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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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3권 무림세가(武林世家)편 : 5화


제233장 실인회인(失人回人)

정말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공기는 티 없이 맑았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청명한 햇살 아래 아득한 곳에 있는 야산까지 한눈에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이런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관호(關浩)는 그렇게 생각했다. 관호는 회남의 토박이로, 평생 회남 일대를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소원이 있다면 돈을 벌어 회남 성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팔공산 자락에 그럴듯한 장원을 짓고 예쁜 아내와 알콩달콩 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벌써 십 년이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쁘게 뛰어다녔으나 성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벌어 놓은 돈도 거의 없었고, 예쁜 여자도 사귀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재신(財神)이 강림했는지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를 일거리를 맡았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절세의 미녀(美女)도 지척에서 보게 되었으니 그의 기분이 어느 때보다 흥겨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늘상 보던 회남의 거리도 오늘따라 새롭게 보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정겹게 느껴졌다.

“여어,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얼굴에 아주 화색이 도는군 그래.”

회남의 북무대로 한편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유씨(庾氏)가 아는 척을 하자 관호는 잇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좋은 일은요. 늘 그렇죠.”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데? 어디서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본 거야?”

관호의 얼굴에 한 줄기 붉은빛이 어렸다.

“여자라니요? 전 아는 여자 없어요.”

유씨는 무심코 한마디 했다가 관호가 얼굴을 붉히자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으헤헤… 정말인 모양인데? 어디 사는 누구인데? 나한테만 말해 봐. 어디 가면 볼 수 있어?”

“그런 여자 몰라요.”

관호는 시뻘게진 얼굴로 황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유씨를 비롯한 주변 상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한가로운 풍경이었고, 평화로운 저잣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관호를 본 마지막 순간이기도 했다.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른 사람들이라니까.”

관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골목 한편에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여 숨을 고른 관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리자, 관호. 오늘 일만 잘 넘기면 내일부터 다른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던 관호는 마음을 잡았는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북문대로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한 한 채의 크고 호화로운 주루였다. 주루의 옆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선 관호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주루를 통과하여 이내 뒤쪽의 후원으로 빠져 나왔다. 후원에는 모두 다섯 별채가 있었는데, 각각의 별채는 서로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제법 높은 담벼락으로 구분 지어져 있었다. 관호의 발길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별채로 이어졌다. 별채로 막 들어선 관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제 오는 거냐? 오늘은 조금 빨리 왔네.”

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집에서 조금 일찍 나왔어. 별일은 없지?”

“어제 저녁에 손님 한 사람이 더 와서 사람이 늘어난 거 외에는 없어.”

“지금도 있어?”

“응. 계속 묵고 갈 모양인가 보더라구. 그럼 수고해라. 나는 먼저 가 볼게.”

“그래.”

관호는 멀어지는 동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어렵지 않아. 편지 한 장만 두고 오면 되는 일이야.’

편지의 주인은 관호가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런 미녀의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사람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정말 잘생겼지. 그러니까 그렇게 예쁜 여자가 남들 눈을 피해 편지를 보내는 거겠지.’

관호의 손이 편지봉투를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품에 슬쩍 닿았다가 떨어졌다. 봉투 안에는 편지와 함께 무언가 두툼한 물체가 담겨져 있었다.

‘이게 바로 연서(戀書)와 정표(精表)라는 거로군. 그런 미남자라면 이런 연서쯤은 한두 번 받아 본 게 아닐 텐데, 보지도 않고 찢어 버리면 어쩌지?’

관호는 자신이 편지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공연한 걱정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오전의 일과가 끝나고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다. 잠시 후에 청소를 위해서 별채의 방으로 들어갈 때 목표한 사람의 방에 슬쩍 들어가 침상 위에 품속에 있는 편지를 올려놓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일을 마치고 미녀를 만나기로 한 곳에 가서 그녀에게 두툼한 보수를 받으면 이번 일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무려 은자 열 냥을 제시했으며, 일이 잘되면 좀 더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의 품속에는 선금으로 받은 은자 한 냥이 잘 간직되어 있었다.

그런 미녀가 자신을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잠깐 궁금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자신이 성실하게 일해 온 효과가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날 관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모두 깨끗하게 해치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 관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호의 실종은 관호 주변 사람들에게만 잠깐 화제가 되었을뿐 곧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가빈루의 후원에서 일하는 열다섯 명의 점원 중 한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낙일방이 자신의 방에 놓여진 편지를 본 것은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낙일방은 침대 옆 탁자 위에 단정하게 놓여진 편지를 보고 잠시 의아했으나 별생각 없이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봉투를 열자 안에서 하나의 물체와 곱게 접힌 편지지가 나왔다. 무심코 편지지를 펼치자 달콤한 듯하면서도 그윽한 내음이 풍겨 나왔다. 순간적으로 독이 아닐까 생각하여 긴장했으나 이내 단순한 향내임을 알 수 있었다. 편지에는 여인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묵묵히 편지를 내려다본 낙일방은 편지지와 함께 들어 있던 물체를 손에 들고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편지와 물체를 다시 편지봉투에 담아 품속에 넣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그가 찾아간 곳은 동중산의 방이었다.

“동 사질,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어서 오십시오, 낙 사숙.”

동중산은 그에게 상석을 양보하고는 그의 앞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계획대로 내일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낼 생각인가요?”

“그렇습니다.”

낙일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가 다시 물었다.

“동 사질은 장문사형께서 언제쯤 오리라고 생각하세요?”

“제 예상으로는 빠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중에는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일 비무첩을 보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문사형에게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문제는 과연 이곳에 도착하실 때까지 또 다른 일이 없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동중산은 멈칫하다가 이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그 점이 염려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희들로서는 그저 장문인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이 말이 끝으로 낙일방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동중산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한결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이 걱정되십니까?”

“그것도 있고…. 무언가 일이 우리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달리 걱정되는 것이 있으십니까?”

낙일방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동중산은 그런 그를 독촉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낙일방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내는 것은 장문사형이 돌아온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어요.”

동중산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중산이 순순히 승낙을 하자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잠시 나갔다 와야겠어요.”

동중산은 이번에도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낙일방을 바라보는 외눈에 걱정스런 빛을 가득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는지 낙일방은 그를 향해 듬직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말아요, 늦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동중산도 따라 웃기는 했으나 얼굴 한편에는 여전히 걱정스런 기색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막 그가 방을 나서기 직전에 동중산은 참고 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낙일방은 그에게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한차례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방을 벗어났다. 동중산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멀어지는 낙일방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이 깊도록 낙일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중산은 방문을 열어 둔 채 한잠도 자지 않고 낙일방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아침 해가 사방을 훤히 밝힐 때까지도 낙일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진산월이 가빈루로 그들을 찾아왔다.

“신검무적이 왔습니다. 조금 전에 가빈루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남군한상의 말에 남궁탄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마침내 왔군.”

그 짤막한 말 속에는 무거운 중압감과 숨길 수 없는 음울함이 담겨 있었다.

“이미 그가 올 것을 각오하지 않았습니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안색은 어떻다고 하던가?”

“먼 길을 달려온 듯 행색이 추례하기는 했지만, 겉으로 보아서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부상 정도를 알아낼 수 있겠나?”

“몇 가지 방책이 있긴 하지만, 자칫하다가 타초경사의 우(愚)를 범할지 몰라 신중히 접근할 생각입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어차피 그자를 상대할 방법은 따로 마련해 놓고 있으니까 말일세.”

“알겠습니다.”

남궁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결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옥면신권에 대한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혁리공(赫里蚣)이 직접 봅가로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로는 더 이상 옥면신권에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를 제거했단 말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종남파와의 비무에서 옥면신권이 참여하는 일은 없을 거라더군요. 혁리공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허언(虛言)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혁리공은 입이 무거운 친구지. 그렇다면 큰 고비 하나는 넘긴 셈이로군. 문제는 역시 신검무적인가?”

“신검무적도 혁리공에게 부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남궁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위험해. 신검무적마저 변고를 당한다면 우리가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크네. 그리고 아무리 혁리공이라고 해도 신검무적을 어쩔 수 있다고는 별로 믿어지지 않는군.”

“그럼 역시 당초 계획한 대로 해야겠군요. 그 정도로 안심할 수 있을까요?”

“강호에서 절대적인 건 없는 법일세.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궁탄은 눈에서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강력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써 볼 수 있는 패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

“본 가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로군요.”

남궁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선(璇)아는 돌아왔나?”

“몇일 전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남궁탄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직도 그 여자에게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나?”

남궁한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 모습만 보아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지 남궁탄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아들이라고 있는 것이 여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다니 정말 속이 터지는군.”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젊은 시절의 한때의 방황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더구나 기아가 잘 크고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남궁탄의 얼굴이 겨우 펴지기 시작했다. 남궁한상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혁리공이 종남파와의 비무에 참관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남궁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것도 좋겠지. 이왕이면 아예 판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진산월이 낙일방의 실종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은 가빈루로 들어와 목욕을 한 후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일방이 돌아오지 않았다니 무슨 말이냐?”

동중산은 자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낙 사숙께서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진산월은 동중산이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는 동안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보고가 끝나자 진산월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낙일방은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었다. 더구나 고수가 된 후에는 예전과 달리 행동거지도 진중해졌을 뿐 아니라 쉽게 흔들리거나 격동하지 않아서 믿음직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 낙일방이 남궁세가와의 비무가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되었다는 것은 그의 신상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닥쳤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직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나, 평소의 그의 성격으로 보아 지금까지 연락도 없다는 것은 단순한 걱정을 넘어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동중산은 낙일방에게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지 못한 자신을 계속 자책하고 있었다.

“낙 사숙은 아마도 자신이 빠른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문인께서 오실 때까지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낙 사숙을 붙잡지 못했으니 제 책임이 큽니다.”

진산월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나 담담한 눈으로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일방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호의 절정고수다. 네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은 그만큼 그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좀 더 믿어 보도록 해라.”

동중산의 주름진 얼굴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어났다.

“장문인….”

“일방이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쓸데없는 걱정을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겠지. 설사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들만으로 충분히 이번 일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위중한 일이 있어도 결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낙 사숙이라면… 틀림없이 그러셨을 겁니다.”

“그러니 그의 일은 그에게 맡겨 두자꾸나. 비록 어떤 험난한 일을 당할지 모르지만, 그는 기필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동중산의 외눈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종남파의 문하 중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가장 각별한 편이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은 숙질지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나이와 항렬을 떠나 마음속으로 끈끈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때로는 형과 동생같이, 때로는 선배와 후배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특히 낙일방을 보는 동중산의 시선은 언제나 따듯하기 그지 없었다. 낙일방이 무공도 변변치 않은 어설픈 풋내기였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던 동중산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성장해 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성장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가슴이 뿌듯하고 대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의 낙일방의 실종은 동중산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낙일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막상 그에게 큰일이 닥쳤음에도 아무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방관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꾸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낙심하고 있던 그를 일깨운 것은 뒤이어 들려온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었다.

“일방이 위험을 예감하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편지가 오거나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이 있었느냐?”

동중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닙니다만.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이곳에 도착한 이후 우리에게 접촉해 온 사람은 이동정뿐이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접촉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일방에게만 말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회남에 온 이후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거나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느냐?”

동중산은 곰곰이 심사숙고하다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제자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네 잘못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라. 남들의 눈을 피해 소식을 전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니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하수인이나 그가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배후인물이다. 일방으로 하여금 밖으로 나오게끔 만든 자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것이지.”

“제자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습니다.”

“일방은 강호 경험이 별로 없고, 그동안 본 파를 벗어난 적도 드물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를 불러낸 자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 안면이 있는 자일 터이니, 범위를 좁혀 나가다 보면 무언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동중산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이제야 비로소 자책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본연의 민첩한 두뇌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장문인의 말씀대로 낙 사숙의 교분 관계는 지극히 협소합니다. 본파의 고수들을 제외한다면 낙 사숙이 알고 있는 자의 숫자는 스무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중에서 일방으로 하여금 본 파의 다급한 일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꼭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더욱 드물겠지.”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낙 사숙의 죽마고우인 개방의 위 소협입니다. 위 소협의 신상에 무언가 변고가 있다면 낙 사숙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잠시 후에 개방의 인물들과 접촉하여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 다음으로는 점차의 사인기 소협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중산이 뜻밖의 인물을 거론하자 진산월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사인기라면…?”

“낙양 석가장에서 낙 사숙과 비무를 벌였던 점창파의 고수입니다. 낙 사숙은 그때 그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저에게 몇 번이나 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진산월은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낙일방은 교우 관계가 좁은 만큼 자신이 일단 호감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면 극단적으로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진산월을 대하는 것만 보아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그가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 온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이번 일이 사인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인기는 타 파의 고수이다. 다른 문파 고수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문파와 문파 사이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일방이라면 누구보다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며, 설사 그렇더라도 반드시 너에게 미리 말했을 것이다. 일방은 이번 일이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동중산은 그의 말에 수긍을 했다.

“장문인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동중산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사 소협 외에는 특별히 낙 사숙과 친분을 유지할 만한 자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진산월은 엄격한 눈으로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당연히 거론해야 할 사람을 빼놓는 것이냐?”

“빼놓는 게 아니라 감히 떠올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일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말해 보거라.”

동중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천봉팔선자 중 남봉 엄 소저입니다. 엄 소저는 낙 사숙이 유일하게 마음을 두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에 관한 소식이라면 낙 사숙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산월도 이번에는 침음을 한 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동중산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진산월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엄쌍쌍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속한 천봉궁이란 단체가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천봉궁은 사방이 온통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종남파에 그나마 호의를 보이고 있는 몇 안 되는 문파였다. 비록 그들의 행태가 일부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그들은 종남파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번 일로 그들마저 종남파에 등을 돌리게 된다면 종남파는 그야말로 강호라는 거대한 바다에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섬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 진산월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마음을 결정한 듯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동정을 불러오너라.”

이동정은 배불리 먹고 푹 쉬어서인지 어제보다 한결 깔끔해진 모습으로 진산월 앞에 나타났다. 그는 진산월을 보자마자 더 이상 정중할 수 없을 정도로 예의를 다해 포권을 했다.

“이동정이 강호의 거성(巨星)이 되신 진 장문인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진 장문인을 다시 뵙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 이쪽으로 앉으시오.”

이동정이 자리에 앉자 진산월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중산에게 듣기로는 천봉궁의 선자들에게서 내 소식을 들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그때 만난 천봉선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이동정은 진산월이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의아했으나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제가 만난 사람은 옥봉 누 소저뿐입니다.”

“다른 선자들은 보지 못했소?”

“아쉽게도 모두 바쁜 일이 있었는지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물었다.

“그녀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 외에 다른 말은 듣지 못했소?”

이동정도 이제는 진산월이 자신에게 이런 것을 묻는 의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특별한 말을 나눈 것은 없습니다. 진 장문인께서 따로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이동정은 두뇌가 민첩하고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인물이기 때문에 진산월도 무작정 그에게 모든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의 사정만을 밝히기로 했다.

“내 사제가 남봉 엄 소저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있소. 그래서 그녀가 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 거요.”

이동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엄 소저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녀의 신상에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라면 옥면신권 낙 소협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렇소.”

“낙 소협이 엄 소저와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말은 누 소저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서안에서보다 한결 가까워진 모양이군요. 그때는 엄 소저가 일방적으로 구애를 했던 것 같은데….”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오.”

진산월이 슬쩍 비켜섰으나 이동정은 먹이를 본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낙 소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다른 곳으로 갔소. 그보다 천봉궁의 선자들과 연락을 할 수 있겠소?”

이동정은 낙일방의 행방에 대해 좀 더 묻고 싶었으나 진산월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버렸다.

“선자들 중 어느 분과 연락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백봉 정 소저를 만났으면 하오.”

이동정은 잠시 몸을 움찔했다.

“정 소저는 단봉공주와 함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몸을 빼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녀에게 내가 꼭 만났으면 한다고 전해 주시오. 시간은 빠를수록 좋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동정이 다시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으나 진산월은 깊은 눈으로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단순히 나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본 파와 남궁세가의 비무를 직접 보려는 목적도 있다고 생각하오.”

이동정은 찔끔하여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진장문인의 안목은 예리하십니다.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습니다.”

“백봉 정 소저가 이틀 이내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 남궁세가와의 비무에 당신을 본 파의 참관인으로 내세우겠소.”

뜻밖의 제안에 이동정은 잠시 망설였으나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틀 후 자정까지는 반드시 정 소저가 진 장문인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교묘하게도 자정이라는 시간을 내걸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이므로 이틀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을 번 셈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순순히 승낙을 했다.

“알겠소. 이번 비무의 일로 중산과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당신은 이만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하오.”

“감사합니다.”

이동정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벗어났다. 동중산은 그때까지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다가 이동정이 밖으로 나간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정 소저에게 엄소저의 일을 여쭈어 볼 생각이십니까?”

“그녀밖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다.”

“만약 이번 일에 엄 소저가 개입된 것이 사실이라면, 정 소저가 과연 순순히 말해 줄지 우려가되는군요.”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알아낼수 있을 것이다.”

동중산도 그 일은 진산월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진산월은 그런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남궁세가에 비무첩을 보내는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일 보내도록 해라.”

“비무 일시는 언제로 할까요?”

“삼 일 후 정오가 적당할 듯하다.”

삼 일 후라면 정소소를 만나기로 한 다음날이 된다. 동중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진산월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의 오른손은 새로 갈아 맨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져 있었다. 동중산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붕대를 갈았기 때문에 진산월이 손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이동정의 말대로 앞으로 칠팔 일은 절대로 검을 잡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스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낙 사숙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진산월이 검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낙일방마저 없다면 남궁세가와 비무를 벌이는 것은 너무도 승산이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진산월은 결연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번 비무는 본 파의 다른 사람들로 상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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