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7화
제 225장 일전쌍조(一箭雙鳥)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제는 해가 완연히 떠올라 주위는 아침의 신선한 빛이 가득했으나 중인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중인들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조몽은 여전히 입가에 여자들을 매혹시킬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자연히 내 신분을 밝히려 했는데 모양새가 조금 우습게 되었군.
어차피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말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터 주변의 숲 속에서 하나둘씩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는 삽시간에 수십으로 불어나서 이내 공터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전혀 주위에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어느새 소리도 없이 나타나 장내를 포위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잘 훈련된 자들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태양혈이 불록하고 두 분에 신광이 번뜩이는 고수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은 언뜻 보기에도 일류를 넘어선 수준의 실력자들임이 분명했다.
“이들은 우리 흑백쌍사가 제법 오랫동안 고련(苦練)시켜 온 이십팔살(二十八殺)이오. 어제 투입되었던 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지.”
임조몽의 말이 아니더라도 군유현은 이들이 자신들을 습격했던 무리들보다 훨씬 더 강한 자들임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개개인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 이들 중 서너 명이 합공하면 자신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지 선뜻 확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흑갈방이 비록 하남성 일대에서 무서운 속도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고 해도 이토록 뛰어난 고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어제 자신들이 당했던 그 집요하고 무서운 습격이 흑갈방의 소행이라는 것조차 진산월의 말이 아니었다면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증인들은 주위에 이토록 많은 흑갈방의 고수들이 에워싸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특히 신목령의 고수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갈황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서인지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들이었다.
무거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전일도가 군유현을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상황이 바뀌었으니 우리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고 보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앞뒤가 모두 잘라진 말이었으나, 군유현은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서로 힘을 합치자는 말이오?”
“지금 상황은 너무 일방적이라 어느 한쪽만으로는 사태를 타개해나갈 수 없소. 일단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행동하는 게 좋지 않겠소?”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해 보였던 전일도의 평소 태도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유연한 모습에 군유현은 내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거칠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세심한 구석도 있군.’
군유현은 전일도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하나 조금 전만 해도 갈황을 앞세워 임영옥을 겁박하던 신목령의 무리들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아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이번 출행의 책임자이기는 해도 임영옥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닌가?
“그녀의 의사를 타진해야겠소.”
군유현의 말에 전일도는 냉랭한 미소를 흘렸다.
“누구에게 물어보겠다는 거요? 구궁보의 세상물정 모르는 소공녀요? 아니면 모용 공자의 명목분인 약혼녀요?”
전일도의 독설에 가까운 말에 군유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소.”
“어차피 결정은 당신이 해야 한다는 뜻이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그녀들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이번에는 군유현도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군유현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봉궁의 선자들에게는 미리 언질을 해야겠소.”
“그녀들도 거절하지 않을 거요. 본 령 외의 다른 문파에 굴욕을 당한다는 건 그녀들로서는 가장 원치 않는 일일 테니까 말이오.”
그들이 남들의 눈을 피해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진산월은 마침내 임영옥을 마주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말문이 막혀버린 것인지, 아니면 이미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음속으로 해버려서 달리 또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두 사람 자신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하염없이 응시한 채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표정이었다.
모용연조차도 두 사람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고, 금교교를 비롯한 천봉선자들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임조몽의 낭랑한 음성이었다.
“하하……. 두 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구려. 하지만 이제는 일을 매듭지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진산월은 그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임영옥을 바라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소.”
임조몽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때가 되지 않다니…..”
“올 사람이 다 오지 않았다는 뜻이오.”
임조몽의 준수한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올 사람은 이미 모두 왔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소.”
“지금 물건과 그 주인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는데, 무슨 주인공을 말하는 거요?”
“이번 일을 계획했던 실질적인 주인공 말이오.”
임조몽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이번 일의 주재자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진산월은 비로소 임영옥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떼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너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이런 일을 꾸밀 만큼 치밀하지도 않고, 성격적으로도 맞지가 않소.”
임조몽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당신에 대해 들은 적이 있지.”
진산월이 부인하지 않자 임조몽은 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단 말이오?”
“적어도 당신의 본래 성(姓)이 백(伯)씨라는 건 알고 있소.”
진산월의 말에 임조몽은 조금씩 굳어지더니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군. 나에 대해서 그 정도로 알고 있다면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구려.”
임조몽은 과장스럽게 양손을 들어 항복했다는 표시를 하고는 아내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는 당신이 나와서 마무리를 지으시오.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하는 건 영 내 체질이 아닌 것 같소.”
그러자 걸걸한 웃음소리와 함께 장내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하하…… 내가 뭐라고 했나? 자네 말솜씨로는 그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공터에 어느새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건장한 체구를 지닌 흑포복면인이었다. 장내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었으나 누구도 흑포복면인이 무슨 신법으로 장내에 나타났는지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맞았다.
“이제야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나셨군.”
흑포복면인은 다름 아닌 운중용왕이었다. 운종용왕은 진산월의 담담한 얼굴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더니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당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사매의 행방을 알려주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소.”
운중용왕은 다소 뜻밖인 듯 신광을 번뜩이며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순순히 풀어주었느냐?”
“그래야 내가 도착할 때까지 당신들이 사매에게 손을 쓰지 않을 테니까.”
운중용왕은 어깨를 들썩이며 정말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한 안목에 놀라운 뱃심이다. 확실히 우리는 네가 네 사매를 만날 때까지 그녀에게 어떠한 수작도 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호위들이 대부분 제거되었을 때 습격을 중지시켰지.”
그 말에 군유현과 모용연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갈방의 습격이 임영옥을 노린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임영옥을 호위하는 구궁보의 고수들과 군유현의 수하들이었던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호위들로부터 임영옥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그들이 습격한 진짜 목적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아무도 습격해오는 자들이 없다고 했더니…..’
군유현은 그런 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자책했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운중용왕은 다시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당신들이 내 사매를 습격한 건 나를 유인해서 이곳으로 끌어들일 속셈이었다는 정도요.
아마도 천룡궤와 봉황금시를 한 번에 얻으려고 한 것이겠지.”
“흐흐….. 바로 보았다. 네가 가진 천룡궤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봉황금시는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들이다. 봉황금시가 없으면 천룡궤를 열 수가 없고, 천룡궤가 없으면 봉황금시는 단순한 장식품에 불과하니 말이다. 둘 중 한 가지만 얻어보았자 남들의 주목만 받게 되고 집중적인 견제를 당하기만 할 뿐이어서 우리는 두 물건을 한꺼번에 입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지.”
“…..!”
“그때 두 물건을 가진 자들이 너와 네 사매임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그 물건들이 연인 관계의 두 사람 손에 각기 하나씩 쥐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한 가지 계획이 떠오르더군.
바로 화살 하나로 새 두 마리를 낚는 방법이지.
마침 네 사매가 너를 만나기 위해 구궁보를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우리는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녀를 호위하는 구궁보의 무사들에게서 그녀를 떼어놓아야 했고, 임영옥과 봉황금시를 노리는 신목령의 고수들을 막아야 했으며, 필연적으로 따라올 게 뻔한 봉황금시의 원주인인 천봉궁의 추격을 뿌리쳐야 했다.
구궁보의 무사들을 제거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으나 흑갈방의 고수들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천봉궁의 추격도 그들을 현혹시켜 몇 개의 무리로 나뉘게 하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목령의 고수였다.
원래 운중용왕은 신목령에서 신목십이호 중의 한두 명을 보낼 줄 알았으나, 전혀 예상치 않게도 태음신맥을 지닌 임영옥을 노리고 오천왕 중의 갈황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갈황의 모공은 그리 걱정할 것이 없었으나, 그의 독공만큼은 아무리 운중용왕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한음독정공은 그의 무공과는 완전히 상극(相克)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로서는 도저히 갈황을 상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 일을 함께 하기로 한 임조몽과 다른 용왕들도 갈황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운중용왕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묘수(妙手)를 생각해냈다.
독에 대한 강한 내성을 지닌 것이 확인된 진산월로 하여금 갈황을 상대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사항이 보완되었고, 마침내 전반적인 계획이 짜여지자 그들은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그들은 임영옥이 움직일 수 있는 노선을 철저히 모두 파악하여 천라지망을 펼쳐놓은 후 천봉궁과 신목령의 고수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일부러 누설하여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그런 다음 진산월을 이쪽으로 유인하였던 것이다.
운중용왕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하여 임영옥 일행은 대부분의 호위를 잃고 겨우 다섯 명의 인물들만 남게 되었고, 천봉궁의 고수들은 몇 개로 나뉘어져 단지 세 명의 선자만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갈황은 자신을 상대할 가장 무서운 사신(死神)이 오는 줄도 모르고 신목령의 고수 몇 명만을 동반한 채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 결과는 지금 중인들의 앞에 명명백백하게 펼쳐져 있었다.
운중용왕의 말을 듣고 있던 천봉선자 등과 전일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들이 운이 좋아 늦지 않게 이곳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철저히 운중용왕의 수작에 놀아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운중용왕은 느긋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너뿐만 아니라 구궁보와 천봉궁, 신목령이 모두 얽혀 있어 계획을 세운 나조차도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으니 오늘 내 일진은 무척 좋은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의 말은 명백한 비아냥을 담고 있었으나 진산월은 처음과 다름없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멋진 계획이었소. 단 한 군데를 제외하면 말이오.”
“그게 무엇이냐?”
“당신은 나와 내 사매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물건은 우리들 손에 있다는 거요.”
운중용왕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무슨 뜻이냐? 설마 물건을 파훼하겠다는 것이냐?”
“말 그대로요. 물건은 여전히 우리 수중에 있고, 당신은 아직까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소.”
그제서야 진산월의 말뜻을 알아차린 운중용왕이 복면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거렸다.
“너희들에게서 물건을 입수하기 전에는 아직 우리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소. 그리고 당신들 실력으로는 내게서 물건을 빼앗지 못할 거요.”
진산월은 운중용왕과 임조몽을 모두 상대해보았으므로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운중용왕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도 의외로 전혀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흐흐….. 네 검법은 솔직히 내가 상대하기에는 벅차다는 걸 인정하지. 너는 내가 만나본 최고의 검객이다.”
그는 오히려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진산월의 무공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진산월의 마음은 처음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운중용왕에게 자신을 상대할 절대적인 방법이 있지 않다면 이런 여유를 보일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운중용왕은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를 위해서 최고의 만찬을 준비했지. 아마 너도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운중용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터를 에워싸고 있던 흑갈방 고수들 사이가 갈라지며 한 사람이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나왔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흑삼인이었다. 강퍅한 얼굴에 피부가 거무스름해서 초췌해보이기도 했다.
하나 흑삼인의 두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절대 공백(空白)의 무심한 눈이었던 것이다.
나이는 대략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옆구리에 고색창연한 칼 한 자루를 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볼품없는 인상이었는데도, 그를 보는 진산월의 얼굴에는 한 줄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흑삼인을 보는 순간 화산파의 절대고수였던 매장원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흑삼임은 느릿한 걸음으로 진산월의 삼 장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무색투명한 눈을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정말 멋진 눈이로군. 이곳까지 애써 달려온 보람이 있겠어.”
너무 낮아서 목이 쉰 것처럼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져 왔다. 텅 빈 그의 눈만큼이나 공허한 음성이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운중용왕을 대할 때와는 달리 격식을 차려 인사를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흑삼인은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양천해(梁天解)다.”
그 짤막한 한마디에 장내가 온통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버렸다.
“금도무적(金刀無敵) 양천해?”
“저 사람이 무림구봉 중의 그 도봉(刀峯)이란 말인가?”
놀란 경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흑삼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천해는 강호무림에서 십 년 넘게 최고의 도객으로 손꼽히는 절세의 고수였던 것이다.
무림구봉의 일인일 뿐 아니라 도에 관한 한은 자타가 공인하는 제일인자였다.
그런 양천해가 이렇듯 볼품없는 몰골의 사나이일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산월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양 대협도 쾌의당의 소속이었소?”
양천해는 아무런 감정의 빛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쾌의당 칠대용왕 중의 도중용왕이 바로 나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경악을 참지 못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강호제일의 도객이 쾌의당의 용왕 중 한사람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화산파의 최고 검객 중 한사람이었던 매장원이 쾌의당의 검중용왕임이 밝혀졌을 때 강호가 온통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양천해마저 쾌의당 용왕 중 한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양천해 같은 절대고수도 일개 용왕에 불과하다면 나머지 용왕들은 어떤 인물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고수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쾌의당의 당주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중인들이 놀라건 말건 양천해는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내 사제가 너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군.”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남에서 귀 사제의 솜씨를 겪어본 적이 있었소.”
“사제가 네 칭찬을 많이 했다. 자신이 싸워본 검객들 중 가장 무서운 솜씨를 지니고 있다고 입이 닳도록 떠들어대더군. 무척 진중한 녀석이었는데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어대기에 너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양천해가 말하는 사람은 무정도 한충이었다.
위남의 강변에서 진산월과 종남파의 고수들은 한충을 비롯한 고수들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한바탕 곤경에 처하기도 했었다.
진산월은 양천해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양천해의 다음 말을 듣고서야 이해를 했다.
“내 사제는 허언을 하지 않는 성격이니 사제의 말대로라면 너는 나의 좋은 적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일에 손을 빌려달라고 하는 운중용왕의 부탁을 선뜻 승낙한 것이다.”
‘나와 싸워보고 싶소?’
“그게 내가 살아나가는 이유이다.”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진산월은 양천해가 어떠한 종류의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사(生死)를 건 격투에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는 전형적인 무인(武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자를 꺾는 쾌감만을 쫓는 싸움광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오늘 양천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게 분명했다.
양천해는 자신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운중용왕은 확실히 절묘한 수를 준비해 놓은 것이다. 하나 운중용왕이 준비한 수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운중용왕이 어느 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부인이 온 건 내 제안을 승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제대로 본 거요? 아니면 날이 너무 좋아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온 거요?”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뜻밖에도 임조몽의 옆에서 술을 따랐던 시비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여전히 임조몽의 옆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운중용왕이 자신을 향해 입을 열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끼어 들이려는 거에요? 설마 도중용왕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말에 텅 비어있던 양천해의 눈에 무시무시한 섬광이 번뜩거렸다.
운중용왕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소? 나는 다만 부인의 귀여운 제자가 부인에게 내 말을 제대로 전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오.”
여인은 얄밉다는 듯 그를 쏘아보더니 이내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제자 아이는 제 할 일을 다했어요.”
“오!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요?”
“그럴 생각으로 오긴 했는데, 당신이 도중용왕까지 부른 줄 알았다면 생각을 달리했을 거에요.”
운중용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부인께선 걱정하지 마시오. 도중용왕은 물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그는 그저 신검무적과 싸우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소.”
여인의 봉목이 반짝 빛났다. 여인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영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당신의 수단은 알아줘야겠군요.”
“고마운 말씀이오. 이제 부인의 대답을 듣고 싶소만.”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헛걸음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운중용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럼 내게 줄 것이 있을 텐데…..”
여인은 한번 더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소맷자락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그녀와 운중용왕의 사이는 제법 멀리 떨어졌는데도 책자는 마치 줄에 매달린 것처럼 허공을 둥둥 떠가더니 운중용왕의 손에 정확히 떨어졌다.
운중용왕은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부인의 물건 던지는 솜씨는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하오. 과연 명불허전이 따로 없구려.”
여인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책자나 확인하도록 해요.”
운중용왕은 손에 들린 책을 살펴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무해가 맞군. 부인의 권리를 인정하겠소.”
“배분은?”
“부인께서 둘 중 하나를 고르시오.”
“나는 금시를 원해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그녀의 시선이 옆에 앉아있는 임조몽을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물건은 하나뿐인데, 남은 사람은 둘이군요.”
운중용왕은 걸걸하게 웃었다.
“하하…… 부인이 다른 사람 생각까지 해줄 줄은 몰랐소. 그는 물건 대신 사람을 갖기로 했으니 부인께선 걱정하지 마시오.”
여인이 임조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나?”
운중용왕을 대할 때와는 달리 그녀는 임조몽에게 서슴없이 하대를 했다. 하나 임조몽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고 입가에 수려한 미소를 매달았다.
“저는 신검무적의 목과 태음신맥의 여자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두 분보다 제가 더 많은 배분을 가지는 것 같아 죄송하군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긴…… 자네는 아직 젊은 나이지.”
임조몽은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진산월은 자신과 임영옥을 이미 수중에 들어온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 배분하고 있는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운중용왕을 향해 물었다.
“저 여인도 용왕 중의 한 사람이오?”
운중용왕은 선뜻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다. 그녀가 바로 화중용왕이다.”
진산월은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뭐요?”
운중용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건 나중에 네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해라. 아마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산월은 뼛골이 시릴 듯 차가운 기운 한 가닥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양천해가 예의 무색투명한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진산월은 양천해가 발출한 무형지기를 슬쩍 고개를 움직여 피하며 그를 향해 우뚝 마주 섰다.
“지금이오.”
양천해 또한 양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허리를 쭉 펴고 몸을 곧추세웠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자 장내의 공기가 아연 긴장되며 팽팽한 기운이 사방을 무겁게 짓눌렀다. 중인들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마른 침을 삼켰다. 한쪽은 오랜 세월 동안 무림에서 천하제일도객으로 인정받고 있는 무림구봉 중의 도봉인 금도무적, 다른 한쪽은 혜성같이 나타나 백 년 내 제일가는 검객이라고까지 찬사를 받고 있는 신검무적. 두 절대고수의 생사를 건 대결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