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2화
제 273장 배후인물(背後人物)
임영옥은 거한이 나타날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거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 마치 내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야.”
거한은 매부리코에 유난히 짙은 눈썹을 하고 있었다. 그 눈썹 아래 검게 번들거리는 두 개의 눈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할 만큼 섬뜩한 것이었다.
임영옥은 그 살인적인 눈빛을 보고도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들은 잔뜩 몰려왔는데, 개를 풀어놓은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의아해하던 참이었지요. 당신이 방산동인가요?”
거한은 그녀의 말에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개주인이라. 그리 틀린 말도 아니군.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천교자 방산동의 악명은 장강 일대에서는 거의 사신(死神)과도 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녹림(綠林)의 총표파자(總票把子)인 십절산군(十絶山君) 사여명(司如命)과 함께 강산쌍패(江山雙覇)로 불리며, ‘강호의 모든 산은 산군이 호령하고, 강이란 강은 이무기가 쥐어 잡고 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더구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어 감히 그의 앞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담량을 지닌 자는 거의 없었다. 방산동이 장강십팔채의 총채주가 된 후 장강십팔채의 세력이 예전보다 몇 배나 강력해진 것에 그의 무시무시한 흉명(兇名)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 방산동이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가슴이 떨려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 하나 때문에 오늘 너무 많은 손해를 봐야만 했다. 그러니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임영옥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단 말이군요.”
“그래. 방해되는 자들을 치우기 위해 내 부하들이 애를 쓰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는 건 너다.”
임영옥은 슬쩍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의 손이 우연인지 머리 위에 꽂고 있는 봉황 문양의 비녀에 닿아 있었다.
“원하는 건 나인가요, 아니면…….”
방산동의 시선이 그녀의 눈을 지나 머리 위의 비녀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거리며 지나갔다.
“둘 다라고 해두지.”
그가 금시라도 임영옥을 향해 달려들듯 하자 유소응이 바짝 긴장하여 임영옥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방산동은 유소응을 보며 웃었다. 살기가 가득 담긴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비켜라, 꼬마야. 어른들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유소응이 절정 고수의 이런 진득한 살기에 정면으로 노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아무리 나이답지 않게 담대하고 침착한 성격이라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유소응은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것을 본 방산동의 검은 눈에 번들거리는 기운이 더욱더 강해졌다.
“재미있는 꼬마로군. 머리통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파헤쳐보고 싶구나.”
털이 수북하게 나있는 그의 커다란 손이 금시라도 허공을 가르고 유소응의 머리를 잡아올 것만 같았다. 유소응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으나 이번에도 역시 몸을 뒤로 피하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손에 들고 있던 견정검을 뽑아들었다.
창!
검집을 내던진 유소응은 견정검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고 자신의 몸 앞에 우뚝 세워들었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장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 방산동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소년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노련한 검객을 보는 것 같았다.
방산동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계속 피식거리며 웃었는데, 그때마다 한층 더 지독한 살기가 꿈틀거리며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곧 죽어도 종남파의 종자란 말이지? 어디 신검무적의 제자 피 맛이 어떤지 한 번 볼까?”
방산동이 성큼 앞으로 다가서자 유소응은 바짝 긴장하여 견정검을 앞으로 내뻗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응. 뒤로 물러나라.”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한 몇 마디의 말이었음에도 그 음성을 듣자 유소응은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어지며 편안한 심정이 되었다.
유소응은 견정검을 내리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방산동의 표정도 조금 변했다. 그는 원래 단숨에 유소응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손에 움켜잡으려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달려들려던 몸을 멈춰 세웠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기형도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한 사람이 천천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담담한 눈빛을 한 사나이였다. 어스름한 월광 아래 그의 한쪽 뺨에 나 있는 칼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를 보자 방산동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검무적…….”
진산월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임영옥을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늦었지?”
임영옥은 고개를 저었다.
“적절한 때에 왔어요.”
“저자들이 본 파의 무공에 대한 파해식을 익히고 있더군.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여 살펴보는 바람에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어.”
임영옥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들이 어떻게 본 파 무공의 파해식을 알고 있는 거죠?”
“일전에 장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아마도 서장무림이나 쾌의당에서 각 문파의 무공에 대해 오랫동안 상세한 연구를 했던 모양이야.”
“단순히 연구했다고 해서 파해식을 알아낼 수는 없어요.”
“첩자라도 있는 모양이지.”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한 게 아니었다. 당시 서안에서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소림과 화산, 개방의 고수들은 파해식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결국 나중에 각 파에 배반자가 있음을 알게 되어 어느 정도 의문은 풀렸으나, 아직도 각 파의 무공이 어느 정도까지 파해식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파해식을 만든 자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임영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본 파 무공을 어디까지 알고 있던가요?”
“장괘장권구식과 천하삼십육검, 그리고 유운검법의 상당수에 대한 파해식을 알고 있더군.”
임영옥은 누구보다 침착한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장괘장권구식과 천하삼십육검, 유운검법은 종남파 무공의 근간이 되는 것들이었다. 물론 종남파에는 그보다 뛰어난 무공들이 존재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최근에 진산월과 낙일방이 잃어버렸던 비급들을 입수하면서 얻게 된 절학들이었다. 진산월의 말대로라면 결국 최근에 얻은 무공들 외의 대부분의 무공에 대한 파해식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새로 진산월이 보강시킨 초식들에 대해서는 파해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굳이 그 점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종남파 무공에 대한 파해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각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산월이 자신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임영옥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 방산동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진산월의 행동에 분노하면서도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장중한 기도에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임영옥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유소응을 돌아보더니 그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이제 사부에게 맡기어라.”
유소응은 가만히 머리를 조아렸으나 그의 이마와 목덜미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비록 임영옥을 보호하기 위해 방산동을 막아서긴 했으나, 방산동의 살기가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순간의 기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신의 모공이 얼어붙고 솜털 한 가닥 한 가닥이 모두 곤두서는 듯한 그 질식할 듯한 기분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의기상인(意氣傷人)이나 의형살인(意形殺人)이라는 단어의 뜻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진산월은 유소응을 다독여 주고는 이내 방산동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방산동은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진산월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자신을 향해 아무 말도 없이 곧장 다가오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기형도를 뽑아들었다.
스릉!
섬뜩한 광망이 이글거리는 톱날모양의 도가 그의 손에 쥐어지자 삽시간에 장내가 진득한 살기로 뒤덮였다.
몇 마디 말을 물을 법도 한데, 진산월은 불문곡직하고 방산동을 향해 몸을 날리며 용영검을 휘둘렀다. 방산동 또한 입을 굳게 다문 채 기형도로 벼락같은 십이도(十二刀)를 날렸다.
주위 사방이 온통 검풍과 도영에 휩싸였다. 그들이 맞붙는 기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칠흑같은 어둠이 일시지간 물러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파파파팍!
소나기 같은 도기가 폭포수처럼 진산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 진산월의 몸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잉어처럼 도기 속을 유연하게 뚫고 방산동의 지척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방산동은 자신이 펼쳐낸 도초가 너무도 빠르게 허물어진 상태로 진산월의 접근을 허용하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진산월의 검에서 우윳빛 섬광이 폭죽처럼 솟구쳤다. 그러자 방산동의 도기가 순식간에 걷히며 한 줄기 혈화(血花)가 피어올랐다.
진산월은 어느새 용영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앞에는 목 부위를 난자당한 방산동이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이렇게 강할 줄은…….”
진산월은 그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방산동은 어디 있나?”
방산동은 그를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시뻘건 선혈이 그의 입을 메웠다. 결국 그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
체구가 큰 만큼이나 요란한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임영옥이 그의 옆에 다가와서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내려 보더니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저자는 방산동이 아니로군요.”
“그래, 방산동은 황충의 흡룡공을 대성하여 물 밖으로 나오면 피부에 작은 비늘 같은 것이 돋는다고 하더군. 하지만 저자는 정상적인 피부를 지니고 있었어.”
“그러면 저자는 누구인가요?”
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사람이 했다.
“그자는 아마 방산동의 최측근 수하인 혈염조의 삼조장(三組長)인 수라귀도(修羅鬼刀) 목영산(睦英霰)일 거예요. 그가 가끔 방산동의 대역(代役)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담옥교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를 상대했던 두 명의 고수들은 이미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결국 담 소저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었구려. 본 파 때문에 번거로운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을 사과드리오.”
“아니에요. 어차피 장강십팔채는 본 가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었으니 언젠가는 그들과 맞붙어야 했을 거예요. 그나저나 저 사람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겠어요?”
담옥교가 가리키는 곳에는 손풍이 한 명의 흑의인을 맞아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손풍의 머리는 풀어헤쳐져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전신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흡사 개울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낭패스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연신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용케도 손풍은 쓰러지지 않은 채 흑의인을 향해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손풍이 비록 십이경맥을 모두 타통하여 탄탄한 내공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해도 본격적으로 무공을 연마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알고 있는 초식이라고 해야 장괘장권구식 중의 몇 가지뿐이었으니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흑의인과 싸워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십이경맥이 모두 뚫려 어느 때보다 그의 신체가 강인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흑의인의 목적이 종남파 고수의 제거가 아니라 방산동으로 분한 자가 임영옥을 쓰러뜨릴 때까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큰 이유였다.
하나 워낙 현격한 실력의 차이가 있는지라 손풍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악에 받친 손풍이 수비를 도외시한 채 마구 주먹을 휘두르자 흑의인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해서 이리저리 그의 주먹을 피하며 그를 희롱하고 있었다.
지금도 손풍이 크게 휘두르는 주먹을 슬쩍 피하며 그의 옆구리를 갈고리 같은 손으로 가볍게 찔러대자 옷자락이 찢어지며 손풍의 갈비뼈 부근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흑의인이 사용하는 수법은 염라조(閻羅爪)라는 것인데, 빠르고 날카로운 위력을 지니고 있는 사파(邪派)의 유명한 조법(爪法)중 하나였다.
손풍의 몸이 주춤거리며 허리가 조금 꺾였다. 아마도 갈비뼈에 부상을 입어 상당한 통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손풍은 이를 악물고 다시 흑의인을 향해 주먹을 내뻗으려 했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측으로 일보 물러나라.
그 음성은 마치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처럼 나직하면서도 똑똑하게 들렸다. 손풍은 무심결에 그 음성을 따라 주먹을 내뻗다 말고 우측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흑의인의 구부러진 손이 아슬아슬하게 왼쪽 옆구리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풍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측으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그 손에 다시 옆구리의 같은 부위를 격중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는데, 그 부위를 다시 가격 당했다면 아무리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는 손풍이라 할지라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예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왔다.
-앞으로 두 걸음 성큼 내디디며 오강감계로 상대의 머리를 노려라.
오강감계는 장괘장권구식 중에서 손풍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초식들 중 하나였다. 음성의 주인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손풍의 몸은 그 음성의 지시를 따라 앞으로 전진하며 오강감계를 펼치고 있었다.
손풍의 오강감계는 제법 괜찮았으나 흑의인은 너무도 수월하게 슬쩍 옆으로 몸을 비틀어 간단히 피하고 말았다. 하나 손풍이 채 실망하기도 전에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몸을 좌측으로 회전시키며 영양괘각으로 상대의 안면을 가격해라.
손풍의 몸이 왼쪽으로 반쯤 선회하며 두 팔이 영양괘각의 식으로 흑의인의 얼굴을 노렸다. 원래 영양괘각은 산양이 뿔로 상대를 공격하는 동작을 응용한 것인데, 지금은 아주 적절하게도 아래에서 위로 상대의 턱을 가격하는 자세가 되었다.
흑의인은 뜻밖의 변초에 흠칫하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마지막 지시가 손풍의 귓전을 울렸다.
-전력으로 상대의 가슴으로 뛰어들며 삼비박룡을 펼쳐라.
손풍은 주저하지 않고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며 오른 주먹을 있는 힘껏 세 번 내질렀다.
흑의인은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놀랐다. 지금까지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공격만 일삼던 손풍이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정교한 몸놀림을 보여주더니 기습적인 일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흑의인은 황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염왕조가 손풍이 펼친 세 개의 주먹을 완벽히 봉쇄하자 손풍의 손에서 핏물이 솟아올랐다. 아쉽게도 손풍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공격을 했음에도 상대의 몸을 가격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손풍의 실력이 흑의인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 흑의인은 손풍의 벼락같은 연환 공세에 놀랐는지 다소 느긋했던 지금까지의 모습을 버리고 얼굴 가득 살기를 뿜어 올렸다.
“이 하루살이 같은 놈이…….”
하마터면 풋내기 중의 풋내기에게 가슴을 가격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흑의인이 막 손풍을 향해 살수를 쓰려할 때, 하나의 검광이 날아들었다.
그 검광이 어찌나 빠르고 유연했던지 흑의인은 몸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거니 눈을 뜬 채 자신의 몸이 검광에 갈라지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어놓으며 흑의인의 몸은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손풍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진산월을 보자 손풍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장문인…….”
용영검은 어느새 진산월의 옆구리에 매여져 있어 그가 조금 전 검을 휘둘러 흑의인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나, 손풍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일이 어찌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은밀히 전음(傳音)을 날려 싸우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도, 그리고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사람도 진산월임을 알았다.
한데 막상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명령을 어기고 남과 싸웠다는 사실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도 ‘면벽 일 년’의 네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를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말을 허투루 듣다니 무엄한 놈이구나.”
손풍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문인이 특별히 내린 명령을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어겨 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무당산에 도착할 때까지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완성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 말을 어긴 벌까지 해서 면벽의 기간이 이 년으로 늘어날 것이다.”
의기소침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손풍이 진산월의 말에 번쩍 고개를 쳐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인즉, 무당산에 갈 때까지 장괘장권구식을 모두 연마하면 면벽 일 년의 벌을 면해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손풍이 무어라고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진산월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서 빨리 장문인의 아량에 감사드리지 않고 뭐 하는가?”
어느새 다가왔는지 동중산이 그를 향해 눈짓을 하고 있었다.
손풍은 황급히 진산월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기필코 이른 시간 내에 장괘장권구식을 익혀서 장문인의 배려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은 말없이 슬쩍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주변의 상황은 거의 정리되어 있었다. 동중산이 상대했던 자는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이미 꽁무니를 뺀 상태였고, 성락중을 막아섰던 네 명의 흑의인들도 두 명은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고 다른 두 명은 도망친 후였다.
성락중은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진산월을 향해 다가왔다.
“별 일 없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사숙께선 생각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장강십팔채의 습격을 별다른 피해 없이 물리쳤음에도 성락중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자들이 아무래도 본 파 무공의 투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더군. 그걸 확인하느라 잠시 지체했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나누도록 하지요. 그보다 그들의 수뇌인 방산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성락중은 이곳에 자신들 외에 담옥교가 있기에 진산월이 화제를 돌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내 그의 말을 받았다.
“나도 그 점이 의심스럽기는 하네. 하지만 장강십팔채의 채주들 대부분이 오늘 목숨을 잃었으니 그 혼자로는 더 이상 다른 수작을 부릴 수 없지 않겠나?”
의외로 그 말에 담옥교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오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채주들은 절반도 되지 않아요. 그러니 방산동이 앞으로도 수작을 부릴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요.”
성락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내가 상대했던 자들이 채주들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래요. 이쪽 방향으로 왔던 자들은 모두 혈염조의 인물들이었어요. 나중에 가세한 인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그제야 성락중은 상황을 짐작하고 침음했다. 사실 그가 상대한 네 명의 고수들은 종남파 무공의 파해식을 알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무공 자체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결국 처음 장문인을 막아섰던 다섯 명과 낙 사질이 상대하는 홍포괴인만이 십팔채의 채주들이었단 말이로군.”
성락중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하자 담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습격한 고수들 중 제가 알고 있는 십팔채의 채주는 그들 여섯뿐이었어요.”
“결국 오늘의 싸움은 전초전에 불과한 셈이구려.”
담옥교는 전초전치고는 오늘 장강십팔채가 입은 타격이 너무 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비록 채주들은 여섯밖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방산동의 직속수하들인 황랑대와 흑수단, 혈염조의 고수들이 상당수 투입되었기에 장강십팔채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혈염조는 방산동이 가장 믿고 있는 수하들로 개개인이 모두 상당한 실력을 지닌 뛰어난 고수들인데, 오늘 이곳에서 삼분지 일 가까운 숫자가 비명횡사하고 말았으니 모르긴 해도 방산동의 속은 무척이나 쓰라릴 것이다.
성락중의 시선이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방산동이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수하들만 보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진산월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우리의 전력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든지…….”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입을 향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든지.”
성락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문인의 말은 방산동의 배후에 다른 인물이 있을 거라는 뜻인가?”
“방산동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수상(水上)이 아닌 육지에서의 싸움은 자신에게 승산이 별로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공공연하게 습격을 한 것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성락중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럴 법한 일이군. 그렇다면 방산동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도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서장의 세력이거나 아니면…….”
동중산이 무심결에 그의 말을 받았다.
“쾌의당.”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중인들의 표정은 검은 하늘만큼이나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늘의 싸움이 끝이 아닌 더욱 험난한 싸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중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장내의 싸움은 끝까지 낙일방을 괴롭혔던 강태독이 결국 두 명의 혈염조 고수들과 함께 낙일방의 주먹에 격살되면서 매듭지어졌다.
흑수단의 합공에 고전했던 전흠은 뒤늦게 싸움에 가세했던 두 명의 혈염조 고수들이 사태의 불리함을 알아차리고 꽁무니를 빼자 간신히 위급한 상황을 넘기고 나머지 흑수단의 고수들을 처치하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스렸다.
오월야(五月夜)의 고적함에 젖어 있던 구릉 지대는 온통 시뻘건 피와 처참한 시신들로 뒤덮여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때문인지 어둠은 더욱 짙어진 것 같았고, 봄밤의 적막감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공허하게 만들었다.
떠나는 일행들의 제일 뒤에서 마지막까지 장내를 둘러보고 있던 동중산은 피로 물든 산하(山河)에 마음이 무거워져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몸을 돌리던 동중산은 문득 한쪽에서 가늘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손풍을 목격하고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런가, 손 사제? 많이 다쳤는가?”
손풍은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얼굴 전체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로 범벅된 그의 두 눈가에는 엷은 물기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동중산은 덜컥 불안한 생각이 들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어서 말하게. 장문인과 사숙조께 말씀드리겠네.”
손풍은 억지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맷자락으로 눈자위를 훔치고는 힘겨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그 놈에게 열다섯 대나 맞았는데도 한 대도 못 때린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동중산은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손풍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