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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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5화


제 255 장 호주호시(好酒好時)

진산월에게 냉옥환이 다시 찾아온 것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거처에서 쉬고 있던 술시(戌時)경이었다.

“공자께서 진 장문인을 뵙고자 하십니다.”

진산월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섰다.

하늘에는 둥근 만월(滿月)이 떠 있었다. 월광 아래 보이는 구궁보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냉옥환의 뒤를 따라 달빛 아래 드러난 소환로의 작은 길을 걷고 있자니 문득 소림사에서의 어느 날 밤이 생각났다. 그때 진산월은 매신 종리궁도에게 납치되다시피하여 정소소를 따라 소림사의 후원에 있는 객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단봉공주와 모용봉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으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또 다시 한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모용봉을 만나기 위해 달빛 밝은 소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풍경,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그때와 지금은 몇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막 강호에 첫발을 디딘 애송이 장문인이었고, 약간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가슴 설레는 두근거림을 안고 있었다. 하나 지금의 그는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절세의 고수가 되었고, 강압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가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설렘과 기대감 보다는 단호한 결심과 각오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앞에서 걷고 있던 냉옥환이 문득 진산월을 슬쩍 돌아보았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워서인지 그는 음울한 인상이었고, 왼쪽 뺨의 흉터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달빛에 섞인 그의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긴장감과 적막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냉옥환은 무어라고 입을 열 듯 했으나 말없이 다시 몸을 돌렸고, 진산월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취몽전을 나와 몇 개의 작은 화원을 지나자 얕은 가산(假山)이 나왔다. 그 가산을 삥 돌아가니 얕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작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건물은 정자(亭子)같기도 하고 누각(樓閣)같기도 했는데, 한쪽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 다소 특이한 모습이었다. 회랑의 뒤쪽은 건물에 가려져 있어, 회랑이 어느 곳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담벼락에는 둥그런 월동문(月洞門)이 나 있었는데, 월동문 앞에 이르게 되자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아무 말이 없던 냉옥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곳부터는 구궁보의 내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의 허락을 받은 사람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남궁선에게서 구궁보의 내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남궁선의 말로는 구궁보의 내실은 모두 세 개의 건물이 있으며, 자신은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망천정 까지만 들어가 보았다고 했다.

과연, 월동문을 지나 가까이 다가간 건물에는 <망천>이라고 쓰인 작은 현판이 달려 있었다.

망천정의 입구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을 본 진산월은 곧 그들이 예전에 소림사에서 보았던 쌍둥이 중년인임을 알 수 있었다. 각기 허리춤에 보도와 장검을 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외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모습이 유난히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모용봉의 측근 수하들이라는 쌍포사절 중의 두 명일 것이다. 이들 말고 다른 한 쌍의 쌍둥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냉옥환과 그 뒤를 따라 오고 있는 진산월을 보았을 텐데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망천정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냉옥환 또한 그들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들의 앞을 지나쳐 망천정 안으로 들어갔다.

망천정은 유달리 천정이 높고 사방에 창문이 달려 있어서 평상시에는 막힌 공간이 아니라 탁 트인 정자에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하나 지금은 야심한 밤인지라 대부분의 창문을 닫아 놓아서인지 정자라기보다는 작은 누각 같은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진산월은 망천정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뒷짐을 지고 서서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내보이는 만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난히 새하얀 유삼(儒衫)이 달빛을 받아 하얀 빛을 뿌리고 있어 흡사 그의 주변에 백색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냉옥환은 백색 유삼의 사람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진 장문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백삼인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수고가 많았소, 냉 소저. 진 장문인과 조용히 이야기 하고 싶소.”

백삼인이 냉옥환을 대하는 태도는 시비가 아니라 강호의 여느 여협을 대하는 것 같았다. 냉옥환은 그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월광(月光)이 유난히 밝다 싶은 순간, 백삼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진산월은 마침내 모용봉을 보게 되었다.

모용봉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일곱. 진산월보다 불과 한 살이 더 많을 뿐이었으나, 강호에서 명성이 퍼진 것은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는 벌써 십 년 전부터 강호인들에게 퍼져 있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야기는 신화(神話)와 전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진산월은 사 년 전에 모용봉을 두 번 만났으나, 그때마다 모용봉이 머리에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서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비로소 모용봉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모용봉의 얼굴은 절세의 옥안(玉顔)이라는 말에 손색이 없는 준수한 것이었다. 차갑게 빛나는 눈과 우뚝 솟은 콧날, 그리고 여인처럼 붉은 입술과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피부가 한데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다소 유약한 듯 했으나, 그래서 오히려 더욱 수려하고 비범해 보였다. 특히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그의 두 눈은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좀처럼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모용봉은 한 동안 진산월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더니 문득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이 순간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소.”

진산월은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를 만나면 할 말이 무척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를 눈앞에서 보게 되자 일시지간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도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 더욱 빨리 찾아오고 싶었는데 늦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은 당신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해야 할지 온갖 두서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제야 진산월은 자신이 아직도 모용봉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용봉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소리도 없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사 년 전의 첫 만남에서 진산월은 모용봉에게 난생 처음으로 자격지심을 느꼈고, 두 번째의 만남에서는 자신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다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지난 세월동안 그는 훌쩍 성장했지만,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모용봉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누추한 곳이지만 진 장문인과 호젓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괜찮은 자리라고 생각하여 이곳으로 모시었소.”

진산월이 자리에 앉자 모용봉은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며 옆에 있는 다기를 들어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찻잔을 들었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차의 맛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모용봉은 진산월이 차를 마시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진 장문인을 만났을 때도 내가 진 장문인에게 술을 따라 주었던 기억이 나는구려.”

뜨거운 차 한 잔을 모두 마신 다음에야 비로소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달빛이 드리워진 모용봉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마신 일점향의 맛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소.”

모용봉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마침 일점향이 몇 병 있는데, 지금 한 잔 하시겠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오. 좋은 술은 좋은 날에 마시고 싶소.”

“호주호시(好酒好時)라……. 잘 기억해 두겠소.”

진산월이 마신 찻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모용봉은 다시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사실 진 장문인에 대한 소문을 최근에 자주 들으면서 과거에 내가 보았던 진 장문인과 소문 속의 진 장문인을 연상시켜 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과거의 내 인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알겠소.”

모용봉은 유성처럼 빛나는 눈으로 진산월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난 세월동안 진 장문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구려.”

진산월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사 년이란 짧은 세월이 아니오.”

“물론이오. 그리고 한 사람이 성장하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소.”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용봉은 한동안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

잠시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모용봉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매력을 느낄 만큼 멋진 미소였다. 심지어 그의 입에서는 낭랑한 웃음소리마저 흘러나왔다.

“하하…….”

그리 크지 않은 웃음소리였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여느 웃음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진산월은 웃고 있는 모용봉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봉은 이내 웃음을 거두었으나, 입가에는 여전히 약간의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미안하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들어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소.”

“무슨 생각이 당신을 그렇게 우습게 했소?”

“예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투덜거린 적이 있었소. 그 사람은 당금 강호는 정체되어 있다며 새로운 고수가 출현하지 않는다고 탄식을 토해냈소.”

“…….”

“그 사람은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했소. 무림에서는 원래 서로 간의 경쟁으로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높은 곳에 홀로 존재함으로서 젊은 고수들이 나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흠모하기만 할 뿐이라 경쟁구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소. 그때 그는 만약 내 상대가 될 만한 자가 나타난다면 오랫동안 길러왔던 수염을 밀어버리겠다고 장담했는데, 조만간 그가 울상을 지으며 수염을 깎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소.”

모용봉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 장문인은 기꺼이 내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오. 그동안의 내 기다림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어 고맙소.”

진산월은 한동안 물끄러미 모용봉을 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도 아니고, 당신의 상대가 되려고 한 일은 더더욱 아니오. 나에게는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었소.”

모용봉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몰락해 가는 문파의 장문인에게 문파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절박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 일이 너무도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며, 단순히 자기가 하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새로운 문파를 세우는 것이 무너져가는 문파를 부흥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결국 그 일을 해냈으며, 그 점에 있어서 모용봉은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봉은 진산월의 깊게 가라앉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최근에 진 장문인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나서 내 나름대로는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었소. 과연 그 소문이 어디까지 진실이며, 얼마나 믿어야 하는 지를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진 영하 강변에서의 일을 전해 듣고 나는 조만간에 반드시 진 장문인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소.”

영하 강변에서 진산월은 신목령의 오천왕 중 일인인 독존자 갈황과 무림구봉 중의 한 사람인 금도무적 양천해를 연거푸 꺾었으며, 그것으로 온 강호인들을 경악과 전율에 떨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모용봉이 진산월을 꼭 만나야 할 무슨 이유가 된단 말인가?

“진 장문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무공이 강호의 최정상에 올라와 있음을 입증해 보였소. 그래서 나는 진 장문인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하오.”

모용봉의 거듭된 말에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기회 말이오?”

모용봉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옥(玉)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진산월은 냉정하고 침착해서 어지간한 일로는 좀처럼 마음의 평정(平靜)을 깨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모용봉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그러한 평정심이 깨어질 뻔 했다. 일전에 모용봉의 서신에서도 행간(行間)에서 비슷한 의미를 읽기는 했으나, 자신의 앞에서 이처럼 노골적으로 임영옥의 주인을 가름하자는 말을 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나 분노와 살기가 들끓어 오르던 그의 가슴은 모용봉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차갑게 가라앉아 버렸다.

“중추절이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더 이상 옥의 주인을 가리는 걸 늦출 수는 없소. 그래서 나는 이번에 어떤 식으로든 그 일을 확실하게 매듭지으려 하오.”

진산월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언뜻 모용봉의 말 속에서 어떤 이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대체 중추절과 임영옥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때 비로소 어쩌면 모용봉이 말하는 ‘옥의 주인’이 단순히 임영옥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그런 의구심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모용봉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생일연에 나는 진 장문인 외에도 내가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세 사람을 더 초청했소. 다시 말해서 진 장문인은 옥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네 번째 사람이 되는 것이오.”

이제는 진산월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다. 모용봉이 말하는 ‘옥’은 임영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은 모용봉이 스스로 경쟁자라고 인정하는 자만이 얻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모용봉이 임영옥을 물건 취급하여 그녀의 주인을 가리자는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진산월은 잠시 말 못할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맹렬하게 끓어올랐던 투지와 전신을 팽팽하게 했던 긴장감이 너무도 맥없이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하나 이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짙은 의혹이 솟구쳐 올랐다.

모용봉이 말하는 그 ‘옥’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모용봉 같은 인물이 경쟁자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그것을 얻을 자격을 주려는 것일까?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에서 스스로 그것을 얻지 않고 남에게 주인이 될 기회를 주려는 것일까? 모용봉이 초청했다는 세 명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의문은 많았지만, 진산월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모용봉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엉뚱한 오해를 하고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숙적에게 약세를 보이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해나 착각은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실수이다. 오해나 착각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게 잘못된 걸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옥이란 무얼 말하는 거요?”

모용봉은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이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보고 나서야 모용봉은 진산월이 정말로 ‘옥’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용봉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소. 진 장문인은 혹시 취와미인상(醉臥美人像)이라는 물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너무도 간단명료한 대답에 모용봉의 얼굴에 한 줄기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내가 듣기로 진 장문인은 석가장의 장주인 석곤에게서 한 가지 물건을 건네받은 걸로 알고 있소.”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석 장주에게서 상자 하나를 받은 적이 있소.”

“그 상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진산월은 모용봉이 취와미인상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엉뚱한 것을 묻는지 궁금했으나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천룡궤라는 것이오.”

“혹시 석 장주가 진 장문인에게 천룡궤를 맡길 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들은 적이 없소. 단지 석 장주에게서 이 천룡궤를 모용 대협께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오.”

“혹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있소?”

진산월은 잠시 모용봉의 투명한 시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룡궤의 주인이었던 천룡객이 자기가 평소에 아끼던 물건 몇 가지를 넣어두었다고 알고 있소.”

모용봉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 말은 누구에게서 들었소?”

“아는 친구요.”

진산월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단순히 친구라고만 한 것은 앞으로도 그의 신분은 밝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모용봉도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에 잠시 무언가 생각에 골몰하다가 마음을 결정한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취와미인상은 취화옥(翠華玉)이라는 진귀한 옥으로 만든 어린 아이 손바닥 크기의 작은 조각상이오. 술에 취해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이라서 취와미인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 진실한 명칭은 누구도 알지 못하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물건을 손에 쥐고 있으면 한기(寒氣)와 열기(熱氣)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공을 증진시키는 효력이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무림의 기보(奇寶)라고 할 수 있소. 하나 취와미인상의 진정한 가치는 전혀 다른데 있소.”

“…….”

“취와미인상의 조각에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무공요결이 숨겨져 있소. 그 무공요결을 터득하기만 한다면 가히 천하무쌍(天下無雙)의 절학(絶學)을 익힐 수 있소.”

천하무쌍의 절학!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뛰지 않는 무림인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말이 당대제일의 기재인 모용봉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진산월 또한 그 말에 적지 않은 흥미와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모용봉 같은 사람이 천하무쌍의 절학이라고 단언할 정도의 무공이 어떠한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모용봉은 자신의 장담이 과언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오십여 년 전에 할아버님은 십 년 동안의 참오 끝에 그 취와미인상에서 일초의 검학(劍學)을 얻으실 수 있었소.”

좀처럼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는 진산월조차도 이번에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취와미인상의 주인이 모용 대협이란 말이오?”

“그렇소. 할아버님은 그 일초의 절학으로 혈마 좌무기를 꺾고 당대 무림의 제일 고수로 공인받게 되셨소.”

그것은 정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모용단죽의 무공 내력은 많은 무림인들에게 가장 큰 비밀이자 관심거리였다. 모용단죽의 가공할 무공들이 순수한 모용세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강호 무림에 적지 않게 퍼져 있었으나, 그의 무공의 정확한 연원(淵源)이 어떠한 것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들이 파생되었던가?

그런데 오늘 비로소 진산월은 모용단죽의 무공에 대한 비밀 중 한 가닥을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모용봉은 조부인 모용단죽이 어떻게 취와미인상을 얻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모용단죽은 모용세가의 방계(傍系) 혈족으로, 처음에는 모용세가에서도 그리 관심을 두지 않던 인물이었다. 하나 어려서부터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을 선보여서, 조금씩 그의 이름이 모용세가에 퍼지고 있었다.

열여섯 살 무렵, 모용단죽은 외가를 방문했다가 감숙성(甘肅省) 부근을 지날 때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서 피를 흘린 채 신음하고 있는 노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노인은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모용단죽은 노인의 범상치 않은 외모에 이상한 끌림을 느끼고 자신이 아껴 두었던 영약들을 모두 사용하여 노인을 회생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노인은 모용단죽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기사회생한 후 그의 재질이 뛰어난 것을 보고는 그에게 하나의 신공구결(神功口訣)과 몇 가지 무공들을 알려 주었다. 모용단죽이 그 노인과 함께 한 것은 불과 열흘 남짓이었으나, 그것은 그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모용단죽이 신공구결과 무공을 모두 외운 것을 확인한 노인은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옥으로 된 작은 여인상을 선물로 주었다.

“이 미인상의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너는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광오한 노인의 말에 모용단죽은 순간적으로 피식 웃었으나, 이내 노인의 주름진 눈 속에 담긴 깊은 시선에 왠지 모를 오한이 들어 웃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한동안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모용단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십니까?”

모용단죽의 외침에 노인은 그저 말없이 서쪽으로 멀어져갔다.

노인과 헤어져 세가로 돌아온 모용단죽은 처음에는 노인의 마지막 말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내 옥미인상이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내공 증진의 효과가 있는 절세의 기보임을 알고는 점차로 옥미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세가를 나와 깊은 산 속에 거처를 정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무공에 매진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이 년 후인 그의 나이 열여덟 살 이었다.

그리고 십 년 후, 강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모용단죽은 당시 천하를 혈세(血洗)하던 혈마 좌무기를 단신으로 격파하여 온 천하를 경동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용단죽이란 이름은 천하제일의 상징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님께서 당시의 노인에게서 배운 신공구결이 바로 천양신공이오. 할아버님께서 본 가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구궁보를 세운 것은 그 분의 가장 큰 절학들이 본 가의 무공이 아니기 때문이었소.”

모용봉의 말은 간단했으나, 진산월은 그 안에 담긴 곡절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용세가에서는 필시 모용단죽에게 그 절학들을 세가에 공개하라는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모용단죽이 모용세가로 돌아가지 않고 따로 이곳에 거처를 정한 것은 세가의 그런 압력을 단호히 거절할 뿐 아니라 세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인 셈이었다.

이제 진산월은 취와미인상이 얼마나 귀중한 기보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천하제일고수인 모용단죽의 가장 큰 절학이 담겨 있는 놀라운 물건인 것이다.

모용봉이 ‘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로 그 취와미인상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모용단죽이 본 가인 모용세가와 척을 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취와미인상의 절학을 대체 왜 모용봉은 남에게 넘겨주려는 것일까?

진산월의 마음 속 의문을 짐작이나 한 듯이 모용봉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취와미인상에 숨겨진 절학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거나 남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파악해야만 그 진정한 가치를 터득할 수 있소. 그래서 나는 내가 인정한 몇 사람에게 그러한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오.”

진산월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취와미인상의 절학을 얻지 못했단 말이오?”

언뜻 모용봉의 입가에 한 줄기 고졸(古拙)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한없이 고고해 보였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씁쓸한 미소였다.

“내가 무언가를 얻은 건 분명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나나 다른 세 사람이라면 취와미인상에서 당신이 얻지 못한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소.”

진산월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취와미인상의 절학을 얻는 것과 중추절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오?”

모용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다가오는 중추절에 내가 누구와 겨루기로 했는지 아시오?”

진산월은 물론 알고 있다. 진산월 뿐 아니라 강호인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야율척.”

모용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야율척 또한 또 하나의 취와미인상을 가지고 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취와미인상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조부께서 석년에 아난대활불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분은 내심으로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계셨었다고 하오. 아무리 아난대활불이 서장의 제일인자라고 해도 당신께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계셨던 것이오. 그런데 실제로 겨루어본 아난대활불의 무공은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어서 거의 백중세에 가까운 승부가 펼쳐지게 되었소. 결국 조부께서는 어쩔 수 없이 아껴두었던 취와미인상의 검초를 펼치실 수밖에 없었소.”

“……!”

“그런데 그때 아난대활불도 하나의 신비한 검초로 조부님의 검초에 대항했다고 하오. 두 사람의 검초는 전혀 달랐지만, 그 위력만큼은 가히 경천동지할 것이어서 아주 미세한 차이에도 확실한 우열이 판가름 나고 말았소. 하나 그때 두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오.”

“그것이 무엇이오?”

“자신들이 펼친 검초가 비록 겉모습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란 사실이오. 조부님의 검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서 간발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만약 아난대활불이 조금만 더 깊게 자신의 검초를 터득했다면 오히려 승부는 반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소.”

승부가 결정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본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했던 무적의 검초와 같은 것이 상대에게도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검초들이 상당한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경악을 넘어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단죽은 피투성이로 변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난대활불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활불께서 방금 펼치신 검초의 내력을 알 수 있겠소?”

자신이 패한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아난대활불이 한 차례 각혈을 하고는 모용단죽을 올려다보았다.

“모용 시주의 무공은 하늘에 다다라 노납은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노납이 마지막에 펼친 것은 작은 미인상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것이오. 모용 시주께서도 혹시 그런 미인상을 가지고 계시지 않소?”

모용단죽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무래도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구려.”

의외로 아난대활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납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용 시주의 검초가 노납의 그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는 것뿐이오. 아마도 그것은 모용 시주가 노납보다 미인상을 더욱 오래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오. 노납이 미인상을 얻은 것은 불과 십 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오.”

모용단죽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모용단죽이 정체 모를 노인에게서 미인상을 받은 건 이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으며,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미인상의 연구에 보낼 수 있었다. 결국 그 차이가 오늘의 승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난대활불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다음 깊은 눈으로 모용단죽을 응시했다.

“오늘은 노납이 모용 시주에게 패했음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모용 시주도 느꼈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십 년 후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때 진정한 승부를 갈라야 할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아난대활불은 몸을 돌려 서장으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아난대활불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모용단죽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와 우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십 년 후, 다시 격돌한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을 펼쳤다. 하나 이번에도 아난대활불은 약간의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지난 세월동안 그는 촌음의 시간도 아껴가며 미인상의 검초를 미친 듯이 연구하여 예전보다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모용단죽 또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그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승부는 세 번째까지 이어졌고, 나이를 이기지 못한 아난대활불은 모용단죽과의 다음 승부를 자신의 제자인 야율척에게 넘긴 채 입적(入寂)하고 말았다.

모용단죽 또한 야율척과 한 번의 승부를 가린 후 모용봉에게 그 책임을 인계했는데, 그때부터 상당히 다른 결과가 벌어지게 되었다.

“조부께서는 야율척과 싸운 후 그의 무학에 대한 재능과 승부감각을 무척이나 칭찬하셨소. 당시 야율척의 나이는 불과 서른을 갓 넘었을 뿐인데 석년의 아난대활불보다 오히려 높은 경지였다고 하오. 특히 미인상의 검초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여 조부께서도 그가 이런 식으로 십 년을 더 성장하면 어떠한 경지에 오를지 두려움을 느끼셨다고 하셨소.”

자신의 가장 큰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야율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용봉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화속의 인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취와미인상을 처음 본 것은 내 나이 열한 살 때였소. 취와미인상의 첫 인상은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노리개 같다는 것이었소. 손에 쥐면 무언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아주 정교하게 잘 조각된 여인네들의 장신구 같다는 게 나의 소감이었소. 내가 취와미인상에서 무언가 무학(武學)의 흔적이라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오 년 후였소. 그 작은 미인상에 천하무쌍의 검학이 담겨져 있다는 조부님의 말씀을 듣고 매일 들여다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내 눈에 어느 날부터인가 문득 하나의 선(線)이 보이기 시작한 거요.”

허공을 응시한 채 조용히 말을 있는 모용봉의 모습은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 선의 흔적을 쫓아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 새 야율척과 만나는 순간이 다가왔소. 직접 본 야율척은…… 하나의 거대한 벽(壁)과도 같은 사람이었소.”

모용봉의 음성에는 어떠한 떨림도 없었고, 감정의 고조나 흥분도 엿보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했던 그의 마음이 크게 출렁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율척과의 싸움은 일방적인 것이었소. 처음 그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소. 그리고 예상한대로의 일이 벌어졌소. 나는 전력을 다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펼쳤지만 그의 옷자락조차 건드릴 수 없었소. 결국 삼백 초 만에 나는 스스로의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야만 했소.”

문득 모용봉은 허공을 응시하던 눈길을 거두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과거의 굴욕적인 순간을 언급하면서도 의외로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구김살도 없었고, 표정 또한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그때 야율척이 나에게 무어라고 했는지 아시오?”

진산월은 당시의 일에 대해 소림사의 방장인 대방 선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용봉이 굳이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모용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달빛이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드리우자 주위가 훤해지는 것 같았다.

“십 년 전에 조부님이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내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소. 하지만 자신은 조부님처럼 참을성이 없어서 십 년을 기다릴 수 없으니, 사 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했소. 사 년…….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노력했는데도 그의 몸에 손끝하나 대지 못한 나에게 겨우 사 년의 시간을 남겨준 것이오.”

“…….”

“지난 사 년간 나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소.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고 새로운 길도 보였지만, 나로서는 야율척에 대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소. 그래서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거요.”

모용봉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모용봉 자신이 야율척과의 승부에서 패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용봉은 그 점에 대한 분명한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무인(武人)으로서의 최 전성기는 사십 대의 나이요. 그 나이대야 말로 젊은 시절의 패기와 체력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풍부한 경험을 함께 지니고 있는 시절이지. 야율척은 자신의 최고의 시절에 어떤 식으로든 서장 무림의 숙원을 이루고 중원을 제패하려 할 거요. 그가 나에게 사 년의 시간만 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요.”

모용봉의 말대로라면 돌아오는 중추절에 모용봉과 야율척의 대결은 그야말로 중원 무림 전체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일전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그 대결에서 모용봉이 패하게 되면 야율척은 주저하지 않고 중원 무림을 도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보를 벌일 것이며, 그 여파는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야율척은 결코 나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려 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나로서는 내가 패하더라도 내 뒤를 이어 야율척을 상대할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소.”

모용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취와미인상을 공개하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오. 내가 인정할만한 실력을 지닌 누군가라면 내가 취와미인상에서 얻은 것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야율척은 나를 대신해 더욱 무서운 적수를 만나게 되겠지.”

모용봉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난 세월동안 나는 강호 무림을 계속적으로 주시하며 나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소. 그렇게 해서 세 명을 찾아냈는데, 이번에 진 장문인이 네 번째로 그 대상자가 된 것이오.”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자신이 문파의 부흥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동안 모용봉은 중원 무림을 위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절학을 남에게 넘겨주려고 마음먹은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진산월은 한동안 모용봉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설사 당신의 의도가 적중하여 누군가가 취와미인상에서 검초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야율척을 상대할 수 있겠소?”

“물론 쉽지 않은 일일 것이오. 하나 어떤 검초를 얻느냐에 따라 충분히 야율척을 상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내가 취와미인상에서 일(一)을 얻었다면 누군가는 충분히 십(十)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야율척이 이미 십(十)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소?”

“야율척에게 있는 미인상과 내가 가진 취와미인상은 서로 다른 것이오. 야율척이 자신의 미인상에서 십을 얻었을 지라도 내가 가진 취와미인상에서 십을 얻게 된다면 충분히 그와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을 것이오.”

진산월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취와미인상이 두 개가 있다면 또 다른 세 번째 미인상이 있을 수도 있겠구려?”

모용봉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왠지 흥겨운 듯한 미소였다.

“확실히 진 장문인은 비범한 사람이오. 바로 보았소. 나는 제 삼(第三)의 미인상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소.”

“그건 누가 가지고 있소?”

진산월은 무심결에 물었는데, 모용봉은 아무 대답도 없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어리둥절하다가 안색이 살짝 변했다.

“나란 말이오?”

모용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장문인이 스스로의 입으로 지금 천룡궤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럼 천룡궤에 세 번째 미인상이 들어있단 말이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건 천룡객 석동이 석년에 조부님께 취와미인상을 선물한 바로 그 노인이기 때문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산월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이 천룡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낙양에서 친구로 사귄 손검당의 입을 통해서였다. 당시 손검당은 그가 무학의 천재이며 천룡처럼 뛰어난 인물이라 천룡객이라 불린다고 했다.

천룡객의 정체가 석동임을 알게 되었을 때도 진산월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도 크게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석가장주인 석곤에게 천룡궤를 모용단죽에게 전해준다는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나 나중에 천룡궤를 노리고 쾌의당을 비롯한 많은 고수들이 몰려든 것을 보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그는 천룡궤의 주인이며 석가장의 전전대 가주인 석동이 실로 엄청난 신비를 지닌 인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천룡궤는 석동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과 무공비급을 보관해 놓은 상자요. 만약 세 번째 미인상이 존재하고 석동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미인상은 천룡궤 안에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소.”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소?”

“이런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소. 다만 전후 사정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오.”

진산월은 전후 사정을 검토했다는 모용봉의 말에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그 점에 대해 세세하게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미인상 자체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나 욕심이 들지 않았다. 검정중원을 완성하는 일만으로도 적지 않은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새로운 절학을 얻어야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석가장주인 석곤은 천룡궤에 제 삼의 미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만약 알고 있었다면, 왜 석곤은 그것을 모용 대협에게 전해 주라고 자신에게 부탁한 것일까?

봉황금시로 열지 않는 한 도저히 열 수 없다는 천룡궤에 세 번째 미인상이 있다는 걸 모용봉은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천룡궤에 담긴 미인상은 과연 석동 본인이 만든 것일까? 만약 석동이 만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작품인 것일까?

그리고 서장의 아난대활불이 두 번째 미인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어떤 곡절이 담겨 있을까? 혹시 아난대활불이 미인상을 가지게 된 것에도 석동의 손길이 닿아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석동이 두 개의 미인상을 모용단죽과 아난대활불에게 나누어 준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크고 작은 의문들이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진산월은 굳이 그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 일들이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룡궤를 모용단죽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자신이 천룡궤와 연관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또한 천룡궤의 주인인 석동과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그가 남겼다는 미인상과 얽히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진산월은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진산월은 천룡궤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모용단죽의 행방을 물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석 장주에게서 천룡궤를 모용 대협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소. 모용 대협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모용봉의 대답은 진산월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조부께서는 외유(外遊)중이시오.”

강호에서는 모용단죽이 구궁보의 깊숙한 곳에 칩거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에 진산월로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 대협이 구궁보에 계시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소. 조부께서는 주로 외부에서 활동하시고, 본 보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잠깐씩 들리시고 계시오.”

모용단죽이 구궁보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에서 활동했다면 강호에서 누군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텐데 그에 대한 소문이 전혀 돌지 않았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용단죽 같은 사람이 강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모용단죽이 구궁보에 없다면 그에게 전해야할 천룡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지 진산월은 잠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모용봉은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마침 내일모레가 내 생일이라 그때쯤이면 조부께서 돌아오실 것이오. 그러니 진 장문인은 그때 조부님을 뵈면 될 거요.”

진산월로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스런 일이구려.”

모용봉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내걸렸다.

“천룡궤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구려?”

“솔직히 그것 때문에 몇 가지 곡절을 겪고 나니 가급적이면 하루라도 빨리 모용 대협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소.”

모용봉은 그 곡절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내 생일연이 끝난 후에 나는 진 장문인을 비롯해 내가 초청한 네 사람에게 옥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오. 그 자리에 참석해 주시겠소?”

‘옥의 주인’이라…….

처음 모용봉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나, 그만큼 강렬한 의미가 담긴 말이기도 했다. 하나 진산월은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오. 하지만 그 자리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소.”

진산월이 거절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모용봉의 낯빛이 살짝 바뀌었다.

“천하무쌍의 절학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겠단 말이오?”

“나에게는 종남의 무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담담한 진산월의 말에 모용봉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 모용봉은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 장문인의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해 주어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속으로 웅얼거리는 듯 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처음 그를 볼 때부터 너무나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번에 내가 구궁보로 온 것은 모용 대협에게 천룡궤를 전해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소.”

모용봉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진산월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고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으나, 그의 전신에서는 무언지 모를 장중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사매의 부상을 치유해주고 잘 보살펴 준 것에 감사드리오. 이제는 내 사매를 다시 본 파로 데려가려고 하오.”

말은 감사하다고 했으나 그에게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일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모용봉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산월 또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는 동안 사위(四圍)는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때마침 방안으로 들어온 월광 한 줄기가 두 사람의 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자 마치 두 개의 석상(石像)이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모용봉이었다.

“진 장문인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귀 사매에게 청혼을 했소. 그리고 아직 그 대답을 듣지 못했지.”

“……!”

“나는 중추절까지 대답을 달라고 했지만, 그 전에라도 그녀가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면 기꺼이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니 진 장문인은 우선 귀 사매를 만나 그녀의 의중을 확실히 물어보아야 할 거요.”

“그녀가 당신의 청혼을 거절하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녀가 원하면 언제라도 귀 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소.”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그녀가 청혼을 승낙하면?”

모용봉의 눈에 번쩍하는 신광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진 장문인이 무어라고 하던 그녀를 귀 파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말이오.”

그 말을 할 때의 모용봉은 지금까지의 고고하고 침착했던 모습과는 달리 과감하고 격정적으로 보였다.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만월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어느 때보다 밝았고 달빛 아래의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보는 진산월의 표정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용봉은 진산월이 무언가 대답해주기를 기다렸으나 진산월은 교교한 빛을 뿌리는 만월을 올려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매를 만나게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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