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11화 (2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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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5권 취와미인(醉臥美人)편 : 11화 (25권 끝)


제 261 장 벽토대지(壁土代之)

손풍으로서는 이래저래 속상한 상황이었는데, 억지로 눌러 참고 있는 그의 분노를 폭발시켜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아까부터 한쪽에서 빙글거리고 있던 남삼 청년이 손풍의 위 아래를 훑어보더니 낙일방을 향해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낙 소협의 사질이면 종남파의 일대제자 신분일 테니 무공 실력도 보통이 아니겠군요. 종남파 일대제자의 뛰어난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말에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말이 일대제자이지 손풍은 사실 무공에 제대로 입문하지도 못한 초보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솜씨를 보여주고 자시고 할 것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손풍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밝히고 중인들의 양해를 구했을 텐데, 가뜩이나 편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듣게 되자 더 이상 가슴 속의 울화를 참지 못하고 말았다.

“솜씨라면 기꺼이 보여주지. 당신 코에 한 방 먹이면 되는 거요?”

손풍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오자 주위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남삼 청년 또한 호기심에서 내뱉은 자신의 말에 그가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몰랐는지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듣고도 참는다면 앞으로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즉시 그는 삼엄한 얼굴로 손풍을 노려보았다.

“과연 종남파의 일대제자다운 배포로군.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종남파의 실력을 인정해 주지.”

손풍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소매를 걷어 붙이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거 간단해서 좋군.”

하나 그가 채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사제, 잠시만.”

손풍이 성난 눈으로 돌아보니 어느 새 다가왔는지 동중산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사형. 놓으시오.”

손풍이 여전히 분기가 가시지 않는 음성으로 소리쳤으나 동중산은 그의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는 달리 엄격한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었다.

“진정하게, 사제.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 잊지 말게.”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손풍의 귀에는 어떤 고함소리보다도 더욱 크고 우렁차게 들렸다. 손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동중산을 꼬나보았다.

“이번에도 무조건 나보고 참으라는 거요?”

“그렇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손풍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으나 동중산은 침착하면서도 냉엄한 얼굴로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곳에 장문인과 사문의 존장(尊長)께서 계시기 때문이네.”

그 말에 손풍은 움찔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진산월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어서 그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었으나, 손풍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기랄. 이번에는 정말 큰 실수를 했구나.’

확실히 실수치고는 지나치게 큰 실수였다.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있는 연회장에서 사문의 제자가 장문인이 근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니 문파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항상 차분하고 온화했던 성락중도 꾸짖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고, 전흠은 아예 성이 나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금시라도 그를 향해 덤벼들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이곳에 진산월이 없었다면 진작에 전흠은 손풍에게 달려들어 치도곤을 안겼을 것이다.

성질 급하고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손풍도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닫게 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이곳은 강호 무림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구궁보가 아닌가? 무림의 거의 모든 명문정파에서 온 수많은 명숙(名宿)들 앞에서 자신의 문파를 욕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낯짝이 두껍고 뻔뻔한 손풍이라도 부끄러움과 문파에 대한 송구스러움에 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때 진산월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손풍 앞에 우뚝 서더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솜씨를 보이고 싶으냐?”

손풍은 그저 참담한 심정이 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의 담담한 듯 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종남의 제자는 남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의기소침해 하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라.”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굽혔던 허리를 쭉 폈다.

“솜씨를 보이고 싶다고 했지? 그럼 무얼 망설이는 거냐? 종남의 제자는 남들 앞에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다.”

손풍은 진산월의 의도를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한 듯 했으나, 그의 눈빛은 왠지 평소와는 달리 온화하고 부드러워보였다.

“미흡하면 미흡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네가 가지고 있는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면 되는 것이다. 네 솜씨가 미흡하다고 해서 본 파를 비웃을 사람도 없고, 네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본 파를 무시할 사람도 없다. 본 파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남들 앞에 당당이 설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손풍은 밝은 얼굴이 되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손풍은 언제 기가 죽었었냐는 듯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남삼 청년을 향해 돌아섰다.

“내 솜씨를 보고 싶다고 했소? 나는 비록 본 파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고, 정식으로 본 파의 무공에 입문조차 못한 풋내기지만 당신이 보고 싶다면 기꺼이 솜씨를 보여주도록 하겠소.”

남삼 청년은 손풍의 다부진 말을 듣고 몇 차례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호남성의 유력한 가문중 하나인 형양백문(衡陽白門)의 일대제자로, 백운영(白雲榮)이라는 자였다. 형양백문은 대대로 호남 최고의 문파인 형산파와 친밀한 관계였고, 백운영 또한 형산파의 제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오늘 설레는 마음으로 모용봉의 생일연에 참석한 백운영은 형산파의 오랜 숙적인 종남파의 인물들이 뭇 고수들의 지대한 관심과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못마땅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검무적이나 옥면신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 다른 제자들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듯 하여 묘한 질투심과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무공이 변변치 않아 보이는 손풍을 보자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검무적까지 끼어든 큰 사건으로 비화되니 당황하고 심란하여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설마 당당한 명문세가의 제자가 이토록 성격이 급하고 성질이 고약할 줄은 정녕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솜씨를 보자고 하면 누구나가 사양을 하는 법이고, 그럴 때 자신은 슬쩍 종남파 제자의 배포가 약하다는 말을 내뱉고 뒤로 빠지려 했는데, 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놈이 사태를 엉뚱하게 키워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종남파의 장문인인 신검무적까지 나서게 되었으니 백운영으로서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긴 것이다.

더구나 말을 들어보니 이 종남파의 제자놈은 종남파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송이였고, 아직 내공도 못 익힌 생초짜였다. 그러니 자신이 그를 때려눕힌다고 해도 오히려 욕을 먹기 십상이었고, 그 후에 종남파에서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때 한 사람이 나서서 그를 구원해 주었다.

“하하……! 이거 내 조카 녀석이 쓸데없이 입을 놀려 신검무적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구려.”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중노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손풍과 백운영 사이에 끼어들었다.

중노인은 혈색 좋은 얼굴에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중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백의 노인은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나는 형양백문의 수석당주(首席堂主)를 맡고 있는 백조림(白彫林)이란 사람이오. 이렇게나마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백조림은 백의절도(白衣絶刀)라는 별호로 강남 무림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온 인물이었다. 도법으로는 형양백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고수였고, 인품이 공정하여 주위의 신망이 두터웠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백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소. 종남의 진산월이오.”

백조림은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진산월의 태도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검무적이 가공할 무공만큼이나 심기가 뛰어나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하더니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그는 입가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솔직히 아까부터 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워낙 많은 분들이 진 장문인 주위에 몰려 있어 마음속으로 애를 태우고 있던 참이었소. 못난 조카 때문에 늦게나마 인사를 나누게 되었으니, 조카 녀석을 꾸짖어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진산월의 시선이 한쪽에 뻘쭘하게 서 있는 백운영에게로 향했다.

“이제 보니 백 대협의 조카분인 모양이군요. 어쩐지 기개가 남달라 보인다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그의 말에 백조림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행동이 다소 가볍기는 하나 본성은 충직한 아이요. 이번의 경솔한 행동은 본인이 누구보다도 반성하고 있을 거요.”

솔직히 생면부지의 인물이 명문정파의 제자에게 솜씨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소한 일로도 충분히 칼부림이 벌어지고 피비린내 나는 혈겁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강호였다.

백조림은 슬쩍 백운영에게 눈짓을 했다. 백운영은 재빨리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형양백문의 백운영이라 합니다. 제가 경망한 말로 귀파 제자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에 사과드리겠습니다.”

백운영이 별다른 핑계를 대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은 정말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쓸데없는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진산월은 종남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결코 그와 형양백문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종남파가 강남 무림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공식적인 자리였다. 이런 공개된 곳에서 문파의 위신을 해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진산월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 소협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아울러 본 파 제자가 백 소협의 말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한 것에 대한 양해를 부탁드리겠소.”

백운영은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장문인의 해량에 감사드립니다.”

백조림이 재빨리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허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앞으로 본 문과 종남파가 이 일을 계기로 상호간에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소.”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진산월의 말에 비로소 백조림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백운영이 젊은 기분에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종남파의 제자에게 시비를 걸었을 때 백조림은 까무러칠 듯 놀라고 말았다.

당금 무림에서 종남파가 차지하는 위상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을 벗어나 감히 대적하기 힘든 압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강북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며, 적은 인원으로 시작한 비무행으로 모든 무림문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더구나 얼마 전에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비무는 강북 무림 뿐 아니라 강남 무림 전체에도 엄청난 충격을 준 일대사건이었다. 그 비무에서 종남파는 놀랍게도 장문인과 옥면신권 등 주축 고수들을 빼고도 남궁세가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 이곳에는 당시에 남궁세가와의 비무에 참석했던 고수들 뿐 아니라 강호제일검객이라고 공인된 신검무적과 최고의 후기지수중 한 명이라는 옥면신권까지 자리하고 있어서 생일연에 참석한 여타의 거대문파들을 능가하는 막강한 진용을 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구대문파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기회가 보이자 앞을 다투어 그들 주위에 모여든 것만 보아도 종남파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견문이나 넓히라며 데려온 가문의 조카녀석이 경솔하게도 종남파의 제자에게 시비를 걸었으니 이를 본 백조림이 대경실색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백운영은 백운영대로 저승 문턱을 넘어갔다 온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백운영은 조금 전에 진산월이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 마치 거대한 산악에 짓눌리는 듯한 엄청난 압박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런 압도적인 가공함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자의 심기를 거스를 뻔 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다시 한 번 후회되었다.

다행히 숙부인 백조림의 재빠른 행동으로 일이 무사히 매듭지어지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 자리에 더 있을 염치가 없어서 숙부에게 눈인사만 하고는 이내 자리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무언가 벌어질 듯 한 일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으나 중인들은 누구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 종남파의 위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강남의 오래된 명문이며 형산파와 친분이 두터운 형양백문에서조차 종남파와 시비가 붙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진정되자 성락중이 슬쩍 진산월의 곁으로 다가왔다.

“장문사질에게 다시 한 번 감탄했네.”

진산월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숙께서 계신데 제가 너무 제 멋대로 행동을 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성락중은 조용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닐세. 본 파의 위신을 세우고 어린 제자에게 천하 무림 앞에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게 해준 장문사질의 행동에 진심으로 감복하는 바일세.”

성락중의 밝은 미소 속에는 한 줄기 짙은 회한의 빛이 담겨 있었다.

“본 파의 이런 모습을 그동안 얼마나 머릿속으로 그려왔는지 모르네. 항상 남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길 정말 간절히 바래왔지. 사부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어야 했는데…….”

“사숙조께서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아무리 종남파가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당금 무림에 퍼져 있는 종남파의 위세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성락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그의 손짓에 담긴 깊은 뜻을 진산월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연회가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 한 사람이 휘적거리며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종남파 쪽으로 다가왔다.

“엇?”

“누구야?”

밀려난 사람들이 투덜거리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불콰하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진산월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짙은 청삼을 입은 훤칠한 키의 청년이었다.

청년이 다가올수록 독한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청년의 허리춤에 아무렇게나 매달린 장검에 매어져 있는 푸른색 수실이 흔들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청년의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를 닮아 있었다. 늘 매고 있던 청색 두건은 어디로 갔는지 머리가 반쯤 풀어헤쳐졌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청년은 진산월 앞까지 다가오더니 비틀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엉성한 자세로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형산파의 무명소졸이 대 종남파의 장문인께…… 끄윽! 인사를 드리오.”

진한 트림과 함께 역한 술냄새가 퍼져 나오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아무도 그 청년을 제지하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청년이 단순히 형산파의 제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맙소사. 대로검 백대행이잖아.”

누군가의 억눌린 듯한 조그만 신음성이 지금 이곳에 늘어선 중인들의 당혹감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렇다. 술에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진산월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형산파가 자랑하는 사결검객 대로검 백대행이었다. 형산파 오결검객 중에서도 최고봉인 조화신검 사견심이 자랑하는 애제자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사결검객중의 선두주자인 백대행이 자신의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취한 상태로 문파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남파의 장문인 앞에 나선 것이다.

돌발적으로 벌어진 뜻밖의 사태에 일부는 망연자실한 모습이었고, 일부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으며, 일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사년 만이로군.”

백대행은 히죽 웃었다.

“정확히는 삼 년하고도 칠 개월 만이지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있었소. 귀하는?”

백대행의 붉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너무나 잘 지내서 살이 피둥피둥 올랐지요.”

진산월의 시선이 그의 전신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확실히 그전에 보았을 때보다 몸이 좋아진 것 같소.”

이번에는 백대행이 진산월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와는 반대로 진 장문인께서는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외모가 조금 변하긴 했지만, 나의 내면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소.”

백대행의 취기 가득한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쩍이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예전의 기억도 잊지 않고 계시겠군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백대행은 한동안 가만히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더니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크하하하!”

한 문파의 제자가 다른 문파의 장문인 앞에서 하는 행동으로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종남파의 고수들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으나, 장문인이 앞에 있는지라 억지로 눌러 참는 듯 했다.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백대행을 향해 물었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거요?”

백대행은 웃음을 그치고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짓인줄 알면서도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이 났던 거요?”

백대행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산월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본산을 떠나기 전에 사부님께 하직 인사를 올리러 갔더니 사부님께서 한참동안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벽토대지(壁土代之)’라는 네 글자를 적어주시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여쭈었으나 말없이 고개만 저으시길래 할 수 없이 인사만 드리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

“그런데 오늘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멀리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진 장문인을 보게 되니 불현듯 사부님이 내리신 네 글자의 뜻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돌연 깨달았지요. ‘벽토대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벽(壁)이라는 글자 밑에 있는 토(土)라는 자를 갈지(之)자로 대신하면(代) 바로 ‘피(避)’라는 자가 됩니다. 사부님께서는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나에게 진 장문인을 만나지 말고 피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백대행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차로 강해져서 마치 혈광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진 장문인을 뵙지 않고 멀리서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뜻을 알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무공을 익힌 건 남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은 어떤 외침보다도 더욱 크게 들렸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피하라는 사부의 말을 거역하고 내 앞에 나선 것이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술이 잔뜩 취해 장문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사부님께서 그런 파자(破字)를 내리신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피’는 조급하게 뛰지 않고 천천히 걷는 형상입니다. 사부께선 제가 성급하게 덤비지 말고 일단은 천천히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걸 진 장문인의 앞에 나선 다음에야 깨달았으니 어찌 웃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백대행의 입가에는 다시 미소가 걸렸으나 조금 전처럼 광폭하지도, 흥겨워 보이지도 않았다.

“진 장문인은 사 년 전의 일을 가슴 속에 깊게 담아두고 매진하여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데, 나는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제 발로 나섰으니 그 무모함에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지는군요.”

“당신은 아직 돌아갈 기회가 있소.”

백대행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때로는 되돌리지 못한 걸음도 있는 법입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 없고, 한 번 엎질러진 술을 다시 따를 수 없듯이 말입니다.”

진산월은 백대행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백대행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취기로 가득한 눈이지만 그 안에는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길(吉)한 날이오.”

이번에는 백대행이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술에 취해 있지.”

“…….”

“내일모레, 구강의 나룻터에서 사 년 전에 못했던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백대행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중인들 틈을 뚫고 사라졌다.

백대행의 모습은 금새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여운은 오래도록 중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한동안 장내가 무거운 침묵에 쌓여 있는 가운데, 돌연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대충 분위기도 되었으니 오늘의 주인공인 모용 공자님의 말씀이라도 듣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좋소.”

“모처럼 모용 공자의 옥음(玉音)을 듣고 싶소.”

어색했던 분위기를 깨려는 듯 주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장내가 시끌벅적해지자 모용봉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중인들은 다시 입을 다물고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용봉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였다.

“먼저 불초한 이 사람의 생일에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이 자리의 모든 동도(同道)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에 답하느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한 차례 소란스러움이 지나가자 모용봉은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대단할 것도 없는 생일잔치 때문에 이토록 많은 분들을 모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제 생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코앞으로 닥친 커다란 환란(患亂)을 막는데 많은 분들의 중지(衆智)를 모으자는 생각에서 뜻이 맞을 만한 분들을 특별히 모시게 된 것입니다.”

대청 안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진 가운데 모용봉의 청아한 음성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린 환란이 무엇인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하고 계실 줄 압니다. 제가 특별히 강남 무림의 고수 분들을 집중적으로 모신 것은 이번 환란을 헤쳐 나가는 데 강남 무림의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중인들 중 누군가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모용봉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금응방의 위지방주(尉遲幇主) 이시군요. 궁금한 점이 있더라도 제 말씀을 듣다보면 이해하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절강성 최대의 방파인 금응방의 방주 신응무적(神鷹無敵) 위지동립(尉遲東立)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모용 공자의 말씀을 경청하겠소.”

“감사합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강북에는 서장 무림의 세력들이 상당수 진출하여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이 힘을 하나로 뭉치는 것에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 년 전과 같은 무림대집회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에 비해 강남 무림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온통 모용봉의 입에 쏠렸다.

“아직은 서장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침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강남의 몇몇 문파에 그들의 수뇌부 중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어서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위지동립이 급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모용 공자의 말씀은 강남 무림에서 그들에 동조하는 문파들이 있다는 뜻이오?”

“그런 의심을 살만한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합니다.”

주위가 술렁거리려 하자 모용봉이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북 무림에 비하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고, 강남 무림 전체의 힘은 아직 건재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강남 무림의 힘을 하나로 뭉치고 더 이상의 서장 세력의 침투를 막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용봉의 말이 끝나자 중인들은 여기저기서 주위 사람들과 자신들의 생각을 주고받느라 소란스러워졌다.

모용봉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담담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보다 자세한 내막은 차차 의논하기로 하고, 우선은 저의 생일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건배를 제안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술잔을 높게 쳐들었다.

“무림의 안녕을 위해.”

모용봉이 낭랑하게 외친 후 술잔을 들이키자 모두들 그의 말을 따라 외치며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웠다.

“무림의 안녕을 위해!”

건배를 마치자 모용봉은 본격적으로 각 문파의 수뇌부들을 모아서 회의를 시작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큭!”

건배와 함께 술을 마셨던 무당파 쪽에서 누군가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사람을 본 중인들은 놀란 외침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현우도장께서?”

시커먼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무당파의 호법진인인 현우도장이었던 것이다.

모용봉이 다급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현우도장에게 다가갔을 때는 이미 현우도장은 전신의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된 채 숨이 끊어진 후였다.

<2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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