는 무공만으로는 행사할 수 없는 법이네. 지금 기분이 어떤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소. 당신도 쾌의당의 인물이오?”
“이 몸이 쾌의당의 하남지부를 맡고 있지.”
“쾌의당의 지원이 있었기에 당신이 그토록 수월하게 흑기보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구려.”
“흐흐… 역시 머리가 좋군. 바로 보았네. 그러지 않았으면 단시일 내에 열두 문파를 합병하는 일은 불가능했겠지.”
진산월의 시선이 다시 여인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천룡궤를 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내 검을 탐을 내게 되었소?”
여인은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진 장문인의 입심은 정말 대단하군요. 이 검이 바로 절세의 보검인 건 알겠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검을 팔아서 시집갈 밑천으로 삼기라도 하려고 했단 말이오?”
그녀는 살짝 눈웃음을 쳤다.
“진 장문인이 나를 받아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알아요. 진 장문인은 조용하고 다소곳한 여자를 좋아하지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바로 보았소.”
“우리가 이렇게 번거로운 계획을 짜면서까지 진 장문인의 검을 노린 건 진 장문인의 손발을 묶기 위해서에요.”
“검이 없으면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오?”
“검을 들지 않아도 진 장문인이 과연 신검무적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당신들 두 사람만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요? 아무리 당신이 소수마공이 대단하다고 해도 조금 무리 아니겠소?”
여인, 소조림은 그의 말을 시인했다.
“솔직히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진 장문인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아무리 진 장문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나를 상대할 생각이오?”
그녀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곳에 우리만 있는게 아니니까요.”
그 말에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마차의 주위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이 어느새 일어나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보니 그들은 시체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수는 모두 아홉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무정구도수라고 해요. 이들이라면 검을 들지 않은 신검무적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거에요.”
“이들도 화중용왕의 부하들이오?”
소조림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의 주재자는 아쉽게도 사부님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요?”
그때 어디선가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나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장내에는 어느새 한 사람이 새롭게 나타나 있었다. 진산월의 무공으로도 상대가 무슨 신법으로 나타났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우람한 체구의 흑포복면인이었다. 두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검은 흑포로 감싸고 있어서 남자라는 점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조금 전의 음성 또한 목소리를 내공으로 바꾼 것이었다.
진산월은 흑포복면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흑포복면인은 예의 걸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쾌의당의 운중용왕이다.”
확실히 흑포복면인은 구름 속의 용처럼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연스레 위엄이 흘러나오는 그의 행동거지로 보아 그의 나이가 중년을 넘지 않았을까 생각 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지난 백년 동안 강호에 배출된 검객들 중 제일 뛰어나다는 너의 검법을 보지 못해 아쉽긴 하다만, 나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성격이라 보다 손쉽게 너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택하겠다.”
흑포복면인이 슬쩍 손을 흔들자 어느새 무정구도수가 진산월의 주위를 에워싼 채 좁혀들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언제 꺼내들었는지 뭉툭한 기형도가 쥐어져 있었는데, 시퍼런 예기가 제법 떨어진 진산월의 몸까지 닿을 정도였다.
“네가 이들의 합공에서 살아난다면 그때는 내가 친히 너를 상대해주도록 하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정구도수들이 일제히 진산월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들은 일체의 고함이나 소리도 없이 오직 진산월의 전신을 노리고 칼을 휘둘러댔다.
파파팟!
삽시간에 주위가 온통 시퍼런 칼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진산월은 그들의 도법이 일체의 수비를 도외시하고 오직 살인을 위한 살초들로만 이루어졌음을 알고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검을 들고 있다면 아무리 무서운 도법이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지만 맨손인 상태에서는 직접 도기를 맞닥뜨릴 수 없어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싸움을 시작하는 셈이었다.
진산월은 이어룡과 어운보를 적절히 펼쳐 무정구도수의 무시무시한 칼질 속을 피해 다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장괘장권구식과 유운비수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나 무정구도수의 도법은 그정도로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자신이 펼친 장력들이 채 절반도 나가기 전에 도기에 가닥가닥 끊기는 것을 보고는 이내 방법을 바꾸어 태진강기를 끌어올려 대천장을 펼쳐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효과가 있어 무정구도수의 날카로운 공격을 이십여 초 가까이 막을 수 있었다.
소조림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막송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의아한 듯 묻자 막송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용영검을 가리켰다.
“그 검은 소저에게 필요 없는 듯하니 내가 가지면 안 되겠소?”
소조림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찡그려졌다.
이건 신거무적이 사용하는 검이라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막송은 생각해놓은 것이 있는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검집을 다른 것으로 하고 손잡이를 바꾸면 쉽게 알아보지 못할 거요. 강호에 검이 얼마나 많은데 비슷한 검 한두 개가 없겠소?”
소조림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용영검을 내주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꼭 발각될 위험을 부릅쓰고 이 검을 사용해야겠어요?”
“소저는 검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검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검을 배운 사람이라면 그 검을 얻기 위해 자신의 팔 하나쯤은 기꺼이 잘라버릴 수 있을 거요.”
“그 정도란 말이에요?”
“그렇소.”
막송이 진지한 음성으로 말하자 그제서야 그녀는 어쩔수 없다는 듯 용영검을 한 차례 쓰다듬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막송은 용영검을 조심스레 건네받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맙소. 이 빚은 꼭 갚겠소.”
“그 말 기억해두겠어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장내의 격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진산월의 대천장에 실린 태진강기의 위력 때문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무정구도수들이 대천장을 무시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펑펑!
순식간에 두 명의 무정구도수들이 대천장에 격중당해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하나 그 순간에 진산월은 처음으로 또 다른 두명이 휘두른 칼에 옆구리와 등을 격중 당했다. 다행히 스쳐맞은 것이라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베어진 상처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와 피범벅이 되었다.
삼 장 밖에 나뒹굴었던 무정구도수들이 꿈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재차 진산월을 향해 칼을 휘둘러 왔다. 그들의 입과 코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으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않는 모습이었다.
다시 세 명의 무정구도수들이 대천장에 쓰러졌고, 진산월 또한 삼도를 맞았다. 자신들의 목숨은 도외시한 채 오직 진산월을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무정구도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살귀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처절한 광경에 소조림과 막송은 넋이 나가버렸다. 그들은 선혈이 난무하고 살기가 가득한 눈앞의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보느라 진산월의 몸이 조금씩 자신들을 향해 접근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시 십여 초가 지나자 진산월의 몸에는 두 개의 새로운 칼자국이 생겼고, 무정구도수 네 사람이 쓰러져버렸다. 이번에 쓰러진 네 명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 두 명은 머리가 박살났고, 다른 두 명은 태진강기에 심장을 정통으로 가격당해 즉사해버렸던 것이다.
진산월의 온몸은 그야말로 유혈낭자해서 얼핏 보기에는 붉은색 혈의를 입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대부분의 상처가 피육을 베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무정구도수의 칼에 격중될 때마다 진산월이 익힌 태을신공이 위력을 발휘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과 남은 다섯 명의 무정도수들간의 대결은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일격필살만을 노리는 사람들처럼 무시무시한 살초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막송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내음에 취해 있다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무정도수 중 한 사람이 날리는 도기가 자신의 지척까지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심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 할때, 그의 옆에 서있던 소조림이 안색이 대변해 뾰족한 외침을 토해냈다.
“앗? 조심해요!”
막송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진산월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세 명이 더 쓰러져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두 명의 무정도수가 미친 듯이 진산월의 등을 칼로 난자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속도를 죽이지 않았다.
막송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사력을 다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진산월의 손바닥이 어느 사이에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가격하고 있었다.
약류장의 공력은 순식간에 막송의 심맥을 가닥가닥 끊어놓았다.
“크헉!”
막송은 입을 딱 벌리며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나 고함소리 대신에 나오는 것은 잘려진 내장 조각과 검붉은 선혈뿐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막송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용영검이 진산월의 손으로 옮겨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막송이 쓰러지는 순간, 진산월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한 차례 번뜩거렸다. 그와 함께 그토록 집요하게 그의 등을 노리던 무정도수 두 사람이 비명도 없이 쓰러져버렸다.
장내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뚝뚝….
진산월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흐르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용영검을 들고 몸을 우뚝 세웠다. 그리고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운중용왕을 향해 담담한 음성을 내뱉은 것이었다.
“이제 제대로 해봅시다.”
<2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