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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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4화


제 222장 배반낭자(杯盤狼藉)

여인들 중 노란 옷을 입고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한 여인이 말에서 내려 휘장 앞으로 걸어오더니 휘장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찾았다!”

그녀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짤막한 환호성을 내지르자 그녀의 뒤를 따라왔던 차분한 인상의 미녀가 가볍게 그녀를 꾸짖었다.

“산매. 경망하지 말고 어서 공주님께 아뢰어라.”

“쳇, 셋째 언니는 늘 나만 부려먹더라. 그런 일은 여섯째 언니를 시켜도 되잖아요.”

“내 말을 듣지 않을 셈이냐?”

차분한 인상의 미녀가 정색을 하자 황의 미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황급히 몸을 돌리더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두 명의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그동안에 차분한 인상의 미녀는 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살펴보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한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행히 우리가 늦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녀의 인사를 받은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군유현이었다.

군유현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이곳에서 세 분 선자를 뵙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우리를 찾아오신 거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인들은 강호에 명성이 높은 천봉팔선자 중의 세 사람이었다.

차분한 인상의 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셋째인 영봉 금교교였고,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여인은 여섯째인 남봉 엄쌍쌍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호들갑을 떨었던 노란 옷의 여인은 막내인 옥봉 누산산이었다.

군유현은 천봉팔선자 중의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고, 특히 금교교와는 서너 번 만나서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금교교는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의신거가 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이 일대에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인원을 나누어 찾아보기로 하고 일행을 나누었는데, 마침 우리가 길을 제대로 찾았군요.”

“오, 정말 다행한 일이구려. 그런데 전갈을 받았다는 건 무슨 말이오?”

금교교는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군유현의 귀로 그녀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군유현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전음을 듣고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구려. 그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를 위해 먼 길을 달려와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군유현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금교교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때마침 정양 근처의 노군묘에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늦지 않게 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에요. 그런데…..”

그녀는 일행의 숫자가 예상보다 너무 적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묻지 않아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습격자들에게 참변을 당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숫자가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할 리가 없었다.

영특한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곳에 계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저는 은밀한 장소에 몸을 피해 계시거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영하의 강변을 따라 이동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추격을 따돌리느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우리가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소.

그러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고 잠시 몸을 쉬게 된 것이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이곳의 주인은…..”

군유현은 그렇지 않아도 임조몽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재빨리 그를 소개했다.

“이쪽에 계시는 임 공자이시오. 임 공자가 우리를 초대해 주어서 잠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소.”

금교교의 시선이 한쪽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임조몽을 향했다.

임조몽의 절세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준수한 얼굴을 보자 금교교의 눈빛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임조몽은 금교교와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볍게 포권을 했다.

“천하에 이름 높은 천봉팔선자를 만나게 되니 안계가 넓어지는 것 같소. 나는 임조몽이라고 하오.”

금교교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슴이 뛰었다.

아무리 그녀가 두뇌가 총명하고 침착하기로 유명한 강호의 기녀(奇女)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여인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절세미남자의 옥안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이제 보니 임 공자이셨군요. 금교교라고 해요. 그런데 저를 만난 적이 있나요?”

“아직 그런 운은 없었소.”

“그런데 어떻게 저희가 천봉팔선자인지를 알아보셨는지 신기하군요.”

그녀의 날카로움이 담긴 말에도 임조몽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세상 모든 여인들의 혼을 앗을 듯한 마력적인 미소였다.

“강호가 아무리 넓다 해도 선자라고 불릴 만한 아름다운 여인들은 많지 않소.

게다가 절정수사와 친분이 있는 선자들이라면 천봉궁의 팔선자밖에 더 있겠소?”

“단지 그뿐인가요?”

금교교의 거듭된 질문에도 임조몽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소저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소저는 혹시 나를 본 적이 있소?”

그가 오히려 되묻자 금교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미남자를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스치듯 지나쳤더라도 반드시 뇌리에 선명한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금교교는 임조몽이 무척 심기가 깊은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반문 하나로 자신이 더 물어볼 여지를 봉쇄해버린 것이다.

그때 단봉공주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줄 알았던 누산산이 경쾌한 동작으로 휘장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숙부님들께서 다녀오신다고 하셨어요. 공주님의 향차를 몰고 오려면 자신들이 가는 게 더 낫다고 하시면서요.”

그녀는 무심코 금교교를 향해 쫑알거리다가 문득 앞에 있는 임조몽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임조몽을 보자 누산산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얌전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이 분은 누구신가요?”

평소 남자를 우습게 알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믿어지지 않는 변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금교교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없어서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이곳의 주인이신 임 공자이시다. 임 공자의 배려 덕분에 군 대협과 다른 분들이 잠시 몸을 쉴 수 있었다고 하시는구나.”

누산산은 임조몽에게 살짝 머리를 숙였다.

“반가워요. 임 공자님. 저는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인 누산산이라고 해요.”

그녀는 특히 ‘막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대개의 남자들이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삼촌인 누광표의 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의 앙증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조몽은 담담하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나다는 옥봉이셨구려. 반갑소. 나는 임조몽이라고 하는 사람이외다.”

“조몽….. 정말 멋진 이름이군요. 임 공자님께선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요?”

“그냥 술을 벗삼아 강호를 주유하는 떠돌이외다.”

누산산은 알겠다는 듯 짐짓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류재사이시군요.”

그 귀여운 모습에 임조몽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풍류재사라니 당치 않소. 그냥 일개 파락호일 뿐이오.”

“임 공자께서 아무리 스스로를 일개 파락호라고 주장하셔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진짜 파락호였다면 오히려 강호에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지요.”

누산산은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일지 몰라도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금교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조몽은 그녀 같은 강호의 기녀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절세의 미남자였다.

이런 미남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파락호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마력적인 용모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금교교는 지금까지 임조몽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둘 중의 한 가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첫째는 임조몽이 그동안 강호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철저히 숨어 지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출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나 그는 분명 자기 입으로 강호를 주유(周游)하고 있다고 했으며, 사람을 대하는 그의 능수능란한 태도로 보아 결코 강호 초행의 풋내기가 아니었다.

두 번째는 임조몽이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강호에서 은밀히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사람들은 또 다른 신분의 그를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이 바로 임조몽 본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임조몽이란 이름 자체도 가명(假名)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녀의 뇌리에는 강호에서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몇 명의 신비인(神秘人)들이 떠올랐다.

임조몽은 그들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지나친 기우(杞憂)에 불과하고, 임조몽은 자신이 말한 대로 유유자적하게 강호를 주유하는 단순한 풍류남아일 뿐일까?

금교교의 시선이 임조몽의 준수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럴 리는 없다. 저런 용모와 저런 마력의 소유자라면 결코 평범한 파락호일 리가 없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무언지 모르게 위험한 냄새가 풍기고 있다.’

그것은 그녀만의 예리한 직감이었다.

너무도 준수한 얼굴에 방심이 흔들리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본능적으로 임조몽이 위험한 남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위험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사처럼 그는 접근을 허락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금교교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우연인지 임조몽이 힐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임조몽과 시선이 마주친 금교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임조몽의 얼굴에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비아냥이 어린 흐릿한 조소였다.

그 미소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으나 금교교는 절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자신에게 다가오는 임영옥을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 보였을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어려운 걸음을 했군요.”

임영옥이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자 금교교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인사가 늦었군요.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부담을 갖지 말아요.”

그녀를 대하는 임영옥의 태도는 평상시와 다름없었으나, 너무 무덤덤해서 왠지 차갑게 느껴졌다.

“조금 전에 누 소저의 말을 들으니 단봉공주도 이 근처에 계신 모양이군요.”

“마침 연락을 받던 자리에 공주님도 계셨어요. 사태가 다급한 것을 알고는 우리는 먼저 보냈는데 머지않아 뵐 수 있을 거예요.”

금교교의 모습 또한 조금은 딱딱했고, 왠지 모르게 임영옥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한쪽에 있는 모용연이었다.

천봉선자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기는커녕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일부러 그녀들을 외면하는 듯한 모용연의 모습은 무심함을 넘어 냉랭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천봉선자들 중 누구도 그녀의 그런 행동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누산산만이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모용연을 훔쳐보고 있었으나, 그런 누산산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장내의 분위기는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가장 빨리 알아차린 사람은 군유현이었다.
군유현은 예전부터 그녀들 사이에 묘한 알력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이내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들이 조금만 늦게 왔어도 이곳에서 우리를 보지 못할 뻔했소. 이제 올 사람이 모두 온 듯하니 이만 떠나는 게 어떻겠소?”

그런데 이번에도 임조몽이 그를 제지했다.

“아직 떠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소.”

군유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럼 또 올 사람이라도 있단 말이오?”

군유현이 무심결에 던진 말에 뜻밖에도 임조몽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직 오늘이 운이 모두 사라진 게 아닌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는 게 좋을 듯 하오.”

군유현은 임조몽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더 만날 사람이 없소.”

임조몽은 빙긋 웃어 보였다.

“때로는 만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대체 누가 우리를 만나려 한단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소?”

“술을 벗 삼아 강호를 떠돌다 보면 가끔은 굳이 원하지 않아도 풍월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소.”

“어떤 풍월 말이오?”

임조몽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뭐 대단한 건 아니오. 사연이 깊은 오래된 상자 하나와 그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에 대한 케케묵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군유현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람들의 안색도 모두 굳어진 채 임조몽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임조몽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볼 필요 없소. 그걸 노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 말이오.”

군유현은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리며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누가 노린단 말이오?”

임조몽은 문득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왔군. 내가 뭐라고 했소? 이곳에 있으면 당신들을 만나려는 자들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군유현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공터의 한쪽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대여섯 명의 인영들이 공터 안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눈부신 백의를 걸친 냉막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허리춤에는 유난히 폭이 얇은 기형도가 매달려 있었다.
그 청년의 냉기로 뒤덮인 듯한 차가운 얼굴을 본 군유현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낙일무영(落日無影) 전일도(全日到)…..”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였는데도 백의 청년은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휘장 앞으로 떨어져 내리며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바로 전일도요.”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과 당당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를 광오하다고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일도는 마도를 석권하고 있는 신목령의 열두 사자 중 서열 이 위인 신목이호(神木二號)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호 제일의 쾌도라 불리는 질풍추혼 견동과 쌍벽을 이루는 절세의 쾌도객이기도 했다.
견동은 천하 제일의 쾌검이라도 인정받고 있는 분광검객 고심홍과 함께 무림쌍쾌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절정고수 였으니, 그런 견동과 견줄 만하다는 것만으로도 전일도의 도법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휙휙!!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며 전일도의 뒤쪽으로 네 명의 백삼인들이 내려섰다.
그들은 칼날같이 예리한 기도를 지닌 신태가 비범해 보이는 중년인들이었다. 그들은 전일도를 지근에서 호위하는 인물들로, 낙일사영(落日四影)이라 했다.
전일도가 나타나자 신목령과는 오랜 숙원 관계였던 천봉선자들이 아연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전일도는 휘장 앞에 몸을 우뚝 세운 채 거칠 것 없다는 듯한 눈으로 중인들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천봉선자들을 볼 때는 가벼운 냉소를 날리던 전일도의 시선이 군유현에게로 향할 때는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기도 했다.
이글거리는 듯한 투기(鬪氣) 가득한 눈으로 군유현을 쏘아보던 전일도는 다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바로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의 전신을 훑어보던 전일도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전일도는 성큼 휘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치 자신이 주인이라도 된 듯한 안하무인격인 행동이었으나, 왠지 그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전일도는 휘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임조몽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 이곳의 주인이오?”

전일도의 무례해 보이는 태도에도 임조몽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꺼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늑한 곳이군. 잠시 자리에 앉아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오.”

전일도는 임조몽의 앞에 털썩 앉더니 한쪽에 있는 술상을 쳐다보았다.

“마침 급히 달려오느라 목이 탔던 참인데 잘 되었군. 한 잔 마셔도 되겠소?”

“그러시구려.”
전일도는 서슴없이 술상 위에 놓인 술병을 들어 술잔에 따르더니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곳에 자신과 임조몽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한 그의 제멋대로의 행동에 군유현과 금교교를 비롯한 천봉선자들은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전일도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은 괜찮은데 조금 약한 것 같군. 몇 잔 더 마셔도 상관없겠소?”

임조몽은 피식 웃었다.

“상관없소.”

전일도는 다시 자기 손으로 두 번이나 연거푸 술잔을 따라 마셨다. 석 잔째 술을 마신 다음에야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소. 이제야 몸이 풀리는군.’

그는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군유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군유현의 몸을 쓰윽 훑던 전일도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옥색 섭선에 고정되었다.

“그게 절옥선(絶玉扇)이오?”

군유현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섭선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소.”

“듣자하니 절정수사가 절옥선을 한 번 펼쳤다가 접으면 사람 목숨 하나가 사라진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오?”

군유현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보지 그러시오?”

전일도의 눈빛이 강렬해지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기형도가 어느 새 뽑혀 나와 군유현의 목덜미를 찔러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군유현의 목덜미가 기형도에 꿰뚫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앗?”

난데없는 공격에 놀란 중인들이 경호성을 터뜨렸지만 군유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섭선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탕!

그의 목을 찔러오던 기형도가 섭선과 부딪히며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전일도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고, 기형도 또한 원래의 칼집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전일도의 동작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 짧은 시간에 그가 칼을 뽑아 군유현의 목덜미를 찔렀다가 섭선에 튕긴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별호가 왜 낙일무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유현은 수중에 절옥선을 든 채로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입가로는 한 줄기 고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자의 성정이 이토록 거칠 줄은 몰랐군.’

군유현은 전일도가 나타나자마자 술 석 잔을 마시더니 대뜸 자신에게 칼을 날려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던 것이다. 칼에 실린 힘 또한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군유현은 왜 전일도가 상당히 독한 장호춘을 석 잔이나 마셨는지 알 것 같았다. 전일도는 누구나가 알다시피 쾌도의 고수였다. 쾌도를 쓰는 자는 순간적인 공력의 운용이 필수적인데, 전일도는 독주 석 잔을 마심으로써 체내의 혈액 순환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켜 공력을 보다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일도가 몸이 풀렸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였다. 전일도는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히 군유현을 바라보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군. 조금 있다가 제대로 겨루어보도록 합시다.”

군유현은 너무도 일방적인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은 누가 말리기라도 한단 말이오?”

“내 마음 같아서야 당장 당신과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지만, 일이 먼저요. 그 다음에는 질리도록 싸워주지.”

이어 그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천봉선자들을 향했다.

“마지막 기회요. 조용히 물러난다면 천목지약(天木之約)이 깨어지는 일은 없을 거요.”

금교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산산이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언제부터 신목령이 감히 본 궁을 오라가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자기들 앞가림도 제대로 못한다고 들었는데, 사정이 좀 나아졌나 보군요.”

전일도의 짙은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으나 의외로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 령의 내부 문제는 당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이건 정말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요.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시오.”

누산산은 화가 나서 쏘아붙이려다가 그의 음성이나 표정이 무척 진지한 것을 깨닫고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금교교 또한 전일도의 말이 결코 허언이나 공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떠난다면 막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금교교의 물음에 전일도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소. 단, 이는 천봉궁의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오.”

금교교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우리에게 구궁보의 사람들을 남겨두고 가라는 말인데, 그걸 우리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한 사람만 두고 가면 되오.”

금교교는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전일도가 말하는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일도의 시선이 좌종을 둘러보다 이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임영옥은 전일도의 칼날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것을 보고는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는 안된다는 말이군요.”

전일도는 그녀의 차분한 태도가 의외인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소저가 이곳을 떠나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소.”

“그것이 무엇인가요?”

“물건 하나를 내놓으면 되오.”

“어떤 물건을 말하는 건가요?”

“알면서 물어보는 거요?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임영옥은 그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덧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올라 주위는 어둠이 가시며 새로운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의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선했고, 때마침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는 마음까지 맑게 씻어주는 듯 했다. 고개를 드니 유난히 파란 하늘이 눈을 찔렀다. 그녀의 영롱한 눈동자에 투영된 푸른 하늘은 오늘은 좋은 날이 될 거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이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녀의 묘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계속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오.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맺지 않은 자들이 여의신거를 습격할 때부터 말이죠….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병을 치료하느라 바깥 출입도 하지 않은 사람인데, 왜 그들은 그토록 집요하게 나를 노리고 있는지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더군요. 심지어는 여의신거를 호위하는 같은 일행들까지 말이지요.”

모용연이 안색이 약간 굳어진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니…..”

임영옥은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구궁보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어. 군 대협의 일행까지 합치면 스무 명도 훨씬 넘지. 여자 하나를 호위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숫자라고 생각하지 않니?”

“언니….. 그건 오빠가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누구로부터 말이냐?”

임영옥의 물음에 모용연은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지난 삼 년 동안 구궁보 밖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그 전에는 종남파에서만 있었고, 강호에서 활동한 기간이라고 해봐야 한 달 남짓에 불과해. 내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누가 나를 위협한다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호위로 쓴 것일까? 심지어는 군 대협 같은 강호의 절정고수까지 동원해서 말이지.”

모용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임영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임영옥은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보냈다.

“아마 너도 모르고 있었겠지. 너는 속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전부터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단다. 모용 공자가 내게 청혼한 그 날부터…..”

“언니……”

“모용 공자가 내게 어느 정도의 마음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날의 청혼은 너무 뜻밖이었지. 그는 내게 굳이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이 먼저 중추절까지 기한을 정했어.”

그녀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고요했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귀에는 아무 선명하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뒤부터 내가 모용 공자에게 청혼 받은 일이 구궁보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더니, 나중에는 그와 중추절에 결혼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세상에 알려지더구나.”

임영옥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나는 사형이 재출도했다는 말을 듣자 사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날 생각이었어. 나 혼자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모용 공자가 청혼을 한 뒤로 사정이 바뀌어서 도저히 혼자 움직일 수 없은 상황이 되고 말았지. 나는 내가 사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난다는 걸 알고 모용 공자가 내게 청혼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 모용 공자가 구궁보에서도 두 대뿐인 여의신거를 내게 내어주고 친구인 군 대협에게 부탁하면서까지 많은 수의 호위대를 딸려 보내는 것을 보고 그런 의심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지.”

임영옥은 해쓱한 얼굴로 변해버린 모용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 매도 알고 있다시피 내가 구궁보에서 그 정도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여자는 아니었잖아.”

모용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임영옥의 말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사형을 만나고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모용 공자의 청혼과 일련의 행동들이 단순한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그의 목적을 의심할 만한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이 정체 모를 자들이 습격이 시작되더군. 집요할 정도로 무서운 습격이 말이지.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단순히 착각한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

“…..”

“왜 모용 공자는 내게 느닷없이 청혼한 것일까? 그리고 왜 갑자기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나는 꼼짝없이 그의 약혼자가 된 것일까? 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에 그토록 많은 호위들이 따라온 것일까? 왜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나를 습격한 것일까?”

그녀의 계속되는 질문은 그녀 자신에게 하는 독백처럼 들렸다.

“왜 생전처음 보는 신목령의 고수마저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내게 과연 무슨 가치가 있길래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 그리고 이제 어렴풋이나마 그 해답을 알게 되었어.”

임영옥은 그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아? 연 매!”

모용연은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녀의 다음 말을 듣게 되면 무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진실을 알게 될지 몰라 귀를 막고 싶었다. 하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당당한 구궁보의 일원이었으며, 스스로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아무리 진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감당해내어야 하며, 능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주세요.”

임영옥은 결연함을 넘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연 매는 좋은 여자야. 연 매를 알게 된 게 지난 삼 년간 내가 한 일 중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

“언니……”

“모용 공자가 내게 청혼한 날. 그는 청혼의 증표라며 내게 한 가지 물건을 건네주었지. 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청혼을 거절하려면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중추절에 물건을 돌려주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물건을 받고 말았어.”

장내의 공기가 아연 긴장되었다. 천봉선자들은 물론이고 신목령의 고수들도 모두 그녀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심지어는 제삼자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임조몸조차도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인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건 황금으로 된 봉황 문양의 장식품이었어. 너무 호화롭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어서 나는 그걸 비녀 대용으로 사용했지….”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의 머리 위로 향했다. 과연, 풍성하게 말아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 한쪽에 봉황 문양이 새겨진 비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임영옥은 천천히 손을 올려 그 황금 비녀를 바라보았다. 틀어올려진 삼단 같은 머리가 그녀의 어깨 위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황금 비녀를 든 채 전일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 당신이 노릴 만큼 귀한 물건이라면 이 비녀 밖에는 없어요. 단신이 원하는 물건이 바로 이건가요?”

전일도는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황금 비녀를 응시하더니 이내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흐흐…… 과연 그거로군. 난 한눈에 알아봤지.”

“당신이 내 머리를 집요하게 쳐다볼 때부터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내게 건네주면 당신에게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소.”

“이 물건이 무엇인가요?”

전일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날렸다.

“머리에 꽂고 다녔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단 말이오.”

“모용 공자는 내게 이 물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흐흐…. 그건 너무 심하군. 모두가 노리는 보물을 맡기면서도 언질조차 주지 않다니 약혼녀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너무 형편없군.”

“그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요.”

전일도는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임영옥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공자가 왜 그토록 당신에게 목을 매는지 알 것도 같소. 당신 같은 여자는 정말 흔치 않은데, 모용 공자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임영옥은 전일도의 약간은 조롱기가 담긴 말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물건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당신은 그걸 비녀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비녀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이오.”

“다른 용도라면?”

“특정한 상자를 여는 데 쓰이지. 다시 말해서 그건 비녀가 아니라 열쇠요.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상자를 여는 오직 하나뿐인 열쇠. 그것의 이름은……”

바로 그때,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게 바로 보황금시다. 아이야.”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천천히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흑의를 걸친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었다. 어찌나 말랐던지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그냥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얼굴의 여기저기에 검버섯이 피어 있고, 눈가에는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 노인을 보는 순간,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던 금교교를 비롯한 천봉선자들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심지어는 군유현마저 바짝 긴장한 채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일도가 흑포노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사숙.”

조금 전만 해도 자신만만함을 넘어 광오해보이기까지 했던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중한 모습이었다. 흑포노인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구나.”

이어 그는 해쓱하게 질려있는 천봉선자들을 둘러보더니 얄팍한 입술을 비틀며 나직하게 웃어댔다.

“너희들로서는 너무 늦은 셈이겠지만 말이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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