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10화 (2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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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6권 육합귀진(六合歸眞)편 : 10화


제 271 장 심야풍정(深夜風情)

여정은 생각외로 순조로웠다. 날씨는 쾌청했고, 강물은 잔잔했으며, 바람은 순풍(順風)이었다. 은근히 분란을 만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담옥교도 대부분의 시간을 선실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어서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위수의 강물 위에서 흑갈방의 습격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룬 기억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 수상여행(水上旅行)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던 일행들도 평온하고 쾌적한 뱃길이 이어지자 조금씩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의창까지 배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의창에서 배를 내려 형산(荊山)을 거쳐 보강(保康)을 지나는 것이 무당산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월 하순이면 무당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다음날 아침이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했다.

“들어오시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배를 몰던 늙은 뱃사공이었다.

이 배는 구강 일대에서 장강을 왕래하던 배로, 뱃사공은 오랫동안 뱃일을 해온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이 배를 통째로 빌려 타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조용히 배를 몰던 뱃사공이 이른 아침에 갑작스럽게 진산월이 있는 선실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뱃사공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타 있었고, 잔주름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진산월이 묻자 뱃사공은 주름진 눈 깊숙이 박혀 있는 유난히 탁한 눈동자로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윽고 갈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무창(武昌)과 한양(漢陽)을 지날 거외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창의 황학루(黃鶴樓)는 들리지 않을 생각이시오?”

황학루는 무창뿐 아니라 중원 전체에 명성이 높은 누각이었다. 그 절경의 빼어남을 칭송하는 싯구는 무수히 많았고, 시인과 묵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무창을 지나면서 황학루를 들리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들리지 않을 거요.”

뱃사공은 다시 물었다.

“무창 맞은편의 한양에는 귀원선사(歸元禪寺)라는 사찰이 있소. 이곳의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은 인세(人世)에 다시없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요. 귀원선사에 들려 오백나한상을 구경하며 인간세상의 오욕칠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것은 어떻소?”

진산월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이 없소.”

“한양을 조금 지나면 연자와(燕子窩)라는 곳이 있소. 그곳의 대곡주(大曲酒)는 강소성의 쌍구대곡주(雙溝大曲酒)에 못지 않은 천하의 명주(名酒)요. 연자와에서 대곡주를 마시며 구비치는 장강의 구절양장(九折羊腸)하는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오.”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뱃사공의 주름진 눈을 응시했다.

뱃사공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다만 뜻 모를 무거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후우……. 당신은 고집이 세구려.”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은 진산월의 앞에 있는 작은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되겠소?”

“그러시오.”

뱃사공은 의자에 앉으며 허리를 쭉 폈다.

“후우. 평생을 강바람을 맞으며 살았더니 아침만 되면 온 몸의 뼈마디가 쑤셔오는구려. 이해해 주시오.”

“나는 상관하지 말고 편한 자세로 계시도록 하시오.”

“고맙소.”

뱃사공은 뻐근한 어깨와 다리를 몇 번 주무르더니 예의 탁한 눈으로 진산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의 깊은 주름 하나하나에 평생을 노질을 하며 고단하게 살아온 사공의 굴곡진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 했다.

한동안 말없이 진산월을 보고만 있던 뱃사공이 이윽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맘때의 동정호(洞庭湖)는 수량이 많아서 장강과 넓은 지역에 접해 있소. 특히 의창으로 가기 위해서는 홍호(洪湖)를 지나야 하는데, 그 홍호는 동정호의 물이 불어날 때면 동정호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하나의 호수처럼 붙어있게 되오.”

늙은 뱃사공의 말은 넋두리인지 아니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돌이켜보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제법 노련한 사공들도 자칫 한눈을 팔다가는 홍호를 지나 의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동정호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곧잘 있을 정도요. 이 일대의 장강은 워낙 강폭이 넓고 물길이 사방으로 갈라지는데다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이 있어서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복잡한 수로에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오.”

“…….”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동정호에는 장강의 모든 수로를 관장하는 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의 본산(本山)이 있소. 그 총채주(總寨主)는 천교자(天蛟子) 방산동(房山童)인데, 성정이 포악하고 손속이 잔인해서 장강 일대에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소.”

천교자 방산동은 진산월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장강십팔채는 엄밀히 말하면 장강 일대의 수적(水賊)들의 연합체였다. 하나 그 규모가 크고 장강의 전역을 영역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강호의 어떤 방파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특히 방산동이 총채주가 된 후로 장강십팔채는 급속도로 그 세력을 키우고 있어서 장강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 있는 문파들이 그들의 횡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늙은 뱃사공은 왜 갑자기 장강십팔채와 방산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뱃사공은 진산월이 자신의 말을 듣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구강을 떠날 때 사공들 사이에서 방산동이 총집결령을 발동하여 장강십팔채의 모든 인원들을 동정호의 군산(君山)으로 모으고 있다는 말이 풍문으로 떠돌았소. 뜬소문이라는 사람도 있고, 방산동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이려고 큰일을 획책하는 모양이라며 소곤대는 자들도 있었소. 그런데 오늘 새벽에 장도호(長渡湖)를 지날 때 장강십팔채의 비조선(秘潮船)이 내 배 주위를 얼쩡거리는 것을 보았소.”

비조선은 장강을 다니는 모든 배들 중에서 가장 빠르고 민첩한 배로, 장강십팔채에서 탐색선으로 주로 사용하는 배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홍호 쪽에서 이곳을 지나던 배가 내 배를 보더니 급히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았소. 그 배의 주인은 나와 안면이 있어서 내 배 근처를 지나칠 때면 일부러라도 배를 가까이 하여 아는 척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내 배를 피했던 거요.”

늙은 뱃사공의 흐릿한 시선은 진산월의 무심한 얼굴에 한동안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늙고 노쇠해서 머리가 굳어진 나도 이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소.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내 배에 타고 있는 손님들이 누구인지 깨닫고 나니 안개가 걷히듯 모든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겠더구려.”

진산월은 말없이 뱃사공의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거요?”

“천교자 방산동은 귀하의 일행들을 노리고 있소. 군산에서 반나절만 배를 몰면 바로 홍호요. 그들은 아마도 홍호에서 진을 친 채 당신들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방산동이 왜 우리를 노린단 말이오?”

“방산동은 수룡신군 황충의 제자요.”

“황충?”

진산월이 되묻자 늙은 뱃사공은 물끄러미 그를 보더니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구려. 황충은 얼마 전에 귀 파의 고수의 손에 죽지 않았소? 방산동은 자신의 사부의 복수를 하려는 거요.”

진산월로서는 다시 한 번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얼마 전부터 강호상에서 그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소. 정확한 건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안에서 종남파가 관련된 큰 싸움이 있었고, 그 와중에 수공의 제일가는 고수인 황충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구려.”

진산월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섬서성에서는 그 소문이 파다하여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나, 워낙 일 자체가 은밀하게 진행되었기에 자세한 내막이 알려지지 않아서 반신반의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섬서와 하남 일대에서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이제 겨우 다른 곳에도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진산월 일행은 구궁보에 들리기 위해 강남 쪽에 있느라 미처 그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 비해 장강을 오르내리느라 여러 가지 소문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뱃사공이 오히려 그들보다 빨리 그 소문을 듣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었으나 뱃사공도 그저 그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만 귀동냥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황충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아니었다.

뱃사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배를 타고 장강을 계속 가는 것은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일전에 위수에서도 흑갈방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나 그때는 삼월보의 셋째 보주인 양중초의 도움과 전흠의 맹활약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흑갈방 측에 뛰어난 수공의 고수가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상대가 너무 달랐다. 장강십팔채는 장강을 무대로 활동하는 무리들이라 그들 중에는 수공의 고수가 적지 않게 있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총채주인 방산동은 수공에 관한한 천하제일이라는 황충을 사부로 둔 인물이었으니 자신들이 수공으로 이득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이쪽은 전흠 외에는 수공을 익힌 자도 없었고, 배도 한 척 뿐이었으니 만약 홍호같이 넓은 호수에서 천라지망을 치고 있는 장강십팔채의 배들에게 포위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무리 진산월의 무공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당해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뱃사공도 그걸 우려해서 무창이나 한양에서 배를 내릴 것을 은근히 권했던 것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이 늙은 뱃사공의 주름진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인께서 처음 보는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늙은 뱃사공의 눈가에 회한에 가득한 빛이 떠올랐다.

“이게 모두 나의 못난 아들 녀석 때문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늙은 뱃사공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아정(阿定)이라는 아들놈이 하나 있었소.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겠다고 날뛰더니 어느 날인가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기고 말았소.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사공 일을 그만둘 수 없어서 혼자 마음속으로 애만 끓이고 있었소.”

늙은 뱃사공의 낮게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조용한 선실을 잔잔하게 울려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그 놈 걱정에 시름시름 앓고 있던 어느 날이었소. 장강을 건너던 손님 중 한 사람이 시름에 잠긴 내 얼굴을 보았는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었소.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림의 고수인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인상이 너무 부드럽고 표정이 온화해 보여서 용기를 내어 사정을 이야기 했소. 그 사람은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자신이 한 번 알아보겠다며 내 아들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자세히 물어보았소.”

늙은 뱃사공은 탁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렸소. 하나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소. 나는 역시나 하고 실망하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육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사람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소. 추레한 몰골을 한 내 자식 놈을 끌고 말이오.”

선실 천정을 바라보는 늙은 뱃사공의 눈에 뿌연 물막이 피어올랐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나와 헤어진 육 개월 동안 내 아들 녀석을 찾아 장강 일대의 큰 도시들을 뒤지고 다녔던 거요. 결국 무창(武昌)의 뒷골목에서 흑도무리들의 졸개노릇을 하고 있는 아들을 찾아내어 데리고 온 것이었소. 정말 놀라운 사람 아니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낯선 뱃사공의 사연을 듣고 육 개월이나 타지의 뒷골목을 헤매다니 정말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거요. 허허…….”

“…….”

“아들 녀석은 무창에서 모진 고생을 한 탓인지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몇 년 후에 병을 얻어 먼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내 아들을 찾아준 그 바보 같은 사람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의 부드러운 미소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단 말이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진산월은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늙은 뱃사공은 물기어린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임장홍이라고 했소. 몰락해 버린 종남파의 명목뿐인 장문인이니 굳이 기억할 것 없다고 허허거리며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려.”

늙은 뱃사공의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에 한 줄기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 또한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선사(先師)의 옛 인연 한 가닥이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져왔다. 세상의 인연이란 이런 것이었다. 언제 어느 때 길게 이어진 인연의 가닥이 누군가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는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진산월은 동중산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동중산의 생각도 진산월과 마찬가지였다. 모르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알게 된 이상 굳이 제발로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수공의 고수들이 즐비할 게 뻔한 수적들의 본진과 수상(水上)에서 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을 것이다.

결국 일행은 한양에서 내려 육로(陸路)를 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방산동이 무리를 이끌고 육지까지 뒤쫓아 온다면 그때는 그들에게 종남파의 무서움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늙은 뱃사공의 안위였다. 졸지에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 방산동이 늙은 뱃사공에게 무슨 횡포를 부릴지 몰랐다. 하나 몸을 피하라는 동중산의 말에 늙은 뱃사공은 주름진 눈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평생을 장강에서 배를 타며 지내온 늙은이요. 달리 갈 곳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소. 비록 그들이 포악한 수적들이지만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늙은이를 해코지 해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요.”

“하지만 방산동은 포악한 자요. 무슨 화풀이를 할지 모르오.”

“장강십팔채는 어지간한 일로는 뱃사공을 건드리지 않소. 배에 탄 손님들은 몰라도 뱃사공을 건드리면 자신들의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 늙은이의 걱정은 할 필요 없소.”

늙은 뱃사공은 몇 번이나 거듭 만류하는 동중산의 손을 뿌리치고 진산월 일행을 내려둔 채 홀로 배를 저어 구강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진산월은 늙은 뱃사공의 안위를 조사하여 그가 무사히 구강으로 돌아가 사공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한양에서 배를 내린 진산월 일행은 천문(天門)을 거쳐 경산(京山)을 지나 대홍산(大洪山)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길이 잘 닦인 관도(官道)로 가려면 형문(荊門)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너무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관도보다 편한 길은 아니었으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가는 것은 또 그만의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한양에서 여러 필의 말을 구입하여 길을 재촉하니 뱃길에 비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동중산과 전흠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장강십팔채의 추적을 경계하여 뒤쪽을 수시로 확인했으나, 그날 저녁이 되도록 별다른 이상함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어두워질 즈음, 그들은 한양에서 조금 떨어진 계마구(系馬口)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장강에서 한수(漢水)로 이어지는 지류가 지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말로 갈아탔기 때문에 이런 특이한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계마구를 한 바퀴 둘러본 동중산이 난감어린 표정으로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객잔이 제법 많기는 하지만 비어 있는 곳이 없어서 우리가 모두 묶을만한 마땅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마방(馬房)이라도 알아볼까요?”

마방은 말을 보관하는 곳으로, 계마구처럼 많은 말들이 있는 곳이면 상당히 큰 규모의 마방들이 존재한다. 넓은 초지(草地)에서 말을 키우는 마장(馬場)과는 달리 마방은 마굿간을 비롯한 건물 위주로 되어 있어서 당연히 외부 손님들을 접견할 장소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규모가 큰 마방이라면 오히려 여느 객잔보다 화려하고 잘 차려진 객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림의 명성이 알려진 고수들이나 지방의 유력인사들 중에는 객잔보다 마방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날이 포근하고 이곳의 공기도 무척 맑구나. 노을이 유난히 붉은 걸 보니 날도 쾌청할 터이니 노숙(露宿)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동중산은 난색을 표했다.

“우리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사고와 담 소저까지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멀쩡한 남의 마방에 풍파(風波)를 불러 오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동중산은 즉시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했다.

진산월은 혹시라도 장강십팔채의 무리들이 야습(夜襲)을 해올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선의로 자신들을 머물게 한 마방이 한바탕 피로 씻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인적이 드문 야산에서 노숙을 하는 것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에도 훨씬 더 부담이 없고 홀가분할 것이다.

진산월은 어느 쪽으로 가야 노숙을 하기 좋은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궁리하고 있는 동중산을 좀 더 가까이 불렀다.

“그나저나 그것은 알아보았느냐?”

동중산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송 노인(宋老人)의 말이 사실인 듯 싶습니다.”

송 노인은 그들을 이곳까지 태워준 늙은 뱃사공이었다.

진산월은 동중산에게 송 노인에게서 들은 종남파와 황충의 격돌에 대한 사건을 알아오게 했는데, 동중산은 객잔을 찾아다니는 와중에도 솜씨 좋게 주위의 소문을 수습해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노해광 사숙조와 유화상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싸움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황충이 끼어들 정도로 확대되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황충이 죽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된 모양입니다.”

“음. 본산에는 황충을 상대할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었을 텐데, 노 사숙께서 어떻게 황충을 제거했는지 모르겠군.”

동중산의 외눈이 어느 때보다 민활하게 반짝거렸다.

“노 사숙조께서는 누구보다도 심계가 깊은 분이시니 현명한 대처를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워낙 은밀하게 벌어진 터라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사태가 진정되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과연 그 정도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을지 의심스럽구나. 황충의 제자가 우리에게까지 적의를 품고 달려들 정도면 본산에서도 무언가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노 사숙조와 소 사숙께서 계시니 다소간의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큰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분들을 믿어보시지요.”

진산월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동중산의 말대로 노해광과 본산에 있는 소지산 등을 믿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노 사숙이라면 지산과 정해를 잘 다독거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진산월은 본산에 자신이나 낙일방 같은 수준의 절정고수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성 사숙의 말씀대로라면 하동원 사숙이 본산에 합류했을 테니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실 것이다. 아! 이럴 때는 본 파의 인원이 너무 적고 믿을 만한 우호세력이 없는 것이 두고두고 안타깝구나.’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함이 감돌았다. 동중산은 진산월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또한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용기를 내어 짐짓 자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 파의 역량이라면 앞으로 이삼 년 내에 강호의 어느 문파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을 탄탄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고난이 훗날 본 파를 더욱 강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테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본 파는 이런 일에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진산월은 가만히 동중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 말이 맞다. 그들이 나를 믿고 있는 만큼 나도 그들을 믿어야겠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이상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동중산이 노숙할 자리로 고른 곳은 숲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얕은 구릉 위였다. 몇몇 사람들이 숲 근처의 평지를 놔두고 왜 이런 장소를 골랐는지 다소 의아해 하기도 했으나 진산월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장강십팔채의 야습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장소를 선택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쾌히 승낙을 했다.

곧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되고 몇 개의 모닥불과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임영옥의 옆에 앉았다.

“야숙(野宿)은 오랜만이지?”

임영옥은 조용히 대답했다.

“사 년 전에 무림맹의 집결지로 갈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군요.”

“그래. 백토강이었던가?”

임영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산월도 더 이상은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무림맹의 방침에 따라 하락지단의 집결지로 향했던 여정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기억이었다. 백토강에서 삼색귀파 호용의 암습 때문에 일정을 지체하여 무림맹에 합류하지 못했고, 결국 다음 집결지인 형자관으로 가다가 서장 나습고찰의 고수들에게 습격을 당해 임영옥과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일은 그들에게 참으로 커다란 상처를 남겼으며,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흔들리는 모닥불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임영옥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임영옥은 진산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불빛 아래 비추이는 사형의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모처럼 만이군요.”

“이상해?”

“아니에요. 정말 보기 좋아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내 표정이 어때서요?”

“금시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야.”

임영옥은 희미하게 웃었다. 모닥불에 비추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름과 동시에 눈가에 살짝 물기가 내비쳤다.

“사형의 웃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울고 싶어졌어요.”

“왜?”

“너무 좋아서.”

진산월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그를 보며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웃어주세요.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산월은 억지로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이제 말해 봐요. 무슨 생각을 했기에 웃었던 거예요?”

“별거 아니야. 그저 옛날 일이 떠올랐을 뿐이야.”

“옛날 일이라뇨?”

진산월은 아무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임영옥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사형은 그때 일을 생각했어요? 그날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노숙했던 날…….”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영옥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진산월이 종남파로 들어온 지 삼 년쯤 지난 어느 겨울에 두 사람은 뜻하지 않은 노숙을 한 적이 있었다.

몰락할 대로 몰락해서 문하제자도 거의 없는 텅 빈 문파의 장문인이 된 임장홍은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 가끔 외부로 나가 몇 달씩 강호를 주유(周遊)하고는 했다. 하나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육 개월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에는 거의 칠팔 개월이 흘러도 그가 돌아오지 않아서 모든 종남파의 제자들이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나 뿐인 아버지를 기다리는 임영옥의 모습은 너무나 애절해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임장홍의 소식이 끊긴지 구 개월을 넘어서자 임영옥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산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가자 모두들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에게 밥이라도 제대로 먹이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는 입맛이 없다며 하루에 한 끼도 챙겨 먹지 않았다. 당시 종남파의 제자들은 진산월 외에 악자화와 매상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들이 모두 나이 어린 소년들인지라 그녀에 대한 뒷수발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임장홍을 그리며 초췌해가던 그녀를 보다 못한 진산월은 종남산 아래로 내려가 임장홍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산을 내려가 서안 일대에서 사부의 소식을 수소문하거나 관도 입구에서 하루를 꼬박 지내다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산으로 올라오는 일을 며칠이나 반복했다.

유난히 심한 눈보라가 천지사방을 휘몰아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진산월은 서안 일대를 헤매다 허탈한 걸음으로 종남파로 돌아오고 있었다.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그가 종남산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을 때, 그의 앞에 거짓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한데다 머리카락이 온통 눈발에 휘날려 꾀죄죄한 몰골로 변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산월은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가서 그녀를 안았다.

“사매. 무슨 일이야? 왜 여기까지 나온 거야?”

임영옥은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배꽃 같은 뺨은 어느 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형…….”

“사매.”

“아버님은 꼭 돌아오실 거에요.”

“나도 알아. 그래서 이렇게 마중 나가는 거잖아.”

임영옥은 추위로 새파랗게 질린 진산월의 얼굴을 처연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나는 충분히 참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사형도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려줘요.”

진산월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게 하지.”

임영옥은 손을 들어 진산월의 빰을 살짝 만졌다. 꽁꽁 얼어붙은 차가운 뺨이 손끝에 닿자 그녀는 몇 번이고 그 뺨을 쓰다듬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돌아가자. 날이 너무 춥잖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눈보라를 뚫고 종남산을 올라갔다. 하나 며칠 째 제대로 먹지 못한 그녀는 너무 허약해져서 눈길을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진산월은 지쳐 쓰러진 그녀를 업고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산을 올라야 했다. 그러다 눈보라가 거세어져서 도저히 더 이상 산을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진산월은 종남산 자락의 어느 작은 동굴을 찾아 그곳으로 그녀를 업고 들어갔다. 눈에 젖은 나무에 간신히 불을 붙여 모닥불을 만든 다음에야 그들은 겨우 지치고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진산월은 태을신공을 운기하며 추위를 몰아내려 했으나, 익힌 지 삼 년도 되지 않은 미약한 그의 내공으로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몰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모닥불 옆에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 서로 꼬옥 끌어안고 밤을 지새웠다.

밤새 진산월은 잠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런 상태에서 잠들었다가 모닥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몇 번이나 졸다가 깨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태을신공을 운기하던 진산월은 문득 누군가의 외침소리를 들었다.

“산월! 사매!”

아련히 들리는 그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진산월은 어느 새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멀리서 자신과 임영옥을 애타게 찾는 악자화와 매상의 목소리를 들었다.

진산월은 황급히 임영옥의 몸을 살펴보고 그녀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음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가 태을신공을 운기하여 틈틈이 그녀에게 공력을 넣어준 덕분인지 그녀는 별 탈이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악자와와 매상을 부른 진산월은 본산으로 돌아와 삼일을 꼬박 앓아누웠다. 그가 삼일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부의 온화한 얼굴이었다.

“잘 잤느냐?”

사부는 마치 잠깐 외출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낮잠에서 깨어난 자식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물었다.

진산월은 멍하니 사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정말 모처럼 푹 잤습니다.”

사부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수고가 많았다.”

짧고 간단한 말이었으나, 진심이 담겨 있는 그 말을 듣자 진산월은 며칠 전의 혹독한 고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축하한다. 너에게 이제 세 번째 사제가 생기게 되었구나.”

진산월은 눈을 크게 떴다.

“사제를 구하셨군요? 어떤 녀석입니까?”

사부는 빙긋 웃었다.

“꾀죄죄하고 볼품없지만 제법 의지가 굳은 녀석이다. 본 파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누워있던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있습니까?”

사부는 새로운 사제를 보고 싶어 하는 진산월의 마음을 휜히 알고 있다는 듯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허허. 지금 태화각에 있을 것이다. 먼 길을 와서 피곤해 할 테니 네가 잘 보살펴 주거라.”

“그렇다면 닭죽이라도 끓여줘야겠군요.”

진산월은 사부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방문을 벗어났다. 그리고 태화각으로 달려가서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추레한 몰골을 한 작고 왜소한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그가 소지산을 처음으로 만난 순간이었다.

당시를 회상하고 있던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사부님께서 구 개월 넘게 돌아오지 않으셨던 것은 아마도 장강에서 송 노인의 아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군.”

임영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아버님께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여쭈어 보았는데, 아버님께서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단다’라고만 말씀하셨어요. 전후 사정을 보면 그때 송 노인의 아들을 구한 다음 소 사제를 만났던 것 같군요. 정말 묘한 인연이로군요.”

“사부님이 만들어주신 인연이지.”

“그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감정을 공유한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미소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임영옥은 진산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닥불이 비추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진산월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새 모두들 멀리 떨어진 다른 모닥불 주변에서 잠이 든 듯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임영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자신도 슬며시 눈을 감았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고, 밤공기는 따스했다.

임영옥은 눈을 감은 채로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사형.”

진산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왜?”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은 두서가 없었으나 진산월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는 반드시 그 시절처럼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임영옥의 눈꺼풀이 서서히 떠지며 아련한 눈동자가 불빛 아래 드러났다. 그녀는 넋두리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

“사형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

“밤새도록 웃고 떠들고 노래 불렀지요…….”

“…….”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진산월은 간신히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임영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검은 하늘을 보석처럼 밝히는 별빛들이 모두 그녀의 눈 안에 모여든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어 오는 것 같았다.

후두둑!

어디선가 산새 한 마리가 요란한 날개짓을 하며 검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임영옥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조심성이 없군요.”

진산월도 그쪽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성질이 급한 자들이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만도 용한 일이었지.”

“장강십팔채의 무리들일까요?”

“그렇겠지. 계마구에서부터 몇 명씩 조심스럽게 우리 뒤를 따라왔으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신중을 기하는 것 같더니 인원이 제법 모이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조심성이 없어지는군.”

“오늘도 많은 피가 흐르겠지요?”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영옥은 다시 애틋한 눈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렇게 좋은 날인데 너무 아쉽군요. 정말 모처럼 사형과 옛 일을 추억할 수 있었는데…….”

“본산으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잔치를 열도록 하지.”

그녀는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모두 모여서 말이지요?”

“그래. 본 파의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말이야.”

“정말 재미있겠네요.”

“그런 다음 우리끼리 며칠 주변을 돌아다니며 야숙을 하자고.”

그녀의 눈에서 수십 종류의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 둘만?”

“그래.”

“정말 기대가 되네요.”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해서 그때처럼 춥고 배고픈 야숙을 하지 않도록 할 거야.”

“음식도 미리 만들어가요.”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그렇게 되면 야숙이 아니라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아무려면 어때요? 사형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면 내게는 어떤 식이든 다 좋아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해. 모두 준비해 갈 테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몇 가지 음식을 입에 올렸다.

“녹두활어와 국화과자, 초향라도 좋고…… 무엇보다도 남전계퇴를 먹고 싶어요.”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여아홍도 한 병 준비해 가지.”

“그러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진산월이 돌아보니 동중산이 쭈삣거리며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진산월과 임영옥의 분위기를 깰 수 없어 망설이고 있던 모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동중산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쳐다보았다.

임영옥이 배시시 웃으며 동중산을 살짝 가리켰다.

“어서 가세요. 아까부터 사형에게 할 말이 있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데,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동 사질이 심술궂은 사고라고 흉볼지도 모르겠어요.”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진산월은 못이기는 척 그녀의 손짓을 따라 동중산을 향해 걸어갔다.

동중산은 황급히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장문인.”

“오래 기다렸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사숙조와 두 분 사숙, 사제들은 모두 준비가 끝났고, 담 소저에게도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진산월은 어둠에 잠겨 있는 구릉 너머의 한쪽을 바라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밤이 깊도록 움직이지 않기에 계속 망설이다 오늘밤을 넘기나 했더니 결국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강호의 소문대로라면 방산동으로서는 정말 많이 참은 걸 겁니다. 두 시진을 꼬박 숨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좀이 쑤실 만도 했겠지. 저렇게 온 사방으로 살기를 날리고 있는 걸 보니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구나. 소응과 손풍을 잘 돌보도록 해라.”

동중산은 조금 머뭇거렸다.

“소응은 괜찮은데, 손 사제가 자신도 한 손을 거들겠다며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본격적으로 본 파의 무공을 수련하다보니 부쩍 자신감이 생긴 모양입니다.”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배울 때까지는 남과 싸우는 것을 금하겠다. 이를 어길 시에는 본 파로 돌아가는 즉시 면벽(面壁) 일년의 벌에 처하겠다.’라고.”

손풍의 성격에 일 년 동안 면벽을 하라고 하면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고 할 것이다.

동중산은 손풍이 펄펄 뛰는 장면이 눈에 선했으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눈 먼 칼을 조심하도록 해라.”

“예, 장문인.”

동중산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성락중이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저들의 기세가 생각보다 매섭군. 장강십팔채라고 해도 수적들의 집단이라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들인줄 알았더니 상당수의 절정고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네.”

“눈 여겨 볼만한 고수가 대여섯 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와 낙 사질, 그리고 흠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는 제자들을 이끌고 먼저 떠나는 게 어떻겠나?”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사숙께 험한 일을 맡기고 혼자 편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성락중은 진산월의 성격에 적에게 등을 보이고 떠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성락중은 진산월의 얼굴을 무심코 살펴보다가 그의 안색이 그다지 밝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무언가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가? 손풍 녀석에게는 내가 한 번 더 따끔하게 말해 놓겠네.”

진산월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그들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방산동이 비록 성격이 포악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머리가 뛰어나고 간계에도 능한 인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상(水上)에서라면 모를까, 뭍에서는 아무리 장강십팔채의 고수들을 끌어 모은다고 해도 우리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결국 고수들을 취합해 습격을 해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성락중은 방산동에 대해서는 오늘 이전까지만해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진산월의 의견에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군. 아무리 수적들이라고 해도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신검무적의 명성쯤은 익히 들어보았을 텐데 말이지. 방산동에게 무언가 자신하는 게 있지 않겠나?”

“방산동이야 당연히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기세를 피우고 공격하려는 것이겠지요. 제가 신경 쓰는 건 그가 자신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과 수하들의 무공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번 습격으로 따로 노리는 게 있는 것인지…….”

진산월의 마지막 말은 거의 나직해서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나 성락중은 그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어둠 속에서 수많은 그림자들이 불쑥 일어나 그들이 있는 구릉을 향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2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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