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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86화


1521화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두 아내와 함께 멀어지는 이드.

스폴은 조금 섭섭했다.

같이 가자고, 한 번도 묻질 않으시다니.

그렇게 슬픈 망부석처럼 별궁 앞에 서 있으니, 잠시 후 도착한 올리비아 황녀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아는 척을 했다. 

“스폴 경?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아무 일도 없습니다.”

“걱정 거리가 생기면 말해.”

전날 스폴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일까. 제법 속 깊은 말을 하는 황녀였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스폴이 포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공주…… 아니, 명예 후작 부인 두 분을 뵙고 싶어!”

공주 마법사라는 말을 애써 바꾸는 올리비아 황녀.

그 모습을 보면 짐작처럼 황제가 이번 방문에 어떤 관여를 한 것 같기도 하다.

스폴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저런. 그런 일이라면 한발 늦으셨습니다.”

“응?”

“두 분은 현재 별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명예 후작님과 함께 가일라를 둘러보시기 위해 황궁 밖으로 외출하셨습니다.”

“뭐어?!”

동경하는 공주 마법사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에 신난 얼굴을 하고 있던 황녀. 그 표정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말?”

“정말입니다. 황제 폐하를 뵙고 돌아와 좀 전에 다시 나가셨지요. 황녀 전하와는 간발의 차였습니다.”

“히잉. 다시 보기로 했으면서.”

사실 그런 약속은 없었다.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하며 눈가가 촉촉해지는 황녀.

그 모습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귀여운 것이었지만.

스폴에게 있어 그것은 공포였다.

‘제국의 황녀를 울렸다고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삐질삐질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황녀의 울음보가 터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울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영리한 황녀는 곧장 유모의 치맛자락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유모! 우리도 나가자! 나가서 공주 마법사님을 찾아야겠어!”

“안 됩니다. 황제 폐하의 허락이 없이는 궁 밖으로 나가실 수 없으십니다.”

유모는 매우 단호했다. 어린 황녀가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그만큼 큰일이기 때문이었지만.

황녀가 이런 유모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럼 허락받을래.”

허락이 필요하다면 허락을 받으면 된다.

황녀는 전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바마마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모가 이런 황녀를 다시 가로막았다.

“황제 폐하께오선 지금 중요한 업무 중이시기 때문에 지금은 만나실 수 없습니다.”

“싫어! 지금 만나뵐 거야!”

“고집을 부리셔도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철벽을 치는 유모.

이때의 유모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황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씨잉~ 유모 나빠! 이러다 공주 마법사님이 떠나버리면 어쩔 거야. 끄아앙~”

기어코 터져버린 울음보.

이에 울고 있는 황녀를 달래기 시작하는 하녀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어깨를 움츠리고 바라보고 있는 스폴.

그녀에게 있어 지금 황녀의 울음소리는 백만 대군의 함성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별궁 앞에서 난리가 터진 사이.

이드는 두 아내와 함께 황궁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세 사람의 손에는 각각 최상급의 통행증이 들려 있었다. 성문에서 발급받은 통행증이었다.

처음 이드 일행을 막아선 기사가 신분 확인 후 정중한 사과와 함께 내놓은 통행증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발급된 통행증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면 가일라 안에서는 가지 못하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기사는 통행증의 대단함을 감격한 얼굴로 설명했다.

동시에 황제가 특별히 신경을 써주었음도 알 수 있었지만, 이드에게 있어 이 통행증은 그냥 통행증일 뿐이었다. 특별히 국가에서 관리하는 통제구역에 일부러 방문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외출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혹시 있을지 모를 시시콜콜한 문제도 이 통행증이 있다면 해결이 가능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디부터 가보고 싶어요?”

황궁으로 통하는 외길을 따라 나란히 걸으며 이드가 물었다.

“이드는 어딜 가보고 싶어요?”

“맛집이요!”

일리나는 차분하게, 라미아는 신이 난 얼굴로 답했다.

각자의 성격에 강하게 묻어나는 대답에 이드는 일리나를 보며 말했다.

“일리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없어요?”

“없어요. 조금 오래전에 다 가봤던 곳이에요.”

“언제요?”

“이드를 만나기 전이요.”

최소 백 년 전의 일이란 말이다.

엘프의 기준에서는 조금 오래전일 수 있지만, 인간의 기준에선 강산이 열 번은 넘게 바뀌었을 시간이었다.

과연 일리나가 과거 방문했던 곳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이런 기분은 이드도 같았다.

그에게도 가일라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 년 전 처음 가일라를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하지만 그때 들렀던 가게가, 그때 이용했던 식당이 아직 남아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긴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한 이드는 시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계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시장은 한 자리에 수십, 수백 년은 이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 잡화점도 들러요.”

시장으로 방향을 잡자 라미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잡화점? 어지간한 건 아공간에 다 들어있잖아?”

“세상 물건이 다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당장 쓸 장작이 모자라기도 하고요. 또 야영지에 깔 가죽도 여러 장 필요해요.” 

그야말로 자질구레한 것들.

또 마법이나 무공을 이용하면 대체 가능한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없어도 문제 될 건 없지만 있으면 편한 물건들.

“그럼 장작이나, 가죽은 잡화점에서 사고. 일리나는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이드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려고 하던 일리나는 곧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화살을 미리 좀 채워두고 싶어요.”

“화살이라.”

엘프라면 역시 활.

하지만 난화십이식을 익혀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그녀에게 화살이 왜 필요할까.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화살을 그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말해 일리나도 그녀 나름대로 혼돈의 파편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이드는 일리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화살을 사는 김에 내게도 활을 쏘는 법을 좀 가르쳐 줄래요?”

“기꺼이. 하지만 이드에게 활이 필요한 일이 있나요?”

“뭐, 있을지도 모르죠. 무엇보다, 배워두면 좋잖아요. 활은 꼭 일리나에게 배우고 싶어요.”

사실 활은 핑계일 뿐, 이드의 서툰 애정표현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일리나의 볼이 살그머니 붉어지고.

“나두!”

그 사이로 라미아가 비집고 들어왔다.

자신만 빼두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이드와 일리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번 여행에서 해야 할 일 하나가 정해졌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외길이 끝이 나고, 가일라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온갖 소음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황궁으로 통하는 외길을 통해 나타난 세 사람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곧 자신이 하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괜한 호기심을 부리기에는 황궁의 존재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일행은 이러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시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장의 위치는 백 년 전과 같았다. 다만,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오가는 사람도 두 배 이상 늘어난 것 같았다. 그만큼 지난 시간 동안 제국이 많은 발전을 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일행은 분위기를 살피며 시장을 걸었다.

온갖 물건이 거리로 나와 있었고, 곳곳에서 고함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드에게 있어 너무 익숙한 분위기였다.

옷차림만 바뀌면 이곳이 중원의 시장인지 라일론 제국의 시장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시장이란 국가와 차원을 넘어 어디든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사람이 같은 것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시장을 구경했다.

중간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과일을 사 먹고, 잡화점을 발견해 장작과 가죽을 사고, 대장간에 들러 화살과 함께 이드와 라미아가 쓸 활을 구입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 맛집을 찾아 들어갔다.

식당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직 저녁을 찾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여기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가죠.”

어중간하게 일찍 돌아갔다가 올리비아 황녀를 만날지도 모르는 일.

이드는 종업원에게 시원한 물과 맥주, 그리고 간단한 요리를 주문한 다음, 작은 지도를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마침 시간이 났으니까. 여행 일정을 짜볼까요?”

이드의 말에 지도를 본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펼쳐 놓은 지도가 대륙 전도였기 때문이다.

‘카논으로 향하는 것 아니었어요?”

“그랬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꼭 카논일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탐색 보드는 견제의 목적을 가진 여행이었다.

은밀하게 움직이기보단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경로를 카논으로 좁혀 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때, 라미아가 말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카논에 혼돈의 파편의 본진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서잖아요.”

본진은 아니라도 혼돈의 파편이 카논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랬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본진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카논을 뒤져봤자 놈들이 더 깊이 숨기밖에 더 하겠나 싶더란 말이지.” 

“혼돈의 파편과 밀당이라도 하겠단 말이에요?”

밀당이라니.

이드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달달한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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