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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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5화


제 223장 독무검영(毒霧劍影)

임영옥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손에 들린 황금빛 봉황 장식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봉황금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삼 년 전에 소림사의 대집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을 때 동중산이 훔친 봉황금시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던가? 그들은 영문을 모르고 쫓겨야 했고, 수시로 습격을 받았으며, 때로는 생사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결국 진산월이 동중산에게서 봉황금시를 회수하여 모용 공자에게 돌려줌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지만, 그 일이 종남파에 끼친 여파는 실로 막대했다. 당시 그녀는 봉황금시라는 말만 무성하게 들었지 실제로 실물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물건이 모용 공자의 손을 거쳐 자신에게 전해졌으니 그 괴이한 인연에 묘한 감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 공자는 왜 이 봉황금시를 자신에게 건네준 것일까?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그 내용을 어떻게 남들이 먼저 알고 있는 것일까? 대체 봉황금시의 비밀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많은 피를 뿌리면서까지 사람들이 얻으려는 것일까? 삼 년 전에 종남파의 고수들은 자신들이 원치도 않았던 봉황금시 때문에 많은 수난을 당했는데, 지금 그녀도 그와 똑같은 일을 겪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일까? 숱한 상념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임영옥이 봉황금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흑포노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모용 애송이가 아낀다는 임가 계집이로구나.”

흑포노인이 나타난 순간부터 천봉선자들과 군유현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임영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차분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임영옥이에요. 노인장께서는 이 봉황금시를 노리고 오셨나요?”

흑포노인은 음산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 그야 당연한 이야기이고, 노부가 이렇게 직접 온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게 무엇인가요?”

흑포노인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이 더욱 깊게 파여졌다.

“너를 보기 위해서다.”

뜻밖의 말에 임영옥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나를 보기 위해서라니요?”

“너는 네 몸의 가치를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노부 같은 사람에게 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약(靈藥)이라고 할 수 있지.”

임영옥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노인장도 음공(陰功)을 익힌 모양이군요.”

그녀는 구궁보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태음신맥을 타고났음을 알게 되었다. 태음신맥을 지닌 여자는 천성적으로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음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음공의 고수가 태음신맥을 지닌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음공을 대성(大成)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지. 노부가 익힌 건 한음독정공(寒陰毒精功)이란 것이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영옥의 눈빛이 아주 살짝 떨렸다. 흑포노인은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한음독정공은 천하에 산재한 무수한 독공(毒功) 중에서도 가장 음독(陰毒)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알려지기로는 이 독공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대부분이 인성(人性)을 상실한 살인마가 된다고 한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독물과 음기를 흡입해야 하여, 일정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이를 지키지 않으면 한 줌의 핏물로 녹아버린다고 했다. 대신에 그 위력은 실로 가공할 지경이어서, 단 오성만 익혀도 능히 독인의 경지에 이르며, 팔성 이상 익히면 독으로는 상대할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당금 천하에 이 독공을 익힌 사람의 숫자는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이며, 그 중의 한 사람은 한음독정공의 경지가 무려 구성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제일독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임영옥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음성이 떨려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노인장이 바로 독중지존(毒中至尊)이라는 독존자(毒尊者) 갈황(葛荒)이군요!”

흑포노인은 마침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크하하….. 그렇다. 노부가 바로 갈황이다.”

독존자 갈황!

당금 무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독공의 제일고수이며, 신목령의 오천왕 중 일인이었다. 무공 실력만 따지면 오천왕 중 경천신수 동방욱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사람들은 동방욱보다는 갈황을 더욱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독공이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그의 한음독정공이 십성에 다다른다면 동방욱을 넘어서 오천왕 중의 제일인자가 될 뿐 아니라 능히 신목령주와도 자웅을 겨루어볼 만하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게다가 갈황은 단순히 독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용독(用毒)과 하독(下毒)에도 일가견이 있어 상대하기 더욱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갈황은 광소를 터뜨리면서도 쭉 찢어진 사갈 같은 두 눈으로 연신 임영옥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그것은 탐욕과 갈망이 어우러진 눈빛이어서 보기만 해도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긴가민가했었는데, 오늘 직접 보게 되니 과연 태음신맥의 소유자가 확실한 걸 알겠구나. 너만 너부 손에 들어온다면 구성에서 막혀 있는 한음독정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 애송이가 무슨 마음을 먹고 너를 구궁보 밖으로 내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노부에게는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지. 클클…..”

갈황은 마치 이미 임영옥을 수중에 넣기라도 한 듯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독공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봉궁에서 그의 독공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자는 오랫동안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천봉궁주와 늙어 죽지도 않는 괴물인 총관 차복승 정도였고, 천하를 통틀어도 채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그건 무공 실력 이전에 내공의 상성(相性)에 관한 문제였고, 그 점에 대해 갈황은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극양(極陽)의 열양공을 화경까지 익힌 고수이거나, 자신이 익힌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음공이나 독공을 최소한 자신이 수준까지 연마한 자가 아니면 한음독정공의 극음(極陰)을 띤 독기를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천봉팔선자나 구궁보의 풋내기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임영옥을 이미 손안에 들어온 물건 취급하는 갈황의 모습은 중인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임영옥을 누구보다도 흠모하고 있던 모용연은 머리끝까지 노화가 치밀어 올라 금시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자신의 오빠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슴이 답답했던 모용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난 고함을 내지르며 갈황을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노독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구궁보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단 말이냐?”

그녀의 한 쌍의 옥수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절옥단금(切玉斷錦)이라는 상승의 수공(手功)이었다.
갈황은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귀찮은 듯 오른 소맷자락을 한차례 휘둘렀다.

팡!

그녀가 떨쳐낸 예기와 갈황의 소맷자락에서 뿜어 나오는 경풍이 중간에서 부딪치며 작은 폭음이 들려왔다.
모용연은 갈황의 경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재차 공세를 이어나가려 했다.
한데 쌍장을 채 절반도 내뻗기 전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갈황이 그녀를 돌아보며 음충맞게 웃었다.

“흐흐….. 아이야. 남들에게는 구궁보라는 이름이 통할지 몰라도 노부에게는 어림없다. 모용 늙은이나 모용 애송이가 아니면 누구도 노부 앞에서 큰소리를 치지 못한다.”

모용연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갈황의 경력과 부딪쳤던 양손이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이한 한기가 손을 지나 팔목 위로 올라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한음독정공의 위력이었다.
단순히 장력을 교환하기만 해도 피부를 통해 차가운 음독이 체내로 침투해 들어오니 일반적인 고수들은 도저히 그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모용연은 황급이 공력을 끌어올려 팔뚝 위로 올라오는 독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나 독기는 너무도 수월하게 그녀의 공력을 뚫고 계속 어깨 쪽으로 올라왔다.

‘세상에 이토록 지독한 독기가 있다니…..’

모용연은 이를 악물며 구궁보의 비전인 천양신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팔을 타고 올라오던 독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 팔 자체가 얼얼하여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것은 여전했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모용연을 꼼짝도 못하게 만든 갈황은 이내 임영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는 네 발로 노부를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노부의 손을 거치겠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참으로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임영옥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봉황금시를 다시 머리에 꽂았다.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독인을 앞에 두고도 어깨까지 풀어헤쳐진 머리를 틀어 올려 봉황금시를 꽂고 있는 임영옥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것이었다.
갈황도 그녀의 행동이 예상 밖이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머리치장을 마친 임영옥은 물처럼 조용한 눈으로 갈황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다면 직접 가져가 보세요.”

갈황은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흐흐…. 맹랑한 계집이군. 태음신맥을 타고난 자는 남과 다른 구석이 있다고 하더니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갈황은 음산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야. 너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노부는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놈들이야 너를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들었을지 몰라도 노부에게 너는 그냥 몸에 좋은 보약 이상은 아니다. 팔 다리 하나쯤 없어진다고 해서 태음신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미리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게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을 태연히 내뱉으며 갈황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군유현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절옥선을 뽑아들고 갈황의 앞을 막아서려고 막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휘익!

어디선가 한 줄기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파람 소리를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음의 고저장단도 불분명하고 가락도 그리 인상적이지 못해서 마치 어린아이가 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임영옥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언지 모를 아련한 그리움과 마음 속 깊은 곳의 떨림이 동시에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휘휘이익!

휘파람 소리는 때로는 서툴게, 때로는 나직하게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근처를 배회하며 장난삼아 부는 것 같았다.
아니면 풋내기 꼬마가 어린 연인을 앞에 두고 두근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으나 누구도 휘파람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갈황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어느 놈이 허튼 장난을 치는 거냐?”

짙은 살기를 담은 그의 음성이 주위를 흔들었으나, 휘파람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어색하면서도 서툴기조차 한 휘파람 소리였으나 그것을 듣는 여인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흥!”

갈황이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양쪽 소매를 세차게 떨쳤다.

파파파팍!

회오리를 연상케 하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사방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실로 무시무시한 경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휘장이 모두 사라지자 주위의 모든 풍경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했다.
공터의 가장자리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한 사람이 등을 기댄 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무척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나이였다.
먼 길을 달려온 듯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온몸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추레하기보다는 거칠고 강인해 보였다.
고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휘바람을 불고 있는 사나이의 옆구리에 매달린 기다란 장검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사나이의 얼굴을 본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검무적…..”

사나이의 휘파람 소리가 점차로 잦아들었다.
사나이는 천천히 몸을 곧추 세우고 중인들을 향해 돌아섰다.
왼쪽 뺨에 나 있는 깊은 흉터가 꿈틀거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갑고 비정해 보였으나,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을 한참이나 돌아다녔지 뭐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는 조용한 음성이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사나이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더군.”

사람들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우두커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나이는 독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몇 번이나 되짚어보고 곱씹어봐도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야. 사매를 데리고 돌아가야겠어. 사매를 홀로 내버려두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단 말이야.”

임영옥은 떨리는 눈으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나이, 진산월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계속 다가왔다.

“나에겐 사매가 필요해. 사매가 있어야 할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내 옆이야. 그리고 사매에게도 내가 필요하지. 사매 옆에 설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야. 어느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 없지.”

임영옥의 아름다운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처음 휘파람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진산월이 자신을 위해 불러주었던 아주 오래된 노래였다.

진산월이 종남파에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임영옥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날은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이었다. 그날따라 혼자라는 외로움과 소녀다운 감상에 깊게 젖어든 그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때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서툴고 어색해서 정말 볼품없는 소리였으나 그녀에게는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는 소리였다.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어색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진산월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음치, 휘파람도 하나 못 부는 엉터리잖아.”

진산월은 붉게 상기된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는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가 불어주는 휘파람 소리는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부드럽고 달콤하게 들렸다. 외로움에 젖어 울고 있는 한 소녀를 위해 한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진산월은 다시 그녀를 위해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게 물건처럼 취급받고 천하제일의 독인에게 위협을 받는 절체정명의 상황에서 들려온 휘파람 소리는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과 힘이 되어 주었다.
임영옥은 진산월을 향해 웃어주고 싶었다.
그가 정성을 다해 불어준 그 서툰 휘파람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나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네 놈이 바로 요즘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는 신검무적이란 말이냐?”

갈황의 살기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임영옥은 몸을 움찔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진산월의 앞을 갈황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갈황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임영옥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임영옥은 가슴을 조여오던 불안감이 가시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진산월이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임영옥만을 주시하고 있자 갈황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애송이가 이름을 좀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대단할 것도 없는 종남파의 장문인 주제에 감히 노부의 말을 무시해?”

그제서야 진산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 것일까?
그 미소를 보자 갈황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네놈이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알량한 칼솜씨 하나는 믿고 노부 앞에서 재주를 피울 요량이라면 어림없는 수작이라고 말해주지. 이 계집 앞에서 네놈을 죽이고 계집과 금시를 취해야겠다.”

갈황의 험악한 말에도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무심한 음성을 내뱉었다.

“말이 많군.”

“뭐라고?”

“어차피 곧 죽을 늙은이가 말이 너무 많아.”

갈황은 일시지간 아무 대꾸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갈황뿐 아니라 진산월이 나타날 때부터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천봉선자들 또한 모두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갈황의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이 푸루뎅뎅하게 변했다.

“이……….. 이…. 찢어죽일 놈이……..!!!!!!!!!”

하나 그의 노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산월의 몸은 어느새 그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가 검을 뽑는 장면을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우윳빛 검광이 갈황의 상반신을 뒤덮어갔다.

“이놈! 어림없다!”

갈황은 양쪽 소맷자락을 세차게 휘둘렀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경력이 파도처럼 일어나며 검광에 맞서갔다.

파파팡!

마치 종이 북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사방이 온통 경풍과 검영에 휘감겨버렸다.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이 다급하게 뒤로 사오 장이나 급히 물러났다. 하나 그들은 이내 다시 오 장을 더 물러나야만 했다. 푸르스름한 경력 속에 강한 독기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푸스스…….

땅바닥에 널려진 휘장의 파편에 독기가 닿자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만 보아도 경력에 담긴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갈황이 미친 듯이 양쪽 소맷자락을 흔들자 장영이 그야말로 사방을 완전히 헤집어놓을 듯 뭇운 기세로 휘몰아쳐 갔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장영 속으로 뛰어들며 용영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그들이 싸우는 곳은 온통 시퍼런 장영과 우윳빛 검광에 휘감겨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산월이 나타날 때부터 누구보다도 눈을 반짝이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누산산은 안력을 돋우어 그들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금교교를 돌아보며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언니, 누가 우세한 것 같아요?”

금교교는 싸움 장면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내저었다.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의 신형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구나.”

“금안공(金眼功)은 이럴 때 안 쓰고 언제 쓰려고요? 공력 아끼지 말고 실력 발휘 좀 해서 자세한 사정 좀 알려줘요.”

누산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을 하자 금교교가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이내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에 금광(金光)이 어른거리며 그녀의 눈동자가 투명해졌다. 그녀는 금빛으로 물든 눈으로 장내의 광경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감탄성이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의 검술이 정말 대단하구나. 갈황의 원음독장(元陰毒掌)이 그의 검에 막혀 그의 몸에 가까이 닿지 못하고 있다.”

누산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곧 저 늙은 독물은 진 장문인의 검에 갈가리 찢겨 죽겠군요?”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진 장문인 또한 원음독장에서 흘러나오는 음기와 독기때문에 움직임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는 것 같구나. 내뻗었던 검초를 자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보아 마음먹은 대로 검법을 펼치기에 난관이 있는 모양이다.”

누산산은 답답한 듯 고운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그럼 대체 누가 유리하단 말이에요?”

“아직까지는 진 장문인이 조금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갈황의 상반신 몇 군데가 검에 베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누산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진 장문인이 이길 거에요. 진 장문인은 그 늙은 독물보다 훨씬 젊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남아서 더 유리해질 테니까요.”

“네 말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니? 그런데…..”

금교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입을 다물자 누산산은 안달이 나서 그녀를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언니 생각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금교교는 관자놀이에 올려놓았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에 따라서 그녀의 눈에 어렸던 금광도 사라지고 그녀의 눈동자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금안공은 순간적으로 안력을 극대화하여 초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절세의 신공이었으나, 그만큼 내고의 소모가 막대해서 오랜시간을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금교교는 자신의 팔을 잡은 채 안달을 하는 누산산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왜 그렇게 진 장문인의 승패에 관심이 많으냐?”

누산산은 움찔하다가 이내 뾰로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야 저 노독물이 이기면 우리까지 위험해지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나저나 어서 말해줘요. 언니가 보기에는 저들의 싸움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금안공으로 지켜봤으니 짐작 가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금안공이라고 만능인 줄 아느냐? 그들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만 간신히 확인했을 뿐이니 앞으로의 일까지 예측할 수는 없다.”

“언니의 좋은 머리로 추측이라도 해봐요. 진 장문인이 저 늙은 독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분명 진 장문인이 유리하긴 한데…. 문제는 갈황이 독공의 고수라는 것이다. 그의 한음독정공은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독기가 혈맥을 타고 체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사실상 막기가 가장 까다로운 무공이야.”

누산산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그놈의 독공이 문제로군요. 그런데 진 장문인은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잖아요.”

“그래서 나도 기이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진 장문인이 아무리 원음독장을 완벽하게 막는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체내에 적지않은 독기가 쌓여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야 할텐데…. 전혀 독에 중독된 기색이 없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누산산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 장문인이 혹시 독을 막는 피독주(避毒珠)라도 소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금교교는 머리를 저었다.

“갈황의 한음독정공이 배출하는 것은 단순한 독기가 아니라 지독한 금음독이다. 그래서 음기와 같이 섞여서 체내에 독기가 침투하기 때문에 피독주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누산산은 상상만으로도 질리는지 몸을 한차례 떨었다.

“정말 악독한 무공이로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강호인들이 그를 그토록 두려워할 리가 없지. 절세의 열양공을 익힌 고수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한음독정공의 독기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언니는 진 장문인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금교교의 얼굴에 아리송한 빛이 떠올랐다.

“글쎄….. 처음에는 그럴 줄 알았는데, 금안공으로 살펴본 바로는 진 장문인은 독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 같구나.”

누산산의 얼굴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활짝 펴졌다.

“왜 그런 것 같아요?”

“나도 아까부터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란다.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가요?”

“삼년 전에 진 장문인은 서장의 제일지자인 천애치수 단목초를 암습하려다 앙천지독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나도 기억이 나요. 그 때문에 진 장문인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그래, 무림제일신의인 노방이 아니었다면 진 장문인은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그 일이 이번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내가 듣기로 한번 절독(絶毒)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그보다 약한 독에는 잘 중독되지 않는다고 하더군. 독에 내성(耐性)이 생겨서 웬만한 독쯤은 간단하게 견뎌낼 수 있다는 거야.”

누산산이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건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로군요. 그렇다면 언니는 진 장문인이 그때의 사건때문에 만독불침(萬毒不侵)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금교교는 피싯 웃었다.

“만독불침이 그렇게 쉽게 되겠니? 다만 어지간한 독은 충분히 감당할 정도는 될걸. 진 장문인 정도의 고수가 독기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떡 독공의 고수라 해도 독으로는 그를 쉽게 쓰러뜨릴 수 없을 거야. 설사 한음독정공을 익힌 갈황이라고 해도 말이지….”

누산산은 반색을 하며 흥분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니는 진 장문인이 갈황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군요?”

“갈황의 독기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두 사람의 진재실학(眞才實學)뿐이야.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는 대결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금교교의 말에도 누산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순수한 무공의 겨룸이라면 진 장문인이 저 늙어빠진 독물을 당해내지 못할 리가 없어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장내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악!”

두 여인은 깜짝 놀라 비명성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내의 싸움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장영과 검풍에 휩싸였던 곳은 거의 폐허처럼 변해버렸는데, 그 폐허 한가운데 하나의 인영이 질펀한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갈가리 찢어진 흑포를 걸친 채 왼쪽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쩌억 갈라져 숨이 끊어져 있는 인영은 다름아닌 독존자 갈황이었다. 신목령의 오천왕 중의 일인이며 가공할 한음독정공으로 모든 무림인들의 두려움을 샀던 독중지존이 비참한 몰골로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진 갈황의 주름진 얼굴에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경악과 공포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갈황의 시신에서 삼 장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가뜩이나 헝클어진 채 먼지가 수북했던 그의 머리카락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옷의 군데군데가 해어져 있었지마 그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용영검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비 한 방울 묻지 않은 용영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보는 이의 가슴에 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장내는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중인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갈황의 시신과 진산월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는데, 누구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갈황의 죽음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침묵을 깬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장내의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 당신의 숨겨두었던 한 수를 보여줄 때가 된 것 같군.”

중인들은 진산월의 말에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진산월이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임조몽이었던 것이다. 임조몽은 준수한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내가 무슨 수를 숨겨두었단 말이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곳에 오면서 습격자들의 시신을 발견했지. 뒤져보니 하나같이 가슴에 검은 색 전갈 문신을 하고 있더군. 그들은 흑갈방의 방도(榜徒)였던 거요.”

“…….”

“그런데 흑갈방을 이끌고 있는 당신이 이들과 함께 있으니 무언가 수를 부리려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흑갈방이란 단어가 나올 때부터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고 있던 임조몽이 불쑥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한번 본 사람을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소. 특히 검을 들고 싸웠던 상대를 몰라볼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화면신사!”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에 중인들은 경악어린 눈으로 임조몽을 바라보았다. 임조몽은 한동안 말없이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친구로군. 그렇소, 내가 바로 흑갈방을 이끌고 있는 흑백쌍사 중의 화면신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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