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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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8화


제 258 장 전장풍운(錢莊風雲)

손가장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감웅기(甘雄起)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몇 명의 인물들을 보며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손가장의 정문은 경비 무사들이 네 명씩 돌아가면서 지키고 있었는데, 몇 번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신풍검 표일립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표일립은 경비 무사들 중에서 엄중히 선별하여 숫자를 두 명으로 줄이고 대신에 그만큼 실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세우게 되었다.

감웅기도 그렇게 선별된 인물인데, 보수가 제법 후해서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만큼 책임질 일도 많아서 손가장을 찾아오는 손님과 문제가 생기거나 말썽을 부리게 되면 혹독한 처벌을 면치 못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은 별 문제없이 무탈하게 지내왔는데, 지금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네 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모습이어서 감웅기로서는 절로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감웅기와 함께 정문을 지키고 있는 왕등(王騰)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날렵하면서도 탄력적인 몸매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여인은 발걸음도 경쾌하기 그지없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두 명의 중년인들은 서로 판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측의 중년인은 다소 뚱뚱한 체구에 키도 그리 크지 않았으나 두 눈이 활력에 가득 차 있고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매달려 있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활기찬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좌측의 중년인은 듬직한 체구에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무언지 모를 여유 같은 것이 느껴져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단단한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인이 걷고 있었는데, 중년인의 등 뒤로 붉은 빛이 나는 두 개의 창(槍)이 삐죽 솟아나와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절도 있는 동작과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만 보아도 상당한 수련을 쌓은 무인(武人)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삼남일녀(三男一女)는 순식간에 정문 앞으로 다가왔다.

감웅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진중한 모습으로 포권을 했다.

“네 분께서는 손가장에 어인 일이십니까?”

가장 앞에 있는 여인이 살짝 웃으며 한 장의 배첩을 내밀었다.

“사람이 바뀌더니 대응하는 방법도 달라졌군요. 바람직한 일이에요. 우리는 손노태야를 뵈러 종남에서 왔어요.”

종남이라는 말에 감웅기와 왕등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더니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보니 종남파의 분들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즉시 손노태야께 아뢰겠습니다.”

배첩을 받은 감웅기가 재빨리 장원 안으로 몸을 날렸다. 여인은 그의 신법이 상당히 표홀한 것을 보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군. 제법 실력 있는 자들을 정문에 내세운 걸 보니 손가장의 체제가 정비되어 전력이 많이 강해졌다는 소문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그녀는 종남파의 유명한 여고수인 무영낭랑 방취아였다.

그녀는 얼마 전에 사형인 응계성을 만나러 손가장에 왔다가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과 시비가 붙어 한바탕 소란을 피운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의 두 무사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대응에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잠시 후, 표일립이 한 명의 중년인을 대동하고 감웅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표일립은 방취아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다가와 포권을 했다.

“방 여협께서 오셨구려. 그동안 잘 지내셨소?”

방취아는 예전에 보았던 표일립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기에 방긋 웃으며 그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나야 잘 지냈지요. 표 대협도 좋아 보이는군요.”

이어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중년인을 소개했다.

“이 두 분은 본 파의 사숙들이시고, 저 쪽 분은 본 파의 빈객이세요.”

그 말에 표일립은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표일립은 무영낭랑 방취아가 당금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신검무적의 사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방취아의 사숙이라면 바로 신검무적의 사숙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표일립은 즉시 방취아의 뒤에 있는 중년인들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저는 손가장의 경비를 맡고 있는 표일립이라 합니다. 오늘 명성이 높은 종남파의 고인들을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표일립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너무 굽신거리지 않는 것이어서 보는 이에게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우측의 뚱뚱보 중년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로 웃고 있는데 비해, 좌측의 중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신풍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나는 노해광이라 하고, 이쪽은 내 사제인 하동원이오.”

하동원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지만, 노해광이라면 철면호라는 외호로 널리 알려진 서안의 막후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표일립으로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노 대협과 하 대협이셨군요. 평소에 흠모하고 있던 분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쪽은 본 장의 송집사(宋執事)입니다. 노 대협과 일행분들을 손노태야께 안내해 드릴 겁니다.”

표일립의 뒤에 있던 중년인이 재빨리 앞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종남파의 여러 대협들을 모시게 되어 금생의 영광이 아닐까 합니다. 태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그럼 잠시 신세를 지겠소.”

노해광은 듬직한 모습으로 집사의 뒤를 따라 손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손노태야를 만나려면 훨씬 간편한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해광이 이렇듯 중인환시리에 다소 요란하게 손가장을 찾은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번 방문은 노해광 개인의 일이 아니라 종남파가 손가장에 정식으로 방문을 하는 공적(公的)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방취아가 정문에서 배첩을 내민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종남파와 손가장이 상당한 교류가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종남파는 물론이고 손가장에게도 적지 않은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멀리 해남에서 종남파까지 달려와 준 하동원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었다. 하동원은 사십이 다 되도록 변변한 명호 하나 없는 무명(無名)의 세월을 보내온 인물이었다. 그의 무공 실력과 종남파에서의 위치로 볼 때 명성을 떨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무림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셈인 이번 손가장의 방문에서 그의 등장을 공식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종남파에 쏠려 있는 주변의 관심을 생각해 볼 때, 조만간에 종남파에 신검무적의 새로운 사숙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섬서성 일대에 파다하게 퍼질 게 분명했다.

송집사가 종남파 고수들을 안내해 도착한 곳은 손가장에서도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인 객청(客廳)이었다. 손노태야가 자신의 처소가 아닌 객청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종남파의 공식적인 방문에 대한 자연스런 응대였다.

객청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손노태야는 두 명의 호위무사를 거느린 채 중앙의 의자에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노해광은 손노태야의 뒤에 서 있는 호위무사들을 한 차례 훑어본 후 자신의 일행들을 손노태야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내 사제와 사질녀요. 인사드리게, 손노태야 이시네.”

하동원이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했다.

“하동원이라 합니다.”

손노태야의 주름진 시선이 하동원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한동안 고정되었다.

“반갑네. 철면호에게 이런 듬직한 사제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어느 분의 고제(高弟)인지 알 수 있겠나?”

“사부님의 함자는 전풍개라 합니다.”

“이제 보니 종남삼검의 한 분이셨던 질풍검의 제자였군. 가만 있자……, 예전에 전 대협의 제자는 두 사람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동원은 손노태야의 비상한 기억력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풍개가 종남산을 떠난 것은 벌써 이십 년도 넘은 과거의 일인데, 손노태야는 아직도 당시의 일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제 위에 사형이 한 분 계십니다. 사형은 지금 장문사질과 함께 외유중입니다.”

“흠. 그렇다면 얼마 전에 남궁 세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신비의 고수가 바로 자네의 사형인가?”

“그렇습니다.”

손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대협의 제자였기에 남궁 세가의 최고 고수를 꺾을 수 있었던 거로군. 늦게나마 귀 파의 승리에 축하를 보내네.”

“감사합니다.”

이어 방취아가 앞으로 나와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저는 종남의 이십일대 제자인 방취아라 합니다.”

손노태야의 시선이 방취아의 생기 넘치는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이십일대라면…… 신검무적의 사매인가?”

“그렇습니다.”

우연인지 손노태야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있는 호위무사 중 한 명에게로 향했다. 짧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다소 험악하게 생긴 청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응계성이었다.

“그럼 소벽력을 잘 알겠군.”

방취아의 시선도 응계성에게로 향했다.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만 해도 병색이 완연했던 그의 얼굴은 생기가 넘쳐 보였고, 눈빛에는 강철 같은 강인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의 사형이십니다.”

“그는 내게 제법 도움이 되고 있네. 잠시 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지.”

무뚝뚝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손노태야가 친절을 베풀자 방취아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재빨리 그를 향해 사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손노태야의 시선이 제일 마지막으로 가장 뒤쪽에 서 있는 쌍창(雙槍)을 꽂은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에 대한 소개를 아직 듣지 못했군.”

노해광은 담담하게 웃었다.

“본 파의 빈객으로 계신 분이지만, 사정이 있어 이름은 알려드리지 못하니 양해해 주시오.”

“소개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여기는 무엇 때문에 데려왔나?”

손노태야의 퉁명스런 말에도 노해광은 입가의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당분간 앞으로 함께 일을 할 사람이라 안면이라도 익히시라고 동행했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알려드리겠소.”

손노태야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은 노해광을 채근하지 않았다. 노해광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차례 인사가 끝난 후 시비가 차를 따르고 물러나자 그제야 손노태야는 노해광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래, 이토록 거창하게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손노태야는 노해광이 다소 시끌벅적하게 자신을 찾아온 것에 필시 곡절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노해광은 대범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라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노해광은 굳이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화상단에 화산파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요?”

“알고 있네.”

“그들 중 몇몇이 요즘 들어 장안 일대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손노태야는 표정의 변화 없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군.”

“그럼 그들이 주로 출몰하는 곳이 방보당과 손가전장 주변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손노태야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주름살로 뒤덮인 눈꺼풀이 한 차례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들이 방보당을 조사한다는 말은 들었네. 그런데 그들이 내 전장 주변에도 얼쩡거린단 말인가?”

“틀림없는 사실이오. 단지 그들이 변복(變服)을 하고 신분을 감추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이오.”

손노태야는 주름진 눈으로 물끄러미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그런 줄은 미처 몰랐군. 그런데 자네는 전장을 지키고 있는 내 부하들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았나?”

“운이 좋았소. 때마침 내 수하 중 한 사람이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가 평상시와 다른 복장을 하고 손가전장에 손님인 척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오.”

“정말 운이 좋았군. 자네 부하가 얼굴을 아는 자가 하필이면 내 전장에 들어올 때 자네 부하에게 발각 당했으니 말일세. 자네 부하는 무슨 일로 내 전장에 기웃거린 것인가? 방보당과의 거래를 끊고 이제 내 전장과 거래를 할 생각인가?”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방태동이 아직 멀쩡한데 거래처를 바꿀 수는 없지 않소? 이번 일은 정말 우연이오. 내 수하가 길에서 얼굴을 알고 있던 화산파의 고수가 변복한 것을 보고 몰래 따라가다가 알아냈을 뿐이오. 설마 내가 손노태야의 전장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자네 생각이 어떤지 노부가 어찌 알겠는가?”

“믿어 주시오. 유화상단과 화산파 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내가 제 정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손노태야와 척을 짓는 일을 할 리가 있겠소?”

노해광이 거듭 자신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걸 밝히자 손노태야는 무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런 줄 알고 있겠네. 그런데 화산파 인물이 무슨 일로 내 전장을 얼씬거린단 말인가?”

“그들의 의중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추측해 볼 수는 있소.”

“말해 보게.”

“그들은 방보당과 손가전장 뿐 아니라 장안 일대의 가장 커다란 오대전장(五大錢莊) 모두를 동시에 사람을 풀어 조사를 하고 있소. 다만 방보당과 손가전장에 좀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을 뿐이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새로운 전장을 차리거나 그들 중 하나를 인수하려 한다고 생각하오.”

“그들이 전장업(錢莊業)에 뛰어들려 한단 말인가? 아무리 화산파라해도 그건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물론 화산파가 구대문파 중의 하나라도 이곳 장안에서 새로운 상권(商圈)에 도전하는 일은 어려울 거요. 더구나 전장업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내세우고 뒤에서 도와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소?”

손노태야의 주름진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거렸다.

“유화상단을 앞에 내세우고 뒤에서 지원을 한단 말인가?”

“그렇소. 유화상단의 풍부한 경험과 인맥(人脈), 거기에 화산파의 지원이 뒤따른다면 빠른 시일에 전장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소. 게다가 유력한 전장 중 한 두 개를 포섭하거나 지워버린다면 더욱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을 거요.”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까?”

“유화상단은 이번에 나와 부딪힌 일로 손해가 막심해서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자칫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화산파 또한 새로운 돈줄을 쥐게 된다면 앞으로 벌어질 본 파와의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할거요.”

손노태야는 노해광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남파가 화려하게 부활한 지금, 서안의 주도권을 놓고 화산파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리라는 것은 누구나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유화상단이 상당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은 이미 수하들을 통해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정이 급한 두 세력이 서로 손을 잡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가능성은 굉장히 농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전장업은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업종보다도 경쟁이 치열했으며, 대부분의 전장이 무림의 세력들과 크고 작은 연계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서안 일대의 전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확실한 구도가 정립되어 있어서 새로운 세력이 출현하는 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어렵사리 자리 잡은 현재의 안정된 구도가 깨어지는 걸 어느 누구도 원치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화산파를 등에 업은 유화상단이 새롭게 전장업에 진출한다면 그 여파는 기존의 모든 전장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유화상단의 총수인 유방현의 집요하고 냉혹한 평소 성격으로 보아 그중 약세를 보이는 몇 개의 전장은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재 서안의 전장은 수십 개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크고 안정적인 곳은 모두 다섯 개였다. 그중 하나가 손노태야의 손가전장이고, 그 외에 이씨세가와 함께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名門)중 하나이며 군부(軍部)의 실력가문인 양씨(楊氏) 문중에서 세운 금수장(錦繡莊), 서안 일대 다섯 개의 대형 표국들이 연합하여 출자한 비룡전장(飛龍錢莊), 서안에서 가장 큰 열 개의 무관(武館)들이 힘을 합쳐 세운 천무장(天武莊), 그리고 화월루의 화대부인을 위시한 재력 있는 여인들이 세운 만방루(萬芳樓)가 오대전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들 중 만방루만이 무림의 세력과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가장 튼튼한 곳이기도 했다. 투자자의 대부분이 관계(官界)의 고위직을 남편으로 둔 안방마님들이어서 자칫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관부의 탄압을 각오해야 했기에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방태동의 방보당은 규모가 작아 오대전장에 꼽히지는 못했지만 가장 오래된 전장이어서 나름대로 적지 않은 명성을 쌓고 있었다.

화산파에서 이들 여섯 개의 전장에 사람을 풀어 은밀히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노해광의 추측이 아무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는 실질적인 증거였다.

손노태야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비로소 관심어린 빛이 떠올랐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들이 전장업에 뛰어든다면, 어떤 방식을 사용할 것 같나?”

“단순히 자료 조사를 위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화산파가 자신들의 귀한 제자들을 변복까지 시켜가며 염탐시키지는 않았을 거요.”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숙주(宿主)가 되어줄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오.”

손노태야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강호에서의 숙주란 먹잇감으로 삼아 강제로 합병하는 대상을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피비린내 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가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소. 유화상단이나 화산파나 이번 일을 오래 끌고 갈 수는 없소. 그들에게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일을 진행시키려 할 거요. 오대전장 중 한 곳을 합병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일은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들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일일 것이오.”

“흠. 자네는 그들이 어디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군부와 관부의 입김이 강한 금수장과 만방루는 일단 제외하고, 남은 세 곳 중 하나일거요. 그중에서 비룡전장과 천무장을 건드리면 장안 일대의 크고 작은 무림세력 대부분과 원한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들로서도 쉽게 공격할 수가 없소.”

“결국 내 전장이란 말이로군.”

“나는 그렇게 보고 있소.”

노해광이 선뜻 시인을 하자 손노태야의 표정이 점차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누구보다 신중한 노해광이 이렇게 단언한다는 것은 이미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거의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방보당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방보당은 그들이 먹잇감으로 삼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고, 그에 비해 힘은 몇 배나 드는 곳이오. 그리고 내가 손노태야의 손가전장이 그들의 목표일 거라고 의심하는 이유는 따로 있소.”

“그게 무엇인가?”

노해광은 손노태야의 표정을 살피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손노태야의 아들이 본 파의 제자로 있기 때문이오.”

손노태야의 얼굴이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찌푸려졌다.

“그 망할 놈 때문이란 말인가?”

노해광은 좀처럼 남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손노태야가 자식인 손풍의 일에는 역정부터 내는 것이 재미있는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만나보니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있는 녀석이더구려.”

“지금 노부를 놀리는 건가?”

“그럴 리 있소? 어찌 되었든 그는 엄연한 본 파의 제자이니 화산파로서는 어차피 한 곳을 손을 볼 생각이라면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손노태야는 못마땅한 눈으로 노해광을 쏘아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 놈은 지금 어디 처박혀서 무얼 하고 있나?”

그의 음성에는 종남파에 들어간 후 몇 달 째 연락 한 번 없는 손풍에 대한 악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해광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직 모르고 계셨소? 손풍은 장문사질과 함께 강호를 주행 중이오.”

뜻밖의 말에 손노태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놈이 신검무적의 비무행에 따라다니고 있다고?”

“그렇소. 모르긴 해도 제법 듣고 보는 게 많을 테니 돌아오게 된다면 본 파의 떳떳한 제자로 손색없는 인물이 되어 있을 거요.”

손노태야는 냉소를 날렸다.

“그 놈이 그럴 리가 없네.”

“이번에는 믿어 보시오. 장문사질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니 말이오. 그라면 틀림없이 손풍의 잘못된 점을 잘 고쳐놓았을 거요.”

손노태야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던 손노태야의 시선이 다시 노해광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정말 화산파가 내 전장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이렇게 두 번씩이나 남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노해광의 말이 그에게 준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할 거요. 그들이 손가전장을 노리는 척 하고 실제로는 다른 전장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가능성이라……. 막연하긴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말이로군.”

“그렇소. 그들이 손가전장과 함께 방보당을 주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거요. 어차피 손을 쓰는 김에 손가전장 뿐 아니라 나의 주거래 전장인 방보당마저 쓸어버린다면 단숨에 본 파의 자금줄을 자르고 새로운 돈줄을 움켜쥐는 셈이 될 테니, 그들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소?”

“방보당 뒤에 자네가 있는 걸 알면서도 방보당을 노린단 말인가?”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이번 기회에 손가전장과 함께 처리하려 할 거요.”

“그들이 종남파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단 말인가?”

노해광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고 냉정한 미소였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그 일로 화산파와 본 파가 정면 충돌하는 일은 없을 거요.”

“왜 그런가?”

“본 파가 그들을 꺼려하듯, 그들도 본 파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양파(兩派)는 어지간한 일로는 서로 드러내놓고 상대를 적대시 하지 않소. 그들이 공개적으로 본 파에 선전포고를 하거나 본 파의 영역을 노골적으로 침범하지 않는 한, 본 파가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은 없을 거요.”

“자네가 거래하는 전장이 공격을 당해도 말인가?”

“방보당의 거래처는 본 파가 아니라 나 개인이오. 그러니 그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고 방보당만을 노린다면 본 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소. 마찬가지로 손풍이 비록 본 파의 제자라고 해도 손노태야의 신상(身上)에 직접적인 위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손가전장이 그들 손에 넘어간다 해도 본 파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 명분이 없게 되오.”

손노태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화상단 뿐이라면 어떠한 도발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으나, 상대가 화산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의 가공할 무공과 오랫동안 다져온 서안 일대의 영향력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손노태야가 서안 제일의 부자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유화상단을 앞세우고 화산파가 뒤에서 은밀히 일을 도모한다면 손노태야로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손노태야는 한동안 주름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떨구어 무거운 눈으로 노해광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 일 테지. 자네의 복안은 무엇인가?”

손노태야의 말은 이번 일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노해광은 만에 하나 손노태야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손노태야의 말을 듣자 내심으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쯤 되면 자신의 계획이 절반 이상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생각해 둔 대책이 있소.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인가?”

“이번 일에 대한 손노태야의 절대적인 협조와 이해요.”

“협조는 알겠는데, 이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우리의 목표는 화산파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방보당과 손가전장을 무사히 보호하는 것이오. 이 점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오.”

손노태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입더라도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설욕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로군. 이해했네.”

“언젠가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아니오. 또한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만 하오.”

“그 점도 이해하겠네.”

지금까지 아무리 사소한 피해라도 용납하지 않았던 손노태야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신속한 결단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화산파라는 이름이 그에게 무거운 중압감을 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적어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나에게 전권(全權)을 주어야 하오.”

“전권이란 어느 정도까지 말하는 것인가?”

“손가장에 있는 식객들을 부릴 수 있는 권리요.”

손노태야는 처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 전부를 부리는 건 나조차 불가능한 일일세. 그들 중에는 누구에게도 구속받기를 원치 않는 자들도 상당수 있네.”

“전부는 필요 없소. 청명숙과 백로숙(白露塾), 대한숙(大寒塾)의 식객들이면 되오.”

손노태야의 주름진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이 번뜩였다.

“자네는 노부를 발가벗기려고 하는군.”

노해광이 지목한 세 곳은 손가장의 스물네 개에 달하는 숙소 중에서 식객들의 수가 가장 많고 손노태야가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곳들이었다. 이곳의 식객들 중에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도 적지 않아서 손노태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노해광은 생각에 잠겨 있는 손노태야를 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이번 일이 잘못되면 식객들 뿐 아니라 손가장 전체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거요. 나도 이번 일에 내 전부를 걸었으니, 손노태야께서도 그 정도는 양보해 주셔야 하지 않겠소?”

손노태야는 의외라는 눈으로 노해광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전부를 걸다니?”

“이번에 본 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여기 있는 내 사제와 사질녀 뿐이오. 그 외에는 내 수하들만으로 상대하려 하오.”

“종남파에서 그 정도 여력도 없단 말인가?”

“화산파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본 파도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소. 어차피 화산파에서도 지금 유화상단에 머물러 있는 인물들만으로 이번 일을 진행하려 할 테니 말이오.”

손노태야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유화상단에 있는 화산파 고수들은 모두 몇 명인가?”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스무 명은 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소.”

“애매한 숫자로군.”

“숫자는 중요하지 않소. 어떤 고수들이 내려왔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오.”

“그렇겠지. 그들 중 우두머리는 누구인가?”

“일단 겉으로 드러난 자는 집법을 맡고 있는 신산 곡수요. 하지만 나는 화산파의 장로들 중 적어도 두 명 이상이 내려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손노태야도 곡수에 대해 알고 있는지 나직하게 침음했다.

“곡수와 두 명의 장로라…….”

“추가로 몇 명이 더 내려올지는 모르지만, 많아야 열 명 안짝일거요. 화산파에서 본 파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그 이상의 인원을 투입하지는 않을 거요.”

“그래서 자네는 그 세 군데의 식객들과 자네 수하들만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나?”

노해광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번졌다.

“강호에서는 어떤 일도 자신할 수 없다는 건 손노태야도 알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승산도 없는 일에 세 곳의 식객들을 투입하란 말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소. 그리고 절대적인 자신은 없지만, 충분히 싸워볼만 하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소.”

손노태야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마지막이라고 해놓고 또 다시 조건을 거는군.”

“주상품(主商品)에 딸려주는 덤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래, 무얼 주면 되겠나?”

노해광의 시선이 손노태야의 뒤에 서 있는 응계성에게로 향했다.

“내 사질을 빌려주시오.”

손노태야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소벽력을? 그가 비록 강단이 있어서 제법 쓸모가 있기는 하지만 다리가 불편해서 화산파와 싸우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요. 무엇보다 화산파에서 이번 일의 선봉으로 내세운 녀석을 상대하려면 그가 꼭 필요하오.”

“그 자가 누구인가?”

노해광의 시선이 어느 때 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두기춘이란 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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