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6화
제 245장 도과난관(渡過難關)
야심한 밤이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짙은 어둠만이 사위(四圍)를 감싸고 있었다. 손풍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비는 완벽했다. 봇짐은 이미 저녁때부터 조금씩 싸기 시작해서 정리를 마쳤고, 옷도 잘 차려입었다. 빠진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텅 빈 침상만이 동그마니 있을 뿐이어서 더 살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완벽하군, 완벽해.”
손풍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야밤에 도둑고양이처럼 남들 눈을 피해 내빼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손풍은 갑자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게 모두 그 성락중인지 사숙조(師叔朝)인지 하는 자 때문이다.”
종남파에서의 생활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느닷없이 동행하게 된 강호행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처음에는 낯설기만했던 문파 고수들과도 조금씩 안면을 쌓아서 친한 사이가 되자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손풍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자가 나타난 뒤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그자에 대한 첫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대뜸 유소응을 말도 없이 데려가는 바람에 납치당한 줄 알고 한 차례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중년의 나이이긴 하지만 아버지보다 훨씬 어린 자신에게 항렬로 이 대(二代)나 뒤져서 사숙조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했으며, 말대꾸는커녕 고개조차 제대로 쳐들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도 없는 신분의 차이를 절감해야 했다.
그런 것까지는 다 참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가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를 검으로 꺾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뒤로는 조금씩 존경심도 생겨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망할 자가 내공을 가르쳐 준다고 자신을 부른 다음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본격적으로 종남파의 진산 내공을 배운다는 말에 얼마나 흥분을 했던가? 장문인에게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그래도 남궁세가의 최고수를 꺾은 진정한 실력자가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복원한 종남파의 실전 신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흥분과 설렘으로 첫날에는 잠도 설칠 정도가 되었다.
하나 그 흥분은 이내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끝도 모를 지루함과 답답함이었다. 대체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은 채 두 시진 동안 구결만 외우고 있으라니, 그게 제장신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인가? 더구나 앉은 자세가 조금만 잘못되어도 기다란 막대로 몸을 툭툭 치는데, 그때마다 뼛골이 시리는 것 같은 통증이 몸속을 마구 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어찌나 아팠는지 손풍은 그 막대가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나중에 몰래 살펴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냥 나뭇가지를 대충 잘라 만든 평범한 나무 막대임을 알고 묘한 실망감에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단지 그런 정도뿐이라면 아무리 성질 급한 손풍이라도 이렇게 야밤에 정들었던 문파를 몰래 떠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구결을 모두 외우자 내공이 움직이는 길을 알게 해 준다며 성락중이 그의 몸속에 진기를 유입해 줄 때부터였다. 그때 손풍은 칼로 전신을 난자당한다는 검수지옥(劍樹地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 끊어지는 듯한 통증과 불에 달군 쇠젓가락이 혈관 속을 쑤시고 지나가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에 손풍은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성락중은 손풍이 입을 벌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고통을 피할 길도 없어서 손풍은 몸부림을 치려고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무려 반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손풍은 완전히 늘어져서 그로부터 꼬박 한 시진 가까이나 그 자리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어야만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의 눈앞에는 성락중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내공이 지나간 길을 기억했느냐?”
성락중의 물음에 손풍은 대답 대신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없어서 그냥 간신히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다음 날, 겨우 기력을 회복한 손풍이 설마 이번에도 그러랴 싶어 성락중의 앞에 앉았을 때, 성락중은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공이 지나가는 경로를 알게 해 주겠다. 뒤로 돌아앉아라.”
손풍은 무심결에 고개를 흔들었다.
“싫습니다.”
성락중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풍은 그 손을 피하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손풍은 그날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옥 속의 반 시진을 보내야 했다.
어제와 다른 것은 검수지옥뿐 아니라 화탕지옥(火湯地獄)도 함께 느꼈다는 것이었다 온몸이 검에 찔리고 뜨거운 용암굴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던 손풍은 자신이 미치지 않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통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한 시진이나 퍼져 있다가 겨우 깨어난 그에게 성락중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공이 지나간 길을 기억했느냐?”
손풍은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입 닥쳐.”
성락중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예의 나무 막대가 쥐어져 있었다. 손풍은 그 나무 막대로 한참이나 시달린 다음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존장에게 불손한 말을 하는 것은 기사멸조(欺師蔑祖)에 해당된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네 팔을 자르겠다.”
성락중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광경을 손풍은 말 한 마디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삼 일째 되는 날, 성락중에게 가는 손풍의 걸음은 영락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연상케 했다. 성락중은 이번에는 내공의 경로를 알게 해 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손짓으로 돌아앉으라는 시늉만 했다.
손풍은 여기서
‘내가 미쳤느냐?’
고 반항할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으나, 그랬다가는 성락중이 진짜로 팔을 자를 게 분명한지라 어쩔 수 없이 그의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때 그의 몸이 덜덜 떨렸던 것은 결코 그가 심약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제의 두 가지 지옥과 함께 새로운 지옥 하나를 더 경험했다. 그것은 온몸이 빙굴 속에 쳐박힌 듯한 한빙지옥(寒氷地獄)이었다. 뜨겁고 차가운 느낌을 어째서 동시에 느낄 수 있는지 손풍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통이 어제보다 더 심해진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일생보다도 더 긴 듯한 반 시진이 지나고, 그는 다시 한 시진을 누워 있었다. 이대로 그냥 정신을 잃고 싶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성락중은 예의 그 지긋지긋한 질문을 던져 왔다.
“내공이 지나간 길을 기억했느냐?”
손풍은 고개조차 흔들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 여력이 없었는지, 아니면 반발심에서 그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손풍은 욕설을 내뱉지 않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때, 손풍은 야반도주를 결심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불교의 열 가지 지옥을 모두 맛볼 게 분명해진 이상,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는 것만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유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하진 않았을 것이다. 성락중은 한없이 점잖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흉악하고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악독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그런 자를 사문의 존장이랍시고 한때나마 존경했었다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가?
종남파 또한 자신을 정당한 한 명의 제자가 아니라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을 따르고 함께 지내며 좋아했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었다. 이제 그 어리석음을 벗어던질 때가 온 것이다. 손풍은 봇짐을 들고 다시 한 차례 방 안을 둘러본 다음 서슴없이 몸을 돌렸다.
‘안녕, 종남파여…..안녕, 무림인의 꿈이여….!’
손풍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 동중산이 서 있었다.
“어딜 가느냐, 사제?”
“으헉!”
손풍은 지옥에서 온 염라귀(閻羅鬼)라도 만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다 앞에 있는 사람이 동중산임을 확인하고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깜짝 놀랐잖소? 대체 야밤에 왜 남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거요?”
“무얼 그리 놀라나? 자네야말로 야밤에 어딜 가려고 봇짐까지 싸 들고 나오는 건가?”
동중산의 물음에 손풍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키시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나는 자네의 대사형인데 어찌 자네의 일에 상관이 없겠나? 어찌 된 일인지 내게 말해 보게.”
동중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으나 손풍은 고개를 흔들며 한층 더 차가워진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과는 할 말이 없소. 어서 비키시오.”
“사형제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나? 나에게만 말해 보게.”
손풍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키라니까. 내 말 안 들리오?”
“밤중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사문의 어른들이 깨어나지 않겠나? 나에게 사정을 설명해 보게. 어떤 말이든 기꺼이 들어 주겠네.”
“이 애꾸야! 빨리 비켜!”
사문의 어른들이 깨어난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진 손풍이 벌컥 화를 내며 동중산의 몸을 밀어제쳤다. 하나 동중산은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문 앞을 비키지 않았다.
“사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게. 사숙조께선 절대로 아무런 의미 없이 남을 괴롭힐 분이 아니네. 만약 사숙조가 그런 분이셨다면 장문인께서 자네를 그분에게 맡기셨을 리가 없네.”
손풍은 이미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라 동중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동중산이 너무도 미워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이 애꾸야, 너도 똑같은 놈이야! 이 마귀 같은 놈들!”
퍽퍽!
동중산은 반항하지 않고 그의 주먹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손풍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분도 자네가 고통스러워할 때는 항상 심각한 눈으로 자네를 지켜보고는 했네. 자네는 기절하느라 몰랐겠지만, 자네가 누워 있는 한 시진 동안 그분도 자네 곁에 앉아서 꼼짝도 않고 자네를 돌보고 있었네. 그분의 그런 마음을 자네는 알아야 하네.”
퍽!
마침내 손풍이 세차게 내지른 주먹에 동중산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동중산은 손풍을 향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장문인 또한 자네가 고통에 신음할 때는 멀지 않은 곳에서 줄곧 자네를 주시하고 있었네. 전 사숙도 그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고, 유 사제는 아예 후원에서 미친 듯이 검만 휘두르고 있었다네. 자네뿐 아니라 본 파의 모든 사람들이 자네와 함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세.
자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모두들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걸세. 나도.”
손풍의 손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손풍은 동중산의 가슴을 때리던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선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나는 참을 수가 없었어…..”
동중산은 말없이 손풍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손풍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늘게 흐느꼈다.
“나는……나는 정말 참으려고 했지만…..더 이상은…..”
손풍은 한참이나 동중산의 품에 안겨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중산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쳐든 손풍은 입술에서 피가 나고 여기저기에 멍이 든 동중산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힘겹게 물었다.
“대사형……괜찮소?”
동중산은 아직도 눈가에 물기가 살짝 고여 있는 손풍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사제의 주먹은 아직 멀었어. 내공이 담기지 않아서 연약한 여인네의 솜방망이 주먹 같았네.”
손풍은 소매로 슬쩍 눈을 훔치며 다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건 내가 손에 사정을 봐줘서 그런 거요. 다음에는 진짜 제대로 된 주먹맛을 보여 주겠소.”
“그때는 나도 맞고 있지만은 않을 걸세.”
손풍은 물기 젖은 얼굴로 피식 웃더니 손에 들고 있는 봇짐을 방 안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동중산을 향해 짐짓 쾌할한 음성을 던지는 것이었다.
“얼굴의 붓기를 빼는 데는 술이 최고인데, 어떻소? 지금 한잔 하는 것이?”
동중산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괴상한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 그래도 아끼는 사제의 말이니 이번에는 들어주지. 딱 한 잔만일세. 내일은 먼 길을 가야 하니 말일세.”
두 사형제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락중은 깊은 빛이 담긴 눈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 자칫했으면 일을 망칠 뻔했네.”
진산월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사숙의 잘못이 아닙니다.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락중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속에 있는 기운이 그토록 강력한 것이었을 줄 미처 몰랐으니 내 불찰이나 마찬가지일세. 처음에는 가벼운 타혈(打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운이 폭발하듯 요동치게 만들어 버렸으니….”
원래 성락중의 계획은 손풍의 몸속에 있는 기운을 조금씩 일깨우기 위해 타혈진맥(打穴震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손풍이 나무 막대로 가볍게 맞은 것이 바로 타혈진맥이었다.
손끝의 힘을 싣는 데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고 정확한 혈도 부위를 찍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심력을 소비하는 수법이었지만 그래도 체내의 기운을 일깨우는 데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손풍의 몸속에 있는 기운이 그 타혈진맥에 격렬하게 반응해 급속도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타혈진맥을 할 때마다 손풍이 심한 통증을 느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원래 타혈진맥은 시전자의 공력 소모가 심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많큼 지극히 안전한 내공인도술(內功引道術)이었는데, 오히려 손풍의 기운을 강하게 자극하고 말았으니 성락중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가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손풍의 몸속에 진기를 자신의 내공으로 직접 인도하기 시작한 것도 타혈진맥만으로는 솟구치는 손풍의 기운을 잠재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손풍이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본 것은 그만큼 그의 몸속에 있는 기운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傍證)이었다. 손풍은 자기 혼자만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막대한 기운을 어긋나지 않게 인도해야 하는 성락중 또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손풍이 한 시진이나 널브러져 있을 때 성락중은 바닥까지 소모된 자신의 내공을 보충하고 심력을 회복시키느라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성락중은 단 한 번도 손풍 앞에서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풍은 그가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즐기고 있다 판단해 버린 것이다.
“손풍의 몸속 기운이 경맥(經脈)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그토록 맹렬하게 반응해 올 줄은 미처 몰랐네. 저 정도 기운이라면 일반적인 영약이 아니라 무언가 특수한 영약을 복용한 것 같은데, 그런 영약을 먹였을 땐 그 후유증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함에도 전혀 그런 것 같지도 않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군.”
성락중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래 영약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독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자칫하면 약효가 지나쳐서 오히려 인체의 커다란 해(害)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고(千古)의 영약을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복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손 노태야같이 노련한 대상인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손풍은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전신에 성락중 같은 강호의절세 고수도 감당하기 벅찰 만한 기운을 담고 있으니 성락중으로서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건 진산월도 마찬가지여서 그 점에 대해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다. 성락중은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제 겨우 세 개의 경맥을 뚫었을 뿐인데, 앞으로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티어 줄지 모르겠군.”
성락중의 음성에는 짙은 우려와 걱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손풍이 느낀 삼대 지옥은 세 개의 경맥을 뚫기 위한 과정이었다. 십이경맥(十二經脈)을 모두 뚫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아홉 번의 과정이 더 남아 있는데, 과연 손풍이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을지 성락중으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십이경맥을 모두 관통해야만 폭발하듯 요동치고 있는 몸속기운이 가라앉으며 온전하게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 자신만의 진기가 되는 것이다.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걱정에 찬 성락중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면서도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버티어 낼 겁니다. 그에게는 같이 고통을 참고 견디어 줄 동료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 * *
낙일방이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눈의 소녀였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어머, 깨어났어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낙일방은 잠시 그 자리에 누운 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제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던 교등의 뒷모습이었다. 그 직후에 천상의 옥음같이 영롱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을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진기를 운용해 보았는데 의외로 막힌 곳이 없이 원활하게 흘러서 자신이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무리하게 태인장을 펼치느라 진원지기가 손상되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기색이 없어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시의 격전은 초가보와의 혈사를 경험했던 그로서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처철한 것이었다. 종남혈사 때는 그래도 동료들과 같이 싸운다는 생각에 여러 모로 힘이 났었는데, 이번에는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네 명의 무서운 고수들과 목숨이 오가는 싸움을 벌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빗해지고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버릴 것만 같았다.
때마침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앞머리가 흔들리자 무심결에 머리를 쓸어 올리려고 손을 들던 낙일방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적지 않은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내려다보니 양손에 모두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 왼쪽 팔은 아예 전체가 부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양손에 모두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이 떠오른 낙일방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다행히 잘려 나가거나 신경이 끊어진 손가락은 없는 것 같았다.
특히 부러졌던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괜찮은 것 같아 제일 큰 걱정을 덜게 되었다. 엄지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통증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통증을 느낀다는 건 신경이 살아 있다는 의미이니 상처만 아문다면 다시 예전처럼 마음껏 주먹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싸움이 특히 힘들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양쪽 손을 모두 다치는 바람에 자신의 가장 큰 장기인 권법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틈틈이 수련해왔던 구반장법과 태인장의 위력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너무 묵령갑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겠어. 묵령갑을 믿고 손의 방어에 소홀했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주먹을 쥘 수 없게 되었으니 모두 내 불찰이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묵령갑 없이 싸우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
낙일방은 안일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지난 싸움의 과정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그때 너무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주력하느라 륜을 가진 자에게 옆구리 공격을 허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탐대실(小貪大失)이었다. 싸움이 장기전으로 갈 것에 대비해서 좀 더 수비에 신경을 써야 했어. 급한 성격을 많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음이 급해지니 문제로군.’
낙일방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몇 사람이 그가 누워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였다. 남자는 사십 대 중반의 다소 강팍하게 생긴 딱딱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는데, 얼굴 표정이 너무 차가워서 무언가에 화를 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은 조금 전에 보았던 눈이 커다란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고, 다른 한 명은 삼십 대 초반의 궁장을 한 미부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눈빛이 너무 맑아서 절로 보는 이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중년인은 무뚝뚝한 얼굴로 낙일방에게 다가와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몸의 몇 군데를 쿡쿡 찔러 보았다. 그때마다 낙일방이 몸을 꿈틀거리자 이내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게.”
낙일방은 그가 자신의 눈을 내려다볼 때부터 의원임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모두 괜찮습니다.”
중년인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처럼 다시 말했다.
“당분간 왼쪽 팔은 움직이지 말도록 하게. 상처가 덧나서 신경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테니.”
“알겠습니다.”
“다른 곳은 그런대로 잘 아물었는데, 왼쪽 옆구리는 봉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심해야 하네. 봉합한 곳이 완전히 아물 때까지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피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중년인은 자신이 할 말만을 하고는 낙일방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낙일방은 그에게 자신을 치료해 줘서 고맙다는 사례의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가 훌쩍 나가 버리자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킥킥….”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눈이 커다란 소녀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낙일방의 시선이 소녀에게 향했다. 소녀는 그의 시선을 받자 웃음을 멈추고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낙일방의 시선은 자연히 그 옆에 있는 궁장 미부에게로 향했다.
궁장 미부는 단정한 얼굴에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다른 후유증 없이 회복되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군요. 부상이 너무 심해서 후유증이 남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 음성을 듣자 낙일방은 이내 그 목소리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직전에 들었던 천상의 옥음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에게 사례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내 옆구리를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노 신의의 말씀대로 당분간은 가만히 누워 계세요.”
낙일방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노 신의라면…..”
“조금 전의 그분이 바로 무림 제일 신의인 철면군자 노방, 노 신의랍니다.”
“아!”
낙일방은 노방에 대한 전설적인 소문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감탄성을 터뜨렸다. 더구나 노방이라면 사 년 전에 장문인인 진산월의 치명적인 부상을 고쳐 준 은인이 아니었던가? 그때 부상에서 회복하는 진산월을 만나러 간 낙일방은 노방이라는 일대 신의가 그를 살려 주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는데, 그 인물이 조금 전의 딱딱하게 생긴 중년인이었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본 파는 두 번씩이나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구나.’
낙일방은 새삼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강호에 알려진 소문대로 그의 외모는 차갑고 냉정해 보였으나, 그의 손을 거쳐 살아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한없이 믿음직하고 자상하게 느껴졌다. 낙일방은 자리에 누운 채로 궁장 미부를 향해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저를 구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은인의 귀명(貴名)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은 능자하이고, 이 아이는 내 사매인 송옥령(宋玉鈴)이 라고 해요.”
“이제 보니 능 여협과 송 소저이셨군요. 저는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인 낙일방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요. 사실 우리는 그때 낙 소협이 그들과 싸우는 중간쯤에 그 자리에 도착해 있었어요.”
낙일방의 눈가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예?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낙 소협이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냐는 것이지요? 솔직히 그때 우리는 낙 소협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하고 있었답니다.”
낙일방은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낙 소협이 아니라 서장의 고수들 뒤를 쫓고 있었어요. 강남에서부터 수백 리나 그들의 뒤를 추적했는데,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킬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낙 소협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다면 계속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뒤를 밟았을 겁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지게 되었으니 송구스런 일입니다.”
“아니에요. 사실은 좀 더 일찍 나서야 하는 일이었어요.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데, 내가 괜한 욕심으로 지체하는 바람에 낙 소협이 큰 낭패를 당하게 되어 미안하군요.”
그녀가 오히려 사과를 하자 낙일방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강호에 명성이 높은 고수답지 않게 무척이나 순진해 보였기 때문에 옆에서 송옥령이 다시 또 키득거리며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능자하는 그녀에게 살짝 꾸짖는 듯한 시선을 보낸 다음 다시 낙일방을 향해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늦게 낙 소협을 구한 게 아닌가 하여 불안했는데, 노 신의 덕분에 위급함을 넘기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불편한 곳은 없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포근하여 마치 밖에 나갔다 가 다치고 돌아온 막내 동생을 걱정하는 큰누님 같았으나, 낙일방은 특별히 기분이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 모습이 예전의 임영옥을 떠올리게 해서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제가 무사할 수 있었군요. 다시 한 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낙일방이 누운 상태에서 억지로 포권 자세를 취하려 하자 능자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제지했다.
“사례는 낙 소협이 무사한 것으로 이미 충분히 받은 셈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낙일방은 그녀의 제지를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편하게 누운 채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서장의 고수들은 무슨 일로 쫓고 계셨던 겁니까?”
능자하는 그의 물음에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서장 무림 측에서 중원에 몇 군데의 거점을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나요?”
낙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섬서성의 흑갈방이 그런 경우이지요.”
“그래요. 그런데 강북뿐 아니라 강남에도 그들의 거점이 있어요.”
낙일방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섬서성이야 서장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니 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머나먼 강남에까지 이미 서장의 세력이 침투했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능자하의 고운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그걸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어요. 서장의 고수들이 강남에서 암약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뒤를 추적했지만 번번이 그 흔적을 놓쳐 버리고 말았지요. 누군가 강남의 유력 인물이나 세력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
“그러다 이번에 서장의 고수 몇 사람이 갑작스레 급하게 이동하느라 우리에게 행적을 들켜서 우리로서는 그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저 때문에 실패하고 마셨군요.”
능자하는 가볍게 웃었다.
“덕분에 낙 소협 같은 인재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낙일방은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맙게 생각되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강호에 나와서 만난 여인들은 외모는 정말 뛰어났으나 그 행태나 마음씨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호의 여인들은 모두 성정(性情)이 차갑고 독선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능자하를 보게 되니 전혀 그렇지 않은 여인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낙일방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우리라고 하셨는데….”
능자하는 한동안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내려 낙일방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장 무림의 뒤를 쫓는 건 우리 성숙해의 가장 큰 임무예요. 나는 성숙해의 십이비성 중 실녀좌(室女座)를 맡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