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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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6화


제 277장 세가풍운(世家風雲)

단계계수자동류(檀溪溪水自東流),

용구영주금하처(龍駒英主今何處).

임류삼탄심욕산(臨流三嘆心欲酸),

사양적막조공산(斜陽寂寞照空山).

삼분정족혼여몽(三分鼎足渾如夢),

종적공류세재간(蹤迹空留世在間).

단계는 여전히 동쪽으로 흐르는데,

용마와 영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물가에서 세 번 탄식하니 마음만 슬퍼지고,

지는 해는 쓸쓸히 빈산을 비추는구나.

천하삼분지계의 꿈은 아득하기만 했으니,

그 자취만 공연히 세상에 남아 있구나……

계마구에서 장강십팔채의 습격을 물리친 진산월 일행은 형문(荊門)과 의성(宜城)을 지나 양양(襄陽) 방향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날 이후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으나, 누구도 마음을 놓거나 방심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방산동이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오월 하순인지라 바람에 조금씩 더운 기운이 담기기 시작했고, 신록은 우거질 대로 우거져서 산천이 온통 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래 양양은 촉(蜀)의 명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이 은거했던 곳이어서 곳곳에 제갈량에 대한 우화나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지나고 있는 단계(檀溪)도 작은 개울에 불과하지만, 제갈량과 그가 모시던 유비에 대한 전설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비에게는 적로(的盧)라는 애마(愛馬)가 있었는데, 이 적로는 주인을 해롭게 하는 말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말로 바꿔 타기를 권했다. 하나 유비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거늘 어찌 말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단 말인가?”라며 적로를 계속 타고 다녔다.

어느 날, 유비가 유표(劉表)의 부하들에게 쫓겨 달아나다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유비는 적로를 몰아 단계의 계곡물을 헤치고 가려 했으나 적로가 계곡물을 두려워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비는 “적로야! 네가 정말 주인을 해치려 하느냐?”며 버럭 소리쳤고, 그 순간 적로가 단숨에 계곡물을 헤치고 반대쪽 언덕에 내려섰다고 한다.

그러한 전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낙일방은 작은 개울에 불과한 단계를 둘러보고는 실망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개울이라면 굳이 명마가 아니더라도 어떤 말이든 건널 수 있겠군.”

옆에서 그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동중산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당시에는 제법 큰 여울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아무려면 이런 얕은 개울을 가지고 그런 전설이 생길 리가 있겠어요?”

낙일방이 따라 웃자 옆에 있던 전흠이 퉁명스런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전설이란게 다 허황된 거지, 그걸 그대로 믿다니 한심한 녀석 같으니.”

“그래도 무언가 비슷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런 전설이 생긴 게 아니겠습니까?

전흠은 단계를 한 차례 휘둘러보았다.

“말 타고 건너가긴 했겠군. 조랑말이라도 이런 개울 정도는 건널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낙일방은 그저 웃고 말았다.

전흠은 계마구에서 장강십팔채 고수들의 합공에 고생한 후로 그것을 설욕할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특히 은근히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낙일방은 혼자의 힘으로 상대를 모두 쓰러뜨렸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어찌된 일인지 장강십팔채 고수들이 꼬리조차 보이지 않고 있으니 그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부렸기에 모두들 은근히 그를 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손풍은 아예 그의 곁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성락중은 전흠의 심통 사나운 얼굴을 잠시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진산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당산으로 가려면 곡성(谷城)까지 관도를 계속 이용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특별히 이쪽 길로 돌아가는 이유라도 있나?”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융중(隆中)에 잠시 들르려 합니다.”

성락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융중이라면…… 제갈세가(諸葛世家)가 있는 곳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일행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도 없는데, 제갈세가에 다른 용무라도 있나?”

“본 파에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이셨던 신수무정 제갈 신의께서 머물러 계십니다. 그분의 신세를 적지 않게 졌던지라, 마침 제갈세가 근처를 지나게 되었으니 찾아가서 그분의 소식이라도 전해주는 게 도리일 것 같습니다.”

성락중도 신수무정 제갈외의 이름을 익히 들었는지라 나직한 감탄성을 발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군. 듣자 하니 그분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신룡(神龍) 같은 기인이라고 하던데 본 파에 계셨다니, 본 파로서는 정말 홍복(洪福)인 셈이로군.”

제갈외의 기행과 괴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제갈외를 흠모하는 듯한 성락중의 말에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는 야릇한 얼굴이 되었다. 성락중은 그들의 표정에 조금 의아하기는 했으나, 크고 작은 싸움을 수없이 벌여야 했던 종남파의 사정을 볼 때 강호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두 사람 중 한 명인 제갈외가 종남파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진산월도 그의 생각에는 절대적으로 공감을 했다.

“제갈 노인 덕에 본 파의 많은 사람들이 부상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본 파로서는 그분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제갈세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옳은 말일세. 그런 사정이 있다면 당연히 들러서 인사를 하는 게 도리겠지. 그렇지 않아도 강호제일의가(江湖第一醫家)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네. 어서 가보세.”

그들은 조금 더 속도를 내어 길을 재촉했다.

제갈세가는 융중산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로부터 진법(陣法)과 병법(兵法), 그리고 각종 의술에 능했는데, 특히 백여 년 전부터는 신묘한 의술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제갈의가(諸葛醫家)라고 부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당대의 가주는 채약군주(採藥君子) 제갈도(諸葛島)였는데, 그는 특히 각종 영약(靈藥)을 제조하는 데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서 약에 관한 한 자신의 아버지인 신수무정 제갈외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영약을 얻으려는 고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 영약제조를 중지하고 외부로 출입을 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진산월 일행이 제갈세가의 입구에 당도한 것은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제갈세가는 죽림(竹林)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한 채의 아담한 장원 같았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배경으로 한없이 푸른 대나무 숲이 인생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그림자를 땅바닥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왠지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동중산이 그 대나무 숲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죽림들에는 모두 기이한 절진(絶陣)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그 안에서 길을 잃고 몇 날 며칠이나 헤맨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로(死路)를 만들어 놓지 않았기에 죽거나 다치는 사람은 없지만, 억지로 죽림을 훼손하거나 제갈세가에 무리하게 침입하려 했다가는 커다란 봉변을 당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중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죽림을 한동안 살펴보았으나, 여타의 죽림과 특별하게 다른 모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낙일방이 도저히 이상한 점을 못 찾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한적하고 평온한 죽림 같군요.”

“제갈세가는 사실 의술로 유명하지만, 기관진식과 무공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진법을 이용한 기관설치는 능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고 할 만하지요.”

“진법이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공도 대단한가 보군요?”

“의술이 뛰어나니 내공이나 기공(氣功)에도 조예가 탁월할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각종 병기술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이라고 들었습니다.”

낙일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강호에는 그런 사실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요?”

“제갈세가 사람들이 워낙 돌아다니기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해서 무림에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갈세가에 찾아오는 사람들이야 그들의 의술이 필요하니 그들과 싸울 일이 없고, 또 특별히 제갈세가에 원한을 가질 만한 자들도 없어서 그들이 실력을 드러낼 기회도 거의 없지요.”

“그렇군요. 그럼 제갈 노인도 상당한 고수이겠군요?”

낙일방이 문득 생각난 듯 묻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전흠이 끼어들었다.

“제갈 노인의 실력은 할아버님 아래가 아니다.”

낙일방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할아버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니 거짓일 리가 없지. 그러니 그분 앞에서 함부로 재주 부리지 마라.”

“사형도 참. 제가 그분 앞에서 재주 부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함부로 주먹 자랑하지 말란 말이다.”

전흠이 짐짓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였으나 낙일방은 조용히 웃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쳇, 싱거운 녀석.”

전흠은 툴툴거리면서도 더 이상은 낙일방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얄미운 녀석이기는 해도 지금처럼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같은 남자라도 반할 정도로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그런 모습에 더 약이 오르고 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중산은 제갈세가의 정문에 유일하게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말을 달려 일행보다 먼저 제갈세가에 가서 배첩을 내밀었다. 종남파에서 장문인이 직접 왔다는 말을 듣자 조용하던 제갈세가 안이 약간 소란스러워지더니 곧 일단의 무리들이 정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자는 머리에 작은 관(冠)을 쓴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동중산의 안내를 받아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시오, 제갈세가의 총관을 맡고 있는 제갈선(諸葛鮮)이라 하오.”

중년인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진산월도 그에 답례를 했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게 된 점을 사과드리겠소.”

“별 말씀을. 강호에 명망이 높은 진 장문인께서 본 가를 찾아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제갈선은 가주인 제갈도의 막내 동생으로, 인물됨이 준수하고 성정이 충후해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진산월은 제갈선을 따라 나온 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자신들의 일행을 제갈선에게 소개했다.

제갈선의 안내로 세가 안으로 들어서니 크고 작은 화원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훌륭한 화원이었다.

객당에 자리를 잡은 진산월은 가주인 제갈도를 만나기를 청했다.

“가주를 뵐 수 있었으면 하오.”

제갈선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허헛. 미안한 말씀이나, 형님께서는 지금 폐관(閉關)에 들어가신지라 접견하실 수가 없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장문인께서 형님을 뵈려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진산월은 커다란 비밀도 아니기에 순순히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이신 제갈 신의께서 본 파에 머물러 계시오. 그래서 그분의 안부를 전해드리려 했던 거요.”

그 말에 제갈선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 아버님께서 지금 종남파에 계시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제갈선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침착하고 차분해 보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격동에 찬 모습이었다.

제갈선은 몇 차례 숨을 몰아쉰 다음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아버님께서 언제부터 종남파에 계셨는지 알 수 있겠소?”

“사 개월쯤 되셨소.”

“그 전에는 어디에 계셨는지 혹시 아시오?”

“본 파 근처의 서십왕촌이라는 마을에 기거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소. 하나 그분이 언제부터 그곳에 계셨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오.”

제갈선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윽고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후우. 아버님은 오 년 전에 세가를 떠나신 후 전혀 연락이 없으셨소. 그래서 우리는 혹시라도 아버님 신상에 무슨 변(變)이 생긴 게 아닌가 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었소. 오늘 진 장문인 덕분에 그분이 무사하시다는 걸 알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일부러 먼 걸음을 해 아버님의 소식을 알려주신 진 장문인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제갈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진산월에게 포권을 했다.

“오히려 나야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소. 제갈 신의 덕분에 본 파의 많은 제자들이 위급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소. 본 파를 대표해 제갈세가의 의술에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제갈 신의께서 본 파를 도와주신 것에 감사드리겠소.”

진산월이 답례하자 제갈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님께서 하신 일로 당대제일검객의 인사를 받게 되니 못난 아들로서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럽구려. 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오.”

진산월은 제갈외가 종남파로 오기까지의 과정과 종남파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제갈선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때로는 탄성을 발하기도 했고 때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않기도 했다. 특히 제갈외가 진산월의 제자인 유소응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오 년 전에 본 가에 불의의 사고가 있었소. 가주이신 큰형님의 아들이 낙마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소. 워낙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본 가의 의술로도 그 아이를 살릴 수 없었소. 그때 아버님께서는 마침 환자를 돌보러 외부로 나가셨었는데, 당신께서 가장 아끼는 손자가 죽을 때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에 몹시 자책을 하셨소.”

진산월은 그에 대한 사정을 제갈외에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기에 묵묵히 제갈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아버님께서는 몇 달간이나 방황하시다 집을 나가셨는데, 그 뒤로 그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소. 이번에 진 장문인께서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분의 안위를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을 거요.”

제갈선은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아버님께서는 아마도 진 장문인의 제자분을 보고 사고로 죽은 손자를 떠올리신 것 같소. 그분이 그렇게라도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되었다면 아들로서 더 바랄 일이 없겠으나…… 자칫 진 장문인의 제자분께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구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소.”

제갈선은 진산월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 장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고 있겠소.”

제갈선이 진산월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제갈세가의 식솔 한 사람이 다급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오더니 제갈선에게 다가가 나직하게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제갈선은 조금 당혹스런 표정이었으나 이내 차분해진 얼굴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외부에서 누가 찾아온 모양이오. 잠시 실례하겠소.”

제갈선이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동중산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갈가의 가주는 만나보셨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만날 수 없었다. 폐관 중이라고 하는구나.”

동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교로운 일이군요. 소문으로 듣기로는 제갈 가주가 바깥출입을 하지는 않아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은 빠짐없이 만나준다고 하던데…….”

“사정이 생긴 모양이지.”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정색을 했다.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곳에서 무당산까지는 이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시간상으로는 충분했으나, 장강십팔채와의 일 때문에 가급적이면 하루라도 빨리 무당산에 도착했으면 하는 것이 동중산의 바램이었다.

진산월도 제갈세가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제갈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제갈외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산월이 막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그들이 앉아 있는 건물이 뒤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를 마주보다가 일제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객당 밖으로 나오니 종남파의 제자들도 굉음을 들었는지 하나둘씩 놀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성락중의 물음에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지금 막 밖으로 나와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문 쪽에서 난 소리 같더군.”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동중산이 황급히 정문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으나 성락중이 그를 제지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락중은 객당 앞에 펼쳐진 화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화원에 절진이 펼쳐져 있는 것 같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낭패를 당할지 모르네.”

동중산은 유심히 화원을 살펴보다가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꽃밭의 배치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하지만 팔문(八門)이 뒤섞여 있어서 미흡한 제 실력으로는 자세한 것을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갈세가의 진식이 강호일절이라고 자네 입으로 말했지 않나? 너무 걱정 말게. 정 다급한 일이면 제갈세가에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해오겠지.”

그때 이번에는 멀리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그 소리를 듣자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성락중의 얼굴빛도 살짝 바뀌었다.

“아무래도 제갈세가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군.”

옆에 서 있던 낙일방이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장강십팔채의 무리들이 쳐들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 말에 성락중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큰일 아닌가? 우리 때문에 애꿎은 제갈세가가 피해를 보는 셈이니 말일세.”

동중산은 낙일방의 말에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장강십팔채는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방산동은 이미 우리에게 한 번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가 제갈세가에 머물러 있을 때 공개적으로 습격을 해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락중은 그래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워낙 무도한 자들이라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벌이기 일쑤이니 그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겠군.”

이제는 확연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거푸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더 이상 계속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절진이 펼쳐져 있는 화원을 뚫고 갈 수도 없어서 종남파 고수들은 모두 당혹해하고 있었다.

때마침 화원 저편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중산은 그가 제갈선과 함께 정문으로 마중을 나왔던 제갈세가의 고수들 중 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그는 능숙한 동작으로 화원을 지나 진산월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진 장문인. 총관께서 급히 도움을 청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참이었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다급한 상황일 텐데도 그는 최대한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외부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습격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화탄(火彈)을 써서 정문 쪽의 기관을 부수는 바람에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화탄을 썼다는 말에 진산월은 물론이고 성락중과 동중산의 안색도 모두 딱딱하게 굳어졌다. 화약은 관(官)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중요한 물품이어서 일반인들은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약 성분을 이용한 화탄은 강호 무림에서도 아주 극소수 방파들이 비밀리에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강호에서 화탄으로 제일 유명한 곳은 강서의 진천벽력문과 산서의 벽력당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명문정파일 뿐 아니라 화탄의 관리에 엄격해서 결코 함부로 사용하거나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았다.

“대체 어떤 자들이 화탄까지 써가며 제갈세가를 습격했단 말이오?”

“복면을 하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습격자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파(邪派)의 무리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겠소. 우리도 힘을 보태겠소.”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성락중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죄송하지만 사숙께 손풍과 소응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성락중은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조심하게.”

“다녀오겠습니다.”

진산월은 낙일방과 전흠, 동중산만을 대동하고 제갈세가의 고수 뒤를 따랐다. 그의 안내로 화원을 지나간 종남파 고수들이 정문 쪽으로 가고 있을 때, 다시 폭음이 터졌다.

콰앙!

이번 폭음은 어찌나 강력했던지 땅이 뒤흔들리고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동중산이 안색이 변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 위력을 지닌 화탄은 산서벽력당의 벽력천자황(霹靂天子荒) 정도밖에 없을 텐데…….”

그 말을 듣자 중인들은 더욱 속력을 높여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조금 전만 해도 고아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제갈세가의 정문 일대는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두터운 송목으로 된 대문은 산산이 박살나서 잔해만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고, 붉은 색 기와에 하얀 색으로 칠해져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았던 담벼락도 오 장 넘게 부서져 흉물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습격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청삼을 입은 제갈세가의 고수들에 비해 전신에 흑의를 입고 얼굴에도 흑색 복면을 한 일단의 무리들은 확연히 대비가 되었던 것이다.

두 무리는 파편조각만 간신히 남아 있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해 있었는데, 움푹 파여진 구덩이 안에 한 구의 시신이 처참한 형상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아직도 매캐한 화약 내음이 장내를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의 폭발이 만들어낸 참상이 분명해 보였다.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모두 그 시신을 보고 분노와 슬픔에 찬 표정들이었다.

그 시신은 제갈선의 조카인 제갈영기(諸葛英麒)의 것으로, 제갈영기는 정문의 수비를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흑의 복면인들이 화탄을 이용해 입구 쪽에 있는 진식을 뚫고 들어오자 정문에 설치된 기관들로 그들을 막으려다 또 하나의 화탄에 정문이 박살나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제갈세가는 높은 의술만큼이나 많은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들은 여타의 무림세가들처럼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남들과 원한을 맺지도 않았고, 그들의 의술에 신세를 진 고수들도 적지 않아서 세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어도 강호의 어느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적대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화탄까지 사용해가며 정문을 폐허로 만들고 그 와중에 세가의 중요인물마저 비명횡사하고 말았으니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분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창졸지간에 화탄에 조카를 잃은 제갈선의 비통함은 누구보다도 큰 것이었다.

흑의 복면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건장한 체구의 흑의인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갈선. 제갈가의 기관진식으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순순히 그들을 내놓아라.”

제갈선은 성난 눈으로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본 가의 식솔들이 살해된 이상 너희들과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 핏 빚은 피로 갚을 수 있을 뿐이다.”

흑의인은 혀를 찼다.

“쯧.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굳이 벌주(罰酒)를 자청하는군. 고작 애송이 하나의 복수를 위해 제갈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셈이냐?”

분노한 제갈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좌동천(左東川)! 함부로 본 가를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구나. 네가 복면을 하고 있다고 네 정체를 모르는 줄 아느냐?”

흑의인은 한동안 삼엄한 눈으로 제갈선을 응시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정체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가? 제갈가는 병법에 능하고 두뇌가 영민하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그 말을 들었는지 제갈선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흑의인도 자신이 복면을 했다고 해서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한 화탄은 강호상에서 무척이나 유명한 것이고, 그의 외모나 성격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제갈선이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은 다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복면을 하여 모습을 가린 것은 제갈가를 무조건 말살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의중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제갈선이 중인환시리에 그의 정체를 밝혀버렸으니 이제 자신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체가 드러나는 것과 단순히 짐작을 하는 것은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제갈선은 누구보다 명석한 인물이었으나, 조카의 처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한 탓에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흑의인의 말에 내심 아차 싶었으나, 그때 흑의인이 복면을 벗고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내고 말았다.

드러난 얼굴은 유난히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사십 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그는 산서벽력당 출신의 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일수벽력(一手霹靂) 좌동천이라는 인물이었다.

원래 좌동천은 산서벽력당의 당주인 벽력추혼(霹靂追魂) 탕일후(蕩一吼)의 사제로, 실질적인 산서벽력당의 이인자였다. 하나 산서벽력당의 노선을 두고 탕일후와 사이가 벌어져 결국 십여 년 전에 자신을 따르는 몇몇 수하들을 데리고 산서벽력당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많은 무림인들은 화탄제조에 있어서는 탕일후가 조금 앞섰지만 무공수위는 좌동천이 더 낫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좌동천이 나온 후 산서벽력당의 위세는 예전보다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막상 좌동천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자 제갈선의 표정은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본 모든 사람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좌동천의 단호한 의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좌동천이 슬쩍 손짓을 하자 주위에 있던 흑의 복면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두르며 제갈세가의 고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장내가 치열한 싸움터로 변해 버렸다. 흑의 복면인들의 수는 십여 명 남짓으로, 수적으로는 제갈세가 고수들보다 적었으나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서 오히려 제갈세가 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갈선과 두 명의 중년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제갈선의 사촌형제들로 제갈승(諸葛承)과 제갈명(諸葛明)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한 자루 섭선을 휘두르는 제갈승의 무공이 가장 탁월해 보였다.

그들 세 사람은 흑의 복면인들을 하나씩 맡아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나마 장내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그들 외에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두세 명이 하나의 복면인을 상대하면서 쩔쩔매고 있었고, 개중에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격하게 밀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좌동천과 그의 좌우에 있는 네 명의 흑의인들은 아예 장내의 싸움에는 끼어들지도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일방적으로 제갈세가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몇 명의 인영이 전권(戰圈)에 뛰어들었다. 그와 함께 장내의 상황이 판이하게 바뀌어 버렸다. 새롭게 나타난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그중 세 명은 싸움에 뛰어들어 흑의 복면인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좌동천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좌동천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싸움에 가세한 세 사람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주먹을 휘두르는 준수한 청년과 날카로운 인상만큼이나 사나운 검법을 사용하는 청년, 그리고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몸이 빠른 중년인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반쯤 말아 쥔 주먹을 휘두르는 백의 청년의 권법은 강력하기 그지없어서 그의 공격을 받는 흑의 복면인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저런 인상의 고수들에 대해 들은 것 같은데…….’

그때 좌동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또 다른 인물에게 옮겨졌다.

훤칠한 키에 다소 마른 듯한 체구를 지닌 이십 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유난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한쪽 뺨에 나 있는 깊은 흉터가 시선을 끌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좌동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절정검객이로구나!’

좌동천의 눈이 젊은이의 얼굴에 있는 흉터와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무언가를 느낀 듯 좌동천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혹시 당신은…….”

좌동천이 막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젊은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별다른 동작을 취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우윳빛 검광이 어른거리더니 좌동천의 주위 공기가 삽시간에 빙굴에 빠진 듯 싸늘해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검기였다.

강호가 아무리 넓고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고 해도 이토록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엄청난 검술을 지닌 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좌동천의 뇌리에 최근에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한 명의 절세검객이 떠올랐다.

“이, 이런…… 신검무적이구나!”

좌동천의 놀란 외침이 터져 나오며 장내의 분위기가 마구 요동쳤다.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흑의 복면인들은 흔들리는 모습이 역력했고, 반면에 제갈세가의 고수들은 모두 용기백배하는 표정들이었다.

좌동천의 좌우에 있던 네 명의 흑의인들이 일제히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 중 두 명은 검(劍)을, 두 명은 도(刀)를 사용했는데, 달려드는 기세와 병기를 뽑아드는 속도가 그야말로 눈부시게 빠르고 맹렬했다.

좌동천도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맹렬하게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파파팡!

격렬한 파공음과 함께 십여 개의 장력이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듯 연거푸 뿜어 나와 그에게 다가오던 검기에 맞서갔다. 좌동천의 절학 중 하나인 분뢰십팔장(奔雷十八掌) 중의 분뢰경변(奔雷驚變)이었다.

그와 함께 네 명의 흑의인들이 발출한 네 개의 검과 도에서 폭풍 같은 검기와 도풍이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하나 진산월의 용영검은 너무도 유연하게 검기와 도풍, 그리고 장영 속을 뚫고 들어갔다.

파팟!

빗발치는 듯한 검기의 한 부분이 무너지며 흑의인 한 명이 허리를 붙잡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어느새 진산월의 용영검이 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용영검이 한 번 차가운 검광을 번뜩일 때마다 흑의인들의 공세가 무디어지며 한 사람씩 피를 뿌리며 전권에서 격퇴되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검과 도를 휘둘렀으나, 그들 중 누구도 진산월의 검을 두 번 이상 피한 사람은 없었다.

순식간에 네 명의 흑의인들은 모두 허리와 앞가슴, 팔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좌동천이 산서벽력당을 뛰쳐나올 때부터 그와 동행했던 인물들로, 하나같이 무공이 뛰어나고 좌동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좌동천이 가장 믿고 있는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도 어이없이 패퇴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었다.

하나 그들 덕분에 좌동천은 간신히 진산월의 용영검이 뿌리는 삼엄한 검기 속에서 몸을 뺄 수가 있었다.

좌동천은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적지 않은 부상을 입고 휘청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진산월과 일정한 거리를 벌려 놓았다.

진산월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하자 좌동천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더 다가온다면 이것을 사용하겠소!”

품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 어른의 주먹만 한 크기의 물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진산월의 물처럼 고요한 시선이 좌동천의 손에 들린 물체에 고정되었다.

물체는 노란 색을 띤 둥근 모양의 알처럼 생겼는데, 크기나 색깔이 오리 알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바로 산서벽력당에서 만든 화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벽력천자황이었다. 좌동천은 산서벽력당을 나올 때 모두 일곱 개의 벽력천자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동안 하나둘씩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꺼내든 것이다.

“그것이 벽력천자황이오?”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묻자 좌동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바로 신검무적이오?”

“내가 진 모요.”

막상 진산월이 순순히 시인을 하자 좌동천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스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종남파와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는데, 왜 대뜸 우리 일에 끼어들어 살수를 쓰는 거요?”

“제갈세가의 손님된 입장에서 주인을 위해 손을 거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리고 본 파와 사소한 원한이라도 있었다면 저들 중 누구도 멀쩡히 살아 있지 못했을 거요.”

진산월이 턱으로 네 명의 흑의인을 가리키자 좌동천은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그들은 모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금 전에 경험했던 신검무적의 가공할 검술로 보아 그가 살심을 품었다면 그들은 모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좌동천으로서는 하필이면 이 시기에 종남파의 장문인이 제갈세가에 손님으로 와 있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군.’

좌동천은 진산월의 검법을 보고 난 후에는 그와 직접 손을 맞대고 싸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강호의 어떤 고수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좌동천이었지만 막상 겪어본 신검무적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임을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검성 모용단죽 이후 최고의 검객일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평가는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펼쳐낸 분뢰십팔장의 장력 속을 종잇장처럼 유유히 뚫고 들어오던 우윳빛 검광을 좌동천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었다. 목숨처럼 아꼈던 벽력천자황을 두 개나 사용하고도 상대가 두려워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난다면 도저히 얼굴을 들고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좌동천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였다.

삐익!

어디선가 사람의 심금을 자극하는 듯한 예리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좌동천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잔뜩 굳어졌던 얼굴이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먼저 빠르게 주위의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방적으로 제갈세가의 고수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흑의 복면인들은 뒤늦게 나타난 종남파 고수들 때문에 오히려 뒤로 밀리고 있었다. 특히 권법을 펼치는 젊은 미남자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서 벌써 세 명째 복면인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젊은 층의 고수들 중 제일권사(第一拳士)라는 옥면신권이로군.’

뿐만 아니라 연신 날카로운 검광을 뿌리고 있는 젊은 검객과 안대를 한 중년인의 실력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여서 자신이 끼어든다 해도 판세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는 그 무서운 신검무적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좌동천은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일은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움을 인정하겠소.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이만 물러나려 하는데, 진 장문인의 의향은 어떠시오?”

벽력천자황까지 사용하며 제갈세가를 압박할 때와는 전혀 다른 정중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진산월 또한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 자들에게 굳이 살수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그들을 보낼 수도 없었다. 제갈세가의 생각은 자신과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신들 손에 피해를 입은 제갈세가에서 결정해야할 일인 것 같소.”

흑의 복면인과 싸우는 와중에도 이 음성을 들었는지 제갈선이 맹렬한 공격을 펼쳐 상대하고 있던 흑의 복면인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재빨리 진산월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산월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이내 싸늘한 눈으로 좌동천을 노려보았다.

“좌동천! 제갈세가가 너희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본 가의 식솔을 죽였으니 너도 또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좌동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무공 등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현격하게 뒤진 제갈선이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나오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사실 제갈세가의 입구에 설치된 기관진식들이 아니었으면 굳이 귀한 벽력천자황을 두 개나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 제갈세가의 기관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교해서 벽력천자황을 사용하지 않고는 단기간에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 개밖에 남지 않은 벽력천자황을 두 개나 사용하여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고도 신검무적 때문에 순순히 물러나려 했는데 오히려 제갈선이 방해를 하고 있으니 좌동천 입장에서는 약도 오르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말 끝장을 보자는 소리인가?”

좌동천이 으르렁거리듯 싸늘한 음성을 내뱉자 제갈선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의 격분을 억누르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가의 인명을 살상하고 정문을 파괴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어떻게 말이냐?”

제갈선의 시선이 좌동천의 손에 들린 벽력천자황을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좌동천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벽력천자황을 달라는 말이냐?”

“그게 네 손에 있는 한 언제라도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재발방지 차원에서라도 그것을 넘겨받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좌동천의 눈자위에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벽력천자황은 제조하기가 극히 까다로울 뿐 아니라 재료 또한 구하기가 힘들어서 산서벽력당을 나온 그로서는 만들고 싶어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하나 남은 벽력천자황을 주느니 차라리 팔 하나를 잘라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때 진산월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그걸 내주고 물러나면 나도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겠소.”

좌동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갈등 어린 빛이 떠올랐다.

벽력천자황을 이용해 신검무적을 상대할 자신이 있으면 한 번 승부를 걸어보겠는데, 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조금 전에 그가 보았던 신검무적의 검술은 그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 장문인의 말씀을 믿겠소.”

그는 조심스레 벽력천자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휘익!

그가 한 차례 휘파람을 불자 흑의 복면인들이 재빨리 전권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좌동천은 제갈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자신도 몸을 날렸다.

좌동천과 흑의 복면인들이 순식간에 멀어지자 제갈선은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별 말씀을. 그보다 정말 이 정도로 괜찮겠소?”

진산월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생결단을 낼 듯하던 제갈선이 너무 쉽게 좌동천을 놓아준 것이 다소 의아했다.

이번 일로 제갈세가가 입은 피해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정성스레 만들어 놓았던 정문 일대의 기관이 모두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직계 후손인 제갈영기를 비롯한 몇 명의 식솔들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여타의 평범한 가문이라도 복수심에 들끓었을 것인데 제갈세가 같은 전통 있는 명문세가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력천자황 한 알만 받고 상대를 순순히 내보내 주었으니 진산월이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선의 얼굴에 한 줄기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생각 같아서는 그자들을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끝까지 혈채를 받아내고 싶었소.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기에 그들을 막지 않았던 거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제갈선은 잠시 머뭇거리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 와 무엇을 감추겠소? 먼저 진 장문인께 한 가지 사죄드릴 일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조금 전에 본 가의 가주께서 폐관에 들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소. 진 장문인께 거짓을 말씀드린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제갈선이 허리를 굽히며 사죄를 하자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총관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총관께서 그렇게 하신 것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텐데, 자세한 사정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제갈선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젯밤에 형님의 오랜 친우 한 분이 커다란 부상을 입은 채로 본 가를 찾아왔소. 그분의 상처가 몹시 위태로워서 형님께서는 크게 놀라 황급히 그분을 치료하셨소. 위급한 상황을 넘기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일행이 위기에 처해 있다며 형님께 도움을 요청하셨고, 형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급히 본 가를 떠나시게 되었소.”

진산월은 제갈선의 말 외에 다른 내막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단순히 그런 사정뿐이라면 굳이 진산월에게 가주의 행방을 숨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친우분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여뢰관이 동천표라는 분이오.”

진산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신법이 뇌전과 같고 이목이 누구보다 뛰어나서 호북제일섬(湖北第一閃)이라고 알려진 분이 아니시오?”

“그렇소.”

“그의 일행이 누구인지 아시오?”

“환상제일창 유중악, 유 대협이시오.”

진산월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동천표가 유중악과 친분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자신의 불길한 생각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 가주께서는 유 대협을 돕기 위해 세가를 떠난 것이구려?”

제갈선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소. 구궁보에서의 일로 유 대협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횡행하고 있지만, 형님께서는 그 소문을 믿지 않고 계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본 가에 설치된 암도(暗道)로 본 가를 빠져나가셨소. 워낙 급하고 비밀을 요하는 일이었는지라 진 장문인께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하게 된 것이오.”

유중악의 찬란한 명성은 구궁보 사건 이후 치명타를 입어 빛을 잃고 말았다. 하나 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그에 대한 신심(信心)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채약군자 제갈도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진산월은 유중악이 자신을 따르는 친우들과 구궁보를 벗어난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선사인 임장홍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인 뇌일봉과 곽자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동천표가 말한 유중악 일행이란 바로 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중악 본인은 물론이지만 곽자령을 비롯한 그와 동행한 자들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위기에 처해 있고, 동천표만이 간신히 빠져나와 제갈세가에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제갈선의 얼굴에는 시름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데 좌동천이 어떻게 알았는지 수하들을 데리고 와서 동 대협과 그 일행들을 내놓으라며 공격을 해왔던 거요. 조금 전에 호각 소리를 듣고 좌동천이 물러나려 하는 것을 보니 형님과 동 대협의 행방이 그들에게 발각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그를 붙잡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소.”

진산월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력천자황까지 사용하여 제갈세가를 압박했던 좌동천이 호각 소리를 듣자 일방적으로 기세를 꺾고 물러난 것은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갈 가주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있겠소?”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이 침착한 음성으로 묻자 제갈선은 반색을 했다.

“그분들을 도와주시겠소?”

사실 그는 몇 번이나 진산월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구궁보 사건 이후 명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유중악을 위해 신검무적이 선뜻 나서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계속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이 먼저 가주의 행방을 물으니 큰 짐을 던 듯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씀이오. 유 대협과는 직접적인 친분이 없지만, 그분의 친우들 중에는 선사의 오래된 벗들도 계시오.”

“아! 그런 인연이 있었구려. 형님께서는 석문(石門)의 낭하곡(浪下谷) 쪽으로 가셨소. 유 대협 일행은 아마도 그 부근에 계실 거요.”

석문은 제갈세가에서 서남쪽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유중악의 행방을 알게 되자 진산월도 마음이 급해졌다. 유중악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와 동행한 뇌일봉과 곽자령의 안위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소. 우리는 그쪽으로 갈 테니 본 파의 제자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소.”

“걱정 마시오. 길 안내를 위해 본 가의 제자를 보내드리겠소.”

이어 제갈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청년 무사 한 명을 불렀다.

“이분들을 낭하곡으로 모시고 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곧 진산월과 종남파의 고수들은 청년무사의 뒤를 따라 황급히 몸을 날렸다.

제갈선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좌동천이 바닥에 내려놓고 간 벽력천자황을 집어 들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작은 물체에 그토록 무서운 위력이 담겨 있다니……. 다음에 기관을 다시 만들 때는 이러한 화탄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야겠구나.”

문득 주위를 둘러본 제갈선은 산산이 박살난 정문과 그 앞에 놓인 제갈영기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는 표정이 침통하게 굳어졌다.

“후우. 그나저나 영기의 가족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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