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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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0권 무당집회(武當集會)편 : 2화


304장. 청연무당(靑然武當)

오리일암십리궁(五里一庵十里宮),

단장취와망영롱(丹墻翠瓦望玲瓏).

누태은영금은기(樓台隱映金銀氣),

임수회환화경중(林岫回環畵鏡中).

문열쌍암용마도(門裂雙岩容馬度),

천개일경허인통(天開一徑許人通).

당년단조전유재(當年丹竈傳猶在),

우핵하유촉벽공(羽翮何由矗碧空)…….

오 리마다 암자가 있고 십 리마다 궁이 있으니,

붉은 담장과 푸른 기와가 영롱해 보이는구나.

누대는 금은색 기운에 숨은 듯 가려져 있고,

산봉우리를 숲이 빙빙 둘러싸니 그림 속 풍경 같구나.

두 개의 바위가 갈라져 생긴 문은 말도 뛰어넘을 것 같고,

하늘이 열리며 생긴 길은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는구나.

올해에도 붉은색 아궁이는 여전히 있는 듯하니,

새의 깃은 어떻게 푸른 하늘을 저리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지…….

무당산의 첫인상은 한없이 푸르고 맑다는 것이었다. 홍익성(洪翼聖)같이 시정(詩情)이 충만한 시인이 아니더라도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무당산의 절경을 보노라면 시구 한 구절쯤은 읊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다.

진산월 일행은 우진궁(遇眞宮)을 거쳐 원화관(元和觀)과 회룡관(回龍觀)을 지나 마침정(磨針井) 부근을 지나고 있었는데,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짙어지는 산의 내음과 푸르게 물들어 가는 주변의 풍광에 잔뜩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종남파의 고수들은 동중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무당산은 초행인지라 더욱 큰 감흥을 느끼는 것 같았다.

동중산은 멀리 병풍처럼 처처히 늘어선 높은 봉우리들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세 봉우리 중 가장 앞의 것이 향로봉(香爐峰)이고, 그 뒤의 높이 솟은 것이 천주봉(天柱峰), 그리고 제일 뒤에 구름에 가려 아련히 보이는 곳이 오로봉(五老峰)입니다. 천주봉 일대가 바로 무당파의 본산이 있는 곳이지요.”

낙일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천주봉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정말 높고 가파르군요. 저런 험한 봉우리 아래에 건물을 지을 생각을 했다니 무당의 도인들도 대단하네요.”

“아마 험하고 함부로 사람들이 올라올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도를 닦는 선인들이 모여들게 되었을 겁니다. 올라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붉은색 담벽에 비취색 기와가 올려진 건물들이 험준한 봉우리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육천기가 껄껄 웃으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허허. 단장취와(丹墻翠瓦)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당파만의 독특한 풍광이지. 조금 더 올라가서 태자파(太子坡)를 지나면 무당파의 건물들을 볼 수 있을 걸세.”

낙일방이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사숙께서도 무당파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육천기는 강호의 이름난 고수일 뿐 아니라 준수한 용모의 낙일방이 자신을 선뜻 사숙으로 부르는 것이 기뻤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쯤 가 보았네. 무당파의 도사들은 대부분이 앞뒤가 꽉 막힌 우직한 자들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말이 통하는 도사들도 제법 있지.”

“친하게 지내는 도인들이 계시는 모양이군요.”

“두 사람 있네. 둘 모두 성정이 부드럽고 인품이 뛰어나서 능히 사귈 만한 자들일세. 이번에 올라가면 내가 소개해 줌세.”

“기대하겠습니다.”

마침정에서 태자파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가팔랐다. 다행히 태자파 주위에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아서 올라가는 내내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재미 때문에 다들 힘든 줄도 모를 정도였다.

태자파에 오르자 천주봉이 코앞에 놓인 듯 가깝게 느껴지며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수림 사이로 붉은색 벽과 유난히 푸른 기와를 지닌 여러 채의 건물들이 시야에 보이자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야, 굉장하구나!”

“정말 멋지군.”

건물들은 천주봉과 그 일대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 사이에 숨은 듯 자리 잡고 있었는데, 붉은색과 푸른색의 강렬한 조화 때문인지 아래에서도 제법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무당파의 모습을 보려면 천주봉 정상에 올라가야 하네. 천주봉 정상에서 내려다보아야만 비로소 무당파를 보았다고 할 수 있지.”

육천기의 말에 낙일방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무나 천주봉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그렇다고 외인이 절대로 출입할 수 없는 금지(禁地)도 아닐세. 사전에 승낙을 받는다면 무당파의 제자들을 대동하는 조건으로 정상에 올라가 볼 수 있네. 나도 두 번째 왔을 때 무당 도우(道友)의 안내로 천주봉 정상을 밟아 볼 수 있었지. 그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어떠셨습니까?”

낙일방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육천기는 빙긋 웃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네.”

“그 정도란 말입니까?”

“궁금하면 자네도 내일쯤 올라가 보게.”

낙일방은 계면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무당파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들이 순순히 허락할 리도 없는데…….”

육천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강호의 후기지수 중 제일고수라는 옥면신권이 요청을 하는데 무당파에서 들어주지 않을 리 있나? 솜씨 좋고 말 잘하는 제자를 붙여서라도 기꺼이 승낙을 해 줄 걸세.”

낙일방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아직도 자신의 명성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고 강호에서의 지위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낙일방의 순진한 모습에 육천기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남과 싸울 때는 무서운 호랑이 같은 낙일방도 평상시에는 이제 겨우 약관을 갓 넘긴 풋풋한 젊은이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락중과 동중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남파 고수들은 십 대에서 이십 대의 나이를 지니고 있었다. 장문인인 진산월 또한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으니, 종남파의 연령층이 얼마나 젊은지 육천기는 이제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런 나이의 젊은이들이 당금 무림을 뿌리째 뒤흔드는 전설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니 육천기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져 왔다. 바닥에서 일어나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육천기는 별다른 경쟁 상대도 없는 대파산에서 작은 문파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심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앞에는 거대한 화산파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초가보라는 강력한 상대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복마전 같은 서안에서 무너져 가는 문파를 일으켜 세우고 강호무림을 위진시키게 되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난관을 헤쳐 나와야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노력에 공짜로 편승한 것 같아 육천기는 내심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선뜻 경요궁을 속문으로 인정해 주고 자신을 사숙으로 받아 준 진산월의 결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낙일방이 다시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육천기는 남모를 감회에 제법 오랫동안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검지(解劍池)는 어딥니까? 무당파의 초입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보이지 않는군요.”

육천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으로 태자파 너머를 가리켰다.

“저 언덕 너머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검하교(劍河橋)라는 다리가 나오네. 그 다리에서부터 비로소 무당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지. 해검지는 그 다리 건너편에 있네.”

해검지는 무당산 어귀에 있는 작은 연못이지만, 그 명성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무당파를 찾아온 몇몇 무림인들이 무당파의 시조인 장삼봉(張三峰)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가지고 있던 병장기를 풀어 놓는 곳이었는데, 나중에는 점차 의미가 확대 해석되어 이곳에서 병장기를 풀어 놓지 않으면 무당파에 적대적인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단순히 존경을 표하기 위한 장소가 무당파의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하나 실상은 조금 달랐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명성을 지녔거나 구대문파 같은 명문정파의 고수들은 해검지에서 병장기를 풀어 놓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병장기란 무림인에게는 목숨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동시에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무리 무당파라도 일방적으로 해검(解劍)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막상 검하교를 건너 해검지로 가 본 일행은 해검지의 평범한 모습에 적지 않게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해검지는 직경 삼 장쯤 되는 별다른 특징 없는 작은 연못에 불과했고, 풀어 놓은 검을 걸어 놓는다는 괘검수(掛劍樹)는 육천기가 알려 주기 전에는 전혀 시선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나무에 불과했다.

하나 해검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풍광이 아니었다. 그들이 해검지에 도착하자마자 근처의 수림에서 몇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보이는 네 명의 도인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정명(精明)하고 자세가 곧은 비범한 인상의 인물들이었다.

해검지가 특별한 것은 이곳부터 본격적인 무당파의 영역이어서 무당파의 제자들이 상시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무량수불. 어디에서 온 도우들이신지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삼십 대 도인이 도호(道號)를 외우며 묻자 동중산이 앞으로 나서서 미리 준비한 배첩을 내밀었다.

“종남파의 장문인께서 무림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셨소.”

동중산의 말을 들은 도인이 움찔하여 배첩을 확인하더니 중인들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이내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무량수불. 종남파의 장문인께서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셨군요. 본 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별말씀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늘에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본 파에서 진 장문인을 모시기 위해 사람들이 내려올 겁니다.”

말을 들어 보니 무당파에서는 오늘 종남파가 방문할 것을 알고 사전에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과연,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 되지 않아 산 위에서 두 명의 인물들이 빠른 신법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동작이 어찌나 표홀했던지 동중산이 나직하게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놀라운 신법이구나. 저것이 아마도 세류표(細柳飄)인 모양이구나.”

그들은 순식간에 종남파 일행의 앞에 내려섰다. 가파른 산길을 단숨에 내려왔음에도 전혀 숨도 가쁘지 않고 표정 또한 변함이 없어서 그들의 내공이 얼마나 정심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진산월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눈빛이 맑은 그 도인은 진산월을 보자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 장문인이셨군요.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하셔서 하마터면 몰라뵐 뻔했습니다. 빈도를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진산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청운도장의 신태도 여전히 비범하시구려.”

그 젊은 도사는 무당파 최고의 후기지수들이라는 무당십이검 중의 한 사람인 청운도장이었다.

사 년 전에 진산월은 임영옥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동광사에 갔었는데, 그때 우연히 청운도장을 만나 함께 어려움을 극복한 적이 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운도장의 모습은 당시와 큰 변화가 없었다.

하나 청운도장은 진산월의 달라진 외모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청운도장은 이내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렸는지 자신과 함께 도착한 도사를 소개했다.

“참, 내 정신 좀 보게. 이분은 제 사형이십니다. 사형, 종남파의 진 장문인이십니다.”

그 도사는 정중하게 진산월을 향해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빈도는 청석(靑晳)이라 합니다. 진 장문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석도장이셨구려. 반갑소. 내가 바로 진 모요.”

청석은 무당십이검 중에서도 서열 삼위의 고수였다.

무당십이검은 무당파의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특이한 신분이었고, 그 지위나 비중이 장로들에 못지않았다. 무당파에서 그런 무당십이검 중의 두 사람이나 내려보낸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것으로, 그것만 보아도 무당파에서 진산월의 예우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일행들을 바라보는 청운과 청석의 얼굴에도 미미한 놀라움과 경의의 빛이 담겨 있었다.

지금 무당산에 올라온 종남파의 인원은 종남 본산의 제자 여덟 명과 속문인 경요궁 출신의 네 명을 포함하여 모두 열두 명에 달했다. 종남파의 제자가 아닌 경요궁의 고수들과 외인인 담옥교까지 포함하면 거의 이십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인원만으로도 당금 무림의 어느 문파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실로 막강한 진형이 아닐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남파가 문파의 존립조차 보장받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한 사람씩 소개받을 때마다 청운과 청석의 표정은 한층 더 진지해졌고,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정중했다. 인사가 끝나자 청운이 밝게 웃으며 그들을 산 위로 안내했다.

“어서 오르시지요. 본 파의 장문인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진 장문인의 왕림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사 년 전에 소림사의 대집회에 참석했을 때에 비하면 오늘 무당파의 대우는 확실히 천양지차가 있었다. 당시에 소림사의 집회에 참석했던 낙일방과 동중산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잠시 야릇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때의 수모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낙일방은 더욱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몇 개의 구릉과 능선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수십 채의 전각이 나타났다.

청운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바로 자소궁(紫霄宮)입니다.”

자소궁.

무당 본산의 상징과도 같은 유명한 건물이 아닌가?

울창한 수림 사이에 자리한 자소궁은 크고 작은 이십 여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자소전(紫霄殿)과 양옆으로 펼쳐진 복지전(福地殿), 용호전(龍虎殿), 그리고 각종 궁(宮)과 방(坊)들이 단장취와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한없이 웅장한 듯하면서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자소궁은 중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무당파다.

소림사와 더불어 북숭남존(北崇南尊)으로 추앙받는 무림의 태산북두 무당파의 본산에 마침내 종남파의 고수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진산월이 무당파 장문인인 현령진인을 만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종남파 고수들을 숙소로 안내했던 청운도장은 두 시진쯤 지난 후에 다시 진산월을 찾아와서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령진인이 조용한 만남을 청한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진산월은 무림집회에 참석하기 위한 강호의 고수들이 속속 도착하여 그들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무당파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은 대동하지 않고 혼자 청운도장을 따라 자소전으로 향했다.

자소궁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인 자소전은 중요한 행사를 하거나 외인들을 접견할 때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자소전>이라고 적힌 파란색 현판 아래 <협찬중천(協贊中天)>과 <운외청도(雲外淸都)>, <시판육천(始判六天)>이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세 개의 검은색 편액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자소전 앞에는 네 명의 도인들이 서 있었는데, 청운도장을 따라 들어오는 진산월을 제지하지 않고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을 지나 자소전으로 막 들어서니 한가운데 보검을 손에 든 진무대제(眞武大帝)의 좌상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고, 그 양쪽에 주공(周公)과 도화낭랑(桃花娘娘)의 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동(金童)과 옥녀(玉女)의 시중을 받고 있는 진무대제의 좌상은 위엄이 넘쳐흘러 보였다. 진산월은 진무대제의 좌상에 향화를 올리고는 청운도장을 따라 자소전의 내실로 들어갔다.

묵묵히 청운도장의 뒤를 따르던 진산월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무당파의 속가제자들은 주로 어디에 기거하고 있소?”

청운도장은 진산월의 질문이 다소 의외였는지 약간은 의아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속가는 자소궁 아래에 있는 흑호전(黑虎殿) 일대에 주로 머무르고 있습니다. 혹시 본 파의 속가들 중에서 특별히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진산월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속가의 제자들 중 매상이란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겠소?”

청운도장은 종남파의 장문인이 자파의 일개 속가제자를 찾자 의아함과 호기심이 일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찾아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이 건물은 무척 크고 웅장하구려.”

“이곳은 주로 접객(接客)을 담당하거나 대규모의 집회를 열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파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지요. 선대의 도인들 중에는 도가의 건물이 이렇게 클 필요가 어디 있느냐며 못마땅해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계셨다고 합니다.”

종남파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곳이 태화전인데, 아무리 봐도 자소전은 태화전보다 두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게다가 천장까지의 높이가 무척 높아서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두 사람은 몇 개의 작은 문을 지나 하나의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린 문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장문도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산월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삼 장 남짓 되는 아담한 크기의 방이 나타났다. 방 안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는데, 한 사람은 검은 수염을 기른 도인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과 초로의 노인이었다.

세 사람은 나직한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진산월이 들어오자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청운도장은 검은 수염의 도인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 장문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수고했다. 그만 가서 쉬도록 해라.”

“예.”

청운도장이 물러가자 검은 수염의 도인은 진산월을 향해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빈도가 무당의 장교(掌敎)를 맡고 있는 현령이라 하오. 멀리 본 파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오늘 이렇게 진 장문인을 만나게 되니 기쁘기 한량이 없소이다.”

“어차피 와야 할 길이었습니다. 종남의 진산월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구려.”

진산월이 착석하자 그제야 현령진인은 미리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중년인을 소개했다.

“이분은 무림맹의 맹주인 위지 대협이시오. 진 장문인은 처음 뵙겠지요?”

진산월의 시선이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중년인은 진한 속눈썹에 깊은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중년 특유의 패기와 여유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인상적인 풍모였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보다 포권을 했다.

“사 년 전의 무림대집회 당시에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소개받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군요. 진산월입니다.”

중년인, 무림구봉 중의 일인이며 무림맹의 맹주인 일장개천지 위지립은 지긋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이내 답례를 했다.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신검무적을 오늘에서야 만나게 되었구려. 반갑소. 내가 바로 위지립이오.”

짤막하고 평범한 인사였으나, 그의 음성에는 강력한 패기와 자신감이 담겨 있어 일종의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진산월의 시선이 위지립의 옆에 앉아 있는 초로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유난히 잔주름이 많은 얼굴에 전체적으로 홍조가 짙었고, 입 주위가 튀어나와 있어 원숭이를 연상케 했다. 하나 주름살 사이에 자리한 두 눈은 현기(玄機)로 가득 차 있어 결코 호락호락한 인상이 아니었다.

노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노회하면서도 약간은 어리숙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강호제일검객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허설(許薛)이라 하는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이니 진 장문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요.”

그의 이름을 듣자 진산월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다.

“황산(黃山)의 취록자(取鹿子)셨군요. 높은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높은 이름은 내가 아니라 진 장문인이 가지고 계시지 않소? 진 장문인에 비하면 나 같은 늙은이야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이오.”

하나 말과는 달리 취록자 허설은 강호에서 재사(才士)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용인술(用人術)과 병법(兵法)에 뛰어나서 천하를 경영하려면 그를 얻어야 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의 별호가 취록자가 된 것도 ‘축록(逐鹿)’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슴이란 예로부터 천하 패권의 상징인 동물이었다. 사슴을 쫓듯 패권을 얻기 위해 다투는 걸 축록이라고 하는데, 허설을 얻으면 그 사슴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취록자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취록자 허설을 품에 안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위지립이었다. 위지립은 무림맹주가 된 후 제일 먼저 허설을 찾아가 정성을 쏟은 끝에 그를 무림맹의 군사(軍師)로 초빙할 수 있었다. 원래 무림맹의 군사는 무림구봉 중의 일인이며 천하제일의 신비인인 번신봉황 이북해였으나, 이북해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공석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허설이 앉은 후 무림맹은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주로서 외부에 힘을 행사하고 무림맹을 대표하는 사람은 위지립이지만, 무림맹의 대소사를 실제로 집행하는 사람은 허설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오늘 이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금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무림의 거목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진산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현재 무림에서 진산월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인사가 끝나고 좌중이 안정되자, 현령진인은 조용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 장문인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소문이 오히려 못한 것 같소. 빈도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하늘 밖에 사람이 있다(天外在人)’라는 말뜻을 알 것 같구려.”

강호의 거목들과 마주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산월의 모습은 확실히 비범해 보였다. 현령진인도 평생을 검을 벗 삼아 살아온 사람이기에 진산월의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별말씀을. 저야말로 오늘 강호의 고인들을 뵙게 되니 가슴이 설레고 안계가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현령진인은 직접 진산월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진산월이 차를 반쯤 비우자 그제야 현령진인은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빈도가 진 장문인을 만나자고 한 건 아무래도 내일 있을 무림집회 이전에 몇 가지 정리해야 할 사안이 있기 때문이오.”

진산월은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현령진인을 응시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는 무림집회의 일정을 확정지으려 하오. 허 군사께서 대충의 일정을 짜 놓았는데, 허 군사의 말씀을 들어 보시겠소?”

무림집회의 일정을 진산월에게 사전에 묻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강호의 대사를 결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방증이었다. 참석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가 일단 참석한 이상 일정을 짜는 일조차 그의 의사를 고려해야 할 만큼 그의 지위가 높아졌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허설이 밝힌 무림집회의 일정은 모두 삼일이었다. 첫째 날에는 구파일방과 천봉궁을 비롯한 기존의 무림맹 중심의 회합을 벌여 대략적인 방침을 정하고, 둘째 날에는 신목령 등 무림맹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거대 세력들의 의사를 타진한 다음, 마지막 셋째 날에 비로소 강호의 명숙들이 모두 모인 총회를 열어 최종 방침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합당한 것 같았으나, 그 안에는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진행하겠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그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당파 장문인을 만나는데 무림맹의 맹주와 군사가 굳이 동석한 이유도 이로써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들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진산월이 자신들의 계획에 수긍하지 못해서 분란이 일어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별다른 반대의 뜻을 보이지 않자 허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고, 현령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도 일정을 듣고 짐작했겠지만, 이번 집회는 의도적으로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계획이오. 뚜렷한 구심점이 없이 일을 벌였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사 년 전의 일로 충분히 깨달았으니 말이오. 그러니 얼마쯤 아쉬운 생각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었으면 하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사 년 전에 소림사에서 벌어졌던 무림대집회는 그 거대한 규모에 비해 실속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대다수의 무림인들이 빡빡한 일정을 따르지 못해 막상 사천성의 최종 집결지에 모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모용봉이 야율척과의 싸움에서 패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너무도 아쉬운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 후유증이 지난 사 년 동안 강호무림을 계속 힘들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진산월이 일전에 대방선사에게 듣기로는 이번 집회의 주최자 자격을 놓고 무림맹주인 위지립과 현령진인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대방선사는 이번 무당파의 집회에 위지립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아서 자칫 유명무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현령진인과 위지립은 사전에 집회의 성격과 진행 방식에 대해 완벽하게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대방선사가 잘못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에 그들이 서로 합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어찌 되었건 진산월은 이번 집회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두 사람의 사이가 원만해진 것은 강호무림을 위해서도 그다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령진인은 턱 밑에 나 있는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두 번째 안건은 진 장문인의 지위 문제요.”

처음으로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저의 지위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현재의 무림맹은 사 년 전에 처음 결성된 후 별다른 조직의 변화가 없었소. 하지만 그 후로 적지 않은 고수들의 신상에 변동이 생기거나 무림의 사정이 바뀌어서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오. 다른 분들이야 어느 정도 각자의 역할과 지위가 정해져 있지만, 진 장문인에게는 아직 이렇다 할 역할이 주어져 있지 않소. 그래서 사전에 진 장문인과 그에 대해 조율을 하려 하는 것이오.”

“저는 무림맹의 지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진 장문인의 심정은 충분히 알고 있소. 강호의 대의를 위해 나서는 일에 지위나 신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요. 하지만 조직이란 그렇지 않소.”

현령진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담겨 있었다.

“하나의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조직 체계와 역할 분담이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하오. 단순히 열정만 가지고 따르기에는 이번 일은 너무도 중대하고, 무림맹의 조직은 쓸데없이 방만하기만 하오. 어떤 식으로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사 년 전의 잘못을 답습하게 될 뿐이오.”

“…….”

“쓸데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림의 중요 인물에게는 그에 맞는 역할과 지위를 사전에 배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소. 그래서 진 장문인의 의사를 물으려고 하는 거요. 어차피 맡게 될 거라면 이왕이면 본인이 원하는 자리를 맡는 것이 좋지 않겠소?”

진산월은 특별히 원하는 자리도 없고 무림맹 내에서 하고 싶은 역할도 없었다. 그에 대한 모든 열정은 사 년 전의 어느 날 쏟아부었고, 그때 모두 타올라 버리고 말았다.

하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무것도 맡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저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제가 맡기를 바라는 일이 있으십니까?”

진산월이 오히려 되묻자 현령진인의 시선이 한쪽에 묵묵히 앉아 있는 위지립에게로 향했다.

“그건 위지 맹주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위지립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돌려 말하지 않겠소. 나는 진 장문인이 선봉장의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오.”

“제일 앞 선에 서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제일 위험한 자리이지만, 또한 제일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오.”

선봉은 어느 곳이든 가장 험하고 거친 자리였다. 뜻한 바가 있거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바라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탐탁지 않아 할 것이다. 처음 만난 상태에서 그런 자리를 선뜻 제시하는 위지립을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게 그 일을 맡기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위지립은 추호도 꺼려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 장문인이 그 일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서장과의 싸움은 퇴로(退路)가 없기 때문이오. 그들은 이미 대부분이 중원에 들어와 있고, 막강한 세를 형성하고 있소. 자칫 첫 싸움부터 그들의 기세에 눌린다면 아주 어렵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하오. 무림에 고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들을 상대로 절대적인 승산을 장담할 수 있는 고수는 거의 없소. 그래서 진 장문인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위지립은 물론이고 현령진인과 허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응시한 채 묵묵히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조건만 맞으면 그 자리를 맡도록 하지요.”

위지립은 반색을 하면서도 그가 내건 조건이 궁금하여 급히 물었다.

“두 가지 조건이란 뭐요?”

“안내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장의 형세에 정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자가 있어야만 그들의 함정에 빠지거나 간계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말이오.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소?”

“얼마 전에 잠시 동행을 했었는데, 산수재의 재주가 놀랍더군요.”

위지립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산수재 이정문 말이오? 그의 의사를 타진해 보겠소. 다른 한 가지는 뭐요?”

“그들의 예봉을 꺾은 후에는 저는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그것 또한 너무도 당연한 조건이었다. 무한정 그보고 앞에 나가서 싸우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소. 진 장문인이 선봉을 맡아 준다면 서장을 상대하는 일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요.”

위지립은 진산월이 별다른 까다로운 조건 없이 선뜻 자신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 못내 기꺼운 모습이었다.

현령진인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 장문인의 무림을 위하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려. 진 장문인의 의기(義氣)는 빈도가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이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 어차피 서장 무림과 충돌하게 되면 그들의 가장 무서운 칼은 진산월을 향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장 앞에 나선다면 쓸데없이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른 일에 영향을 받을 일도 적어질 것이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큰 짐을 덜게 된 셈이오. 그럼 이제 세 번째 용건을 말하겠소. 어쩌면 진 장문인으로서는 가장 기다려 온 말일지도 모르겠구려. 바로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에 대한 일이오.”

이 말을 한 후에는 진산월의 격동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현령진인의 은근한 기대와는 달리 진산월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에 대한 논의가 이번 집회에서 필연적인 안건이 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기필코 그렇게 만들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진산월은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를 정식으로 거론하는 현령진인의 말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령진인은 진산월이 자신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자 약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빈도는 진 장문인이 그 일에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럴 리야 있습니까? 다만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일인지라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구려. 삼일 동안의 무림집회가 끝난 후 구대문파만의 회동(會同)이 있을 예정이오. 그 자리에서 종남파의 구파 복귀 문제가 중요한 안건이 될 가능성이 높소. 이미 소림사의 방장이신 대방선사께서 그럴 의향을 전해 오셨소.”

“대방선사께서 말입니까?”

“그렇소. 빈도도 다소 의외이긴 했으나, 대방선사께서 구파회동에서 그 일을 안건으로 제시하겠다고 이미 언질을 주셨으니 정식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 분명하오.”

대방선사는 소림사에서의 약속을 확실히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현령진인은 진산월의 얼굴을 주시하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논의는 상당한 설전(舌戰)이 오가겠지만, 아마도 다수결로 판가름 나게 될 것이오. 이십여 년 전의 경우처럼 말이오.”

이십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금과는 정반대로 종남파의 구대문파 퇴출에 대한 논의였고, 발의자는 당시 무당파의 장문인이었던 목엽진인이었다. 다수결에 의해 안건이 받아들여져서 종남파는 결국 구대문파에서 축출되었고, 그 자리를 형산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안건에 찬성했던 문파는 발의를 했던 무당파 외에 화산, 점창, 청성, 공동의 다섯 개 문파였고, 아미파와 곤륜은 반대를 했으며, 소림은 기권을 했다. 만약 이번에도 다시 다수결이 벌어진다면 당시의 문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만에 하나라도 안건이 부결(否決)된다면 종남파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 진산월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의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그 모습에 현령진인은 새삼 경탄하는 마음과 경외심이 함께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강호최고의 검법을 지닌 것도 모자라 이와 같은 냉정함과 극도의 평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나이가 아직도 이십 대에 불과한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진인께서는 어떻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소. 당시와는 여러 가지로 사정이 달라졌고, 각 문파의 장문인도 모두 바뀌어 있소. 하지만 일단 구파의 합의가 도출되면 그 합의를 깨거나 무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현령진인은 완곡하게 표현했으나, 진산월은 단번에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진인께서는 그 논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본 파에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진산월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진인께서는 어떤 결정을 하실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현령진인은 잠시 쓴웃음을 짓더니 더할 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구려. 하지만 굳이 숨길 것도 아니니 밝히겠소. 빈도는 예전의 굉요대선사의 행적을 밟을 생각이오.”

“기권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진산월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전대의 장문인이었던 목엽진인이 종남파의 퇴출을 발의했기에 진산월은 현령진인도 그와 비슷한 길을 가리라고 예상했었다. 그가 현령진인에게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를 물은 것은 종남파의 구파 진입을 반대할 것이 분명한 무당파 장문인이 결과에 따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주문이 아니냐는 나름대로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현령진인이 기권의 의사를 밝혔으니 진산월로서는 약간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선대의 장문인이 종남파의 퇴출을 주도했는데, 후대에 와서 그 노선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더구나 무당파 같은 명문정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진인께서 그런 결정을 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하군요.”

“빈도는 종남파가 구파에 복귀하는 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형산파가 특별한 과오도 없이 구파에서 퇴출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소. 그래서 빈도로서는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기에 침묵을 지키려는 것이오.”

어떻게 보면 과거의 멍에를 피하려는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오랜 심사숙고 끝에 내린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하나 진산월로서는 당연히 종남파의 구파 복귀를 반대할 줄 알았던 무당파의 장문인이 기권을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종남파의 구파 복귀에 대해 무림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전과 비교해 보면 당시에 종남파의 퇴출에 기권했던 소림사는 찬성으로 돌아섰고, 당시에 찬성을 했던 무당은 기권으로 돌아섰으니 그 차이가 현격하게 좁혀진 셈이었다.

하나 당시의 상황대로라면 아직도 열세인 것은 분명했다. 종남파 퇴출에 반대했던 문파는 두 개인 반면, 다른 네 문파는 찬성했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령진인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한동안 묵묵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와 곤륜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종남파의 구파 복귀를 찬성할 거요. 하지만 다른 네 문파에 대해서는 빈도도 모르겠소. 진 장문인은 그들 네 문파 중 적어도 한 개 문파의 찬성을 이끌어 내야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거요.”

현령진인의 말은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화산과 점창, 청성, 공동의 사대 문파가 모두 반대를 한다면 대방선사가 발의한 안건은 부결될 것이며, 종남파는 더욱 멀고 험한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들 네 문파 중 어느 곳도 종남파와 특별히 친분이나 접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청성파와 공동파는 진산월이 장문인이 된 후로는 아직 단 한 번도 상면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점창파와는 소림사에서의 비무로 약간의 면식이 있었으나, 종남파에 이상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점창파의 장로 독검취응 백리장손을 생각해 보면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전망이 썩 밝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네 개의 문파 중 어느 곳을 공략해서 찬성으로 돌아서게 해야 할지 말을 꺼낸 현령진인조차 쉽게 짐작되지 않을 정도였다.

구대문파의 회동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현령진인과의 만남은 끝이 났다.

청운도장의 안내를 받으며 방을 벗어나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령진인과 위지립, 허설의 눈에는 각기 다른 빛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모습이 방을 벗어나자 그제야 현령진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대단한 젊은이군. 종남파의 구파 복귀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 결국 강호의 대세는 종남파로 향하게 될 것 같소.”

위지립이 불쑥 물었다.

“종남파가 이번에 구대문파로 복귀할 거란 말씀이오? 그들이 설사 형산파를 꺾는다 해도 다른 네 파의 동의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들 대부분이 형산파와 크고 작은 인연으로 묶여 있어서 말이오.”

현령진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사 이번에 안 되더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것이오. 강호는 힘이 지배하는 곳이고, 구대문파는 더욱 그런 경향이 있소. 종남파가 진정으로 강호를 주도할 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들이 먼저 나서서 종남파를 구대문파로 받아들이려 할 거요.”

“흠. 진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기만 한다면 다른 문파에서 그들의 구파 복귀를 반대하는 곳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게 강호의 법칙이오.”

“강자존(强者存)이란 말이오? 하지만 이번에 형산파를 보면 종남파가 형산파를 이기리라고 쉽게 속단할 수는 없을 것 같소.”

현령진인이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형산파에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 아시오? 진 장문인을 상대할 만한 고수를 찾기란 쉽지 않을 텐데, 그들이 특별한 길이라도 찾아냈단 말이오?”

위지립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길이란 워낙 여러 가지가 있으니 말이오.”

현령진인은 위지립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지. 다만 길이 너무 복잡해서 출구도 없는 미로(迷路)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진산월은 올 때처럼 청운도장을 따라 자소전을 벗어났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하늘에는 하나둘씩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진산월이 자소전 밖으로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거무스름한 산천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청운도장이 말을 걸어왔다.

“장문도장과의 대화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그렇소.”

청운도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 부탁하셨던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청운도장의 표정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본 파의 속가에는 그런 이름의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일단 본 파의 속가로 들어오면 명부에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기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명부를 확인해 보았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청운도장에게 답례를 했다.

“도장이 사과할 일이 아니오. 오히려 공연한 일로 도장을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하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덕분에 저도 모처럼 속가제자들의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청운도장은 진산월의 표정이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의아해졌다.

‘진 장문인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보는구나. 대체 매상이란 사람이 누구이기에 침착하기 그지없다는 진 장문인이 이토록 아쉬워하는 것일까?’

청운도장은 진산월을 숙소 입구까지 안내하고는 멀어져 갔다.

진산월은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 가득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사제?’

종남파를 떠날 때 매상은 무당파의 속가제자라도 되어서 그들의 무공을 배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작정한 일은 반드시 해치우는 매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진산월은 그가 무당파의 제자로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어렵게 찾아온 무당파에 매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대체 어디에 머물러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 진산월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진산월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검게 변해 있었고, 점점이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달이 뜨지 않아서인지 별빛이 유난히 밝게 빛나 보였다.

별은 사람의 운명이라고 했던가?

저 반짝이는 별들 중 어딘가에 매상의 별도 빛나고 있을 것이다.

‘잘 있는 거지? 아직 우리를 잊지 않고 있는 거지? 언제고 반드시 돌아올 거지?’

진산월은 별 하나하나에 대고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만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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