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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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2권 용왕대전(龍王大戰)편 : 9화


제 227장 사불여의(事不如意)

장내의 싸움은 그야말로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운중용왕의 예상대로 신목령의 고수들과 구궁보, 천봉궁의 인물들이 모두 합세하여 흑갈방의 이십팔살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벌써 적지 않은 인물들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군유현의 수하인 진남쌍패 중 철패 하후태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고, 전일도와 함께 나타났던 낙일사영 또한 지금은 한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흑갈방의 피해도 적지 않아서 이십팔살 중 무려 여섯 명이나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운중용왕은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은 사람들의 반격이 워낙 강력해서 쉽사리 그들을 쓰러뜨리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라 불려도 손색없는 인물들이었고, 그중 몇몇은 자신에 비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야말로 승자를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중용왕의 시선이 한 사람을 찾았다.
곧 그의 시야에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임조몽과 임영옥의 모습이 들어왔다.
임조몽이 봉황금시의 주인인 임영옥을 상대하겠다고 하여 운중용왕은 선뜻 승낙을 했는데, 두 사람은 아직 손도 맞대보지 않은 것 같았다.

운중용왕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직하게 혀를 차고 말았다.

‘쯧, 화문신사가 또 쓸데없는 버릇이 나온 모양이군.’

임조몽은 무공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지금도 그냥 이유 불문하고 공격했으면 임영옥을 제압하고도 남았을 텐데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녀와 대치하고만 있으니 운중용왕이 못마땅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들 눈에는 그의 그런 모습이 강자의 여유로 보일지 몰라도, 운중용왕에게는 전혀 쓸데없는 자기만족의 허식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저럴 시간이 있으면 빨리 그녀를 제압한 다음 옆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는 자기 부하들의 목숨이나 신경 쓸 일이지…….’

운중용왕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조몽은 준수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임영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여인들의 방심을 뒤흔들 만큼 매력적이었으나, 아쉽게도 임영옥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임 소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언제고 꼭 한번 만나고 싶었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군요.”

임영옥의 냉정한 말에 임조몽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군. 하긴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일이 어렵게 되어 유감이오. 솔직히 나는 신검무적과 임 소저가 잘되기를 마음 한편으로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소. 소저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임영옥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고마운 말이군요.”

“두 사람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게요. 그런데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무림의 보문 두 가지가 당신들의 손에 들어가 버렸으니 그저 당신들의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겠구려.”

“과연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일까요?”

“소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정말 운이 없었소. 소저가 희귀하기 그지없는 태음신맥을 타고난 것도 그렇고, 신검무적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어 우리와 적대하게 된 것도 그렇고……세상에 정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당신들이 그 일의 당사자가 된 것은 운 때문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겠소?”

임영옥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당신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우리는 정말 운이 나빴군요.”

“그렇소.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들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설명이 안 되지.”

“그렇다면 안심했어요.”

뜻밖의 말에 임조몽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심했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임영옥은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조용하게 말했다.

“사형은 늘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운이란 공평한 거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운이 나빴다면, 앞으로는 반드시 좋아질 거예요.”

임조몽의 두 눈에 괴이한 빛이 번뜩거렸다.

“소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소?”

“그래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임조몽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나 곧이어 고개를 흔들며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소저의 믿음이 사실이 되길 빌겠소. 하지만 일단 오늘의 운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구려.”

그는 천천히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리며 그녀를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모용 공자가 직접 소저에게 무공을 가르쳤다고 하던데, 이번 기회에 소저를 통해서 모용 공자의 실력을 한번 가늠해봐야겠소.”

임조몽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향해 손을 쓸 듯하자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세 명의 흑갈방 고수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모용연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싸우는 와중에도 틈틈이 임영옥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훨씬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흑갈방 고수들의 합공에 애를 먹고 있었다.

‘큰일 났구나. 지금 언니는 절대로 남과 싸워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그녀는 처음에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하나 이십팔살 중의 세 명이 집요하게 계속 그녀만을 공격해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임영옥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임조몽이 임영옥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모영연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군유현은 다섯 명의 흑갈방 고수들이 펼친 합격진에 갇혀 있어 당장은 몸을 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세 명의 천봉선자들 또한 두세 명의 고수들에게 합공을 받고 있어 자기 한 몸 지키기에도 힘겨워 보였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남을 도와줄 여력은 없어 보였다.

기대했던 신검무적은 어찌 된 일인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어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양천해와의 격전의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주위에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는 두 명의 용왕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무리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면 임영옥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암울하게 했다.

운중용왕은 임조몽이 임영옥을 향해 다가가는 광경을 보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웬일인지 이번 일을 빨리 마무리 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화면신사의 실력이라면 임영옥을 제압하고 봉황금시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신검무적도 제압당했으니 천룡궤는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조만간 천룡궤를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운중용왕은 진한 흥분에 몸이 떨려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진산월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 가슴팍을 더듬었다.

“이런 제기랄!”

진산월의 품속을 뒤지던 운중용왕이 욕설을 내뱉었다.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했던 그로서는 거의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화중용왕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천룡궤가 없소.”

화중용왕의 봉목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그랬소. 그런데 지금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확인해 보았는데, 이자의 품속에는 천룡궤가 없소.”

운중용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필시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곳에 숨겨 놓았을 거요. 내가 이 생각을 못하다니…..”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험한 장소로 오면서 상대방이 노리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물건을 다른 곳에 보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는데, 운중용왕은 미처 그 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천룡궤 같은 기보를 몸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귀한 물건일수록 자기 몸에 깊숙이 보관한 채 놓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운중용왕은 낭패스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기껏 함정을 파놓고 도중용왕까지 희생해 가며 겨우 상대를 제압했는데 막상 목표로 했던 물건은 찾을 수 없으니 맥이 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화중용왕은 그보다는 한결 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신검무적은 우리 손에 있으니 나중에 그를 깨워 알아보면 될 일이에요. 당신을 만나고 이곳으로 올 때까지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 그리 먼 곳에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운중용왕은 그답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낸들 그걸 모르겠소? 하지만 왠지 일이 그렇게 순순히 풀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구려. 지금까지 강호를 행하며 내 계획이 어긋난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신검무적과 관련된 일은 자꾸만 예상이 빗나간단 말이오.”

“그런 의기소침한 모습은 당신답지 않군요. 그렇게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그를 깨워 천룡궤의 행방을 토해 내도록 할까요?”

“미인루를 그렇게 쉽게 해독할 수 있는 거요?”

화중용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비밀이에요.”

운중용왕은 쓴 입맛을 다셨다.

“흠….. 알겠소. 하지만 이곳에서는 더 지체하기 힘드니 일단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소.”

“물론 나도 여기서 신검무적을 깨울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슬쩍 손짓을 하니 지금까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네 명의 하인들 중 두 명이 미끄러지듯 유연한 신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를 데려와라.”

“예.”

그녀의 말에 두 명의 하인들은 허리를 조아리고는 아직까지도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있는 진산월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데 그녀들이 막 진산월의 몸에 손을 대려 할 순간이었다.

휙휙!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그녀들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들이 움찔 놀라 몸을 피하자 그 물체는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폭음을 일으켰다.

쾅!

그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매캐한 내음이 코를 찌르는 가운데 노란색 연기가 사방을 뒤덮자 운중용왕이 다급한 외침을 토해냈다.

“현황탄(玄黃彈)! 개방의 쥐새끼냐?”

그가 세차게 양쪽 소매를 휘두르자 거센 경력이 뿜어 나오며 연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운중용왕이 다시 몇 차례 손을 내젓자 연기가 가시며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두 명의 여인들은 연기에 중독된 듯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운중용왕은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자 황급히 화중용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았소?”

화중용왕의 얼굴 또한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현황탄이 터진 직후 인영 하나가 연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인영의 얼굴은 보지 못했소?”

“인영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흐릿한 그림자만 간신히 보았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운중용왕의 눈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부인의 안력으로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보통 놈이 아니로군.”

“현재 강호에서 그 정도의 신법을 펼칠 수 있는 자는 단지 열 명가량뿐이죠. 그리고 그중에서 개방의 보물인 현황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죠.”

“만리부운객 나자행….. 그 빌어먹을 거지놈이로군.”

나자행은 개방의 용두방주일 뿐 아니라 강호십대신법 대가 중의 일인이었다. 그는 뛰어난 신법과 무공으로 무림구봉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제일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운중용왕은 두 눈을 뻔히 뜨고도 신검무적을 빼앗기게 되자 분노를 넘어 허탈함을 느꼈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중용왕 또한 심사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신분으로 수치심을 무릅쓰고 자기보다 훨씬 어린 무림의 후배에게 암습까지 했음에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니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그녀는 애초의 목적을 생각해내고는 이내 운중용왕을 향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겠어요. 일이 더 틀어지기 전에 봉황금시라도 확실히 손에 넣어야겠어요.”

마침 운중용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두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이면 화면신사가…….”

하나 임조몽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운중용왕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당연히 임영옥을 제압해놓고 있을 줄 알았던 임조몽이 두 명의 중년인에게 앞뒤로 포위된 채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명의 중년인의 얼굴을 본 운중용왕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쌍무상……”

놀랍게도 그들은 천봉궁의 팔대신장 중에서도 무공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추혼무상 갈혁과 소면무상 갈휘 형제였던 것이다.

운중용왕은 그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망연자실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쌍무상이 누구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두두……….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인마가 거대한 사두마차와 함께 공터를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칠팔 명의 말을 탄 고수들에게 호위된 채 공터로 들어서는 마차는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네 마리의 눈부신 백마가 이끌고 있는 마차는 온통 붉은색이었고, 사방의 벽에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양쪽으로 달려 있는 문에는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도는 진주 주렴이 달려 있었고, 손잡이를 비롯한 모든 장식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붉은빛과 황금 장식이 봉황무늬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해 보였다.

세상에 이토록 호화로우면서도 품위 넘치는 모습의 마차는 결코 흔치 않았다. 오직 하나, 강호의 신비문파인 천봉궁의 소주인인 단봉공주의 단봉향차(丹鳳香車) 뿐이었다.

마침내 단봉공주가 천봉궁의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무서운 속도로 숲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 노인의 달려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한 줄기 검은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휙휙!

지금도 노인은 커다란 나무 위를 단숨에 뛰어넘어 숨 한 번 내쉴 동안에 십여 장을 움직이고 있었다. 비쩍 마른 노인의 허리춤에는 아홉 개의 매듭이 묶여 있었고, 등 위에는 삼 척 길이의 푸른색 죽장이 비스듬하게 매어져 있었다.

더구나 오른팔에는 자기보다 체구가 더 큰 사람 하나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런 상태로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십 리 정도 달려간 다음에야 노인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하나 여전히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노인이 몸을 멈춘 것은 그로부터 일각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는 어느 야산의 중턱에 있는 작은 산장으로 들어갔다. 산장은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별로 높지 않은 담벼락 안으로 서너 채의 아담한 모옥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고 뒤쪽에 상당히 커다란 연못이 있어 제법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현판도 달려 있지 않은 산장의 담을 훌쩍 뛰어넘은 노인이 모옥 중 한 곳으로 다가서자 어디선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 망할 놈의 거지야! 왜 멀쩡한 문은 놔두고 허구한 날 담을 넘어서 들어오는 게냐? 네가 거지냐, 도둑놈이냐?”

노인은 모옥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데나 다니기 편한 곳을 이용하면 되는 거지. 그나저나 이리 좀 와봐라. 네가 힘을 써야 할 일이 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나를 부려먹으려고 하는 게냐?”

퉁명스런 음성과 함께 한 명의 인물이 내실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체구가 작달막하고 몸이 퉁퉁한 화의노인이었다. 얼굴이 대춧빛으로 붉고 턱밑으로 허연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나 근엄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해학이 넘쳐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노인의 두 눈이 연신 밝게 빛나며 활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의노인은 거지노인을 보며 무어라고 이죽거리려다 거지노인이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을 탁자 위에 올려놓자 눈살을 찌푸렸다.

“제길, 또 어디서 시체 하나를 가지고 온 게냐?”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좀 살펴보도록 해라.”

“내가 무슨 네놈 종이냐? 하라는 대로 다 하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의노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탁자로 다가왔다. 탁자 위에 놓인 사람을 본 화의노인은 그의 옆구리와 어깨에 나 있는 칼자국을 보고는 눈빛이 홱 변했다.

“무서운 도기(刀氣)로구나…..”

그는 칼자국을 조심스레 살펴보고는 재차 탄성을 토해냈다.

“정말 가공스러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경력이 담긴 도기다. 세상에 이토록 무서운 도법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

그때 거지노인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 사람 있지.”

“누구냐? 그 대단한 작자가?”

“양천해.”

거지노인의 말에 화의노인은 한차례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양천해의 구절도에 당하면 이런 흔적이 남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 그나저나 정말 무섭군. 대체 칼에 얼마나 엄청난 힘이 달려 있기에 인간의 몸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양천해의 구절도에 당하고도 살아남다니 정말 운이 좋은 자로구나.”

“그래, 하지만 양천해는 그리 운이 좋지 못했지.”

“왜?”

“양천해는 전신이 난도질당해 죽었다.”

화의노인의 눈이 금시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뭐라고? 금도무적 양천해가 죽었다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내가 직접 목격한 일이다.”

거지노인의 말에 화의노인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대체 천하에 누가 있어 양천해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네 눈으로 지금 보고 있지 않느냐?”

회의노인은 순간적으로 거지노인의 말뜻을 몰라 멀거니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탁자 위의 인영에게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그럼, 이자가 양천해를 죽였단 말이냐?”

“그래.”

“무림구봉 중의 도봉이며, 천하제일도객인 양천해가 이 새파랗게 젊은 녀석과 싸우다가 패해서 죽었다고?”

거지노인은 갑자기 무거운 표정으로 탄식을 했다.

“오늘 나는 정말 무서운 싸움을 보았다. 내 평생 그토록 살벌하고 가슴 떨리는 싸움은 본 적이 없다. 그걸 정말 최고의 무인(武人)들이 사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보이는 엄청난 광경이었지.”

“…..!”

“그 처절한 싸움 끝에 양천해는 온몸이 피로 뒤덮인 채 싸늘한 시신이 되고 말았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완벽한 결투였고, 또한 완벽한 승부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 무인들의 신성한 승부를 더럽힌 자들이 있다. 이자는 비록 승리했지만 치졸한 암습을 받고 쓰러진 것이지. 그러니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자를 살려야 한다.”

화의노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인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옆구리와 어깨의 칼자국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이 도흔(刀痕)들은 비록 깊기는 해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야.”

그의 시선은 이내 인영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인영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검을 굳게 쥐고 있었다. 인영의 손에 들린 검에서 흘러나오는 우윳빛 검광이 화의노인의 눈을 어지럽혔다.

“정말 좋은 검이로군.”

화의노인은 짧게 중얼거리며 검을 쥔 인영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영의 손바닥은 길게 갈라져 있었는데, 어찌나 상처가 깊었던지 붉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속살이 굳어진 핏물과 함께 검의 손잡이에 달라붙어 있어 떼어낼 수도 없었다. 화의노인은 탁식을 토해냈다.

“대체 어떤 싸움을 했기에 손바닥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검을 휘둘렀단 말인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도 양천해를 물리쳤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먼.”

화의노인은 조심스레 인영의 오른손을 내려놓고는 이내 다른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 좀처럼 암습을 당한 부위를 찾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거지노인을 향해 말했다.

“이자의 몸을 좀 뒤집어줘라.”

거지노인이 비쩍 마른 손을 흔들자 탁자 위에 있던 인영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화의노인은 그런 광경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인영에게 다가가 등의 목덜미 부분을 유심히 관찰했다.

“찾았다!”

이내 그는 짤막한 탄성을 내지르며 인영의 목덜미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인영의 목에는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작은 반점 하나가 나 있었다. 무언가 예리한 것에 찔린 듯한 흔적이었으나, 너무 희미해서 안력을 돋우기 전에는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화의노인은 그 작은 자국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표정이 한결 무거워졌다.

“됐다, 나가야. 이제 내려놓아라.”

거지노인이 손을 늘어뜨리자 인영의 몸이 다시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거지노인은 화의노인의 기색을 살피고는 덩달아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무엇에 당했는지 알겠느냐?”

화의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이 자를 암습한 사람이 누구냐?”

“소수마후다.”

화의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금도무적도 모자라 소수마후까지 덤벼든 것이냐?”

“그건 잠시 후에 알려주마. 그를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

“후우….. 소수마후가 사용한 암기가 무엇인지 아느냐?”

“멀리 떨어져서 몰래 지켜보느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비 모양의 장신구였던 것 같다.”

화의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하고 날개 쪽에 깨알만한 비취가 박혀 있는 금색 장신구지?”

“그런 것 같다. 사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녀가 무슨 암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암습을 한 것조차 몰랐다. 양천해와 그의 격돌에 너무 집중하느라 그곳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암습을 했다는 것도 나중에 전후사정을 보고 짐작한 것이다.”

화의노인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명색이 무림구봉 종의 일인이며 개방제일인이라는 놈이 상대가 암습하는 것도 몰랐단 말이냐?”

거지노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장내에 있던 자들의 무공이 워낙 높아서 조금만 더 가까이 접근했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종적이 발각 당했을 것이다.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보니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그 싸움은…….. 후우……..더 말해서 뭐하겠느냐? 그런 싸움을 본 것만으로도 일대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거지노인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화의노인도 공연히 입맛만 쩍쩍 다셨다.

“제길…. 넌 어쩌다 그런 광경을 구경하게 된 거냐?”

“잠시 네 얼굴이나 보려고 근방을 지나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고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구궁보의 여인이 봉황금시를 지닌 채 구궁보 밖을 나왔다고 하더구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구궁보의 마차가 지나간 행적을 뒤쫓아갔는데,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그나저나 그 나비 모양의 장신구가 무엇이냐?”

“만리무영개도 머리가 다 된 모양이구나. ‘나비가 선녀의 손을 떠나면 혼백 하나가 사라진다.’ 라는 강호의 오래된 속담을 잊은 게냐?”

화의노인의 핀잔에 거지노인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그게 선녀호접표란 말이냐?”

“그래. 소수마후의 열 가지 살인무기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바로 그 선녀호접표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토록 가느다란 흔적을 남길 수는 없다.”

거지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했다.
“음…… 어쩐지 아무리 암습이었다고 해도 신검무적 같은 고수가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했더니
선녀호접표에 당한 거로군.”

이번에는 화의노인이 깜짝 놀랐다.

“그럼 이자가 바로 백 년 내 강호에서 배출된 최고의 검객이라는 바로 그 신검무적이란 말이냐?”

“그가 아니고서야 어찌 양천해를 꺾을 수 있겠느냐?”

“과연…..”

화의노인은 몇 번이나 탄성을 토하더니 새삼스런 눈빛으로 탁자 위에 누워있는 인영의 얼굴을 거푸 바라보았다.
거지노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만 봐라. 그러다 얼굴 닳아 없어지겠다. 그나저나 선녀호접표가 강호제일의 암기라는 건 알겠는데, 사람을 이런 모양으로 만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어떻게 된 건지 아는 대로 말을 좀 해다오.”

“아마 소수마후, 그 지독한 마녀가 선녀호접표에 미인루를 쓴 것 같다.”

“미인루? 설마 그 지독한 물건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단 말이냐?”

“이십 년 전에 만들어서 한번 사용한 후 그 뒤로 다시 쓴 적이 없긴 한데… 그렇다고 애써 만든 걸 버렸을 리도 없지. 너도 알다시피 그 마녀의 성깔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거지노인의 얼굴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졌다.

“이거 큰일이군. 미인루는 아예 해독할 방법도 없다고 알려진 물건이 아니냐?”

“꼭 그렇지만도 않다.”

화의노인의 말에 거지노인은 반색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 좀 해봐라.”

“미인루는 소수마후가 일적봉후(一適封侯)와 산혼수(散魂水)를 배합해서 만든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약물이 더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무튼 가장 중요한 성분은 바로 그 두 가지다.”

“산혼수는 들어본 것 같은데, 일적봉후는 뭐냐?”

“그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비액이다. 이름 그대로 한 방울만으로도 천하의 누구라도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버리지. 독이 아니라서 내공으로도 어쩔 수 없고 해독도 불가능하다.”

“그럼 천하무적이란 말이 아니냐?”

“대신에 조제하기가 까다롭고 사용하기는 더욱 번거롭다. 반드시 혈관에 직접 투입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도 결국 하루나 이틀 안으로 소변과 땀을 통해 체외로 배출되어 버린다.”

“결국 단기간 효과를 노리는 약물이란 말이구나.”

“그런 셈이지. 그러니 일적봉휴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문제는 산혼수다. 이건 사람의 심지를 완전히 흐트러뜨려놓는 몹쓸 물건인데, 해독하기가 영 마땅치 않다.”

“일적봉후처럼 저절로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체내에 축적되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지독한 물건이지.”

거지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산혼수에 당한 자는 평생 실혼인(失魂人) 상태로 지내야 한단 말이냐?”

“몇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 첫째는 정혼신주(定魂神珠)나 휘수정(翠水精)처럼 사람의 신지(神志)를 맑게 하는 신물을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불문이나 도가의 정종심법(正宗心法)을 연마한 화경의 고수가 내공력을 이용해 치료하는 것이다.”

거지노인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군. 신물은 몰라도 정종심법의 고수라면 소림이나 무당에 가면 있지 않느냐?”

“문제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산혼수의 효력이 강해진다는 것이지. 닷새 이상이 지나면 산혼수가 머리로 침투하여 영영 회복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제길. 그러면 큰일 났군. 이곳에서 소림이나 무당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릴 텐데…..”

“게다가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그게 뭔가?”

“이자가 지금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이지. 입 속을 보니 시커멓게 죽은 피가 가득 담겨 있더군. 이 정도라면 심맥이 적지 않게 손상되었다는 뜻인데. 이런 상태로라면 닷새가 아니라 삼 일도 견디지 못할 거야.”

거지노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곤란하군, 정말 곤란해…..”

“더구나 그를 이동시켰다가는 상세가 더욱 깊어질 거야. 별수없이 그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이리로 데려와야 하는데, 삼 일 안에 이곳까지 올 수 있는 불문이나 도가의 고수가 있겠느냐?”

거지노인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더니 벌컥 화를 내었다.

“그러길래 누가 이런 촌구석에서 살라고 했느냐?”

화의노인이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자 거지노인은 언제 화를 내었냐는 듯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그 두 가지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인가?”

회의노인은 한마디 하려다 거지노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한 것을 보고 억지로 눌러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은 그 두 가지뿐이다.”

거지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산혼수를 깰 수 있는 기물이 정혼신주와 취수정뿐이냐?”

“그 외에 몇 가지가 더 있다. 녹옥룡(綠玉龍)이나 칠채보원신주(七彩寶元神珠), 대라옥정(大羅玉鼎)도 모두 비슷한 효능을 가진 것들이지. 아, 혈옥수(血玉樹)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화의노인이 기물의 이름을 하나씩 말할 때마다 점점 어두워졌던 거지노인의 표정이 마지막 물건을 이름을 듣고는 활짝 펴졌다.

“혈옥수로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그럴 거야. 혈옥수의 수액(樹液)은 사람의 두뇌를 자극하는 성분이 있어서 두뇌를 활성화시키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는 최고의 영약 중 하나지. 하지만 그건 남해 보타산(菩陀山) 일대에서만 자라는 것이라 당장은 구하기가 불가능할 텐데…..”

화의노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거지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하하…. 됐어! 그러면 그렇지. 신검무적 같은 강호의 영웅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리는 없지.”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혈옥수는 보타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오지인…..”

“불영곡(佛影谷)에서만 자라는 나무지.”

“그래, 어? 너도 알고 있었냐?”

화의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 거지노인은 마음의 여유를 찾은 듯 그의 통통한 뺨을 톡 찔렀다.

“물론이지. 네놈이 비록 아는 것이 많아 강호제일지자(江湖第一智者)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나도 견문이라면 네놈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오히려 돌아다니는 소문은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게다.”

“그야 물론 늙은 거지, 네놈이 워낙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그런데 무슨 수로 이 근처에서 혈옥수를 구할 수 있는 거냐?”

거지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흡족한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내가 너를 만나러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어디에 들렀는지 아느냐?”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바로 염가보(閻家堡)다.”

염가보는 이곳에서 백여 리 떨어진 염하점(閻河店)에 있는 무림세가였다.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크고 세력이 강했으나, 강호무림 전체를 놓고 보면 중소 규모의 문파에 속하는 편이었다. 염가보의 보주는 십절수(十絶手) 염천동(閻千童)이라는 인물인데, 거지노인과는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 온 사이였다.

“이번이 마침 염 보주의 예순 다섯 번째 생일이어서 들렀었지. 그곳에서 내가 누구를 보았는지 아느냐?”

화의 노인이 버럭 노성을 질렀다.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속시원하게 어서 빨리 말하기나 해라.”

“남해청조각(南海淸朝閣)의 당대 전인(傳人)인 이동심(李東心)소저다.”

그제서야 화의노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남해청조각의 전인이라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녀에게서 혈옥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대로 청조각의 전인들이 외유를 할 때는 혈옥수로 만든 홍옥모니주(紅玉牟尼珠)라는 염주를 소지하고 다니니 말이다.”

“그렇다. 실제로 그녀가 저녁마다 홍옥모니주를 꺼내들고 불경을 암송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지.”
“문제는 그녀가 순순히 홍옥모니주를 건네주겠나 하는 것인데…..”

거지노인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나한테 맡기고 너는 신건무적의 내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신경 써라. 늦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홍옥모니주를 구해서 갖고 오겠다.”

거지노인은 그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이내 몸을 날렸다.
한줄기 바람처럼 표홀한 신법으로 담을 넘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화의노인이 투덜거렸다.

“저 빌어먹을 놈이 끝까지 문으로 나갈 생각은 안 하네. 그나저나 당대제일 검객의 몸을 살펴볼 수 있다니 오늘 일진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무림에서 제일 박학다식한 인물로 알려진 해수(解首) 모인풍(毛仁風)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이내 탁자 위의 인영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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