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4권 모산지연(姆山之宴)편 : 11화
제 250장 목전경고(目前警告)
여불회가 물러난 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동방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아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 여협께서 나오실 차례 같습니다.”
기아향은 동그란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그이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끌어서 저까지 나서기에는 염치가 없군요. 우리 그이가 제 몫까지 한 걸로 해 주세요.”
“다들 별로 상관없어 하는 것 같습니다만…..”
“부탁합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사양하자 동방야도 더 이상은 권하지 못하고 견동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자네 차례일세.”
견동은 주저하지 않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날아갔다. 그는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불회가 부숴 놓은 탁자의 잔해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중인들은 그가 무슨 신기(神技)를 보일까 기대하는 마음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탁자의 잔해를 뒤적거리던 견동이 꺼내 든 것은 반쯤 깨어진 자기(瓷器) 접시였다. 아마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음식 접시가 탁자가 부서질 때 같이 깨어진 모양이었다. 견동은 손바닥 크기만 한 접시를 들고는 차갑고 냉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강호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쾌(快)’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소. 과연 ‘쾌’란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인가, 상대적인 것인가? 어느 정도 빨라야만 진정한 ‘쾌’ 라고 불릴 수 있는가? 진정한 ‘쾌’를 이루었을 때 과연 강호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끝도 없는 질문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지.”
중인들은 모두 강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의 음성에 담긴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쾌’ 대신에 ‘강함’을 넣어도 좋았고, ‘부(富)’를 넣어도 좋았으며, ‘미(美)’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각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대입해 본다면 그를 번민하게 한 질문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견동은 수중에 접시를 만지작거리며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스물세 살에 강호에 출도한 후 십오 년 이란 세월 동안 수없이 남들에게서 듣고, 나 혼자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소.”
중인들의 시선이 그의 입에 고정되었다. 과연 강호 제일 쾌도가 내린 ‘쾌’의 정의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문이었다. 견동은 들고 있던 접시를 허공으로 던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쾌’에 대한 결론을 말한다 해 놓고 무슨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인가? 견동이 높이 던져 올린 접시는 허공을 한없이 올라갈 듯하다가 이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견동은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떨어져 내리는 접시를 보고 있었다.
높이 솟구쳤던 접시는 올라간 것보다도 더욱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접시가 그의 머리 높이를 지나고 가슴 부위를 지나고 무릎 부위를 지날 때까지도 그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마침내 접시는 빠른 속도로 그의 다리 부위를 지나 바닥에 닿게 되었다. 막 접시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려는 순간,
팟!
무언가 번쩍하는 섬광이 장내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섬광이 번뜩이고 지나간 순간이 너무도 짧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섬광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다만 진산월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섬광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눈부신 쾌도의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참기 어려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줄 알았던 접시는 멀쩡했다. 그 접시는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칼날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칼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견동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혈전도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접시가 바닥에 닿으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견동이 도를 뽑아 접시를 칼날 위에 멈춰 세웠음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그토록 빠른 속도로 칼을 뽑아 휘둘렀음에도 견동의 칼은 조금의 충격도 주지 않고 접시를 칼날 위에 세운 것이다.
견동은 천천히 혈전도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혈전도를 슬쩍 움직여 접시를 다시 손안에 움켜잡았다.
“내가 필요한 만큼의 빠르기가 바로 진정한 ‘쾌’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어떠한 함성보다도 크고 명확하게 들렸다. 견동이 혈전도를 거두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곧이어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강호 제일 쾌도다운 솜씨요. 안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군.”
그중에서도 여불회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정말 멋진 말이오. 나도 이제부터는 진정한 ‘주도(酒道)’를 찾아볼 생각이오.”
옆에서 듣고 있던 기아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정한 주도라니요?”
여불회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딱 기분 좋게 취할 만큼 마시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주도’란 말이지.”
그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가시며 장내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동방야가 다시 좌중을 돌아보며 다음에 나올 사람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남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연령대의 인물들이었다. 진산월과 전흠을 비롯해 혁리공과 화옥, 담옥교가 모두 이십 대의 나이였던 것이다. 하나 굳이 따지자면 혁리공과 화옥은 이십 대 후반이었고, 진산월은 이십 대 중반, 전흠과 담옥교는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혁리공과 화옥이 서로 마주 보더니 화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는 같지만 내가 생일이 조금 빠른 편이군.”
화옥의 말에 혁리공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몇 년 동안이나 형님 행세를 한 걸 잊지 않고 있지.”
“쓸데없는 건 오래도록 기억하는군.”
화옥은 낮게 투덜거리며 대청의 중앙으로 가서 주위를 향해 포권을 했다.
“강호의 고인들 앞에서 미천한 실력을 선보이게 되어 두렵군요. 모쪼록 어여삐 봐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본가의 글솜씨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뜬금없이 글솜씨를 보여 준다는 말에 중인들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빛이 떠올랐다.
화씨세가는 강호의 오래된 명문(名門)이니 물론 나름대로의 필법(筆法)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이곳은 지금 무인(武人)들이 자신의 무공 실력을 선보이는 곳일 뿐,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글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화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중인들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화옥 본인이 아니라 화옥의 바로 앞 공간이었다.
분명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텅 빈 허공을 향해 글을 쓰는 흉내만 내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허공에 실제로 하나둘씩 글씨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빈손으로, 그것도 허공에 글씨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중인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화옥의 앞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처음 나타난 글자는 ‘고(高)’였다. 먹을 갈아 종이에 쓴 것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글자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서 ‘산(山)’이라는 글씨가 나타났다. 계속 나타나는 글씨는 결국 ‘고산유수멱지음(高山流水覓知音, 깊은 산,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서 나를 알아주는 지인을 만나다.)’이라는 문구를 완성하고 끝이 났다.
“휴우!”
그제야 화옥은 깊은 숨을 몰아쉬고는 허공에 휘두르던 손을 멈추었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심력을 소비한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멈추자마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글자들이 허물어지듯 아래로 주르르 내려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눈치 빠른 중인들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 사람들만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중산 또한 허공에 글씨가 써지는 이유를 알지 못해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그것을 알고 조용한 음성으로 그에게 설명을 했다.
“화 공자가 펼친 것은 접인신공(接引神功)의 일종인 경해진기(傾海眞氣)다. 경해진기를 끌어 올린 상태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빠르게 손을 움직이면 주위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들어 글자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동중산은 비로소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고 감탄성을 발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화 공자가 기적(奇蹟)이라도 만들어 낸 줄 알고 정말 놀랐습니다.”
“말로는 간단한 것 같아도 경해진기와 섬수공(閃手功)은 상당한 수련을 쌓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것이다.”
“화 공자가 휘두른 손짓이 바로 경해진기와 함께 화씨세가의 삼대 절학(三大絶學) 중 하나인 섬수공이로군요.”
“그렇다. 섬수공은 공력이 십성에 도달하게 되면 미세한 먼지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가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원리를 알고 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안의 과정을 살펴보면 진산월의 말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의 먼지들을 경해진기로 끌어 모아서 흩어지지 않도록 빠르게 손을 놀려 원하는 글자 모양을 만든다는 것은 뛰어난 공력과 절정에 다다른 수공이 없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화옥이 중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물러나자 혁리공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강호를 진동시키는 절세의 고수들 앞에 서게 되니 제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는군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무공에는 별다른 소질이 없으니, 여 대협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나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혁리공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벌어진 일일 수도 있고, 그냥 누군가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옛날 어느 부잣집에 젊고 예쁜 후처(後妻)가 들어왔습니다.”
강남에서 제일가는 부귀 가문의 공자인 그의 입에서 부잣집 운운하는 말이 튀어나오자 몇몇 사람들이 나직하게 웃었다. 혁리공도 따라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젊고 예쁜 만큼 욕심도 많아서 나이 많은 남편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 부잣집의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소문난 미남자였고, 젊고 건강했으며, 야심도 대단했습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려, 끝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곳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중 기아향은 사십이 넘은 중년의 부인이라 혁리공의 말을 듣고도 가만히 웃고 있을 뿐이었으나, 담옥교는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말을 듣자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잠시 나갔다 오겠다 말하고는 대청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으나, 혁리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담 소저께서 과식을 하신 모양입니다. 흠, 아무튼 두 사람은 남편의 눈을 피해 밀회(密會)를 계속했으나 끝나지 않는 연회가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남편에게 발각당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고 한편으로는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그 후처를 사랑하고 있었고, 후처와 밀회를 즐긴 남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배신이야말로 사람을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불회는 벌써부터 그 남편이 안됐다는 둥 불쌍하다는 둥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기아향에게 꼬집힘을 당하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사랑을 배신당하고 믿음을 배신당한 그 부자는 너무도 분노가 치밀어 병까지 들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병이 늙고 노쇠한 그의 몸을 갉아먹은 거지요. 병상에 누워 신음하던 부자는 자신의 아들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부자가 아들에게 무슨 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불회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대꾸했다.
“필시 그 두 간악한 남녀들을 죽이라고 명했겠지.”
혁리공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부자의 마음속의 화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여불회의 눈살이 찡그려졌다.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부자의 그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배신의 고통 또한 그만큼 강렬했던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있다니…… 고문이라도 가하라고 한 것일까?”
“부자는 나름대로 명망(名望) 있는 가문의 주인이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그런 명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여불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겠군. 나는 모르겠네.”
“부자가 아들에게 내린 명은 간단했습니다. ‘두 사람을 서로 한집에서 살게 해라.’라는 것이지요.”
여불회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건 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상을 내린 게 아닌가?”
“다만 한 가지,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은 집에서 일 리 이상 나갈 수 없으며, 다른 이성(異性)에게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말이지요.”
“만일 그것을 어기면?”
“그때는 전신을 난도분시하여 돼지의 먹이로 주라고 했습니다.”
끔찍한 말에 여불회는 한 차례 몸을 떨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부자가 왜 아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때 조용히 혁리공의 말을 듣고 있던 기아향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건…. 정말 지독한 형벌이에요.”
여불회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두 남녀를 같이 살게 하는 게 지독한 형벌이라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평생 동안 좁은 공간에서 한 사람만을 보며 산다면 누구라도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들같이 바람기가 많은 남녀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지요.”
여불회는 그녀의 말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혁리공은 감탄했다는 눈으로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과연 기 여협의 혜안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기 여협의 말씀대로 두 사람은 머지않아 한창때의 아름다움을 모두 잃고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후처는 어차피 자신의 정부(情夫)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니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꾸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남들이 보기에도 끔찍한 뚱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부 또한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킬 수도 없고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 수도 없으니 모든 희망을 잃고 게으른 폐인이 되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여불회는 아내가 말한 지독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부자는 그들에게 미래(未來)를 빼앗아 버린 것이로군.”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부자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보복이었습니다.”
“후우….. 정말 인간의 상상력이란 무한한 것이로군.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니. 그 부자는 그들이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해 했나?”
“아쉽게도 그는 자신의 복수가 실현되는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앓다가 몇 달 후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그것대로 아쉬운 일이로군.”
“그런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젊은 혁리공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나가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복수’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혁리공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고 특이한 반전(反轉)이나 기이한 사연은 없었으나, 중인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혁리공은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한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중인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의 중앙으로 가서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흠모의 시선도 있었고, 질시를 담은 눈빛도 있었으며, 동경과 존경을 담은 눈도 있었다. 그리고 묘한 악의를 느끼게 하는 시선도 여전히 존재했다.
어떤 눈으로 보든 모든 사람의 시선 속에는 신검무적이 과연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하는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는 밖으로 나갔던 담옥교마저 어느 사이에 돌아왔는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혁리 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마침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랐소.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려 하오.”
중인들의 눈에 대부분 실망 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들이 기대했던 건 신검무적의 말솜씨가 아니라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의 검술 솜씨였다.
혹자는 그가 지난 십 년 동안 강호에 나타난 검객들 중 가장 뛰어난 고수라고 했고, 혹자는 이미 천하제일 검객이라고도 했으며, 혹자는 오십 년 전의 모용 대협 이후 최고의 고수라고 했다. 심지어는 무림구봉 중 검봉은 화산파 장문인 용진산이 아니라 신검무적에게 돌아가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검에 구름을 만들어 낸다는 그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지 않는 무림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 전설의 한 자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건만, 검술을 펼치는 대신에 이야기를 하겠다니 중인들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신검무적의 검술을 보는 것보다 짜릿하겠는가?
하나 진산월은 중인들의 실망 어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것도 마침 어느 가문의 이야기요. 물론 혁리 공자가 말한 것 같은 부잣집은 아니오. 한때는 분명히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가문이었으나 지금은 몰락할 대로 몰락해 버려서 집안 살림조차 제대로 꾸려 갈 수 없는 형편이었소. 그 가문에 나이 어린 소년이 양자로 들어왔소. 그 소년은 떠돌이 거지였기 때문에 배를 곪지만 않으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소. 그 가문이 비록 몰락했다고 해도 배고픈 거지 소년을 굶길 정도는 아니었기에 소년은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소.”
그의 말이 시작될 때부터 한 사람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변하더니 배고픈 거지 소년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는 다름 아닌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지금 진산월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고개를 떨군 건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산월의 과거를 알고 함께 경험을 공유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진산월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중인들의 귀에는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년은 지금처럼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소. 하나 어느 날, 소년을 양자로 받아들였던 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소년은 험한 가시밭길을 가야 했소. 주인은 죽으면서 소년에게 가문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고, 소년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알면서도 소년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거요.”
진산월의 시선은 허공의 어느 한 점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사부인 임장홍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소년은 모진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조금씩 가문을 일으킬 수 있었소. 떠나갔던 식솔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소년의 주머니에도 돈이 모이기 시작했소. 하나 소년은 가문을 일으키려면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먼 상행(商行)을 떠나기로 결심했소. 비록 그 상행에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반드시 성공시켜 가문을 부흥시키겠다고 다짐한 소년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길을 떠났소.”
이제 중인들도 무언가를 느낀 듯 그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년의 예상대로 상행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소. 짐을 노리고 습격해 오는 도적떼들도 있었고,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지기도 했으며, 어이없는 일을 당해 짐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소. 하나 소년은 믿음직한 수하들과 함께 그 모든 난관들을 헤치고 상행을 계속했소. 그 상행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소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상행을 멈추지 않을 거요.”
진산월은 문득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손가락 끝을 향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아득한 남쪽 하늘이었다.
“아마 저 하늘 어딘가를 향해 소년의 상행이 움직이고 있을 거요. 지금 이 시간에도 소년은 상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지도 모르오.”
이제는 누구라도 진산월이 말하는 소년이 그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산월은 왜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그리고 그가 말한 상행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래서 더욱 결연하게 들렸다.
“내가 왜 엉뚱한 소년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을 거요. 나는 단지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이곳에 있는, 혹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소년은 결코 상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난관도 기꺼이 헤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소. 그러니 그의 앞을 막으려거든 당신도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할 거요.”
그 말을 할 때 진산월의 시선이 혁리공 쪽으로 향한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항상 웃음기가 감돌고 있던 혁리공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핼쑥하게 굳은 것도 우연한 일일 뿐이었을까? 중인들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신검무적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다만 한 가지. 신검무적이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분명한 경고를 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이 자리에 돌아간 후에도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기도를 뿜어내지 않았으나, 대청 전체가 그의 말에 짓눌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의 일은 조금 허무하게 끝이 났다. 진산월의 다음 차례였던 전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며 포기해 버렸고, 담옥교 또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숙소로 돌아가고 말았다. 흥겹게 시작했던 연회가 다소 이상하게 끝나 버린 것이다. 중인들이 하나둘씩 숙소로 돌아가자 진산월 일행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혁리공도 그들이 가는 것을 배웅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 날 진산월 일행이 산장을 떠날 때에도 혁리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제 진산월 일행을 안내했던 환악이 공자께서는 몸이 불편하여 나오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산장에 왔을 때처럼, 그들이 피번을 타고 모산도를 떠나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약간 마르고 키가 큰 사람이 옆의 인물에게 말했다.
“어제는 왜 계획대로 하지 않았나? 그를 이대로 순순히 돌려보내다니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 아닌가?”
그 인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멀어지는 피번의 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판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인물은 그 사람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획을 바꿨을 뿐이오.”
“왜 갑자기 바꿨나?”
“생각해 보니까 굳이 내가 힘을 들여 그를 상대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말한 대로요. 그는 적으로 삼기에는 두려운 자요. 그의 목표가 강남으로 가는 것이라면, 굳이 내가 나서서 그의 검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오.”
“그럼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강남은 대공자(大公子)의 관할이오. 그러니 그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소?”
키가 큰 사람은 한동안 그 인물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자네, 겁을 먹었군.”
그 인물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보이오?”
“그렇게 보이네.”
“굳이 부인하지 않겠소. 솔직히 당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소?”
“사실은 그렇다네.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는데, 실제로 눈앞에서 직접 보니 거대한 벽(壁)을 대하는 것 같았네.”
“그것 보시오. 그러면서 나를 탓할 수 있겠소?”
“하지만 계속 그를 피할 수는 없네. 언젠가는 반드시 그와 맞부딪쳐야 할 걸세.”
“그가 대공자를 물리친다면 그렇게 되겠지.”
“대공자가 그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누구라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배 이상의 힘을 내는 법이오.”
“그도 그렇군. 그래서 어제 그런 이야기를 했나?”
“재미있지 않소? 도도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당신도 속으로는 통쾌해서 죽으려고 하지 않았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녀를 앞에 두고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너무 심했네. 그녀는 그 일을 반드시 설욕하려고 할 걸세.”
“그야 먼 미래의 일이겠지. 지금은 신검무적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여씨 부부는 어떻게 할 텐가?”
“원래 내가 그들 부부를 이번 연회에 초대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신검무적과 그들을 충돌시켜서 신검무적으로 하여금 그들을 제거하게 하려고 했던 거요.”
“왜 그런 계획을 했나? 그들 부부는 비록 무공이 괜찮긴 하지만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들 부부는 그리 대단할 게 없지만, 그들 부부의 절친한 친구 중에 대단한 자가 있소.”
“그게 누군가?”
“유중악.”
“환상제일창 유중악이 그들 부부의 친구라고?”
“그렇소 그것도 가장 친한 몇 사람 중의 하나지.”
“그러면 자네는 신검무적으로 하여금 그들을 해치게 해서 유중악과 싸우게 하려 했던 거로군.”
“여러 가지 계획 중의 하나로 세워 놓았던 거요.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번에 파기한 것이고.”
“왜 그렇게 생각했나?”
“문득 유중악의 친구들 중에 그들 부부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뿐이오.”
“그가 누군가?”
“팔비신살 곽자령.”
“안탕산의 그 괴물 말인가? 그는 왜?”
“곽자령은 종남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태평검객 임장홍의 가장 친한 친구였소. 다시 말해서 이미 그들 사이에는 제법 질긴 인연의 줄이 닿아 있었던 거요. 그걸 모르고 일을 무리하게 진행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을지 모르오.”
“그렇군. 그러면 이제 우리는 대공자가 신검무적을 어떻게 상대할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소.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아니오?”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겠지.”
그 말에 혁리공은 모처럼 활짝 웃으며 키가 큰 사나이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그러니 이제 내가 왜 그를 순순히 보냈는지 알겠지요?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들이 피 흘리며 싸우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이오?”
* * *
멀어지는 모산도를 바라보는 진산월의 눈빛은 유난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락중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연회 전에는 한바탕 칼부림이라도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조용히 지나갔군.”
“원래는 혁리공이 어떻게 나오든 일단 무력(武力)을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었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락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반짝였다.
“여불회의 이야기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비록 흥미 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른 게 없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무척이나 귀중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을 알고 있나?”
“예. 그건 바로 선사의 이야기였습니다.”
뜻밖의 말에 성락중은 눈을 크게 뜨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의 눈가에는 한 줄기 아련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선사의 이야기를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필시 선사의 친구분과 교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앞에서 제가 어찌 검을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성락중은 한동안 말없이 진산월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임 사형께서 그런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줄을 몰랐다니 내 불찰이 너무 크구나.”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성 사숙.”
성락중이 그를 응시하자 진산월은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어제 밤의 연회에서 그가 가리킨 그 방향이었다.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성락중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화산이 아닌가?”
“구화산 자락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성락중은 무심코 대답했다.
“구궁보.”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 말꼬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영혼의 동반자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락중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을 할 때 진산월의 전신에서 성락중으로서도 처음 보는 가공할 기운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 기운은 이내 사라졌으나,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진산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차갑고 서늘하며 한없이 거대한 것이 자신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음을 느꼈던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허공을 응시한 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과거의 지난 일은 가슴 한구석에 고이 묻어 두면 됩니다. 언제고 꼭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금은 미래의 일을 준비할 때입니다. 그리고 저의 미래는 그녀가 있는 구궁보에 있습니다.”
성락중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담담한 표정 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락중은 진산월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없이 푸른 하늘 아래 아득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벌판을 가로질러 거대한 강을 건너면 연꽃 송이가 피어 있는 듯한 하나의 아름다운 산이 나온다. 그 산자락 어딘가에는 지난 오십 년 동안 천하제일 고수로 군림하는 절대자가 머무르는 건물이 있을 것이다. 가슴 속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담고 있는 진산월이 그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성락중은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떨려 왔다. 그들의 앞날에 닥칠 거센 풍운(風雲)을 예고하듯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갑판 위에 서 있는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자신의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을 맞으며 언제까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구궁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오월 십사 일(五月 十四 日). 진산월이 당가타의 강변에서 임영옥과 이년지약을 한 지 삼 년 육 개월 만이었다.
(군림천하 2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