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7권 호한위난(豪漢危難)편 : 8화
제 279 장 발검사고(拔劍四顧)
진산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저 멀리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점차로 밝아져 군데군데 파란 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개를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여명 사이로 크고 작은 산들이 첩첩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수십 겹으로 겹쳐진 오래된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끝없이 펼쳐진 산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져왔다. 끊어질 듯 이어진 산봉우리들이 앞으로 그가 헤쳐 나가야할 고단한 여정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강호(江湖)의 삶이란 어찌 이리도 고된 것인지……. 그 힘든 여정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진산월은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심정이었다.
“발검사고심망연(拔劍四顧心茫然: 검을 뽑아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만 아득해지는구나)…….”
진산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백(李白)의 ‘행로난(行路難)’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그때 이백은 관직에서 내쫓겨 혈혈단신으로 장안을 등져야 했고, 지금 진산월은 어찌된 내막인지도 모른 채 한 사내의 행방을 찾아 낯선 산야(山野)를 헤매고 있었다. 비록 처한 상황은 각기 달랐지만, 험난한 세상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막막한 감정이 드는 것은 수백 년 전의 시인이나 지금의 진산월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당시 이백은 ‘거센 파도를 헤쳐가다 보면 때가 오리니, 구름 높이 돛을 달고 창해로 나아가리(長風波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라고 노래했지만, 과연 진산월에게도 그러한 시기가 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막막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우두커니 서 있던 진산월은 문득 멀리서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섬광을 보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으나 진산월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병장기의 날에 떠오르는 양광(陽光)이 반사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진산월은 한 번 더 광채가 번뜩였던 곳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그곳을 향해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작은 야산을 세 개쯤 지나쳤을 때 처음으로 거친 기합 소리와 칼바람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커다란 봉우리 하나를 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제법 큰 강이 흐르는 넓은 평야가 나타났다. 그 강은 한수의 남쪽을 지나는 남하(南河)로, 강 넘어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이 바로 무당산이었다.
그 평야와 야산이 만나는 곳에 하나의 계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곡은 그리 크거나 깊지 않았으나, 유난히 큰 바위들이 많아서 상당히 가파르고 험해 보였다. 계곡의 중간쯤에 제법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그 동굴 앞의 공터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은 한 명의 면사 여인과 세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여인은 푸른 색 능라의를 입고 있었는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가히 환상적이어서 천상의 선녀를 보는 것 같았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눈 아래는 짙은 면사에 가려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백옥 같은 손에는 하나의 옥대(玉帶)가 들려 있었는데,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옥대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유연히 날아 괴인들에게 날아갔다. 그 솜씨가 어찌나 부드럽고 매끄러웠던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면사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세 명의 흑의인들은 하나같이 체구가 건장하고 기형도를 든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도법은 상당히 날카로웠으나 워낙 면사 여인의 움직임이 신묘했는지라 별다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팽팽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 외에 초로의 노인 두 사람이 한쪽에 서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장내의 격전과는 달리 그들은 느긋하고 여유 있는 표정들이었다.
노인들 중 유난히 우람한 체구에 검은 수염을 기른 갈포인이 장내의 격전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옆에 서 있는 비쩍 마른 체구의 흑포 노인을 향해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계집의 허리띠 휘두르는 솜씨가 제법이긴 하지만, 더 시간을 끌 것 없이 이쯤에서 해치우는 게 어떻소?”
흑포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지 않겠나? 아직 그녀의 모든 수를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지체되었소. 밤이 길면 꿈이 사나운 법이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흑포 노인은 갈포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게.”
갈포인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때 면사 여인은 막 자신을 공격해 오는 흑의인의 칼을 옥대로 쳐내고 있었는데, 갈포인의 장력이 그 빈틈을 교묘하게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나 면사 여인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옥대를 든 손목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옥대가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 뱀처럼 꿈틀거리며 갈포인이 날려 보낸 장력 속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절묘했던지 갈포인은 내뻗었던 손을 재빨리 거두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야만 했다.
파아아…
장력이 허무하게 사라지며 옥대가 한 차례 허공을 선회하다가 면사 여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갈포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솜씨로군. 이쯤에서 물러나면 우리도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겠다.”
동굴을 등지고 선 면사 여인이 슬쩍 자신의 등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있는 사람도 같이 가도 되겠지요?”
갈포인은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냉혹하고 사나운 웃음이었으나, 면사 여인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럼 실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흐흐. 계집.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당신 재주로 그게 될까요?”
면사 여인이 계속 자극하자 갈포인의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에 한 줄기 붉은 홍조가 어른거렸다.
“노부가 누구인 줄 아느냐?”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오늘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흐흐. 과거에도 노부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믿고 함부로 설치는 자들이 간혹 있었지. 그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그런 패배자들은 알고 싶지 않군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하락괴검(河洛怪劍)도 있었고, 낭산쌍흉(狼山雙兇)이나 황산삼웅(黃山三熊)도 있었다. 지금 그들은 모두 백골이 되어 차가운 흙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면사 여인이 새삼스런 눈으로 갈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럼 당신이 흑수일독(黑手一毒) 마여상(馬如象)?”
갈포인은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부가 바로 마여상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은 유달리 마디가 굵고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흑수일독 마여상은 한 쌍의 육장(肉掌)만으로 많은 고수들을 살해한 흉인(兇人)이었다. 그의 악명은 특히 호광(湖廣) 일대에 널리 퍼져 있어서 그곳에서는 강호의 어떠한 흉신악살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순순히 물러나도록 해라. 일단 손을 쓰면 노부는 여인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 그때 가서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악명이 자자한 흑수일독답지 않은 유연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에 잠깐 겪어 보았던 면사 여인의 무공이 만만치 않았기에 마여상으로서는 정말 큰마음을 먹고 아량을 베푼 셈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이번 일이 중차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진행하는 데 아주 약간의 사소한 변수라도 제거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나 면사 여인의 다음 말은 그의 기대를 무참하게 깨어버리는 것이었다.
“당신이 아니라 십절산군 사여명이 직접 와도 내 앞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야말로 호된 꼴을 당하기 전에 이만 물러나는 게 좋을 거예요.”
마여상의 두 눈에 흉악한 빛이 어른거렸다.
호광 일대가 좁다고 날뛰던 마여상이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인 십절산군 사여명에게 패해 그의 수하가 된 것은 불과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기억이었는데, 면사 여인은 짤막한 말 한 마디로 그의 상처를 송두리째 헤집어 놓은 것이다.
“어디 네년이 잠시 후에도 그따위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마여상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갈고리같이 구부러진 그의 양손이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 왠지 보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마여상의 무공은 확실히 강호에 알려진 소문만큼이나 무섭고 날카로웠다. 특히 그의 흑갈조(黑蝎爪)는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었다. 검게 변한 손가락이 금시라도 면사 여인의 몸을 갈가리 찢을 듯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면사 여인은 피하지 않고 옥대를 휘둘러 정면으로 그의 공격에 맞서왔다. 삽시간에 장내는 두 사람이 휘두르는 경력에 휩싸여 버렸다. 그들의 공방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면사 여인을 합공하던 세 명의 흑의인들은 싸움에 가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자신의 절기인 흑갈조를 펼치고도 면사 여인에게 별다른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마여상의 눈빛이 흉흉하게 번들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옥대의 푸른 그림자 속을 종잇장처럼 뚫고 들어가 그녀의 옆구리에 시뻘건 피구멍을 내주고 싶은데, 일 장(一丈) 길이도 안 되는 옥대가 어찌나 영활하게 움직이는지 당최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공세 범위는 교묘하게 동굴 입구를 포함하고 있어서 누구도 동굴 근처에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당금 무림에 이 정도로 옥대를 잘 사용하는 여고수가 있었던가? 이 망할 계집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하구나.’
그는 자신이 상대의 정체도 파악하지 않은 채 너무 성급하게 덤벼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으나 그만큼 마음 깊숙한 곳에서 흉악한 살심이 마구 끓어올랐다.
‘종(鍾) 늙은이가 두 눈을 빤히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이런 계집 하나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맹(盟)에서 내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마여상은 두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공세가 한층 더 거칠어지며 면사 여인의 사방이 온통 시커먼 손가락 그림자에 휩싸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면사 여인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비선보(飛仙步)의 보법을 횡(橫)으로 밟으며 마여상의 좌측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옥대가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마여상의 목덜미를 휘감아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하고 유연했던지 천상의 선녀가 허리띠를 풀어 너울너울 선무(仙舞)를 추는 것 같았다.
하나 그 순간에 마여상은 자신의 목이 금시라도 옥대에 휘감겨 버릴 듯한 위기감을 느껴야만 했다. 옥대가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이 펼쳐낸 흑갈조의 경력 사이를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마여상은 두 눈을 부릅뜨며 벼락같은 폭갈을 터뜨렸다.
“이따위 요상한 수법에 노부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
마여상의 왼손이 자신의 목을 보호함과 동시에 오른손이 섬전 같은 기세로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그러자 검은 빛 경기가 면사 여인의 왼쪽 가슴팍을 향해 일직선으로 폭사되었다. 그가 비장의 절초로 생각하고 있는 흑사장(黑邪掌)이었다.
지금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면사 여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두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흘러나왔다. 원래 강호에서 여인의 가슴이나 아랫배 부위를 공격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여상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노골적으로 면사 여인의 앞가슴을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면사 여인은 옥대를 휘두르던 오른손을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왼손을 살짝 흔들었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고운 그녀의 왼손이 유난히 하얗게 반짝인다 싶은 순간, 굉음이 터져 나오며 마여상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펑!
“크윽!”
마여상은 오른손을 부여잡으며 십여 걸음이나 정신없이 후퇴했다. 손목이 완전히 부러졌는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얼굴은 시커멓게 변한 채 흉신악살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나 고통보다도 놀라움이 더 컸는지 그의 입술을 뚫고 신음 같은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혹시 명옥공(冥玉功)……?”
그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면사 여인의 신형이 그에게 바짝 다가서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의 손에 들린 옥대의 끝부분이 그의 목을 휘어 감고 있었다.
“큭!”
마여상은 낯빛이 푸르뎅뎅하게 변한 채 발버둥을 쳤으나 그럴수록 옥대는 더욱 강력하게 그의 목을 조여 들어왔다. 마여상의 두 눈이 뒤집어지며 입가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마여상의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는 꿈쩍도 할 것 같지 않던 면사 여인이 갑자기 옥대를 풂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공간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쾅!
흙먼지가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는 가운데, 무언가 희끗한 인영이 흙먼지를 뚫고 무서운 속도로 면사 여인에게 접근했다. 면사 여인은 냉소를 날리며 옥대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흥! 날호(辣狐) 종담(鍾淡)! 과연 듣던 대로 비열하기 짝이 없구나.”
사나운 기세로 그녀를 몰아치고 있는 인영은 다름 아닌 마여상의 옆에 서 있던 흑포 노인이었다. 그의 비쩍 마른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한 무시무시한 경력이 장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흑포 노인은 강북녹림맹의 다섯 호법(護法) 중 하나인 날호 종담이란 인물로, 손속이 잔인하고 심성이 악랄해서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특히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파황수(破荒手)는 호북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내가수법으로 알려진 무서운 무공이었다.
그래서인지 면사 여인이 휘두르고 있는 옥대는 조금 전과 같은 위력을 보이지 못하고 가공할 경력에 휘말려 금시라도 끊길 듯 세차게 흔들렸다.
종담 또한 한동안 맹렬한 기세로 공세를 계속했으나 약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을 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손은 점차 느려졌고, 반면 면사 여인의 옥대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온통 두 사람의 격전에 쏠리고 있을 때였다.
일단의 무리들이 소리도 없이 공터 한쪽에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남포인과 네 명의 백의인이었는데, 백의인 네 명은 어깨에 작은 일인용 가마를 메고 있었다. 가마꾼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체구가 당당한 청년들이어서 더욱 특이해 보였다. 그들 앞에 있는 남포인은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검은 수염을 기르고 제법 청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은밀했던지 장내의 누구도 미처 그들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종담과 면사 여인이 그들의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조금씩 손길을 늦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거의 동시에 공격을 멈추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종담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면사 여인을 쏘아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새롭게 나타난 남포인과 백의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백의인들이 메고 있는 작은 가마에 고정되었다. 가마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옥구슬로 이루어진 주렴(珠簾)과 사방의 장식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럽고 비범해 보였던 것이다.
종담은 안력을 최대한 돋우어 보았으나, 주렴 자체가 특이한 것이었는지 전혀 주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종담은 다시 가마 앞에 있는 남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포인의 얼굴은 가면을 씌운 듯 무표정해서 전혀 그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종담은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그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이들이 이른 새벽에 인적도 찾기 어려운 이런 외진 계곡에 나타난 것이 결코 단순한 행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님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다.
“어느 방면의 고인(高人)들이신가?”
종담이 마음속의 불안감을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점잖게 묻자 남포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대파산(大巴山)에서 왔소.”
종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파산은 사천성(四川省)의 북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으로, 너무나 넓고 큰 지역이라 단순히 그곳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뜻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파산 일대에서 활약하는 고수들이나 문파의 수만 해도 십여 개가 훌쩍 넘었다.
종담은 슬쩍 남포인 일행들을 다시 한 차례 훑어보고는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꼭두새벽부터 유람을 다닐 리는 없을 테고, 이 시간에 이런 궁벽하고 외진 곳에 어인 일로 온 건지 알 수 있겠나?”
남포인은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노인장의 생각은 틀렸소. 우리는 꼭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어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온 것이오.”
“그곳이 어디인가?”
종담이 부지불식간에 되묻자 남포인의 시선이 면사 여인의 뒤에 자리한 동굴 쪽으로 향했다.
“환선동(環旋洞)은 동굴 자체는 그리 길거나 크지 않으나 그 안의 형태가 기기묘묘하여 이 일대에서 가장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고 들었소. 우리는 환선동을 보러 온 것이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오.”
오해를 하지 말라는 남포인의 음성과는 달리 그의 말을 들을수록 종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여상을 비롯한 강북녹림맹의 고수들 또한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면사 여인만은 처음 남포인 일행이 나타났을 때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을 뿐,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그들의 등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같았고, 또 어찌 보면 누가 나타나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치우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태도 같기도 했다.
장내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종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냉랭한 기운이 느껴지는 눈으로 남포인과 그의 일행들을 쏘아보았다.
“이 일대에 좋은 경치도 많은데 굳이 이런 외진 동굴까지 찾아온 걸 보니 무척 취향이 독특한 친구로군. 갑자기 자네에게 몹시 흥미가 생겼네. 자네 이름을 알 수 있겠나?”
“그 전에 먼저 노인장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순리 아니겠소?”
“나는 종담이란 별 볼일 없는 늙은이일세.”
종담이 선뜻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이번 일이 강북녹림맹의 행사이니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강북녹림맹의 호법이며 호북성의 유명한 살성인 날호 종담의 이름을 듣고도 남포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종 노인이셨구려. 나는 단가(段家)라 하오.”
남포인이 얄밉게도 자신의 이름은 쏙 빼놓고 성만 말하자 종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놈이 지금 나를 놀리나?’
종담은 고절한 무공만큼이나 강호에서의 명성도 뛰어나고 자존심도 강해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무시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강북녹림맹의 총표파자이며 당금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십절산군 사여명도 그를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정 수준의 예우를 해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체도 모를 중년인에게서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속으로 불같은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연히 그의 눈빛이나 음성이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도리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군. 솔직히 자네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네. 다만 이 일대는 본 맹(本盟)의 행사가 있으니 자네 일행은 다른 곳을 돌아보는 게 좋을 걸세.”
“본 맹이라니? 어디를 말하는 거요?”
중년인이 능청스럽게 되묻자 종담은 그가 정말 몰라서 묻는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아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하나 면사 여인과의 일도 순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적을 늘릴 수는 없는 일이어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강북녹림맹에서 나왔네.”
남포인은 짐짓 눈을 크게 뜨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 그렇다면 노인장께서 바로 강북녹림맹의 유명한 고수인 날호 종 대협 본인이란 말씀이시오? 미처 몰라 뵈어 죄송하오.”
남포인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종담은 슬쩍 손을 내저었다.
“알면 되었네. 그러니 자네는 일행을 데리고 이만 물러가도록 하게.”
“이를 말씀이오? 무명소졸이 감히 강북녹림맹의 행사를 방해할 수야 없지.”
남포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떠날 뜻을 비치자 종담은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는 눈앞의 중년인은 물론이고 네 명의 가마꾼들과 그들이 메고 있는 가마 속의 인물에 대해 왠지 껄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남포인은 선뜻 몸을 돌려 떠날 듯하더니 갑자기 환선동 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종담이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무얼 하려는 건가?”
남포인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종담을 향해 모처럼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파산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가 서운하여 동굴에서 뭐라도 기념이 될 만한 것이라도 가져가려 하오. 금세 들어갔다 나올 테니 종 노인은 신경 쓰지 마시오.”
종담은 남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안 될 건 또 뭐요? 동굴에 들어가 돌멩이라도 하나 집어서 나오면 되는 일인데.”
“단지 돌멩이 하나라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돌멩이가 아니라면 아무거라도 눈에 띄는 걸 집어 나오겠소. 이를테면…….”
“이를테면?”
“환선굴은 무척 큰 동굴이라는데 뭐라도 하나 있지 않겠소? 창(槍)이라든가, 아니면 사람이라든가…….”
남포인이 빙글거리며 말하자 종담은 한동안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이내 한 줄기 웃음을 그려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냉랭한 웃음이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더니 역시 강호의 말은 틀린 게 없군. 어쩐지 일이 너무 순순히 풀린다 싶었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 사이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여상과 세 명의 흑의인이 남포인의 주위로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포인은 여전히 가면을 씌운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구려. 대파산에서 여기까지 헛걸음하게 생겼는데, 겨우 동굴에서 기념품 하나만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까지 말리다니 종 노인은 자신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종담이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슬금슬금 다가오던 마여상이 버럭 노성을 지르며 남포인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이 풍뎅이 새끼 같은 놈이 감히 본 맹의 앞에서 허튼 수작을 부리려 하고 있구나!”
사실 마여상은 면사 여인과의 격전에서 뜻밖의 낭패를 당해 망신살이 뻗친 상태였다. 아직 강북녹림맹에 가입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마여상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입지를 어느 정도라도 다질 계획이었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중인환시리에 치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그야말로 분노와 수치심 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중년인 일행이 나타나 시비가 벌어지자 호시탐탐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느닷없이 먼저 손을 쓴 것이다.
마여상이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성급하게 중년인을 공격해 들어갔으나 의외로 종담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중년인과 그 일행들에 대해 꺼림칙한 생각이 있었기에 자신보다 마여상이 먼저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마여상은 처음부터 자신의 성명절기인 흑갈조의 절초들을 전력으로 펼쳐냈다. 거무튀튀한 색을 띤 그의 손이 갈고리처럼 오므라진 채 무서운 속도로 남포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것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남포인의 목덜미가 마여상의 우악스런 손가락에 그대로 뜯겨나갈 것만 같았다.
막 마여상의 강철 같은 손가락이 남포인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남포인의 신형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마여상의 손가락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버렸다. 놀랍게도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남포인은 마여상의 공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마여상은 흠칫 놀라며 재차 다른 손으로 공세를 이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무언가 부드러운 바람이 남포인에게서 마여상의 가슴 쪽으로 살며시 불어왔다.
마여상은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그 가벼운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남포인의 관자놀이를 향해 뻗어나가던 손을 급히 거두어들이며 자신의 앞가슴을 보호했다.
쾅!
“크윽.”
폭음과 함께 마여상의 신형이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에 비해 남포인은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기는 했으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단숨에 두 사람의 우열이 확실하게 판가름 나자 마여상은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찢어죽일 놈!”
마여상이 이를 부드득 갈며 남포인을 향해 다시 덤비려 하자 종담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유심한 눈으로 남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보다는 한결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방금 자네가 펼친 것은 혹시 표류보(漂柳步)와 청류장(靑柳掌)이 아닌가?”
힐끗 돌아본 남포인의 두 눈에서는 한 줄기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고 지나갔다.
“어떻게 알았소?”
“장력 속에 깃들은 푸른 색 기운이 너무 희미하여 긴가민가했었네. 다행히 ‘흔들리는 걸음에 산들바람이 불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강호의 시구 하나가 문득 생각이 나서 확인해 보려 했던 것일세.”
남포인은 의미를 알기 힘든 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종 노인의 안목은 대단하시구려. 그 짧은 순간에 본 문 무공의 특징을 파악하시다니 말이오.”
감탄이 담긴 남포인의 말에도 종담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비류문(匕柳門)의 후예란 말이군.”
“그렇소.”
“비류문의 무공은 비수처럼 날카롭고 버들잎처럼 표홀하지만 워낙 익히기가 힘들어서 당금 무림에서 그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들 중 단씨 성을 쓰는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지. 자네가 바로 색명수사(索命秀士) 단후명(段厚明)인가?”
남포인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바로 단후명이오.”
색명수사 단후명은 비류문의 후예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지만, 다른 신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종담의 시선이 빠르게 한쪽에 서 있는 네 명의 가마꾼과 그들이 메고 있는 가마로 향했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경요궁(瓊瑤宮)에서 온 것이군.”
“그렇소.”
단후명이 담담한 얼굴로 시인을 하자 마여상을 비롯한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경요궁은 대파산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그리 크지 않은 문파로, 역사는 백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 당금 강호에서 경요궁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대대로 경요궁의 궁주들이 천하를 오시할 만한 무서운 무공의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경요궁에는 세 명의 궁주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구 하나 절정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특히 대궁주(大宮主)인 화의신수(華衣神手) 육천기(陸天紀)는 수공(手功)에 관한 한은 당금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원래 비류문의 전대 문주였던 비류존자(匕柳尊子)는 육천기의 절친한 친우였기에, 비류존자가 죽은 후에 그의 수제자 격인 단후명은 육천기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 단후명은 경요궁의 외총관(外總官)으로 대외적인 일을 맡아서 하고 있으며, 경요궁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 단후명이 가마의 안내인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마 속의 인물은 경요궁에서도 핵심적인 수뇌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설마 육천기 본인이 온 것은 아니겠지?’
종담은 순간적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어 시선이 절로 가마를 향했다. 육천기는 수공의 절대고수답게 체구가 우람한 팔 척의 거한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행히 언뜻 보기에도 가마는 그리 크지 않아서 건장한 남자가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육천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때 문득 종담의 뇌리에 경요궁의 세 궁주 중 유일한 여자이며 한때 사천땅에서 상당한 염명(艶名)과 살명(殺名)을 동시에 떨쳤던 여살성(女煞星)의 이름이 떠올랐다.
종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마 안에 있는 분은 혹시 경요궁의 삼궁주(三宮主)인 연혼(燃魂)…….”
종담이 자신도 모르게 무어라고 물으려 할 때 갑자기 가마 안에서 조용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다른 사람이 함부로 그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을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텐데.”
그리 크지 않았으나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종담은 나이도 적지 않았고 강호에서의 신분도 낮은 편이 아니었으나 여인의 말을 듣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장내에 어색하리만치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종담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더 늦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마여상만으로 경요궁의 고수들과 면사 여인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단후명뿐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해 볼 수 있겠으나, 가마 속의 여인이 그가 짐작했던 인물이라면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히 대치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단후명은 그런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종 노인은 무리할 필요가 없소. 나는 단지 환선동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 되오. 굳이 내 손에 종 노인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말이오.”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오히려 종담은 그 안에 은밀하게 담겨 있는 진득한 살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종담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두려운 상대를 만났다고 무작정 물러설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맹주인 십절산군 사여명이 신신당부한 것이라 어떻게든 반드시 이루어야만 했다.
종담이 막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휘익!
어디선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듯한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굳어 있던 종담과 강북녹림맹 고수들의 얼굴이 일제히 활짝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