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나 혼자 만렙 뉴비 91화


91화 선택의 통로 (2)

“너도 남아 있는 거 주사해. 우리가 마신 건 기체형 독이라 해독제 없으면 죽는다.”

진혁이 안드리에게 액체가 반쯤 남아 있는 주사기를 건넸다.

“예? 예. 예.”

안드리아가 토끼눈을 든 채 주사기를 받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이, 이럴 수가…….’

정말이다.

조금 전까진 혈관이 조금씩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약을 주입한 순간 모든 게 씻은 듯 사라졌다.

안드리아가 진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처음엔 그저 두려운 존재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신의 대리자들을 죽이고 신도들까지 쓸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졌고. 지금 와서는 오히려 호기심이 솟구쳤다.

상대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그런 호기심이.

게다가.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야.’

안드리아 역시 선택의 통로에 관한 소문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 들어간 자 중에 살아서 나온 사람은 없다고.

수많은 선택에 방황하다가 죽을 뿐이라고.

그러나 이 남자는 그 모든 걸 비웃기라도 하듯 관문들을 순식간에 돌파해 버렸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격이 다른 무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모든 게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들이었다.

안드리아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정말로 교주를 죽이고 지옥 같았던 삶을 끝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해? 가야지?”

“네? 네!”

안드리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쿠쿠쿵!

곧바로 세 번째 관문이 열렸다.

이번 방은 이전까지와 달리 꽤나 심플했다.

중앙에 보이는 의자와 그 앞에 설치된 검은색 레버. 마지막으로 레버를 향해 뻗어지는 파이프가 보였다.

[후우. 세 번째 관문은…….]

발냄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의욕이 꽤나 떨어졌는지 목소리에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힘내.”

[뭐?]

“넌 5층 최고의 발냄…… 아니, 관리자잖아. 우울해하지 말고 힘내서 설명하라고. 이번에는 힌트도 듣고 나서 선택해 줄 테니까.”

탑에 있는 몬스터들까지 걱정해 주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진정 고인물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진혁은 스스로 대견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모습을 봐야 하는 발냄새로선 억장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좋다. 세 번째 관문은 바로 ‘자기 희생’이다. 보다시피 의자에 앉은 한 명이 레버를 당겨야만 다음 관문으로 가는 문이 열리게 되어 있지.]

“앉아서 레버만 당기면 된다 이거죠?”

생각보다 간단한 조건에 안드리아가 반색했다.

[성급히 좋아하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해라. 레버를 당기는 순간, 바로 앞에 있는 파이프에서 불길이 치솟을 거다. 레버를 당기는 손을 천천히 태워 버리게 되어 있지.]

의자에 있는 구속구의 특성상 화염을 피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자기 자신을 태워야만 열리는 문.

그야 말로 ‘자기 희생’이란 테마에 걸맞은 관문이었다.

“그럴 수가…….”

안드리아가 말을 더듬었다. 이번만큼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짝! 짝! 짝!

“이야. 자기 희생! 멋진 말이지. 그래서 힌트는 뭔데?”

진혁이 손뼉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힌트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진 않아도 된다는 거다. 너라면, 무슨 뜻인지 눈치 챘겠지?]

“그러니까. 자기가 다치기 싫으면 다른 사람을 억지로 저기에 앉히고 레버를 당기게 시키면 된다 이거네?”

[바로 그거다.]

겉으로는 자기 희생이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을 강제로 앉힐 수만 있다면 자신은 상처 하나 없이 탈출할 수 있는 구조다.

흠칫하고.

안드리아의 몸이 가늘게 떨었다.

둘 중에 하나가 희생해야 할 경우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뻔했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의자에 앉았다.

구속구를 차고 레버에 손을 갖다 댔다.

[뭐냐? 본인이 희생할 생각이었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구나.]

응?

“갑자기 무슨 희생?”

미안하지만, 아직 마도서의 발동 시간이 3분 정도 남았거든.

다시 말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Lv8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진혁의 손끝에서 나온 냉기가 파이프를 통째로 얼려 버렸다.

철컹!

곧바로 레버를 당기자.

쿠쿠쿠쿠!

격한 진동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을 태워 버려야 할 불은 나오지 않았다.

[…….]

할 말을 잃어버린 발냄새가 화면 너머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지 화면이라고 착각할 지도 모르겠는데?

“죄, 죄송해요.”

안드리아가 발냄새를 향해 꾸벅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다음 관문을 향해 이동했다.

진혁 역시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게 상대를 좀 가려 가면서 상대했어야지.

‘하필이면 만나도 나를 만나냐.’

그래도 너무 좌절하거나 자학하진 마라.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듯이,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건 예정되어 있던 거니까.

***

선택의 통로에 있는 함정들은 총 일곱 개.

하지만, 네 번째 관문과 다섯 번째 관문 역시 돌파 당했다.

너무나 허무하게 말이다.

“이런 거 말고 좀 참신한 거 없어? 심장 쫄깃하고 등에 땀이 맺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혁이 따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빨리 클리어하는 것도 좋지만, 뭐랄까?

조금 더 자극을 즐기고 싶다고 해야 하나?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고인물의 DNA들이 헬 난이도를 요구해 왔다.

‘이건 진짜 고치긴 해야 하는 나쁜 버릇이긴 한데…….’

어쩌겠나?

11년간 다져진 본능이 그러한 걸.

[지금보다 더 참신한…… 것 말이냐? 그, 그건…….]

“왜. 설마 없어? 이상하네. 5층의 네임드가 설계한 통로가 이토록 쉬울 리가 없는데.”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마주쳤다.

“아! 혹시 지금까지는 일부러 우리를 방심시키려고 쉬운 것만 앞쪽에 배치한 거였나?”

[그, 그렇다. 바로 여섯 번째 관문이 나, 발세테르의 회심의 역작이지.]

발냄새가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3초 뒤, 여섯 번째 관문마저 뚫렸다. 지금까지 중에 최단 기록으로.

“…….”

“…….”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시발. 나 안 해.]

발냄새가 욕설과 함께 화면을 꺼 버렸다.

이것 참…….

진혁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관리자를 탈주시켜 버렸네.’

시련의 탑을 통틀어 봐도 이런 일은 전무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가 됐다.

‘이 영상이 올라가면 얼마만큼의 조회수를 기록할지 말이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명예의 전당’ 최상단의 주인은 정해져 버린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선택의 통로’를 구축했던 허상 결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드디어 본 게임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이다.

***

[교주의 은신처에 입장하셨습니다.]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기괴한 조각상과 피로 그러져진 심벌이 가득한 석실.

그 중앙에서는 시체를 갖고 무언가를 하는 교주의 모습이 보였다.

“이야. 설교를 하려고 교주가 된 줄 알았더니. 해부학 연습을 하고 있었네?”

이거, 알고 보니 이과생이었구나?

의대에 합격한 걸 보니 학생시절 공부는 열심히 한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천유성이랑 동기일지도 모르겠네.

“이럴 수가……. 발세테르가 돌파 당했다고?”

“너무 그 친구한테 뭐라고 하지 마. 생각보다 소심한 친구 같던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연, 그자가 말했던 게 사실이었군.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나.”

교주가 꽤나 놀랐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감옥에서 헛소리나 하던 진혁은 적으로 간주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신의 대리자들에게 갈가리 찢겨 죽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러고 보니 랜슬롯 아니, 호센벨트는 보이질 않는군.”

“그 자라면 아까 전에 떠났다.”

떠났다라…….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눈치가 빠르다니? 그게 무슨 눈치가 말이냐?”

“여기 남아 있으면 죽을 걸 알았을 테니 그걸 눈치 채고 먼저 도망갔다. 뭐, 이런 이야기지.”

“크하하! 재밌구나. 자의식 과잉도 그 정도면 예술의 경지야.”

교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한 순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법칙을 어기고 고유 능력과 스킬을 사용했더군. 솔직히 말해 놀랐다. 설마, 절대적인 순리를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미처 몰랐어.”

“내가 제법 하는 편이야.”

정확히 말하면 제법이 아니고 눈이 돌아갈 정도지만.

실력의 3할은 감추는 게 미덕이라고 했으니,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건 이 정도만 해줄 생각이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되는구나. 또 잠시 뒤에 얼마나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댈지도 말이다.”

교주가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성물을 쓰려는 건가?”

“……!”

진혁의 말에 교주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 확연히 느껴졌다.

“성……물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이냐?”

“대충은.”

예전에 성물들 전부 모아서 컬렉션도 만들어 봤으니,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그래도 그거 다 모으는 게 어렵다는 건 인정해 준다.

몇 개는 정말이지 탈모가 올 정도로 구하기 어려웠으니까.

“……정말로 놀라운 놈이로군.”

놀라움과 경악이 섞인 말투.

물론, 그러한 감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 속엔 진득한 살기가 섞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물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성물이 갖고 있는 힘 또한 알고 있을 테지.”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한 저주받은 성물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마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눈앞에 있는 ‘오물을 먹는 항아리’는 7개의 색중 ‘파랑색’의 등급을 보유한 성유물이다.

“그거 쿨타임 엄청나게 길었던 것 같은데, 나 하나 잡겠다고 사용하려고?”

“앞으로 네놈보다 더 성가신 놈은 만나지 못할 것 같거든. 어설프게 아끼느니 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쓸 생각이다.”

으음.

그건 부정하기 힘드네.

이 녀석도 의외로 예리한 면이 있다.

바로 그 순간.

[성유물 ‘오물을 먹는 항아리’가 발동됩니다!]

항아리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주가 뿜어져 나왔다.

공기마저 태워 버리는 검은 물결.

파도처럼 범람하는 기운이 순식간에 진혁을 향해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콰!

즉발기에 절대 판정을 갖고 있는, 말 그대로 필살(必殺)의 능력!

진혁이 재빨리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애초에 피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렇게.

꿀렁!

파도가 진혁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울컥하고.

입에서 검은색 피가 흘러나왔다.

끔찍한 통증이다. 한 순간에 정신줄을 놔 버릴 만큼.

“크으…… 컥! 커억.”

폐를 꿰뚫린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 돼!”

안드리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오만함을 탓하며 죽어라. 인간이여.”

교주 또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몸에 바람구멍이 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으로 끝.

진혁의 의식이 끊어졌다. 동시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시전자의 사망으로 인해 ‘썩어 가는 심장’으로부터 받은 ‘마왕의 저주’가 사라집니다.]

시전가 사망했기 때문에 나타난 메시지.

그리고.

시전자가 사망함으로써 발동되는 고유 능력이 교차했다.

[시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막혀 있는 천장 너머, 5층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밤하늘로부터.

우우우웅!

별의 기운을 담은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두근! 두근! 두근!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한번 고동치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