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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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7화


제 257 장 청천호일(晴天好日)

화창한 날이었다.

창문 밖으로 내보이는 아침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워서 동중산은 잠시 침상 위에 앉은 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절은 오월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지라 날씨는 청명했고, 공기는 한없이 신선했으며,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기온도 적당했다. 모처럼 숙면을 취해서인지 그동안의 여정으로 피곤했던 몸 상태도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상쾌한 기분 보다는 왠지 모를 우울함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동안의 여정의 고단함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당초 목적지로 정했던 구궁보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 동중산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인 임영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동중산은 사 년 전의 일차 중원행도(中原行道)에도 참여했었기에 임영옥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구궁보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시 임영옥은 누가 무어라 해도 종남파 최고의 고수였다. 종남파에서 그녀의 위치는 특이했으며, 전대 장문인의 유일한 딸이며 장문인인 진산월의 연인이기에 그 위상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영옥과 부득이하게 결별한 후, 진산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고 그녀를 되찾아 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왔는지를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던 동중산으로서는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진산월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적인 무공을 지니고 있고 강호의 거목(巨木)이 되었으면서도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진산월이라 할지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종남파의 행도에 먹구름으로 드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 과연 임영옥을 구궁보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을 지 동중산으로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문파 간의 제자를 돌려받는 문제가 아니라, 구궁보의 위신이 걸리고 남녀 간의 치정(癡情)이 얽힌 복잡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구궁보의 독보적인 신공인 천양신공을 터득했다면, 구궁보의 독문절학을 익힌 그녀를 구궁보에서 선뜻 내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종남파의 정식 제자이며 파문을 당하거나 문파에서 축출되지 않은 그녀의 신분을 감안해 볼 때, 구궁보에서도 무조건 그녀의 신변을 붙잡아 두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강호에 소문난 모용봉의 청혼이 사실이라면 사태는 더욱 복잡하게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용봉이 청혼까지 한 여인을 순순히 남에게 인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여인의 과거의 정인(情人)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의사이며, 그녀가 과연 구궁보를 나와 종남파로 돌아올 의지가 있는지가 가장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동중산이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그가 보았던 임영옥이라면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종남파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하나 사 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심정이 어떻게 변했을 지는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장풍에서 남궁선을 만난 이후, 진산월은 부쩍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중산은 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지 못했지만, 진산월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 구궁보에 있는 임영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진산월의 성격으로 볼 때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궁선은 상당한 기간 동안 구궁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임영옥에 대한 것을 알고 있을 테고, 진산월에게 그녀의 소식을 전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되었든 임영옥을 종남파로 데리고 오려는 진산월의 계획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동중산의 뇌리에 문득 사 년 전의 어느 날 아침에 보았던 임영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봉황금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종남파를 이용하고 몰래 모습까지 감추었던 그가 진산월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를 맞아 주었었다. 그때 그녀가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미소와 온화한 음성이 잊혀지지 않았다.

‘사고(師姑)께선 본 파로 돌아오실 것이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동중산은 진산월을 위해서, 종남파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정말 간절히 염원했다.

그의 그런 염원이 하늘에 통했는지 그가 자신의 방을 벗어나 대청으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단정한 자태로 대청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임영옥의 모습이었다.

“사고……?”

동중산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외눈을 깜박거렸다.

임영옥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예전에 보았던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잤어요?”

참으로 평범한 말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동중산의 가슴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외눈에 뿌연 물막이 고이기 시작했다.

동중산은 그녀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했다.

“예. 아주 달게 잤습니다. 사고께서도 편안히 주무셨는지요?”

사 년 전의 그날처럼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나도 모처럼 깊은 잠을 잤어요.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군요.”

동중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임영옥은 동중산이 애꾸가 된 것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았고, 동중산도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때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유난히 파란 하늘이 그의 눈을 찔렀다. 조금 전에 보았던 우울한 하늘이 아니라 눈이 시리도록 쾌청하고 상쾌한 하늘이었다.

동중산은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이내 임영옥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정말 좋은 날입니다, 사고.”

☆ ☆ ☆

그날 오후, 반가운 손님이 종남파를 찾아왔다.

뇌일봉이 모처럼 다시 만난 임영옥을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비쩍 마른 체구에 키가 훌쩍 큰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이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일봉!”

뇌일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 중년인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자령! 자네…….”

중년인을 끌어안은 뇌일봉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인 또한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만면에 격동에 찬 빛을 숨기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힌 뇌일봉이 중년인을 향해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

“종남파 고수들이 구궁보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달려와 봤는데, 진짜로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중년인은 뇌일봉의 오랜 친우인 팔비신살 곽자령이었다. 그와 뇌일봉은 임장홍이 살아 있을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며, 세 사람은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맺고 있었다.

하나 임장홍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아 오랫동안 서로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상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영옥에 이어 곽자령까지 만나게 된 뇌일봉은 기쁨이 큰 탓인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잘왔네. 매정한 친구 같으니……. 어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할 수가 있나?”

곽자령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네. 한 가지 일에 휘말려 정신없이 바빴거든.”

“그게 무슨 일인가?”

“언제고 기회가 되면 말해주겠네.”

뇌일봉은 곽자령이 입이 무겁고 진중할 뿐 아니라 한 번 내뱉은 말은 기필코 지키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게. 그런데 구궁보에는 어쩐 일인가?”

“청천(靑天)이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 초대를 받아서 그를 따라왔네. 올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이곳에서 자네를 만나게 되었으니 모처럼 좋은 선택을 한 셈일세.”

뇌일봉이 안광을 번뜩였다.

“청천이라면…… 환상제일창 유중악 말인가?”

“그렇네.”

환상제일창 유중악은 무림구봉 중의 일인일 뿐 아니라 의기가 높고 성품이 담백해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기상이 푸른 하늘과 같다고 하여 ‘청천(靑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중악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자 뇌일봉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서 가보세. 그를 본 지가 벌써 칠팔 년은 된 듯 하니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지는 것 같네.”

“서두르지 말게. 그나저나…….”

문득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이내 임영옥에게로 향했다.

곽자령의 냉막한 얼굴에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옥아(玉兒)로구나. 나를 기억하느냐?”

임영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영옥이 숙부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곽자령은 한동안 그녀의 신색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차가운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게 입가에 한 줄기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야 잘 있다. 그나저나 이제는 완연한 여인이 되었구나.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한창 피어나기 시작한 십대 중반의 소녀였었는데……. 세월이 정말 빠름을 알겠구나.”

곽자령이 종남파를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은 임영옥의 나이 십육 세 때였다. 진산월이 정식으로 대제자가 되어 다음 대 장문인으로 내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다. 곽자령은 여느 때와 같이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가 임장홍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는 기약도 없이 떠나가 버렸는데, 결국 그것이 그가 임장홍을 만난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햇수로 따지면 벌써 구 년 전의 일이었으니, 한 명의 어린 소녀를 성숙한 여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곽자령이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임영옥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곽 대협.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다가온 사람을 본 곽자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자네는 혹시 진산월…….”

“그렇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산월은 곽자령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가 비록 일파의 장문인 신분이었으나 곽자령은 선사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사람이었으니 예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곽자령은 진산월의 심연(深淵)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과 왼쪽 뺨의 흉터, 전신에서 흐르는 기도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남들이 하도 신검무적, 신검무적 하기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과연 자네는 그렇게 불릴만한 인물이 되었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닐세. 예전에 내가 보았던 어린 소년만 생각하고 있던 나의 불찰이네. 자네는 정말 훌륭하게 성장해 주었군.”

곽자령은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진산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뇌일봉은 곽자령이 이토록 남을 칭찬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에 다소 놀라면서도 흐뭇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곽자령은 살성(煞星)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성격이 불같고 손속이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직접 만나보니 과격하기 보다는 강단이 있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내뱉는 말투는 다소 투박했으나, 그 안에는 진정(眞情)이 담겨 있어 믿음직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한 차례 반가운 해후를 한 후 곽자령은 진산월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는 일봉과 청천을 보러 갈 텐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겠는가?”

유중악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사귀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진산월 또한 평상시라면 기꺼이 곽자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임영옥이 사 년 만에 종남파로 돌아온 날이었다. 더구나 동중산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그녀를 혼자 두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곽자령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 대협은 저도 꼭 뵙고 싶은 분이었지만, 오늘은 기회가 아닌 듯 하군요. 그냥 두 분만 가셔서 모처럼의 회포를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뇌일봉은 진산월의 마음을 대충 알아차리고는 곽자령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하세.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는가?”

곽자령은 다소 아쉬움을 느끼는 듯 했으나,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청천이 그동안 자네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해서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했었는데 조금 아쉽긴 하군. 하지만 어차피 내일 모용 공자의 생일연에서 만나면 되는 일이니…….”

뇌일봉과 곽자령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대청을 벗어났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진산월을 향해 임영옥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따라가지 그랬어요. 사형은 예전부터 유 대협을 만나고 싶어 했잖아요.”

몇 년 전인가, 유중악의 명성이 강호를 진동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진산월이 임영옥을 향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유중악이 정말 소문 그대로의 인물이라면 기꺼이 친구로 사귀어볼만 하겠군. 사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당시만 해도 진산월은 같은 종남파의 사형제들 외에는 뚜렷하게 사귀는 사람이 없어서 임영옥은 그가 언제 친구를 사귀게 될지 약간은 걱정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산월의 말에 빙긋 웃으며 약간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사형같이 남을 사귀는 걸 까다롭게 고르는 사람도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걸 보니 확실히 유중악이 대단한 인물인가 보네요. 사형은 그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요? 조화(造化)가 무궁(無窮)하다는 그의 신창(神槍) 실력인가요, 아니면 철담협골(鐵膽俠骨)한다는 의기(義氣)인가요?”

진산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 다 아니야. 난 그저 남녀노소가 누구나 그를 좋아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말이 통하는 사람일 테고, 말이 통한다면 마음도 통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알았어요. 사형은 그의 풍류적인 기질이 마음에 들었던 거군요.”

임영옥의 다소 짓궂은 말에 진산월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약간은 멋쩍게 웃었다.

“그게 그런 말이 되나? 뭐 듣고 보니 사매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군.”

“역시 그렇군요. 사형은 풍류객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건 모든 남자들의 바람 아니야?”

그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임영옥은 당시의 일을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임영옥을 돌아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나고 싶긴 하지.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야.”

그를 보는 임영옥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왜요? 사형은 늘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래왔잖아요.”

“이제는 나도 몇 명의 친구가 생겼거든. 그리고 강호의 모진 풍파를 겪다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기도 했고.”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강호의 소문이란 것이 항상 옳은 건 아니더군. 특히 사람에 관련된 것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야. 설사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자신이 좋아하게 될지는 만나보지 않고서는 확신할 수가 없지.”

“사형은 예전보다 한결 신중해 졌군요.”

언뜻 진산월의 입가에 피식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소심해진 거겠지.”

임영옥도 따라 웃었으나, 그녀의 웃음 속에는 한 줄기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경험을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영옥은 유중악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곽자령의 말대로 어차피 내일이면 그를 직접 볼 수 있을 테고, 그를 사귈지 안 사귈지는 그를 만나본 진산월이 결정할 일이었다. 또 유중악 본인이 진산월을 탐탁지 않아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나 진산월이 좀 더 많은 친구를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예전의 진산월은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격이었다. 겉으로는 실없이 웃고 다니는 것 같아도 실제로 사람을 사귀는 것에 무척 까다로웠고, 쉽사리 남에게 마음을 주려하지 않았다. 나보살(懶菩薩)이라는 별칭대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었으나, 한 번 결심한 일은 어지간한 일로는 꺾지 않았고 고집 또한 대단해서 가끔은 심술궂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도 사람을 대하는 데 능해서 대인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하나 사 년 만에 다시 본 진산월은 예전과는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다. 단순히 외모가 변하고 무공이 높아진 것뿐만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진 것 같았다.

다소는 두루뭉술했던 예전과 달리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했고, 남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가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구를 고르는 것에 까다로운 편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어서 친구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임영옥은 진산월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언제나 느긋했던 여유 있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 속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것이 친구든, 연인이든, 아니면 새로운 누군가이든…….

그래서 그가 마음 속 평온을 되찾고 행복하게 되기를 그녀는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었다.

임영옥은 아직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진산월을 향해 방긋 미소 지었다.

“갑자기 사형이 새로 사귀었다는 그 손검당이란 친구가 보고 싶군요.”

“왜?”

“사형 같이 까다로운 친구를 사귄 사람은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서요.”

“그를 보면 사매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럴까요?”

“그럼.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고, 쓸데없이 말이 많지도 않고,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지. 무엇보다 그는 진실 된 사람이야.”

임영옥은 가느다란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사형은 용케도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군요.”

“운이 좋았지.”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럴까?”

“틀림없이.”

진산월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임영옥은 한쪽 뺨의 흉터가 깊게 파이는 그의 독특한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 여자 앞에서는 가급적이면 그렇게 웃지 마세요.”

“왜?”

“그녀들에게 너무 자극적일 테니까요.”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내가 그렇게 여자들에게 매력이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의 사형은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그런가?”

“내 말을 믿어요. 사형은 여자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요.”

진산월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임영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내 표정이 어때서?”

“무언가에 화난 사람처럼 보여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틀림없이 여자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던 시절도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런데 그때는 한 번도 사매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듣게 되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다는 생각도 드는군.”

“우스울 건 없지 않아요?”

“충분히 우습지. 만사불여의(萬事不如意)라고나 할까? 세상 일이 참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사형은 늘 미녀들의 사랑을 받는 풍류객을 꿈꿔왔잖아요.”

임영옥이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진산월은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지금은 오직 한 여자의 사랑만을 원할 뿐이야.”

임영옥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담담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그의 진심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그녀는 황급히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낙 사제의 소식은 아직 알지 못하나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임영옥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낙 사제가 무사하다면 틀림없이 사형의 소식을 듣고 구궁보로 올 거예요.”

“나도 그렇게 믿고 있어.”

“낙 사제가 보고 싶군요. 그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요.”

“만나 보면 틀림없이 사매도 깜짝 놀라게 될 거야.”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진산월과 임영옥의 얼굴이 일제히 활짝 펴졌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하염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낙일방이었던 것이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고 공기가 청명한 어느 날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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