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나 혼자 만렙 뉴비 : 25화


25화 검성(劍成) 천유성 (1)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굉장히 낡아 보이는 검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알고 있는 검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레플리카 버전의 성유물.

바로 ‘건륭(乾隆)이 새겨진 철기검’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녀석이 시련의 탑에서 내내 도전하던 찰거머리라는 뜻이겠군.

진혁의 상대의 위아래를 훑었다.

날카로운 인상.

185cm가 넘는 탄탄한 체구.

마치 잘 벼려 둔 한 자루의 검 같다.

‘게임 내에선 워낙 사이코패스 같아서 몰랐는데, 이 녀석도 현실에선 멀쩡하게 생겼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모델 저리 가라다. 완벽한 비율의 몸에 조각처럼 생긴 얼굴은 TV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얼굴값이 아깝다. 얼굴값이.

“너는 진짜 질리지도 않냐?”

진혁이 혀를 찼다.

게임 내에서 그렇게 쫓아다닌 걸로도 모자란 건가.

이제는 하다하다 유적까지 쫓아오네.

진심으로, 만약 내가 지옥으로 간다면 거기까지 쫓아올 놈이다.

“그 귀찮다는 얼굴……. 네놈은 나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 것이냐.”

남자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동시에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 맞다.

이 녀석 무시 받는 거에 아주 한이 맺혀 있었지.

상대하는 입장으로선 귀찮기만 해서 그만 깜빡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봐.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여기까지 쫓아와? 그리고 그렇게 졌으면 이제 인정이라는 걸 좀 해라. 제발 좀.”

“이번에는 다를 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이상 내가 네놈에게 밀릴 리 없어.”

말이 안 통한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안 통했다.

작게 한숨을 쉰 진혁이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레벨 차이로 인해 스킬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당연히 레벨 차이가 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기존의 행운 스탯과 적응 스탯에 ‘전투의 노래’ 효과로 인해 추가 스탯까지 얻은 상태였으니까.

[스탯 효과가 레벨 차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어봅니다.]

——————————————————

이름: 천유성

성별: 남

나이: 28세

레벨: 29

힘 35 민첩 31 체력 18 마력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0

직업: 검사(劍士)

고유 능력: 검의 노래

스킬: Lv6 ‘추혼검기(追魂劍氣)’, Lv5 ‘선인의 눈’, Lv5 ‘일기토(一騎討)’, Lv5 ‘호신강기’, Lv5 ‘전장 선택’, Lv4 ‘추혼검무(追魂劍舞)’, Lv4 ‘암막 결계’, Lv3 ‘인내’, Lv3 ‘집념’…….

——————————————————

[복사 조건: 천유성은 검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검’으로 그를 찍어 누르십시오.]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긴 스탯창이 나타났다.

[선인의 눈]을 통해 날 알아본 건가. 게다가 지겹도록 스토킹을 하면서 나에 대해 꿰뚫어보고 있으니 이곳까지 쫓아온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됐다.

‘천유성이라…….’

이런 이름이었군.

시련의 탑.

그곳에 있던 고인물.

천유성은 진혁이 알고 있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축에 속했다.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실제로 녀석과 검을 나눴던 사람들은 천유성을 검성(劍成)이라 칭하며 경외시하기도 했고. 검귀(劍鬼)라 부르며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이 정도였나.’

진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읽었다.

레벨, 스킬, 고유 능력, 스탯.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물론, 천유성이 예전보다 강해졌다는 건 인정한다.

검성이 되기 위한 빌드업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으니까.

허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격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벌어졌지.

“굳이 싸우겠다면 말리진 않겠는데, 괜찮겠어? 여기엔 나 혼자만 온 게 아닌데?”

천유성의 살기에 반응한 테레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해야 2, 3분.

그 뒤엔 일 대 일이 아니라 이 대 일 상황이 된다.

“성녀라…… 쓸데없는 동료를 만들었군.”

음….

“두 가지 정정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첫 째로 테레사는 동료가 아니야.”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어 잠시 함께하는 거다.

그리고 둘째로.

“난 쓸데없는 건 데리고 다니지 않아.”

진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웅!

은빛 방패가 날아왔다.

표면에 은은하게 일어나는 기운.

신성력을 머금은 흉기다.

“큭!?”

천유성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가까스로 쳐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미간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니까.

“재가 오기 전에 슬슬 도망치는 게 어때?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 대결에 방해꾼이 끼어들게 내버려두진 않겠다.”

[천유성이 Lv5 ‘전장 선택’을 발동합니다!]

천유성의 몸을 주위로 투명한 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진혁의 입 꼬리 또한 위로 올라갔다.

역시.

살살 긁어 주니 바로 반응한다.

본인이 원하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고유 결계, ‘전장 선택.’

천유성이 갖고 있는 결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종류의 위력을 지닌 결계였다.

우우우웅!

약 50m 넓이의 공간이 새롭게 구성됐다.

군데군데 박살난 대리석과 먹다 남은 벽곡단이 널브러져 있는 수련장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 다운 장소네.’

이 정도로 캐릭터성이 일관되는 것도 참……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천유성이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이제 외부로부터 도움 따위는 받을 수 없다.”

결계로 인해 단절된 세상.

천유성은 곧바로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

[천유성이 Lv5 ‘일기토(一騎討)’를 발동합니다!]

[천유성의 모든 스탯이 10%만큼 상승합니다!]

[테레사로부터 받은 ‘전장의 노래’ 효과가 사라집니다.]

[모든 스탯이 10%만큼 하락합니다.]

연거푸 나타나는 상태 메시지들.

‘전장 선택’과 ‘일기토’로 인해 강제 너프를 받은 결과였다.

바로 이 두 가지 스킬 때문에 천유성은 자신 있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고.

바로 이 두 가지 스킬 때문에 진혁은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걸렸다.’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융합’에 붙어 있는 특수 조건.

-본래 복사해야 하는 조건보다 상황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질 경우 복사 조건이 그에 맞게 수정됩니다.

그리고 이 경우엔…….

[복사 조건이 수정되었습니다.]

[선(先) 복사, 후(後) 조건 달성이 인정됩니다.]

[제한시간 10분 안에 조건을 달성하십시오.]

조건이 변했다.

먼저 능력을 복사하고 이후에 조건을 달성하는 것으로.

“천유성의 고유 능력을 복사하겠다.”

[고유 능력 ‘검의 노래(S)’를 복사합니다.]

[‘검의 노래’: 도검류에 대한 이해도가 200%만큼 증가합니다. 몸은 자연스럽게 효율적인 검로를 찾으며, 전신의 감각 또한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검성(劍成)의 칭호를 받기 위한 필수 능력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경험과 반사 신경에 의존한 싸움이었다면.

이 능력을 얻은 순간부터는 검을 이해하고 검과 하나가 되는 싸움이 가능케 된다.

스윽.

진혁이 오른손에 쥔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왼쪽 검지론 천유성을 향해 까딱거렸다.

“여유…… 있는 척하지 마라!”

천유성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동시에.

콰앙!

지면을 박차고 진혁에게 돌진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빠르다.

하지만.

카아앙!

진혁이 옆구리를 노린 공격을 흘려 넘겼다.

그러자 곧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카앙! 카아앙!

1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몇 차례가 되는 검격이 오갔다.

하나같이 급소만을 노리는 절초였다.

바로 그때.

천유성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수작이냐?”

“응? 뭐가?”

“모른 척하지 마라! 네놈의 주특기는 근접이 아닌, 중거리일 터. 어째서 그깟 단검 하나로 맞서느냔 말이다!”

지긋지긋하게 싸워 왔기에, 천유성 또한 진혁의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근접보단 거리를 두는 싸움을 즐긴다는 사실을.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할 것 같거든.”

검으로 찍어 눌러줘야 하는 이상 다른 걸 쓸 순 없다.

무엇보다 검의 노래를 얻었기에, 단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진혁 입장에서의 이야기일 뿐이고.

당사자인 천유성 입장에선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죽여 버리겠다!”

격노한 천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

카앙!

캉! 카카카카캉!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 넘는 공방전이 오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천유성은 점점 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장.

게다가 상대는 특기마저 포기한 채 근접전에 어울려 주고 있지 않은가?

모든 상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팽팽한 균형은 도무지 깨지질 않았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

‘검술을 쓴다고?’

단순히 흉내나 모방 따위가 아니다.

유구한 세월마저 느껴지는 노련함.

게다가 중간 중간 허를 찔러 오는 파격적인 수준의 변칙성은. 솔직히 말해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천유성이 거리를 벌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짧은 시간 안에 다수의 스킬을 발동하다 보니 무리가 갔던 탓이다.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놀랍군. 모르는 사이에 이 정도 수준의 검술을 익히다니.”

“최근에 열심히 배웠어.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정확히는 조금 전에.

그것도 너한테 배운 거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저 녀석 눈이 돌아가겠지.

진혁의 이죽임에, 천유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네놈이 장기를 포기했다고 한들 나 역시 단순히 검술만으로 상대하기엔 무리였어. 너 같은 괴물을 상대로 여유를 부린 내 실수다.”

인정해야 한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 공기가 급변했다.

직선으로 뻗은 검.

그곳에서.

[천유성이 Lv6 ‘추혼검기(追魂劍氣)’를 발동합니다!]

파츠츠……!

검신을 따라 푸른 마력이 맺혔다.

닿는 걸 모조리 베어 버리는 극의(極意), 바로 ‘검기(劍氣)’였다.

“젠장.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이제 막 검 좀 배운 초보 상대로 검기까지 쓴다고?”

“네놈이 초보라는 전제부터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군.”

천유성이 단칼에 일축했다.

콰앙!

그리고 검기를 흩뿌리며, 진혁을 향해 쇄도해 왔다.

진혁이 천유성과 단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걸로 맞섰다간 날이 다 나가겠는데?’

아무리 10강짜리 검이라도 검기는 견딜 수 없다.

괜히 최강이라고 불리는 힘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들면 된다.

검기를 상대할 수 있는.

아니, 검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진혁이 바위 위에 놓인 검은색 단약을 쥐었다.

“‘검의 노래’와 ‘마혼단(魔魂丹)’을 융합하겠다.”

우우우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SS)’을 획득하셨습니다!]

[‘검의 무덤’: 도검류에 대한 이해도가 500%만큼 증가합니다. 몸은 최적의 검로를 찾으며, 전신의 감각 또한 최고치에 이릅니다.]

[검마(劍魔)의 칭호를 받기 위한 필수 재능 중 하나입니다.]

[복사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가능하면…….

이 능력은 ‘얼어붙는 눈물’을 흡수한 뒤에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리를 한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걸 내보낼 수밖에.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현됩니다.]

검의 끝을 본 이는 검성(劍成)이 되었지만, 끝을 깨어 버린 이는 검마(劍魔)가 되었다.

최강이자 최악의 재능.

그렇기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남은 거라곤 이름 없는 묘지 위에 꽂힌 한 자루의 검뿐.

이것은 그 마두(魔頭)에 관한 이야기다.

쿠쿠쿠쿠쿠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대리석 가루들이 공중으로 천천히 솟구쳤다.

바로 그 순간.

[Lv1 ‘흑월야(黑月夜)’가 발동됩니다!]

진혁의 단검 위로 검은 달이 드리웠다.

결계의 빛마저 물들여 버리는 칠흑 같은 초승달이.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달려오던 천유성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