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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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10화


제 260 장 연회청리(宴會廳裡)

드넓은 대청 안을 가득 메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얼굴이 두껍고 배짱이 좋은 전흠 조차도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앞서 걷고 있는 진산월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 다음으로 중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옥면신권 낙일방이었다. 특히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은 따가울 정도여서 제아무리 철담목석의 사나이라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낙일방 또한 준수한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향한 여인들의 뜨거운 시선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산월 일행이 시비가 안내한 자리로 가서 착석하자 그제야 장내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나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자들도 있었다. 낙일방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자신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는 시선 하나를 느끼고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의 주인은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야릇한 미소였다. 낙일방은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는지 옆에 있던 동중산이 힐끗 낙일방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돌아보았으나, 워낙 사람이 많아서 낙일방이 누구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동중산이 낙일방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한 사람이 그들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오시오. 아까부터 이제나 저제나하고 한참을 기다렸었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은 정검 부옥풍이었다. 부옥풍은 진산월 일행과 구궁보에 함께 들어온 후 줄곧 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틀 계속 종남파의 숙소로 찾아오더니 오늘은 종남파가 오기도 전부터 이곳에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중산은 그의 환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담이 되기도 했으나, 진산월은 아무런 내색 없이 담담하게 그의 환영을 받았다.

“일행들과 같이 있지 않고 일부러 이쪽으로 온 거요?”

진산월이 가벼운 어투로 말하자 부옥풍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하하……. 그쪽이야 어차피 지겹도록 보아온 자들이니 오늘 하루쯤은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소. 그나저나…….”

그의 시선이 진산월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임영옥에게로 향했다.

“임 소저를 이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그동안 강녕하셨소?”

“오랜만이에요.”

임영옥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와 인사를 주고 받았다.

부옥풍이 임영옥을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늘 모용봉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달랐고, 그녀의 표정 또한 달라 보였다.

부옥풍은 나란히 앉아 있는 진산월과 임영옥을 다시 한 번 각별한 눈으로 주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그렇게 앉아 있으니 정말 잘 어울려 보이오. 확실히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자리에 있어야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소.”

임영옥의 아름다운 눈이 부옥풍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그의 말에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부옥풍은 준수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시선을 태연히 받았다.

부옥풍의 외모는 정말 온화하고 정감이 있어 보였다. 누구나가 그에게 호감을 느꼈고, 기꺼이 친구가 되려는 자들도 무척 많았다. 정검이라는 그의 외호는 사람 사귀기 좋아하고 늘 온유한 그의 성품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임영옥을 향해 웃고 있는 그의 미소에는 순수한 호의만이 엿보이고 있었다.

임영옥은 호의는 호의로 해석해 주기로 했다. 그가 비록 모용봉의 절친한 친구인 해천사우의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알고 있는 그의 성품은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해천사우 네 사람의 성격은 강호에 퍼져 있는 그들의 찬란한 명성만큼이나 개성적이었다. 부옥풍이 부드럽고 온화한 반면에 군유현은 다소 과격하고 냉정해서 별로 정이 가지 않았고, 담중호는 무뚝뚝하고 속을 알기 어려워서 상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쾌검의 달인인 고심홍은 별호 그대로 무공에 미친 승부사여서 무공 외에는 주위의 다른 것에 별로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토록 판이하게 다른 성격에 각기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는 네 명의 기재들이 모용봉이라는 한 인물에 반해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된 것은 그들을 아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놀라고 흥미롭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일전에 부옥풍의 친우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들 네 사람은 어떻게 해서 모용봉과 사귀게 되었나?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취미와 성격도 제각각인 자네들이 그렇게 친한 사이가 된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때 부옥풍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석에서 대답했다.

“우리 네 사람은 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네 개의 산처럼 홀로 지내던 존재들이었지만, 모용봉은 우리 모두를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네. 모용봉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심홍이나 군유현과 내가 친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네.”

“결국 모용봉이라는 커다란 바다가 네 개의 높다란 산을 삼켜버린 셈이로군.”

“바로 그렇네. 그래서 우리는 ‘해천오우(海天五友)’가 아닌 ‘모용봉과 해천사우’가 된 것일세.”

그때 그 친구는 한참이나 그의 말을 묵묵히 음미하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아무쪼록 그 바닷물이 마르지 않기만을 바래야겠군.”

부옥풍은 속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중얼거렸으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세상 일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부옥풍은 종남파 일행과 나란히 앉아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종남파 고수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구대문파나 다른 명문세가들이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구대문파와 그들 사이의 다소 불편한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형산파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구궁보 측에서 자리 배치에 상당히 고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산파 고수들은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도 연신 종남파 쪽을 힐끔 거리고 있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그런 모습을 익히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형산파와 종남파가 어떤 식으로든 한바탕 격돌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솔직히 부옥풍도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야릇한 호기심이 있기는 했다. 하나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 이곳에서 종남파와 형산파가 싸움을 벌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종남파나 형산파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상대가 시비를 걸어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나 오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모용봉이다. 모용봉은 자신의 생일잔치가 두 문파의 싸움터로 변하는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다시 중인들 사이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모용봉이 왔나 하여 고개를 돌린 부옥풍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중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장내에 들어서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천봉궁의 여인들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녀들이 줄지어 대청 안으로 들어서고 있으니 사람들이 절로 탄성을 지를 법도 했던 것이다.

천하절색(天下絶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녀들이 네 명이나 차례로 걸어 들어왔고, 그 뒤로 붉은 궁장에 얼굴을 망사로 가린 여인이 늙은 노파와 건장한 중노인의 호위를 받으며 취몽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봉팔선자 중에서 네 사람이나 왔군. 게다가 소문으로만 듣던 단봉 공주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으니 이게 웬 횡재냐?”

여기저기서 희희낙락해 하며 눈에 불을 켜고 그녀들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남파 고수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낙일방은 천봉선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이내 희미한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네 명의 천봉선자들 중에서 엄쌍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낙일방은 진한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말의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그녀를 직접 대면하여 추궁하지 않아도 된다는 다소 복잡하고 이중적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낙일방은 지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자신이 묻기 전에 스스로의 입으로 먼저 그 일의 진상을 밝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갈망이라고 해도 좋았고, 기대라고 해도 좋았으며, 단순히 몽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만 그렇게 해야만 마음 속의 고통과 근심이 몽땅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나 그녀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보니 적어도 오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낙일방이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안 천봉궁 일행들은 장내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취몽전 안을 가로질러 자신들의 자리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실로 묘해서 종남파와 구대문파의 사이에 놓인 형국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있기는 했어도 고개만 돌리면 바로 그녀들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인지 낙일방이 마음을 추스르려고 가벼운 심호흡을 하자 그녀들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혔다.

달콤한 그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야릇하게 뒤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특히 낙일방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낙일방이 한 줄기 야릇한 감상(感傷)에 젖어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장내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점잖게 앉아 있던 구대문파의 고수들도 모두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낙일방은 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용봉이 취몽전 안에 준수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모용봉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눈부신 백의 대신 짙은 남색 장삼을 입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뜩이나 하얀 그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얗게 보였고, 눈빛은 더욱 맑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의 군계일학과도 같이 뛰어난 모습을 보자 취몽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중인들은 일제히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모용 공자! 생신을 축하하오!”

사방에서 그에게로 폭포수와 같은 축하의 말이 쏟아졌고, 박수와 요란한 함성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모용봉은 자신을 향한 열렬한 환호성에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으로 중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공수(拱手)를 했다.

모용봉의 뒤에는 몇 명의 남녀가 따르고 있었는데, 네 명의 여인은 유명한 사대신녀가 분명해 보였고, 두 쌍의 쌍둥이들은 쌍포사절이 확실했다. 그들 외에도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모용봉의 수하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사대신녀와 쌍포사절 사이에 몸을 숨기듯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그를 발견한 뒤부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젊은이는 이십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이 곱상하고 피부가 하얘서 얼핏 보기에는 남장여인(男裝女人)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하나 유난히 짙은 검미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이 의외로 상당히 강단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지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쌍포사절의 등 뒤로 몸을 가린채 움직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참동안이나 그 젊은이를 바라보다가 부옥풍에게 물었다.

“저 청년은 누구요?”

부옥풍은 처음에는 진산월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몰라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다가 진산월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구양공자(歐陽公子)를 말하는구려.”

구양이라는 성에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장사의 구양가의 공자란 말이오?”

“그렇소. 구양가의 일월성진 사대공자 중 막내인 구양수진이 바로 그요.”

구양가의 사대공자에 대해서는 진산월도 들은 바가 있었다. 더구나 그들 중 한 명인 구양전월은 석가장에서 직접 본 적도 있지 않은가?

“구양수진이라면 무공에 미쳐서 연공실 밖으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희대의 무공광(武功狂)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이곳에 온 걸 보니 모용 공자와 친분이 상당히 두터운 모양이구려?”

부옥풍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본 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오. 어제 모용봉의 거처에 갔다가 그를 소개 받았소. 내가 알기로는 그동안 모용봉과는 전혀 왕래가 없던 사이였을 거요.”

“그런데도 모용 공자가 직접 자신의 생일연에 함께 데리고 나왔단 말이오?”

부옥풍의 얼굴에 한 줄기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나도 조금 의아하긴 하오. 어제 봤을 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서 그냥 구양가를 대표해서 하객으로 참석한 줄만 알았는데, 지금 모용봉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오.”

모용봉은 고고한 성품만큼이나 남을 사귀는데 까다로워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의 숫자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더구나 엄격한 모용세가의 가풍 때문인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나름대로 분명한 격식을 차리는 편이어서 결코 이런 공개된 자리에 아무나 동행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친구들인 해천사우와 경천사객은 각기 따로 떨어져 앉아 있고 가신(家臣)이라 할 수 있는 사대신녀와 쌍포사절만을 대동하고 입장을 했는데, 그들 중에 전혀 낯선 외인(外人)이 끼어있으니 모용봉의 가장 친한 친우 중 한 사람인 부옥풍이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모용봉은 대청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공수로 답장을 했다. 그 바람에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도착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종남파가 있는 곳을 지날 때 그는 나란히 있는 진산월과 임영옥을 일별했으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포권을 했을 뿐,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봉의 뒤에 시립해 있는 사대신녀들이 진산월의 옆에 임영옥이 있는 것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들 중 몇 사람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힐끔거리기도 했는데, 소문으로만 듣던 신검무적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아니면 모용봉의 약혼자로 소문난 임영옥의 과거 연인이라는 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모용봉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 자체는 여느 연회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한쪽에서 풍악을 울리는 연주가 시작되었고, 소속된 문파와 지위에 따라 구분된 탁자에 각종 음식들이 차려지면서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고, 진지하게 옆 사람과 무언가 담론을 나누는 사람도 있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유명한 고수들의 모습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었다.

구대문파를 위시한 명문세가의 인물들은 이번 기회에 다소 소원했던 세력들과 교류를 나누기도 했고, 문파의 어린 제자들에게 타 문파의 선배고수들을 소개하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하나 종남파만은 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이 조촐하게 자신들만의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다른 문파에 제자들을 소개해줄 만큼 발이 넓은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문파로 불쑥 찾아갈 만큼 낯짝이 두꺼운 인물도 없었다. 그런 일은 문파의 어른이 나서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종남파의 어른이라고 해봐야 성락중 뿐이었고, 성락중은 이십 년 넘게 해남도에만 머물렀던 지라 아는 고수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일대제자의 신분인 동중산이 나설 수도 없었고, 동중산 자신도 명성에 비해서는 그다지 인맥이 넓은 편이 아니었다.

다른 문파의 사람들도 종남파 쪽을 신경 쓰면서도 먼저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은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 구대문파와 종남파와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먼저 손을 내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종남파의 비무행은 분명 구대문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 결과에 따라서 구대문파의 지위가 변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따라서 구대문파의 인물들로서는 종남파에 접촉하는 일에 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구대문파 외의 다른 문파에서도 종남파를 찾아오고 싶었으나, 일부는 구대문파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일부는 신검무적이라는 명성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연회는 화려하고 융성했으나, 종남파가 있는 곳만은 외딴 섬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들과 함께 있는 부옥풍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거야 원. 다양한 계층의 고수들과 안면을 넓힐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찾기 어려울 텐데……. 이래서야 기껏 이곳까지 먼 길을 온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부옥풍은 자신이라도 나서서 종남파의 고수들이 제대로 된 연회를 즐길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적당한 상대를 발견하고는 이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옥풍은 이내 두 사람을 데리고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진 장문인. 내가 진 장문인께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소.”

진산월이 돌아보니 부옥풍의 옆에 체구가 건장한 두 명의 남자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뜨거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포권을 했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남창의 뇌진기(雷振起)라는 사람이오.”

“강호제일검객의 명성을 늘 흠모하고 있었소. 나는 포검산장에서 온 마종의(馬宗毅)라고 하오.”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 진산월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인사를 했다.

“이제 보니 진천벽력문과 포검산장의 소주인들이셨구료. 반갑소. 진산월이오.”

진산월은 두 사람을 정중하게 자리에 앉도록 안내했다.

두 사람은 강서성에서 가장 강력한 방파인 진천벽력문과 포검산장의 후계자들로, 강남에서는 담중호 못지 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진천벽력문은 강남 무림 뿐 아니라 중원 전체를 놓고 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양강무공(陽剛武功)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강무공들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레 화기(火器)에 대한 수준도 높아져서 산서(山西)의 벽력당(霹靂堂)과 함께 가장 강력한 화탄(火彈)을 지닌 곳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뇌진기는 당대의 진천벽력문의 문주인 뇌정신군(雷霆神君) 뇌일후(雷日侯)의 큰 아들로서, 일신의 무공 또한 후기지수 중에서는 단연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미 소문주로 내정되었으며, 몇 년 내로 뇌일후의 뒤를 이어 진천벽력문의 문주로 오를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포검산장은 무공산의 중턱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산장이었다. 하나 그들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강남 무림에 널리 퍼져 있었고, 특히 빠르고 정교한 검법으로 명성이 높았다. 일개 가문이 검 하나만으로 이 정도의 명성을 쌓은 곳은 강북의 검보와 강남의 포검산장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 두 가문을 일컬어 북보남장(北堡南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포검산장의 장주인 검수(劍樹) 마적령(馬積嶺)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간에 우의가 돈독할 뿐 아니라 하나같이 기재가 뛰어나고 인물이 훤칠하여 포검사수(抱劍四秀)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중에서도 둘째인 마종의는 어려서부터 검에 대한 탁월한 재질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나이 십칠세 때 마종의는 포검산장의 절학인 무영적환십팔검(無影摘環十八劍)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 그의 형인 마종원(馬宗元)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인하고 소문주의 자리를 동생인 마종의에게 넘겼으며, 그 후로 그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었다.

뇌진기는 진천벽력문의 후계자답게 당당한 체구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성격 또한 호탕해서 부옥풍과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마종의 또한 강호삼정랑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준수한 외모만큼이나 풍류재사(風流才士)로 손꼽히는 인물이어서 부옥풍과는 진즉부터 잦은 왕래를 해오던 사이였다. 그들은 신검무적을 소개해 주겠다는 부옥풍의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선 것이다.

강남의 유력한 가문의 후계자일 뿐 아니라 본인들의 명성 또한 대단한 두 명의 젊은 기재들이 종남파를 찾아오자 그 후로 사람들의 발길이 하나둘씩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다른 곳보다도 오히려 더욱 붐비게 되었다.

동중산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성락중과 낙일방 또한 강호에 명성이 퍼진 유명세를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서안 일대에서나 겨우 이름이 알려졌던 전흠 마저 자신을 향해 아는 척을 해오는 낯선 사람들의 행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종남파 일행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은 손풍이었고,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도 당연히 그였다. 손풍은 하다 못해 나이 어린 유소응 마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을 심통 사나운 얼굴로 쏘아보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삼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꼬마 사형마저도 찾는 사람이 있는데, 왜 나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어오는 자가 없는 거야?’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종남파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 중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신세가 되어 버린 손풍의 심정은 한없이 허탈하고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아! 강호에 이토록 인재를 알아보는 자가 없다니……. 내 조만간에 기필코 저들로 하여금 자신의 삐뚤어진 눈을 한탄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손풍이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 혹시 종남파의 분이신가요?”

난데없이 들려온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음성에 손풍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옳거니. 드디어 왔구나.’

힐끔 돌아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여인이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손풍은 떨리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짐짓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종남(大終南)의 이십이대 제자되는 손풍이라 합니다. 실례지만 소저께선…….”

손풍이 서안의 화류계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자연스런 태도로 미녀의 이름을 물어보려는 순간, 미녀가 먼저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저 이걸…….”

미녀의 빙어처럼 고운 손에는 곱게 접힌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손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강남의 여인들은 강북과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더니 과연 사실이로구나. 이토록 노골적일수가…….’

손풍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미녀의 손에서 서찰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미녀가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낙 공자님께 잘 전해주십시오.”

그리고는 손풍이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손풍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린 채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손풍은 커다란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나 힐끔 내려다 본 서찰 위에는 단정한 필치로 <옥면신권 낙일방 공자 친전(親展)>이라고 쓰여 있었다.

손풍은 갑자기 맥이 탁 풀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구나. 강남의 여인들은 어찌 이리도 무도(無道)하단 말인가?’

기분 같아서는 손에 들고 있는 서신을 박박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사문의 사숙에게 전해달라는 서신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손풍은 그저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때마침 접대하던 손님을 막 배웅하고 돌아서던 동중산이 그를 발견하고 툭 건드리지 않았다면 손풍은 언제까지고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손 사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가?”

손풍은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지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보인단 말이오?”

동중산은 이 성질 급한 사제가 또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상했는가 싶어 한숨부터 흘러나왔으나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혼자 있으니 심심했던 모양이군. 이리 오게. 내가 자네와 어울릴만한 젊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네.”

“일 없소.”

손풍은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낙일방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낙일방의 주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개중에는 젊고 아리따운 미모의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손풍은 그걸 보고 다시 배알이 뒤틀렸으나 억지로 눌러 참으며 사람들을 헤치고 낙일방에게로 다가갔다.

“낙 사숙.”

낙일방은 몇 명의 남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그를 보자 반색을 했다.

“손 사질. 어서 오게. 장문사형이 나를 부르시는가?”

손풍은 심통이 단단히 난 와중에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낙 사숙은 정말 장문인을 좋아하는구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장문인에 관한 일부터 물어보다니.’

손풍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라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어서 공손하게 손에 들고 있는 서신을 내밀었다.

“그게 아니라 사숙께 전해달라는 편지가 있습니다.”

낙일방은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손에 들린 서신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낸 것인가?”

“저도 모릅니다. 아마 받아보시면 아시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낙일방은 무심결에 서신을 받아 펼쳐보려 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녀들이 모두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몇몇 여인들의 눈빛은 반짝이다 못해 광채가 날 정도였다.

낙일방은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다가 서신을 펼쳐보지도 않고 품속에 넣고 말았다. 남들의 주시를 잔뜩 받고 있는 상태에서 연서(戀書)로 보이는 서신을 펼쳐보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이런 편지는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낙일방은 눈치 없이 중인 환시리에 서신을 건네준 손풍이 원망스러웠지만, 누구보다도 손풍 본인이 가장 원통해 하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두 숙질의 행동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더구나 강호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대단한 명성을 날리는 신진 고수이면서도 아직은 순진한 구석이 있는 낙일방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는지 몇몇 여인들은 호감과 관심어린 눈으로 그를 보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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