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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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8권 열한기공(熱寒奇功)편 : 8화


제 289 장 천목파약(天木破約)

언덕을 넘어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 편이었다.

여불회는 유중악이 염려스러운 지 길을 걷다가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유중악은 의외로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얼굴뿐 아니라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유중악은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여불회 또한 그를 부축하거나 섣부른 격려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땀이 흘러내린다는 것은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유중악의 몸 상태는 확실히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으며, 그것은 유중악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당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에는 일행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그 인물은 당연히 혁리의였다. 혁리의가 동생들인 용봉쌍이와 혁리공을 무당산 초입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그곳까지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계절은 여름으로 접어들었는지라 오후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으나,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여 그늘로 들어서면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여불회가 손으로 앞에 보이는 높은 언덕 위를 가리켰다.

“저 고개만 넘으면 무당산이 지척일세. 저 고개 위에 작은 객점 하나가 있는데, 주변 경관이 뛰어난 데다 음식 솜씨도 괜찮아서 잠시 쉬어 갈 만하지.”

혁리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주루에서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먹을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여 대협의 식성이 어떠한지 알겠구려.”

“많이 먹어야 힘을 쓰지. 남자의 힘이란 모름지기 먹는 데서 나오는 법일세.”

여불회는 오른손을 구부려 알통을 만들어 보이고는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진 장문인의 의향은 어떠시오?”

“그곳의 경관이 좋다니 잠시 쉬어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여불회는 진산월이 겉으로 표현은 안 했어도 그 속에는 아직 몸이 성치 않은 유중악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곳에서 간단한 요리를 곁들여 술 한 잔 마시며 무당산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도 제법 훌륭한 도락이 될 거요.”

하나 그들은 도락을 즐길 수 없었다. 언덕을 올라간 그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서진 객점의 파편들과 점점이 뿌려져 있는 핏방울뿐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여불회는 안색이 변해 폐허로 변한 객점의 잔해들을 이리저리 뒤집다가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객점의 주인과 주방장이네. 시신이 아직 채 식지 않은 걸 보니 이들이 변을 당한 건 아주 최근의 일 같네.”

시신은 모두 머리통이 부서져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여불회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공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이토록 악랄한 살수를 쓰다니. 흉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사갈 같은 심보를 지닌 놈이 틀림없구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불회는 십 장쯤 떨어진 풀숲에서 다시 한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번의 시신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오른손에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장검 하나를 굳게 움켜쥔 채 바닥에 꼬꾸라져 있는 모습이 일견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불회는 그 시신을 똑바로 눕힌 후 사인을 조사하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불렀다.

“진 장문인. 잠시 와보시겠소?”

진산월은 다가가서 시신을 내려 보았다. 여불회는 말없이 시신의 한쪽 옷자락을 들춰 보였다. 건장한 가슴 한쪽에 선명한 손자국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피로 그린 듯한 붉은 색 장인(掌印)!

“이건 아무리 봐도 혈수존자 오욕백의 혈라인 같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라인이 맞소. 하지만 오욕백 본인의 솜씨는 아니오.”

“진 장문인은 혈라인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려.”

“그렇소. 오욕백이었다면 장인이 이렇게 피부에 새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몸 자체가 깊이 파였을 거요. 하지만 흉수가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구려.”

여불회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산월의 말이 꼭 오욕백의 혈라인을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진 장문인이 보기에 흉수가 누구인 것 같소?”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냉엄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쯤은 꼭 다시 만났으면 했던 자요.”

“그가 누구요?”

진산월이 그 말에 답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크악!”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길에서 벗어난 숲속을 이십 장쯤 헤치고 나아가니 조그만 공터가 나타났고, 공터 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미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중인들을 보자 꺼져가던 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의 시선은 중인들 중 한 사람에게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시…… 신검무적!”

진산월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나를 알고 있소?”

그 사람의 가슴팍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난자당한 듯 풀어헤쳐져 있었고, 상반신이 멀쩡한 곳이 없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어서 즉사하지 않은 것이 신통할 정도였다.

그는 진산월을 올려보며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잘려진 내장조각이 검붉은 핏물에 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 하남성 노군묘에서 진 장문인을 뵌 적이 있소…….”

노군묘라는 말에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천봉궁의 인물이시오?”

“그렇소. 나는 공주님을 모시는 십이태세 중 일곱째요…….”

그러고 보니 그때 노군묘의 입구를 지키던 몇 사람 중에 그를 본 것도 같았다. 아마 조금 전에 보았던 시신도 십이태세 중 한 명일 것이다.

“단봉공주가 이곳에 왔소?”

“고, 공주님의 지시로 선자 두 사람을 호위하던 중이었는데, 암습을 받았소…….”

“암습한 자들은 누구요?”

그의 대답은 진산월의 예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시, 신목사자들…….”

“선자들은 어디 있소?”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서, 석화가(石花街) 방면으로 가고 있소. 신목사자들이 그녀들의 뒤를 쫓고 있으니 그녀들을 도와…….”

그는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여불회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천봉궁과 신목령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맺고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약조가 깨어진 모양이오. 진 장문인은 어쩌실 셈이오?”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들에게 가야겠소.”

여불회는 진산월이 이미 신목령과 적지 않은 원한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약간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목령의 인물들은 다소 편협한 구석이 있어서 자신들의 일에 외인이 끼어드는 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거요. 그래도 갈 생각이오?”

“그녀들 중 몇 사람은 본 파와 상당한 인연이 있소. 그러니 신목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들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들을 구하지 않을 수 없소.”

“그렇다면 진 장문인과 내가 먼저 움직입시다. 청천과 혁리 공자는 내 안사람이 잘 이끌고 올 거요.”

진산월이 말릴 겨를도 없이 여불회가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성급한 행동에 진산월이 어이가 없어 기아향을 돌아보니 기아향이 상관하지 말고 어서 가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산월도 마음이 급한 상태였기에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여불회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천봉팔선자 중에는 낙일방의 연인인 엄쌍쌍도 있었다. 만에 하나 지금 신목령의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는 여인들 중 그녀가 있다면 진산월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해야 했다.

쏜살같이 숲속을 치달려 가던 그들의 귀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신형은 비조처럼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숲속의 제법 큰 공터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명의 여인이 세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합공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여인은 부상이 심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수비에 급급해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이 세 명의 공격을 도맡다시피 상대하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여인은 짙은 남의를 입은 이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미녀였다. 그녀의 미간에 검은 기운이 어려 있는 것으로 보아 독에 당한 모양이었다.

세 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여인은 불타는 듯한 홍의를 입고 있었는데, 다소 사나운 인상의 외모와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장검 또한 그녀의 옷처럼 은은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장검이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게 움직이는지 장내가 온통 홍영(紅影)에 가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들과 싸우고 있는 세 명의 남자는 백의 미남자와 하늘색 유삼을 입은 청년, 그리고 머리에 복면을 뒤집어쓴 청의인이었다. 백의인과 청의 복면인은 맨손이었고, 하늘색 유삼의 청년만이 손에 섭선을 들고 있었다. 세 사람 중 주로 공격을 가하는 인물은 백의인과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었고, 청의 복면인은 그녀의 공격을 막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세 남자의 무공은 언뜻 보기에도 하나같이 강호의 절정고수에 못지않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홍의 여인의 검술이 워낙 날카롭고 매서운지라 좀처럼 그녀의 검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홍의 여인의 검술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해서 세 사람이 합공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검을 당해내지 못했을 게 분명해 보였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손길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합공을 당하는 와중에도 부상을 입은 남의 여인을 보호하느라 지나치게 심력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남자 중 백의인이 가끔씩 남의 여인을 공격하고는 했는데, 그 시기가 절묘할 뿐 아니라 공격하는 부위가 하나같이 치명적인 곳이어서 홍의 여인은 번번이 그의 공세를 막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도 홍의 여인의 장검이 매서운 검광을 뿌리며 하늘색 유삼의 청년의 섭선이 뿌려낸 공세를 파해하고 들어가는 순간에 백의인은 그녀의 옆을 빙글 돌아 남의 여인의 가슴팍을 향해 일장을 내갈기고 있었다. 부상으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여인의 가슴을 정면으로 노리는 그 수법은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조화심, 이 비겁한 놈! 네놈이 그러고도 신목령의 사자라고 떠들고 다니냐?”

홍의 여인은 젊은 여자답지 않게 거친 욕설을 터뜨리며 내뻗었던 장검을 급히 회수하여 백의인을 향해 검을 휘둘러갔다. 그러자 백의인은 얄밉게도 중간에 손을 거두며 뒤로 훌쩍 물러나 버렸다.

홍의 여인은 순식간에 벼락같은 일검을 펼쳐 간신히 그의 공세를 물리쳤으나 대신에 숨결이 가빠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백의인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준수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곡유유! 벌써부터 숨이 차면 어쩌려고 그러나? 나는 이제 슬슬 몸이 풀리려고 하는데 말이지.”

하늘색 유삼의 청년이 빙글거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조 형도 그러시오? 나도 이제 조금씩 놀아볼 마음이 생기려던 참이었소. 우리 오늘 한 번 허리띠를 풀고 진탕 놀아봅시다.”

그가 허리띠를 벗는 동작을 취하자 홍의 여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장검을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그어 내렸다.

“공손도! 네 놈의 추악한 입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

공손도는 겉으로는 방심한 척해도 그녀에 대한 경각심을 단단히 가지고 있었기에 즉시 몸을 옆으로 피했다.

쫘악!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어른의 손가락 굵기만 한 자국이 깊게 파이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가공할 검기에 공손도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년이 검에 미쳐서 툭하면 몇 년씩 폐관을 한다고 하더니 무공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정말 의외의 봉변을 당할 뻔했다.’

하나 그는 이내 음산한 흉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흐, 곡유유! 내가 허리띠를 푼다니까 너도 마음이 급해진 거냐? 그렇다면 옷가지는 내가 그 야들야들한 몸에서 직접 벗겨주지.”

홍의 여인은 그의 음심(淫心)이 가득한 말에 귀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공손도의 무공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펼치는 섭선무공은 한때 강북 무림을 풍미했던 광풍서생 양척기의 광풍이십팔선으로, 능히 강호일절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홍의 여인과 공손도는 순식간에 질풍 같은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하나 결국 뒤로 물러서는 사람은 먼저 달려들었던 공손도였다.

공손도는 팔에 일검을 격중 당했는지 피범벅이 된 왼팔을 감싸고 일 장 밖으로 물러난 채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정말 암호랑이 같은 년이구나! 내 오늘 기필코 네년을 내 배 아래에서 발버둥 치게 만들고야 말겠다.”

백의인, 조화심이 옆에서 점잖게 웃으며 그를 말렸다.

“공손 아우, 서두르지 말게.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한참 남았으니 암호랑이를 길들일 시간은 충분하네.”

공손도는 순간적인 호승심에 그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가 낭패를 당하자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기에 조화심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저년은 내 거요. 두 분은 그렇게 아시오.”

“이를 말인가? 나는 사나운 호랑이보다는 야들야들한 암사슴이 더 좋다네.”

조화심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남의 여인을 쳐다보자 남의 여인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상기되었다.

하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걱정스러움과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칠매(七妹) 혼자라면 능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공연히 나 때문에 그녀까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구나. 아! 십이태세 두 분까지 나를 구하다 쓰러지셨는데, 내가 어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겠는가?’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가득했다.

‘객점에서 불의의 암습만 당하지 않았어도……. 이자들이 우리의 행적을 이토록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공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구나.’

남의 여인은 천봉팔선자 중의 여섯째인 남봉 엄쌍쌍이었다.

원래 그녀는 혈봉 곡유유와 두 명의 태세들과 함께 무당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더위를 피해 차를 마시려 언덕 위의 객점에 들렀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중독된 것을 깨달았다. 독의 위력이 어찌나 지독한 지 단지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도 그녀는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재빨리 자신이 중독된 것을 알렸기에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때 신목령의 암습이 시작되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중독으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보호하느라 십이태세 중 한 사람이 조화심의 혈라인에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한 사람도 그녀들의 탈주를 돕느라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혈봉 곡유유마저 그녀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으니, 엄쌍쌍의 심정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참담하기만 했다.

그녀의 눈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이렇게 짐만 될 수는 없다. 내가 없다면 칠매의 능력으로 능히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막 비장한 표정으로 마지막 공력을 끌어올려 심맥을 끊으려 할 때였다.

휘익!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한 마리 신룡처럼 허공을 날아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그 인물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달랐다. 곡유유는 어리둥절했고, 조화심과 공손도는 사신을 보듯 놀랐으며, 청의 복면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엄쌍쌍은 맥이 풀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진산월은 다른 사람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엄쌍쌍에게 다가갔다.

“엄 소저. 그동안 잘 계셨소?”

엄쌍쌍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예, 진 장문인께서도…….”

하나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마의 검은 기운이 점점 번져서 눈 아래까지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몸은 견딜 만하오?”

그녀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공력을 끌어올려 독기가 퍼지는 걸 막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일단 주변의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 소저의 상태를 살펴봅시다.”

곡유유는 새롭게 나타난 진산월과 그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는 여불회를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진산월이 엄쌍쌍과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조금 긴장이 풀어졌는지 나직하게 속삭였다.

“언니, 누구야?”

엄쌍쌍은 곡유유의 성정이 과격해서 가끔 입 밖으로 여인답지 않은 험한 말을 내뱉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가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칠매, 이분은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진 대협이시니 어서 인사드려.”

진산월의 이름을 듣자 자존심이 강하고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곡유유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신검무적?”

단순한 네 글자의 이름이었으나, 그것이 주는 의미는 너무도 거대한 것이었다.

아직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청의 복면인은 특히 놀랐는지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몸을 한 차례 떨기조차 했다. 새로운 방해자의 등장으로 일이 자꾸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자 마음이 불편해 있던 참에 그 방해자가 신검무적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놀라움과 당혹감에 가득 찬 눈으로 조화심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신검무적이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조화심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겠소. 저 두 계집만 해치우면 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는 것 같소.”

청의 복면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우리가 이공자(二公子)에게 호되게 당한 것 같군.”

“설마 이공자가 일부러 그랬겠소? 우리가 그를 만날 줄을 어떻게 알고?”

“신검무적의 행적은 당금 강호에서 최우선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니 그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공자가 모를 리 없네. 그런데도 우리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는 것은 여차하면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새로운 일을 도모하겠다는 수작이 아니고 뭐겠는가?”

조화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공자가 우리를 그리 대할 리 있소? 우리가 그를 위해 한 일이 얼마인데?”

“아직도 그의 성격을 모르는가? 그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친혈육이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일세.”

그 말에 조화심은 물론이고 공손도의 얼굴에도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공자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던 것이다.

공손도가 참지 못하고 재빨리 말을 꺼냈다.

“그럼 늦기 전에 어서 몸을 피합시다.”

하나 그의 말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네놈만큼은 오늘 반드시 내 손으로 도륙할 것이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곡유유가 매서운 검광을 뿌리며 공손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공손도는 질겁하고 황급히 뒤로 몸을 피했으나, 곡유유의 검은 집요하게 그를 따라왔다.

“이 미친 년!”

공손도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으나 이미 그의 몸은 그녀의 검세 속에 휩쓸려있어 정면으로 붙지 않고는 도저히 몸을 빼낼 수 없는 상태였다. 별 수 없이 그는 수중의 섭선을 질풍처럼 휘두르며 그녀의 검에 대항했다.

조화심과 청의 복면인은 공손도를 돕고 싶었으나 진산월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조화심이 힐끔 돌아보니 진산월은 한쪽에 태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모습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그들 정도는 언제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로도 보였다.

‘제길. 그때의 그 덩치만 컸던 놈이 어떻게 이런 고수가 되었는지…….’

조화심은 자신이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고는 내심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감히 그와 직접 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전에 종남산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잠깐 겪어본 바로는 자신은 절대로 그의 검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뒤로 들려온 폭풍 같은 소문으로 보아 진산월의 무공은 그때보다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옆의 청의 복면인과 합세한다고 해도 그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당당한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한 명으로 천하를 휩쓸고 다닐 때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두려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으니 조화심 자신으로서도 어이가 없고 한숨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지금도 진산월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 올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곡유유와 공손도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손도는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곡유유에 비해 무공이 뒤떨어진 상태에서 진산월의 등장으로 마음이 잔뜩 위축되어 있으니 그나마 있던 실력도 제대로 발휘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한 형편이었다.

곡유유의 검은 여인답지 않게 정말 사납고 날카로워서 금시라도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했다. 하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서 공손도는 몇 군데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용케도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고 있었다.

공손도는 처음에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이내 사정을 알아차리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망할 년이 나를 가지고 놀 생각이구나. 내 몸을 자근자근 썰어서 육포로 만들겠단 말이지?’

그의 눈에 한 줄기 악독한 빛이 떠올랐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곡유유가 순순히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도 않자 공손도는 이판사판이란 생각에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곡유유를 향해 덤벼들었다.

마침 곡유유의 검은 호선을 그리며 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공손도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검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푹!

곡유유의 검이 사정없이 그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왔다. 하나 그 바람에 곡유유와 그의 몸은 지척 간에 놓이게 되었다. 공손도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수중의 섭선으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쳐갔다.

“머리통을 부숴주마!”

곡유유는 언제나처럼 공손도의 옆구리를 살짝 갈라놓고 물러나려 했는데 자신의 검이 그의 몸을 꿰뚫어 버리자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손도가 설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이토록 무식한 수법을 써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대전 경험이 많은 고수였다면 검을 놓고서라도 일단은 몸을 뒤로 피했을 것이나, 그녀는 자신의 애검을 끔찍하게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검을 놓고 물러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단지 검을 최대한 빨리 뽑아내고 몸을 뒤로 젖혀 공손도의 섭선을 피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나 공손도가 검이 뚫고 들어간 부위를 자신의 진기로 꽁꽁 봉쇄했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처럼 검이 수월하게 뽑히지는 않았다. 그러니 검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녀로서는 섭선을 피하는 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팟!

섭선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뒤로 묶었던 그녀의 머리띠가 풀려져 폭포수 같은 머리가 우수수 흘러내렸다.

간신히 머리통이 박살나는 참변을 면한 곡유유의 얼굴이 이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머리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가던 공손도의 섭선이 허공에서 기이하게 꺾이며 그대로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향해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광풍이십팔선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북풍탈백(北風奪魄)의 수법이었다. 곡유유로서는 도저히 그 살인적인 초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줄기 검광이 대지를 가르며 공손도의 이마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큽!”

공손도는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의 미간에는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장검 하나가 뒤통수까지 관통된 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옆구리와 이마가 각기 검에 꿰뚫린 채로 죽어 있는 공손도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곡유유는 간신히 공손도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아들고는 한 차례 진저리를 쳤다. 조금 전에 그녀는 자칫 방심한 사이에, 너무도 짧은 순간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상대를 죽이려는 공손도의 악독함은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곡유유의 시선이 검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진산월이 허허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조금 전의 위급한 순간에 진산월은 용영검으로 홍단서천의 비검술을 펼쳐 공손도를 죽이고 그녀를 위기에서 구출해낸 것이다.

덕분에 그는 검이 없는 빈손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본 조화심과 청의 복면인이 재빨리 시선을 교차하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번이 신검무적을 쓰러뜨리고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조화심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월강수를 펼쳤고, 청의 복면인 또한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주먹으로 무시무시한 권법을 펼치며 진산월을 압박해 들어갔다.

진산월은 양 손을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그들의 공세가 지척으로 다가설 즈음에야 비로소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막 그들의 공세가 정면으로 충돌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던 조화심이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청의 복면인은 진산월의 공세에 단신으로 맞부딪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앗?”

청의 복면인은 놀란 외침을 토해냈으나, 그때는 이미 진산월이 펼쳐낸 장세와 그의 주먹이 정면으로 격돌하고 있었다.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청의 복면인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전력을 다한 공격으로도 대천장에 태진강기를 섞은 진산월의 장공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청의 복면인은 자신이 뒤로 물러난 것보다는 조화심이 혼자서 몸을 빼내 도망친 것이 더욱 놀라운지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화심, 네놈이……!”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 진산월의 손이 어느 때보다 유연하게 허공을 가르며 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청의 복면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두 주먹을 풍차처럼 휘둘러 그 손을 막으려 했다. 하나 그 손은 너무도 부드럽게 그의 주먹 사이를 뚫고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그 순간 청의 복면인은 자신의 가슴이 거대한 철퇴에 가격당한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크아악!”

절로 입이 벌어지며 폭포수 같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세찬 경련을 일으키던 그의 몸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가슴뼈가 움푹 꺼져 들어가고 양쪽 눈과 코에서도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의 복면인은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지 피가 흘러나오는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무영탈혼장이라고도 불리는 종남파의 절세 무공, 약류장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를 두고 혼자 몸을 피하던 조화심은 청의 복면인의 비명 소리를 듣자 더욱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그는 이미 예전에 진산월과 겨루어 보았기 때문에 진산월이 검법뿐만 아니라 장법을 비롯한 맨손 무공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도 월강수를 비롯한 자신의 절학들을 모두 사용하고도 불과 십여 초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합공을 하는 척하여 동료조차 속이고는 혼자서만 몸을 빼낸 것이다. 그로서는 이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확신은 이내 깨어지고 말았다.

쉬익!

그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날아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그 그림자가 무엇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조화심은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큭!”

그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 하나의 길고 가느다란 채찍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채찍은 특이하게도 옥색(玉色)을 띠고 있었는데, 다른 채찍에 비해 유난히 가늘어서 흡사 여인의 허리띠를 연상케 했다.

그것을 보자 조화심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 채찍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어느새 옥빛 채찍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조화심은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으나, 목덜미 살이 한 움큼이나 뜯겨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만큼 채찍이 날아드는 속도가 빠르고 변화가 막심했던 것이다.

조화심은 지혈할 여유도 없이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쌍장을 휘둘렀다.

“이제 끝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조화심은 눈을 부릅뜬 채 필사적으로 월강수와 혈라인을 동시에 끌어올리며 양 손을 위로 쳐올렸다. 하나 채 반도 내뻗기 전에 두 개의 옥장(玉掌)이 그의 양 손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파팡!

“헙!”

조화심은 짤막한 신음을 내지르며 신형을 한 차례 휘청거렸다. 비록 양 어깨가 박살나는 것은 면했으나, 완전히 공력을 끌어올리기 전이었는지라 양 손목의 뼈가 부러지고 몸 속 기혈이 송두리째 뒤흔들려 버린 것이다. 그는 입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피를 꿀꺽 삼키며 그대로 몸을 굴렸다.

파아아……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공간이 장력의 여파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조화심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며 피할 공간을 찾으려 했다.

하나 그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목덜미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큭!”

조화심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목덜미를 관통한 물체를 움켜잡았다. 한없이 매끄러운 듯한 그것은 바로 옥빛 채찍이었다.

“정소소……. 네년이…….”

조화심은 옥빛 채찍의 주인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고 온몸에 유혈이 낭자한 그의 모습은 도저히 옥면절정으로 불렸던 절세의 미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참혹한 것이었다.

옥빛 채찍의 주인, 정소소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말없이 채찍을 거두었다.

조화심은 몇 번이나 피 묻은 손을 내뻗으며 그녀를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때 동정호 일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일대 살성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묵묵히 조화심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휴우, 조가 놈의 장력이 무섭긴 무섭네요.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옥정수(玉鼎手)를 펼쳤는데도 그걸 막아내다니……. 그래도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으니 나쁜 놈다운 최후로군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그녀는 천봉팔선자의 막내인 누산산이었다.

정소소는 냉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은 자라고 해도 함부로 욕하는 것이 아니다.”

누산산은 찔끔하더니 이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 욕도 못해요? 게다가 이놈들 손에 십이태세 중 두 분이나 돌아가셨잖아요.”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다. 진 장문인이 아니었으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했다.

진산월은 공손도의 시신에 꽂혀 있는 용영검을 회수하고 있었다.

누산산은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 이제는 쳐다보기도 힘든 인물이 되었군요. 가까이 가서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에요.”

정소소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얼핏 누산산이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을 때, 정소소는 어느새 진산월을 향해 저만치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의 손에 쓰러진 청의 복면인의 시신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정체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조화심과 공손도는 모두 본 모습을 드러냈는데, 왜 그 혼자만 복면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신목령의 고수라면 굳이 그 상황에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목령의 고수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조화심이나 공손도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친숙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잠시 그의 정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은은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지며 누군가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체가 궁금하면 복면을 벗겨 보지 그러세요.”

진산월이 돌아보니 정소소가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진 장문인 덕분에 저의 자매들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군요. 도움에 감사드려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소?”

“여섯째와 일곱째를 이 언덕 아래의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약속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기에 불안한 마음에서 그녀들이 온 길을 거슬러 오고 있었어요.”

“그러다 흔적을 발견한 것이구려?”

“그래요. 십이태세 중 한 분의 시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진 장문인이 안 계셨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선자 중 한 분의 무공이 뛰어나니 내가 없었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요.”

진산월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정소소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더니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나저나 진 장문인께서는 이자의 정체에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군요.”

“혼자서만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짐작이 가는 자라도 있소?”

처음으로 정소소의 고운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예상되는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확인해보기 전에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럼 확인해 봅시다.”

진산월은 서슴없이 복면인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복면을 벗겨냈다. 진산월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년의 부릅떠진 눈과 피를 가득 머금은 채 꽉 다물어진 입술은 그가 죽음 직전에 얼마나 큰 경악과 고통을 느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정소소를 돌아보았다.

정소소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져 있었다. 항상 부드럽고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아는 자요?”

정소소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는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여섯째인 위중설이에요.”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요?”

정소소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오?”

그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누산산이 그들 옆으로 와서 고개를 삐쭉 내밀고 시신을 바라보다 뾰쪽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앗? 이자는 종남산에서 둘째 언니에게 죽었다던 위중설이 아니에요?”

정소소가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그 음성은 주위에 퍼져나간 후였다. 그녀는 질책하는 눈으로 누산산을 쏘아보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혈봉 곡유유는 물론이고 한쪽에서 힘겹게 서 있던 엄쌍쌍까지 가까이 다가와 시신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소소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곡유유를 보고는 이내 얼굴을 풀며 미소 지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싸우는 걸 보니 무공 실력은 제법 좋아졌는지 몰라도 덤벙대는 건 여전하더구나.”

곡유유는 다소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다가 순간적인 방심으로 공손도에게 낭패를 당할 뻔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공손도, 그 자식이 그렇게 악독한 수법을 쓸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래서 강호에서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하거나 상대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그보다 다친 곳은 없니?”

큰언니다운 자상한 말에 곡유유는 모처럼 활짝 웃었다.

“나야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지요. 참, 여섯째 언니가…….”

두 여인의 시선이 엄쌍쌍에게로 향했다. 엄쌍쌍은 서 있기도 힘든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는데, 미간에만 머물러 있던 검은 빛이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의 절반 가까이 퍼져가고 있었다.

정소소는 그녀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 보고는 급히 그녀의 혈도 몇 군데를 눌러 독기가 빨리 퍼지지 못하게 했다.

“독기의 위력이 상당하구나. 아무래도 한시라도 빨리 노 신의에게 데려가야겠다.”

곡유유가 반색을 했다.

“노 신의께서 근처에 계셔요?”

“그래.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객잔에 머물러 계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자.”

곡유유는 손뼉을 탁 쳤다.

“그럼 소연도 그곳에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너는 소연을 안 본 지도 오래되었겠구나. 나도 이번에 모처럼 그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한가요?”

“그래. 여전히 착하고 부끄러움이 많지. 너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야.”

정소소가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곡유유는 평소의 앙칼진 성격과는 달리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요.”

“너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녀를 좋아하지. 그런데 너는 진 장문인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니?”

그 말에 곡유유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예…….”

정소소는 그녀의 대답이 시원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는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곡유유는 그녀가 귀신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꿰뚫어 본 것 같아 내심 찔끔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희롱한 공손도에게 복수할 욕심 때문에 진산월에게 인사다운 인사도 하지 못하고 공손도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곡유유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진산월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이내 마음을 결심한 듯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천봉궁의 혈봉 곡유유가 진 장문인의 도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사례를 드리지 못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누산산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 성질 사납고 암호랑이 같은 곡유유가 남에게 이토록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처음으로 본 것이다. 더구나 외간 남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곡유유는 천봉궁의 팔선자 중에서도 정소소와 함께 가장 무공이 뛰어난 고수로 손꼽혔으며,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그 나이대의 여자들 중에서는 단연 발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도도하고 오만했으며,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남자들을 경멸해 왔다. 누산산은 그녀보다 나이도 한 살 어렸지만 무공이 약하다고 늘 구박을 당해왔던 터라 그녀의 이런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통쾌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나 그 상대가 당금 강호의 제일검객인 진산월이 아니었다면 곡유유가 과연 이토록 정중하게 인사를 했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지나간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곡 소저의 실력을 보니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약간의 위험은 있을지언정 결과는 변함이 없었을 거요.”

하나 진산월의 말과는 달리 조금 전에 진산월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의외의 낭패를 당했을 거라는 것은 곡유유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진산월을 쳐다보는 곡유유의 시선은 평상시 다른 남자들을 볼 때와는 달리 존경과 흠모의 빛이 담겨져 있었다.

“아닙니다. 조금 전 진 장문인의 비검술은 저로서도 처음으로 보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비검술이 아니었다면 저 악적의 손에 제 피를 가득 묻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격식을 갖춘 그녀의 말은 일견 딱딱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진정도 느껴졌다.

진산월은 혈봉 곡유유가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과격하고 입심이 거칠다고 들었는데, 막상 만나본 그녀는 의외로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였다. 강한 힘을 숭상하는 그녀였기에 진산월에 대한 태도가 더욱 공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모습조차 그다지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소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위중설의 정체를 밝혔을 때 그녀는 확실히 당혹감을 느낀 표정이었고, 그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솜씨 좋게 곡유유에게 말을 건네며 화제를 돌렸으나, 그렇다고 진산월에게 일부러 그 건에 대해 숨기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이런 공개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이다.

진산월은 누산산이 말한 내용에 더욱 관심이 갔다.

누산산은 위중설이 종남산에서 둘째 언니의 손에 죽었다고 했는데, 죽은 사람이 어찌 생생하게 살아서 이곳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녀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산월은 천봉팔선자의 둘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취봉 두청청.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얼굴을 보기도 했고, 예전에는 그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그녀가 얽힌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졌으며, 정소소는 그 때문에 그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혹시 그 일은 낙일방이 엄쌍쌍의 정표를 받고 나갔다가 함정에 빠진 일과 연관된 것은 아닐까?

오늘 이 이름 모를 야산의 숲속에서 마도의 하늘이라는 신목령의 십이사자 중 세 명이나 목숨을 잃어버렸다. 신목령의 사자들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천봉궁의 인물들을 습격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서 비명횡사한 것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천목지약이 존속하는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소소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것에는 자신이 미처 모르는 또 다른 내막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 정소소가 그에게 다가왔다.

“진 장문인 일행이 온 모양이군요. 육매의 독상(毒傷)도 치료해야 하니 노 신의께서 계신 곳으로 움직이도록 하지요. 자세한 사정은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이 돌아보니 여불회가 어느새 자신의 아내인 기아향과 유중악 등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정소소와 잠시 마주쳤다.

그녀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은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으며, 눈빛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흑백이 분명한 그 검은 눈동자에는 진산월의 영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진산월은 한없이 강인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강호에서 퍼진 것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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