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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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9화


제 270 장 의외적청(意外的請)

장강의 물결은 끝없이 푸르렀다. 멀리 보이는 강변의 언덕은 울창한 나무와 수풀로 뒤덮여 있었고, 그 너머로 장쾌하게 펼쳐진 초원이 아득히 늘어선 산봉우리들을 배경삼아 한껏 창창함을 뽐내고 있었다.

진산월은 선상에 우뚝 선 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창(宜昌)으로 가는 배 안이었다. 의창에서 배를 내려 형산(荊山)을 지나면 바로 무당산(武當山)이 지척이었다. 유월 일일에 무당파에서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여정으로는 시일이 넉넉한 편이어서 배에서 지내는 것이 지루하다면 강릉(江陵) 쯤에서 내려 형문(荊門)을 지나는 육로를 이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진산월의 두 눈에 투영되는 장강의 물결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진산월의 마음속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물결 하나에 생각 하나.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처럼 그의 생각도 이리저리 이어지고 있었다.

“심사가 복잡해 보이는군.”

문득 들려온 음성에 진산월은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성락중이 뒷짐을 진 채로 그의 옆에 나란히 선 채 강물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락중은 강물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진산월의 얼굴은 한편으로는 냉정해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인해 보였다. 하나 성락중은 그가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묵묵히 진산월을 보고 있던 성락중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자네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워 보여서 마음이 편치 않네. 조금은 그 짐을 나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지 않겠나?”

진산월은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도 충분히 사숙께서 나눠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락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인가?”

“사숙께서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로서는 무거운 짐을 덜어 낸 느낌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군.”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성락중은 다시 시선을 돌려 뱃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이루고 사라지는 물결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끔은 강호(江湖)의 삶이 저 물결처럼 덧없다는 생각도 드는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갑자기는 아닐세. 해남에 있을 때부터 바다를 보고 있다 보면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부서질 줄 알면서도 끝없이 바위를 향해 몰아쳐가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향해 돌진해 가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울적해 질 때가 있었네.”

그렇게 말하는 성락중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빛이 어려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사숙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락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네. 여전히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네. 다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네를 비롯한 본 파의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짐의 무게와 헤치고 나아가야 할 길의 험난함이 가슴을 무겁게 할 뿐이네.”

“그건 모두 우리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

“우리에게 그 짐을 지고 그 길을 걸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추호도 그 길을 걷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성락중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길을 걷기로 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나?”

이번에는 진산월이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푸른 물살을 바라보고 있던 진산월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에게 후회란 사치스런 감정입니다. 약간의 미련은 있을지 모르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져 버렸습니다.”

성락중은 가볍게 탄식했다.

“미련은 후회의 그림자 같은 것일세.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말은 맞는 것 같군. 우리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네.”

“…….”

“무당산에서 형산파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결판을 내려고 할 걸세. 일이 여기까지 되어 버렸으니 우리도 피하거나 물러설 수는 없지. 무당산에 도착하는 그 날이 무척이나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려지는군.”

“걱정이 되십니까?”

성락중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이 된다기보다는 두렵다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이겠지. 형산파는 현재 구대문파 중에서도 화산파와 함께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문파일세. 우리들만으로 그들과 맞붙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 걸세. 자네는 두렵지 않나?”

진산월은 웃었다. 차분하기 보다는 냉정하고, 부드럽기 보다는 단호하며, 유쾌하기 보다는 비장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길을 걷다 쓰러지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하나, 길을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성락중은 미소 짓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알 듯 말 듯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군. 문파의 선배로서 자네에게 무어라고 할 말이 없네.”

“사숙께선 지금까지 잘 해오셨습니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네. 하지만 자네와 다른 제자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알게 되니 내가 너무 편하고 안락한 길로만 걸어온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일세.”

성락중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인물이었다. 매 순간마다 그는 최선을 다해왔으며, 단 하루도 종남파의 부흥을 꿈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나 지난 몇 달간의 여정동안 종남파의 고수들이 어떠한 역경을 헤쳐 왔는지를 조금씩 알게 되자 그는 문파의 선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고수 하나 없고 비전무공조차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무공도 변변치 않은 몇 명의 젊은이들이 호시탐탐 자신들의 목줄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주위의 위협과 억압을 뚫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가 있었겠는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속에서 본산마저 빼앗긴 채 뿔뿔이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만 했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초지(初志)를 잃지 않고 끝내 무서운 적들을 물리침으로써 문파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제이(第二)의 부흥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강호에 종남파의 이름이 다시 퍼지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을 그 많은 고난과 위험, 그리고 그들이 흘려야 했을 피와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성락중은 마음이 격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제 당금 강호에서 종남파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남파의 명성은 지난 백여 년 이래 가장 높게 퍼진 상태였고, 신검무적과 그의 믿음직한 사제들은 강호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한 고비, 정말 중요한 마지막 한 고비만 넘긴다면 종남파는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무림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형산파를 꺾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형산파를 꺾고 기산취악의 치욕을 씻는 일이야 말로 종남파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 구강의 나루터에서 벌인 백대행과의 비무는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진산월은 종남파의 무공은 쓰지도 않은 채 형산파가 자랑하는 사결검객 중의 최고수를 불과 십 초 만에 꺾어 버렸다. 그러니 형산파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설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동안 종남파에 대한 형산파의 공식적인 대응은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구대문파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위세를 보이고 있는 형산파로서는 거의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종남파의 일에 이런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자체가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강호를 행도하던 형산파의 제자들이 종남파의 제자에게 시비를 걸어 굴욕을 선사하는 경우는 제법 있었으나, 문파 자체가 종남파에 어떤 행동을 하거나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금까지의 암묵적인 방식이 이번 일로 인해 깨어질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종남파로서도 굳이 멀리 호남성까지 가거나 무당산의 대집회에서 형산파를 일부러 도발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자연스레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나 막상 형산파와 격돌한다고 생각하자 성락중은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이 배에 타고 있는 종남파의 인원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 중 두 명은 이제 갓 무공에 입문한 풋내기들이었고, 몇몇 제자들의 무공은 아직은 그리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장문인인 신검무적과 낙일방을 제외하고는 뚜렷하게 믿을 만한 고수가 없었다. 전흠이 비록 무공에 새롭게 눈을 뜨고 금령단을 복용하여 내공이 일취월장했다고 해도 아직 금령단의 약효를 완전히 소화시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형산파의 사결이라면 몰라도 오결검객의 상대가 되기에는 미흡한 실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형산파의 오결검객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장문인인 신검무적과 낙일방, 그리고 자신 뿐인데, 이들 세 사람 만으로 과연 형산파와의 격돌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성락중은 오랜 기간 동안 형산파에 기산취악의 치욕을 설욕할 기회를 기다려 온 사람이었다. 하나 막상 가까운 시일 내에 그들과의 대결이 실현될 가능성이 보이자 절로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종남파에게 형산파는 거대한 벽(壁)이나 마찬가지였다. 열 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로 그 거대한 벽과 정면으로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그와는 다른 것 같았다.

진산월은 이미 화산파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던 초가보와의 처절한 격전 끝에 승리를 일구어 냈고, 강호에 재출도해서도 크고 작은 험악한 싸움을 수없이 치루어야만 했다. 뿔뿔이 흩어진 문파 제자들을 하나씩 모아 마침내 화산파조차 두려워하던 막강한 초가보를 물리쳤던 그가 형산파와 격돌하는 것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종남산을 떠나올 때부터 이미 그 일을 각오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일은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사 년 전에 군림천하의 꿈을 꾸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그렇게 결정지어졌던 것이다.

이제 성락중도 진산월의 마음가짐이 어떠한 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끝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진산월의 결연한 각오를 알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파의 선배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서, 성락중은 다시 한 번 마음 깊숙이 진산월에게 감복했으며,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그와 길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새삼 굳게 다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뱃전에 서서 강물을 응시한 채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멀리서 한 채의 배가 그들이 탄 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크고 호화로운 배였다. 배의 선단에는 파란 색 바탕에 노란 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남담(南譚)>이라고 쓰인 깃발이 강바람에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뱃전에 나와 있던 동중산이 배에 펄럭이는 깃발을 유심히 보더니 진산월에게 다가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담기(南譚旗)는 강남 담씨세가의 독문표기입니다. 특히 저처럼 남담이란 글자를 금색 원이 감싸고 있는 것은 당대의 가주가 타고 있는 배를 뜻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씨세가라면 일전에 만난 적이 있던 강남절품도 담중호가 가주로 있는 가문으로, 강남의 제일가는 명문세가였다. 진산월은 담중호와 인사를 나누고 구궁보까지 동행하기는 했으나, 그와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눈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진산월 일행이 탄 배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모습이었다. 높다란 배의 갑판에 담중호와 복마쌍룡도 여씨 형제가 나란히 서서 진산월이 탄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담중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였다.

“진 장문인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세가로 돌아가다가 멀리서 진 장문인이 탄 배를 보고 잠시 인사라도 나눌까 하여 배를 돌렸소.”

가깝다고는 하지만 오 장은 족히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소곤거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답례했다.

“반갑소. 그렇지 않아도 별다른 인사도 없이 헤어져서 나도 아쉬움을 느꼈던 참이었소.”

“괜찮다면 잠시 내 배로 올라와서 차라도 한 잔 하시지 않겠소?”

담중호가 진산월을 자신의 배로 초대하자 진산월은 선뜻 승낙을 했다.

곧 이어 남담선(南譚船)이 진산월이 탄 배에 바짝 붙었고, 사다리가 내려졌다.

동중산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답게 자신이 먼저 배 위로 올라와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진산월을 오르도록 했다. 동중산과 진산월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자신들이 탄 배에 남아 있었고, 동중산을 대동한 진산월만이 담중호와 여씨형제의 안내를 받으며 선상(船上)에 자리를 잡았다.

막상 올라와보니 담씨세가의 배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호화로웠고, 손님을 맞이할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선상의 가장 높은 곳에는 차양이 쳐진 야외석까지 마련되어 있어, 진산월은 그곳에 마련된 고급스런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고 동중산은 그의 뒤에 시립했다.

진산월이 자리에 앉자 담중호도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고, 마찬가지로 여씨형제도 호위하듯 그의 뒤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복마쌍룡도 여씨형제라면 강남 무림에서도 상당히 널리 알려진 당대의 고수들인데, 담중호를 대하는 모습은 정중하면서도 공손하기 그지없어서 오랫동안 주인을 따르는 충복을 보는 것 같았다.

배 한쪽에서 시비가 나와서 차를 따르자 담중호는 자신이 먼저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진산월에게 권했다.

“이것은 본 가에서 가져온 여래선(如來仙)이라는 차요. 용정(龍井)과 철관음(鐵觀音) 등 몇 종의 차를 배합하여 만든 것인데, 그런대로 담백한 맛이 있어서 내가 즐기는 것이라오.”

진산월은 차향을 맡고는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은은한 맛이 코끝을 스치더니 이내 입안에 그윽한 풍미가 느껴졌다.

진산월은 차 한 잔을 다 마시고는 이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차로군. 아련한 맛이 입안을 감돌다 사라지니 절로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소.”

담중호는 빙긋 웃었다.

“진 장문인이 다도(茶道)에도 조예가 깊은 줄은 미처 몰랐소. 여래선의 진가를 알아주니 주인 된 입장에서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담중호가 다시 차를 따르자 진산월은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음미했다. 새파란 강물이 넘실거리는 강 위에서 끝없이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좋은 차를 마시고 있으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듯 했다.

진산월은 다시 한 잔의 차를 모두 마신 다음 담중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담 가주께서 일부러 가던 배를 돌려서 나를 찾아온 것은 단순히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만은 아닐 듯 한데, 내게 다른 용무가 있으시오?”

진산월의 직설적인 물음에 담중호의 얼굴에 약간은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진 장문인의 눈이 워낙 날카로워서 숨기지 못할 줄을 알았소. 사실은 진 장문인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담중호의 묵직한 시선이 진산월의 두 눈에 고정되었다.

“진 장문인은 이번에 무당산에서 열리는 대집회에 참석하기위해 무당산으로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소.”

진산월은 굳이 숨길 일이 아니기에 순순히 시인을 했다.

“그럴 예정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여정에 한 사람을 동행시켜 주셨으면 하오.”

뜻밖의 말에 항상 냉정하고 침착했던 진산월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친분이라고 해봐야 지금까지 한두 번 대면한 정도에 불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한 사람을 동행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눈으로 담중호를 바라보았다. 담중호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부탁이 무리한 것이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상대에게 무례한 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런 부탁을 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담중호는 뒤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선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린 젊은 여인이었다. 여인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가 상당히 인상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와서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을 다시 뵙게 되니 반갑군요.”

진산월은 눈 앞의 미녀를 알아보고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보니 담 소저이셨구려. 잘 지내셨소?”

“덕분에.”

그녀는 짤막하게 말하고 담중호의 옆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일전에 소호에 있는 모산도의 추한산장에서 만났던 도봉황 담옥교였다. 그녀는 담중호의 하나뿐인 여동생으로, 담중호가 몹시 애지중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나 워낙 짧은 동안의 만남이었고, 그녀와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하고 헤어졌기에 진산월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담중호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동생에게서 얼마 전에 진 장문인을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소. 그런데 어렵게 만난 진 장문인과 별다른 교분도 맺지 못하고 헤어져 속상해 하는 것을 보고 한바탕 웃고 말았소.”

담옥교를 바라보는 담중호의 얼굴은 무뚝뚝한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환한 표정이 떠올라 있어, 그가 얼마나 자신의 동생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 이 아이는 무당파에서 열리는 대집회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진 장문인께서 그곳에 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신도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내가 어렵사리 진 장문인께 부탁을 드리게 된 것이오.”

진산월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진산월의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맑고 투명한 시선이었다. 그녀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는 몰라도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눈빛에는 아무런 사심(邪心)도 담겨 있지 않은 듯 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무당산의 집회에 참석하려는 건 사실이오. 하지만 그 일은 내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 아니라 본 파의 중대사 때문이오. 그래서 본 파의 제자가 아닌 외인과 동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담 소저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진산월이 완곡하게 거절의사를 밝히자 담옥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에 수긍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부탁을 거절해 서운해 하는 것인지 의미를 알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고, 대신 담중호가 그의 말을 받았다.

“진 장문인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사실 내 부탁이 무리한 것이라는 사실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원래는 내가 동생을 무당산까지 데려다 주려 했는데, 본 가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진 장문인께 신세를 지려 했던 것이오.”

“…….”

“동생으로서는 꼭 무당산에 가야할 일이 있고, 나도 본 가의 사정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형편이오. 동생은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는데, 여자 혼자의 몸으로 강호의 고수들이 운집할 무당산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오라비로서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소. 그러다 운이 좋게도 진 장문인이 타고 있는 배를 발견하고 급히 배를 돌리게 된 거요. 염치가 없는 줄은 알지만, 진 장문인의 선처를 부탁드리겠소.”

담중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진산월도 무조건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강남제일세가인 담씨세가의 당대 가주가 자신의 신분과 체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마 담중호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담옥교를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담 소저께서 무당산의 집회에 꼭 참석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담옥교의 눈이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곳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담옥교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결정했는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 스스로 밝힐 수 없군요. 하지만 제가 무당산에 가게 되면 제가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그녀의 말인즉,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자신을 동행시키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진산월로서는 그녀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가 은밀히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일수도 있고, 헤어진 지 오래인 친구일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연 그녀와의 동행을 허락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그 점에 대해 진산월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거절하는 것이 이치상으로 합당한 일이었지만,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담씨세가의 가주가 몇 번씩이나 자존심을 굽히고 사정을 하는데 매몰차게 뿌리친다는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부탁이란 것이 여정에 여인 한 명을 동행시켜 달라는 것이었으며, 그 이유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거절할 명분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런 일로 담씨세가와 척을 지게 되어 원치 않은 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호에서의 은원(恩怨)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일로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종남파가 비무행을 시작하고 머나먼 강남까지 온 것은 단순히 형산파를 압박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신세에서 벗어나 강호의 유수한 명문정파들과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담씨세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강남 제일의 명문세가이고, 담중호 본인은 강남제일도객으로 불리는 절세의 고수였다. 약간의 성가심만으로 이런 담씨세가와 친분을 맺을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상대의 부탁을 수락해야 할 상황이라면 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무당산까지 담 소저와 동행하겠소. 그런데 무당산에 도착한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담중호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했다.

“진 장문인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무당산에 가면 본 가와 친분이 두터운 분들이 계실 테니 동생은 그들과 함께 움직이게 될 거요. 그러니 무당산에 도착한 이후에는 굳이 진 장문인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담옥교도 진산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최대한 진 장문인과 종남파 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추한산장에서 보았던 담옥교는 상당히 냉정하고 도도한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예의 바르면서도 조용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다른 여인을 보는 것 같았다.

“사례 받을 일은 아니오. 다만 일정은 우리가 정한 대로 따라주셔야겠소.”

“당연한 말씀이에요.”

장내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담중호는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으면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진 장문인과 좀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것이 정말 아쉽구려. 나중에라도 꼭 본 가를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소.”

진산월은 의외로 선뜻 수락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당산에서의 일이 끝나면 강소성 쪽으로 갈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귀 세가에 신세를 지도록 하겠소.”

담중호는 반색을 했다.

“진 장문인께서 오신다면 본 가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모시겠소. 꼭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겠소.”

뒤에서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동중산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진산월 일행이 종남파를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 지나서 문파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중산은 무당산에서의 집회가 끝나면 바로 종남파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씨세가는 강소성의 중심도시인 금릉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무당산에서 금릉에 들리기 위해서는 상당히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그런데도 진산월이 담중호의 방문 요청에 반승낙을 한 것은 청조각이 있는 보타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금릉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용단죽과의 만남 이후 진산월은 청조각에 들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만약 모용단죽의 예상대로 청조각에 육합귀진신공의 하나가 남아 있기라도 한다면 그 신공을 회수하는 일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동중산이 진산월의 말에 의아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담중호는 진산월에게 몇 번이나 꼭 담씨세가를 찾아달라는 말을 하고는 담옥교를 남긴 채 떠나갔다. 자신들의 배로 돌아와서 멀어지는 남담선을 바라보고 있던 동중산이 담옥교가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진산월에게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담 가주가 정말 세가에 바쁜 일이 있어서 동생을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 그의 의도가 무엇이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

“그야 그렇지만…….”

동중산은 담옥교의 갑작스런 합류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나직하면서도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이번 일을 거절한다 할지라도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려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오히려 담 소저를 우리의 옆에 두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그를 멀리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중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적(敵)은 가급적 가까이 두라는 옛 격언을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제가 갈수록 소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매사에 신중한 것은 좋지만,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담 소저에 대한 일은 너에게 맡기겠으니 그녀의 행동을 잘 지켜보도록 해라.”

동중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시오, 장문인.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본 파에 누(累)가 되지 않도록 제가 잘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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