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5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5화


제 317 장 장장적야(長長的夜)

성락중은 문득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좌한 채로 운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뜨인 것은 누군가가 그의 방문 앞을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락중은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제부터 계속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서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녀석이었다.

“정신없게 하지 말고 들어 오거라.”

문밖에서 서성이던 자의 신형이 멈추더니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전흠의 얼굴은 지난 이틀 사이에 확연히 알아볼 정도로 홀쭉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인상도 험악하고 강퍅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 주위가 퀭하고 뺨마저 쏙 들어가서 초췌해 보일 정도였다.

성락중은 전흠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여태껏 자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던 게냐?”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초식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앉거라.”

전흠이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다가와 앉자 성락중은 그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게냐?”

전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 또한 성락중으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제 진산월은 형산파와의 비무에 출전할 다섯 사람 중 하나로 전흠을 지목했다. 전흠으로서는 할아버지인 전풍개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맞이함과 동시에 문파의 오랜 숙원을 푸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일이기에 크게 기뻐해야 마땅했다.

하나 그때부터 전흠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주위 사람들은 아직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그가 너무도 무거운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그런 행동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전흠을 지켜보아왔던 성락중만은 전흠이 단순한 부담감 때문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지 모른다는 희미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흠은 나이답지 않게 배짱이 좋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와 형을 따라 해남파에 입문하지 않고 할아버지 밑에서 고독하게 무공을 수련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에 의지할 사람도 없고 같이 어울릴 친구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전흠은 묵묵히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무공을 익히는 것에만 열중해 왔다.

더구나 그가 익히는 무공은 당시만 해도 완전히 몰락했다고 여겨지던 종남파의 무공이었으니, 전도가 양양한 해남파 장문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전흠으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흠은 단 한 번도 그 점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거나 아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전흠이 고집스럽고 외골수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참을성이 강해서 어지간한 일로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서 오만하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성락중의 앞에 앉아 있는 전흠에게서는 평상시의 자신에 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락중은 그런 전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녀석. 그리도 간절히 형산파와의 일전을 원해 왔으면서 막상 앞으로 닥쳐오니 걱정이 되는 게냐? 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 게냐?’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위안하거나 다독거릴 생각은 없었다.

현재 종남파의 사정으로는 전흠을 대체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승리하던 패배하던 전흠의 출전은 불변의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흠이 맡겨진 일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락중은 전흠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비록 초췌하고 피부가 거칠어졌으나, 전흠의 몸은 여전히 탄탄했고 자세 또한 빈틈이 없어 보였다. 희미하게 땀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초식을 다듬고 있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님이 분명했다.

“몸에 불편한 곳은 없느냐?”

전흠은 살짝 머리를 조아렸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럼 마음이 문제인 게로구나.”

“…….”

“네가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너 뿐만 아니라 이번에 출전하기로 한 모든 사람들이 그런 부담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전흠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성락중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설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기쁘긴 한데, 만에 하나라도 패했을 때를 상상해 보면 절로 식은 땀이 나더구나. 그 상실감과 고통을 어찌 감내해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전흠은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성락중을 쳐다보았다.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사숙께서도 그러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성락중은 그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을 하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무엇입니까?”

“앞만 바라보고 걷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둘러볼 여지도 없이 오직 앞으로 닥칠 일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

“어차피 형산파와의 비무는 정해져 있고, 나는 반드시 출전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미리부터 결과를 속단하고 흔들릴 것이 아니라, 다가올 승부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승부에 집중하는 순간, 두려움이나 중압감 따위는 뇌리에서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성락중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고 어조도 부드러웠으나, 전흠의 귀에는 다른 어떤 호통보다도 큰 것 같았고 그 어떤 꾸짖음보다도 준열하게 들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듯이,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전흠의 어깨가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사숙.”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비로소 눈앞이 훤해지더구나. 너는 어떠하냐?”

전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자위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락중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금과옥조에 감사드립니다. 사숙의 말씀을 듣고 나니 결과에만 급급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제 눈이 조금은 뜨인 것 같습니다.”

전흠의 얼굴은 여전히 강퍅했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리 초췌하거나 긴장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속의 커다란 응어리가 풀려나간 듯 어딘지 모르게 편해 보였다.

성락중은 그의 표정 변화를 감지하고는 한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잠이 들 수 있겠느냐?”

전흠의 얼굴에 모처럼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약간은 계면쩍고 쑥스러운 웃음이었다.

“편안하게 잘 수 있을 듯 합니다.”

“됐다.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두도록 해라.”

하나 성락중은 아직 편하게 잘 운명이 아니었다.

“사숙. 일방입니다. 잠시만 뵐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성락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결전을 앞둔 야밤에 낙일방이 자신을 찾아온 것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들어오게.”

낙일방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동중산이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다.

낙일방은 성락중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쉬고 계시는데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마침 전 사형도 함께 계셨군요.”

“흠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네. 무슨 일인가?”

“저보다는 동 사질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게 더 빠를 듯 합니다. 동 사질, 말씀 드리게.”

낙일방의 뒤에 서 있던 동중산이 앞으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조를 뵙습니다.”

성락중은 손사레를 쳤다.

“급한 일인가 본데, 이런 상황에서 허례는 삼가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항상 침착함을 유지했던 동중산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은 장문인께서 조금 전에 외출을 나가셔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성락중도 그의 말을 듣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장문인이 안돌아왔다고?”

“그렇습니다.”

“아니 내일 큰 일을 앞둔 장문인이 대체 무슨 일로 밖으로 나갔단 말인가?”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이정문 공자의 방문을 받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분이 함께 나가셨습니다.”

“장문인이 자네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

“조금 늦을 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취침하라고 하셨습니다만, 어디로 무슨 일 때문에 가는 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허, 이런…….”

성락중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이경(二更)을 넘어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밤이었다. 당장 눈을 붙여도 내일 아침까지는 결코 푹 잤다고 할 수 없는데, 장문인이 밖에 나가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종남파의 문인들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의 성격상 정말 중요하거나 위급한 일이 아니면 아직까지 연락도 없이 안돌아오지는 않을 텐데, 혹시라도 장문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 닥친 게 아닌지 걱정되는군.”

“저도 그 때문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저 혼자라도 장문인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후원에서 수련중이시던 낙 사숙을 발견하고는 낙 사숙에게 사정을 말씀 드리고 사숙조를 뵈러 온 것입니다.”

동중산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성락중이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낙일방 또한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는지 전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락중은 임독양맥을 타통한 고수가 이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려면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걱정스런 마음부터 들었다.

“내일 힘을 써야 하는데, 오늘 밤에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낙일방의 표정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정도 해두지 않으면 몸이 심심해서 오히려 잠자리가 허전해 지더군요. 저도 제 몸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니, 사숙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담담한 가운데 자신에 찬 음성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듬직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성락중도 낙일방에게는 신심(信心)을 지니고 있기에 그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었다. 그보다 지금은 더욱 중요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군. 그런데 자네는 어디로 장문인을 찾아가려 했나? 혹시라도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나?”

성락중이 동중산을 향해 묻자 동중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장문인께서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저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우선 이정문 공자의 거처라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거처가 어디인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일전에 자소궁의 동쪽 방향에서 그가 오는 것을 몇 번 보았기에 그쪽을 뒤져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추측만으로 말인가?”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락중이 듣고 보니 동중산의 말마따나 진산월을 찾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진산월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진산월을 보기 전까지는 잠을 자고 싶어도 눈이 감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성락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동중산을 향해 물었다.

“자소궁의 동쪽 방향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나?”

“비승각(飛昇閣)과 남암궁이 있고,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룡궁(五龍宮)이, 남쪽으로는 조천궁(朝天宮)이 있습니다.”

“자네는 그중 어느 쪽이 유력하다고 보나?”

동중산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지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비승각은 점창파의 고수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고, 남암궁은 천봉궁의 거처이며, 오룡궁에는 형산파가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천궁은 어느 파가 있는지 아직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일단 오룡궁은 아니겠군.”

형산파와의 비무 전날에 종남파 장문인이 형산파 근처로 갈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정문 또한 종남파와의 대결을 앞둔 형산파의 거처에 숙소를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세 곳은 모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성락중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같이 가보세.”

이어 그는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는 낙일방과 전흠을 엄격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자네들 두 사람은 이곳에 있게. 언제 장문인이 돌아올지 모르니 말일세.”

☆ ☆ ☆

비신대의 절벽은 유난히 가팔랐다.

비신대는 험한 지형이 많은 무당산에서도 유독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와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진무대제(眞武大帝)가 신선이 되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는 전설 때문에 비신대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평상시에는 그다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칠흑 같은 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들이 마치 검은 비단 위에 뿌려진 유리파편 같아 보였다.

평상시라면 그 선명한 색의 대비에 아름다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오히려 가슴 섬뜩한 서늘함만이 느껴졌다. 그 파편 하나하나가 당장이라도 떨어져 내려 가슴 한 구석에 틀어박힐 것만 같았다.

문득 고개를 떨구어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한 벼랑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때마침 벼랑의 저 깊은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가자 흡사 지옥의 무저갱에서 유혹해 부르는 악마의 숨결처럼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감돌았다.

이정문도 그 바람을 느꼈는지 한 차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아찔한 벼랑이오. 무당산에 이렇게 깊은 절벽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여느 때 보다 한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검은 하늘과 점점이 뿌려진 별빛 아래 보이는 세상은 텅 비어 있어 공허함마저 느끼게 했다.

하나 진산월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으나 삼엄한 무언가가 조금씩 주위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정문의 표정은 그의 현재 심정을 나타내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늘 독설을 내뱉던 입도 굳게 닫혀 있었고, 냉정하게 빛나던 두 눈도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진산월을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연 날카로운 음성을 토해냈다.

“나는 약속을 지켰소. 이제는 당신 차례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외침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그 외침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사람의 귀를 시원하게 하는 듯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별로 듣기 좋은 목소리도 아닌데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질러대는 거요? 하마터면 귀청이 상할 뻔 했구려.”

진산월과 이정문이 서 있는 비신대의 절벽에서 십여 장 떨어진 숲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주위가 온통 훤해질 만큼 준수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실로 절세의 옥안(玉顔)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용모를 지닌 미남자였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 미남자는 빙긋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만나게 되었구려. 진 장문인의 아름다운 사매는 잘 계시오?”

미남자는 단지 살짝 미소를 짓기만 했는데도 그의 전신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이러한 미소를 보면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 그의 미소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반면에 이정문의 얼굴은 더욱 잔뜩 찌푸려졌다.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이정문은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길. 불공평하군. 이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야.”

그의 투덜거림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미남자는 쉽게 알아듣고 되물었다.

“무엇이 그리도 불공평하단 말이오?”

이정문은 그를 힐끔 흘겨보았는데, 가뜩이나 심통 사납게 생긴 얼굴이 일그러져서 무언가에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목소리가 좋으면 대체로 얼굴은 그보다 떨어지기 마련인데, 당신은 목소리도 좋을 뿐 아니라 얼굴은 그보다 더욱 뛰어나니 그것이 첫째 불공평한 일이오. 목소리가 나쁘면 얼굴이라도 잘생겨야 하는데, 나는 목소리도 안좋고 얼굴은 그보다 더욱 못하니 이게 두 번째 불공평한 일이오.”

“세 번째도 있소?”

이정문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물론이오.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잘난 당신은 여자가 끊이지 않고 줄줄 따르겠지만, 목소리도 형편없고 얼굴도 보잘 것 없는 나에게는 오직 단 한명의 여자만이 있을 뿐이오. 그런데 그 여자마저 내 곁을 떠나버렸으니 이 어찌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소?”

미남자는 그의 억지스런 말에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싫은 표정을 내지 않고 담담한 미소 지었다.

“당신의 여자가 당신 곁을 떠났다니 심심한 위로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구려.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 당신 곁을 떠난 게 확실하오?”

이정문은 여전히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 왔는데 그녀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겠소?”

미남자는 손으로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내 눈에는 그녀가 이미 당신을 찾아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잘못 본거요? 아니면 저 여자가 당신의 그녀가 아니란 말이오?”

그 말에 이정문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 육난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십 장 쯤 떨어진 절벽 가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절벽 끝에 돌출되어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자세로 보아 그녀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듯 했다. 그래서인지 누가 툭 건드리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기만 해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정문은 한동안 그녀를 가만히 보더니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나는 아직 혼자 될 팔자는 아닌 모양이구나.”

이어 그는 육난음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괜찮은 거야?”

육난음은 비록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지만, 듣고 보는 건 이상이 없는지 그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이정문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몸은 이상이 없단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군. 난 당신을 잃은 줄 알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어.”

육난음의 눈이 다시 한 차례 감겼다가 뜨여졌다. 이정문은 이번에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쉽게 알아냈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나도 지금까지는 그런 줄만 알았지. 하지만 이번 일로 세상에는 종종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놈이 갑자기 하늘이 무섭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

육난음은 세 번째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 전의 두 번 보다 한결 느린 속도였다.

“이제 주제를 알았으니 아직도 늦지 않은 거라고? 글쎄. 당신 말대로 되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의 넋두리 같은 말을 듣고 있던 미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만. 더 다가간다면 당신은 정말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르오.”

주절거리면서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가던 이정문이 걸음을 멈추고는 미남자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조금 가까이 가서 그녀가 정말 무사한지 확인해 보려고 한 거요. 아무려면 내가 그녀의 안위를 두고 위험한 모험을 할 것 같소?”

“일전에 누군가가 그러더군. 당신은 기름밭 사이에서도 기꺼이 불장난을 할 사람이라고 말이오.”

이정문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거렸다.

“누가 그런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거요?”

“그 사람은 자신이 당신을 세상에서 세 번째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했소.”

“세 번째?”

“첫째는 당신의 그 대단한 아버님이고, 둘째는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당신의 유일한 연인이오.”

이정문은 피식 웃었다. 메마르고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정말 모처럼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 작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하군. 혹시 그 자는 툭하면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재수 없는 성격을 지니지 않았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망상을 하면서 말이오.”

미남자는 허리를 잡고 정말 통쾌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정말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소. 그 때문에 나도 가끔은 그가 재수 없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 다만 자신이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소. 대신 자기가 세 번째로 똑똑하다고 말한 적은 있었소.”

“이번에도 세 번째란 말이군. 대체 그 오만하고 천하인(天下人)들을 발가락 사이의 때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자가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인정한 두 사람이 누구요? 설마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나요?”

미남자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가 첫 번 째로 꼽은 인물은 그의 사부요.”

이정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인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가 내가 생각하는 그 인물이라면 그 자의 사부가 확실히 그 자보다는 똑똑하겠지. 두 번째 인물은 누구요?”

“바로 내 사형이오.”

이정문은 다소 뜻밖인지 되물었다.

“당신의 사형?”

“그렇소.”

“그가 누구요?”

이번에는 미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오?”

이정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얼굴 생긴 것만 보면 천하제일 미남자라는 흑갈방의 화면신사 같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가슴을 떨리게 할 정도로 멋진 미소를 지닌 걸 보면 영하 강변에서 미소 한 번으로 천봉선자들의 마음을 녹였던 임조몽이란 인물 같기도 하고, 말주변이 좋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매끄러운 걸 보면 서장 무림에서 자금 조달을 맡았던 백석기란 자 같기도 한데, 당신이 그들 중 누구인지는 당최 모르겠소.”

미남자는 이정문의 장황한 말을 듣고는 다시 빙긋 미소 지었다. 보면 볼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력이 있는 미소였다.

“역시 산수재다운 답변이군.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면 내 사형이 누구인지도 알게 아니오?”

“흑의사신 위태심 말이오? 난 단지 그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뿐이오.”

“내게 심통 부릴 필요는 없소. 그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이정문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망할 혁리공은 어디에 있소?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왜 자기는 뒤로 숨고 당신을 앞에 내세운 거요?”

미남자, 화면신사 백석기는 예의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말하길 당신이 비록 자신보다 똑똑하지는 않지만 거의 그에 필적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그 똑똑한 머리로 한 번 알아 맞춰 보시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소?”

이정문의 눈썹이 잔뜩 찡그려졌다.

“내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혁리공, 그 자가 내게 한 방 먹였다고 천방지축으로 노는군. 그러다 된통 당한 사람을 내가 알고 있지.”

“바로 당신 말이오?”

“그렇다고 해둡시다. 아무튼 혁리공의 행방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원래 그의 목적은 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운이 트이려는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소득을 거두게 되었소. 그래서 그는 계획을 바꾸어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되었지.”

백석기는 흥미 있는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당히 재미있는 추론이오.”

“다만 그 두 마리 새중 한 마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자신이 있지만, 다른 한 마리는 너무 거대한 존재라 혼자서는 잡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그는 강력한 조력자를 구하려 했겠지.”

“계속 해 보시오.”

“그 새를 감당할 만한 역량을 지닌 인물은 그리 많지 않소. 하지만 혁리공은 제법 재주가 좋은 자이니 어떤 식으로든 합당한 조력자를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그는 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 했겠지. 그래서 다시 한 가지 계책을 세워 놓은 거요.”

백석기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이정문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매섭게 반짝였다.

“그 새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누군가를 다시 또 포섭하려 한 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정문은 전력을 다해 옆에 있는 진산월의 옆구리를 손으로 가격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일격이었다.

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산월의 몸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주르르 밀려나더니 절벽 밖으로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그가 서 있던 위치가 절벽 끄트머리였기에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그대로 절벽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헛!”

진산월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으나 그때 이미 그의 몸은 허공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진산월이 전력을 다해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꽈릉!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세찬 장력이 이정문의 몸을 그대로 가격했다. 이정문은 설마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진산월이 반격을 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아악!”

장력에 격중 당한 이정문은 피를 뿌리며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진산월의 몸도 절벽 아래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이정문이 갑작스럽게 진산월을 공격하고, 다시 반격당해 쓰러지고, 진산월이 절벽 밑으로 추락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십 장 밖에 있던 백석기가 장내로 다가온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으으…….”

이정문은 코와 입으로 검붉은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채 제대로 몸을 펴지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천하인들을 감탄하게 한 절세의 기재라는 그동안의 평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것이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백석기의 얼굴에도 약간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일이 이렇게 풀리는 경우도 있나? 이걸 기뻐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용케도 들었는지 이정문이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보았다.

“나… 나는 약속을 지켰소. 이제 그녀를 풀어주시오…….”

입을 열 때마다 시커먼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아 내상(內傷)이 적지 않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백석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정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남들이 하도 산수재 산수재하고 떠들기에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거 없는 자였군요.”

다가온 사람은 뜻밖에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위에 기대어 움직이지 못했던 육난음이었다.

백석기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육난음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얼굴을 슬쩍 매만졌다. 그러자 매미껍질처럼 얇은 인피면구가 벗겨지며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선약연이었다.

이정문이 진산월을 암습해서 절벽으로 밀어버린 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연인인 육난음을 인질로 잡힌 이정문은 진산월에게 도움을 청했고, 진산월은 자신의 사제 또한 그들에 의해 억류되어 있다는 이정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비신대의 절벽으로 오게 되었다.

일단 육난음으로 분장한 선약연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서 육난음이 정체모를 자들에게 잡혀 있다는 이정문의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었고, 자연히 진산월은 어딘가에 붙잡혀 있을 사제의 행방을 찾는데 주의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선약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 의사표시를 한 것도 혹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육난음 본인이 아님을 진산월이 알아차릴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정문은 그녀의 눈짓을 그럴 듯하게 해석하여 대응했고, 그 때문에 진산월은 그녀가 가짜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질극의 배후에 혁리공이 있음을 밝혀 진산월의 신경을 그쪽으로 돌리게 한 이정문은 전력을 다해 진산월을 절벽 쪽으로 밀어붙였고, 불시에 암습을 당한 진산월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의 장력에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정문의 무공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적시의 암습과 절벽을 지척에 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절세의 고수인 진산월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정문이 높은 무공을 지닌 뛰어난 고수였다면 진산월도 그에 대해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 이정문의 내공은 고수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미약했고, 전력을 기울인 장력으로도 무방비 상태의 진산월에게 치명상을 가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절벽가에 서 있는 진산월을 절벽 아래로 밀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일을 배후에서 계획한 사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이정문을 자신의 놀이말로 사용한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진산월이 떨어져 내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난음으로 분장했던 선약연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이제야 왔어요?”

그 사람은 여전히 시선을 절벽 아래로 둔 채 무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선약연은 그를 따라 절벽 밑을 내려 보다가 눈앞에 펼쳐진 아찔한 낭떠러지에 정신이 어지러운지 이내 머리를 쳐들었다.

“뭘 그리 보고 있어요?”

그 사람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그녀를 향해 싱겁게 웃어 보였다.

“벼랑 끝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너무 높아서인지 보이지 않는군.”

선약연은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어떻기에 그러오?”

그녀는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내가 당신을 안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당신 속을 모를 줄 알아요? 지금 당신 얼굴은 무언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억지로 짓고 있는 가짜 웃음이 떠올라 있어요.”

“당신이 나를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는 줄 몰랐는걸.”

“말해 봐요. 당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아무런 감정의 빛도 담겨 있지 않은 공허한 것이어서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말이오.”

“전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마찬가지군요. 일이 잘 풀리면 좋은 거지, 뭐가 그리 불만이에요?”

그 사람은 머리를 긁적였다.

“계획한 대로 일이 딱딱 이루어지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내 경험상 정말 일이 처음에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진행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단 말이오.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그렇소.”

“…….”

“이정문과 신검무적은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온 인물들 중 가장 어렵고 무서운 사람들이오. 솔직히 둘 중 하나만 쓰러뜨리는 것도 나로서는 정말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이번에 나는 그들 두 사람을 모두 무너뜨렸소.”

선약연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건 그만큼 당신이 세운 계획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나는 이번에 신검무적을 상대하기 위해 몇 가지의 계책을 준비해 놓았는데, 그중 가장 첫 번째 계책만으로 그를 제거해 버렸소. 애써 준비한 나머지 계책들을 사용해 볼 겨를도 없이 말이오.”

“그래서 그 계책들을 사용해 보지 못해서 아쉽단 말인가요?”

“아무래도 무언가 미심쩍어서 말이오.”

“뭐가 그렇게 미심쩍은가요?”

그때 어느 새 그들 곁으로 다가온 백석기가 그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검무적은 너무 쉽게 죽었소.”

그 사람, 수전공자 혁리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의 빛을 띠었다.

“그렇소. 신검무적은 절대로 만만한 인물이 아닌데, 오늘은 너무 맥없이 당해 버렸단 말이오.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다고 해도 신검무적 같은 사람을 상대로는 완벽하게 통한다는 확신이 없었소. 그래서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추가로 몇 가지 계책을 더 준비했는데, 그는 내 기대와는 달리 제대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추락해 버렸소. 마치 일부러 뛰어내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오.”

선약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아무리 신검무적이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저런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일부러 뛰어내린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상한 일 아니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꼭 그런 생각이 드니 말이오.”

“그건 당신이 늘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다니기 때문이에요. 좀 더 긍정적인 사고관을 가져 봐요.”

혁리공은 그녀의 독설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가면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관적인 게 아니라 그만큼 치밀한 거요. 그래서 말인데, 백 형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자가 신검무적 본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오?”

백석기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검무적이 맞소. 예전에 나는 그를 직접 본 적이 있어서 그의 기질과 눈빛을 잘 기억하고 있지.”

“확신할 수 있소?”

혁리공이 되묻자 백석기의 두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내 눈을 의심하는 거요?”

혁리공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소? 서장제일기인이셨던 천애치수께서 신안(神眼)이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던 사람의 눈을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는단 말이오?”

백석기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선사의 존함을 함부로 꺼내지 마시오.”

혁리공은 즉시 사과했다.

“미안하오. 그만큼 백 형의 실력을 믿는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 그 분을 거론하게 되었소. 결코 본의는 아니니 백 형은 마음을 푸시오.”

백석기도 그런 일을 가지고 혁리공을 오래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이정문과 함께 나타나서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은 내가 만났던 신검무적이 확실하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되겠구려.”

“그게 무엇이오?”

“절벽으로 떨어진 신검무적이 진짜로 죽었는지 그의 시신을 직접 찾아보는 것이오.”

백석기와 선약연의 시선이 일제히 절벽 밑을 향했다.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는 절벽 아래는 잠깐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을 송연케 했다.

“어떻게 말이오? 당신이 직접 내려가 보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소?”

“그럼?”

“마침 나한테는 믿음직한 수하들이 몇 명 있소.”

“그들이라고 해도 무슨 수로 이 절벽을 내려갈 수 있겠소?”

“직접 절벽을 타고 내려갈 수는 없지만, 남암궁의 뒤쪽을 돌아가면 비신대의 아래로 접근할 수 있소. 그래서 그들을 그리로 보냈소.”

선약연이 무언가를 느낀 듯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 늦게 온 거로군요.”

“그렇소. 신검무적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기에 수하들에게 비신대 밑을 뒤져보라고 지시하느라 조금 늦게 온 거요.”

백석기는 무언가 꺼려지는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암궁에는…….”

혁리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 남암궁에 없소.”

백석기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없는 게 확실하오?”

“그녀는 아들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소.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 덕분에 남암궁 근처에서 이렇게 활보할 수 있으니 말이오.”

백석기는 혁리공의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건 어떻게 알게 되었소?”

혁리공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녀의 아들을 불러낸 사람이 누구일 것 같소?”

“당신이란 말이오?”

“나는 서신만 전했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그가 움직였으니 내가 불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백석기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결국 이번 일의 핵심은 편지 두 장 이로군. 유중악도 편지 한 장으로 유인하더니 천하의 대엽진인 마저 편지로 불러내다니. 천하에 당신처럼 편지라는 수단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없을 거요.”

“하지만 그래도 백 형의 도움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거요. 백 형 덕분에 이정문의 목줄을 잡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거요.”

두 사람이 상대방을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던 선약연이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을 띠었다.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건 그만하고 이제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어때요? 밤이 늦어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훨씬 지났단 말이에요.”

혁리공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무심한 미소가 냉랭한 빛을 띄웠다.

“그래, 깜박 잊고 있었군. 이제 질긴 인연 하나를 끊을 시기가 되었지.”

그의 시선이 천천히 한쪽에 쓰러져 있는 이정문에게로 향했다.

이정문은 그때까지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다가 혁리공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이를 악물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케도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입가에 검붉은 선혈이 잔뜩 묻어 있고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서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런 이정문을 바라보는 혁리공의 눈빛은 먹이를 눈앞에 둔 사나운 늑대를 연상케 했다.

혁리공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이정문에게 다가가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번개 같은 동작으로 그의 맥문을 움켜잡았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던지 설사 이정문이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혁리공은 재빨리 이정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진기의 흐름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호흡이 일정치 않은 걸 보니 심각한 내상을 입은 건 확실하군. 그렇다면 신검무적이 이정문을 공격한 건 거짓이 아닌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는 건 선약연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 비관적인 인물이기 때문일까?

혁리공은 이정문의 두 눈을 한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이정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일부러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 이런 식의 만남이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반갑소. 혁리공이라 하오.”

혁리공이 붙잡았던 손목을 놓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이정문의 초췌한 얼굴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나야 말로…… 이런 모습으로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내가 바로 이정문이오.”

힘겹게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이정문의 입에서는 끊이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혁리공은 그 모습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무척이나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만나기를 기대해왔소. 이렇게 직접 나를 보게 되니 기분이 어떻소?”

이정문은 허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떤 기분일 것 같소?”

혁리공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 당신의 기분을 알 리가 없지 않겠소?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기분일 것 같지는 않구려.”

“확실히 좋은 기분은 아니오. 당신은?”

“솔직히 약간은 아쉬운 생각이 드는구려.”

“내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말이로군.”

혁리공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그려졌다.

“부인하지는 않겠소. 내가 듣기로 산수재는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서 어떤 순간에도 방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조금은 맥이 풀렸다고나 할까. 역시 강호의 소문이란 그다지 믿을게 못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소.”

은근히 자신을 조롱하는 말에도 이정문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혁리공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연인만을 찾는 이정문의 모습에 다소 실망감이 들었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오른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그러자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남녀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과 풍만한 몸매의 젊은 여인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중년인의 오른손이 여인의 등에 살짝 닿아 있고, 여인이 그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의 얼굴은 제법 예쁜 편이었으나 지금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어 미모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본 이정문은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 괜찮은 거야?”

그녀는 한동안 복잡한 빛이 담긴 눈으로 피에 젖은 이정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녀의 음성은 금시라도 꺼질 듯 미약했으나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비로소 이정문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면 됐어. 당신이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나는 이제 어떠한 일이든 감당할 수 있어.”

그녀가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그때 혁리공이 그녀를 제지했다.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시오. 봐서 알겠지만 약속대로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잘 모시고 있었소.”

이정문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풀어주시오. 그게 우리 사이의 약속이지 않소?”

“한 가지만 확인하면 그녀를 무사히 돌려보내겠소.”

“그게 무엇이오?”

혁리공은 턱으로 슬쩍 벼랑을 가리켰다.

“내 수하들이 신검무적의 시신을 찾기 위해 비신대 아래로 내려갔소. 그들이 돌아와서 신검무적의 죽음을 확인해 준다면 그녀는 즉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요.”

이정문은 머리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꼭 신검무적의 시신까지 확인해야겠소? 정말 치밀하다 못해 귀찮은 성격이군.”

“당신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요.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심하게 확인과정을 거쳤을 지도 모르겠군. 내가 들은 산수재에 대한 소문이 절반만 사실이라도 말이오.”

“대체 무슨 소문을 들은 거요?”

혁리공은 이정문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정말 듣고 싶소?”

이정문은 눈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소. 별로 좋은 말일 것 같지 않으니 말이오.”

“현명한 생각이오.”

혁리공의 말에 이정문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혁리공은 이정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심 득의의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문은 사 년 전에 서장 무림의 최고기인이자 제일지자(第一智者)인 천애치수 단목초를 순전히 계략만으로 살해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서장 무림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었다.

누구는 그가 천하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계략과 술수에 관한 한 당금 무림에서 첫손가락에 꼽을 만 하다고 했다. 두뇌가 비상하고 심성이 악랄할 뿐 아니라 머릿속에 온갖 기괴한 수법들이 가득 담겨 있어 그의 표적이 되는 자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떠드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천애치수가 죽은 원한보다는 천애치수 같은 뛰어난 인물조차 무너뜨린 그의 심계와 치밀한 머리에 더욱 큰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혁리공 또한 처음 이정문이 자신을 목표로 접근해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가슴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이정문과 당당히 계략으로 승부하여 그를 꺾고자 하는 호승심도 불같이 타올랐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자신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정문이 좌절에 빠진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으니 아무리 냉정하고 마음이 굳건한 혁리공이라도 짜릿한 기쁨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강호제일의 검객이며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또 다른 존재인 신검무적 또한 함께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미심쩍은 상황과는 별개로 오랜 노력과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 끝에 자신의 의도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혁리공은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지금 그는 승자로서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으며, 이 즐거움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정문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혹시 알고 있소?”

“무얼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한 약속은 오직 그녀의 무사귀환 뿐이었소. 다시 말해서 당신 자신의 안전은 그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거요.”

혁리공은 이정문의 잔뜩 구겨진 얼굴을 예상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그녀의 안위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거요.”

그러면서 혁리공은 통쾌한 웃음을 날리려 했다.

한데 막상 이정문의 얼굴을 본 혁리공은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이정문의 두 눈에 괴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혁리공이 봐온 이정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날카롭고도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냉정한 눈빛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또한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냉랭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소. 당신은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것을 싫어하여 아직 내게 손을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제거할 기회를 그냥 보낼 사람도 아니라는 걸 말이오.”

혁리공은 절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구려?”

이정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여러 가지 표정들이 점차로 사라지며 가면을 씌운 듯 무심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이 산수재 이정문의 본모습임을 혁리공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소.”

“그게 무엇이오?”

“당신은 아직 누군가와 제대로 된 머리싸움을 해 본적이 없다는 거요.”

혁리공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내가 머리싸움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지금까지 내가 짜놓은 계획에 한 줌의 고혼으로 사라진 자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물론 하잘 것 없는 자들과 싸워 승리를 취한 적은 있겠지. 하지만 진정한 강호의 머리싸움은 그런 게 아니오.”

혁리공의 두 눈이 차가워지며 눈가에 스산한 살기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정한 강호의 싸움을 많이 겪어본 당신은 지금 그런 꼴로 내 앞에 있는 거요?”

“내 꼴이 뭐가 어때서? 당신이 만약 진짜 제대로 된 머리싸움을 해봤다면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라는 걸 알았을 거요.”

“…….”

“그래서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상대를 경시하거나 조롱해서는 안된다는 걸 절대로 잊지 않았을 거요.”

그 말에 혁리공의 얼굴이 점차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은…….”

“내 말은 아직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오.”

이정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짤막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혁리공이 돌아보니 육난음을 사로잡고 있던 중년인이 목을 부여잡은 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새어나오는 모습이 참혹해 보였다.

쿵!

중년인은 채 두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와 함께 육난음의 몸은 어느 새 나타난 푸른 색 능라의를 입은 면사여인의 품에 안겨져 있었다.

혁리공은 중년인의 목에 꽂혀 있는 죽엽 모양의 암기와 면사여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옥대를 보고는 이내 표정이 굳어지며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죽엽배와 선녀대(仙女帶)? 신수옥녀로구나.”

면사여인은 자신이 안고 있는 육난음의 몸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혁리공을 쳐다보았다. 유난히 서늘하고 아름다운 두 눈에 서릿발 같은 안광이 어려 있었다.

“내가 바로 능자하에요. 내 사매에게 산공독(散功毒)을 썼군요.”

신수옥녀 능자하는 강호제일의 암기고수인 천수관음의 첫째 제자로, 육난음의 대사저(大師姐)였다.

혁리공은 돌연 나타난 능자하가 육난음을 구출하자 절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의 시선이 이내 이정문에게로 향했다.

“이정문. 과연 한 수가 남아 있었구나.”

이정문은 여전히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표정과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약소한 솜씨요.”

“하지만 그녀 한 사람이 더 가세했다고 해서 오늘 일의 결과가 바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나를 놀라게 할 절세의 무공이라도 익히고 있단 말인가?”

이정문은 혁리공의 살기 띤 말에도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을 놀라게 할 사람은 내가 아니오.”

“그럼 누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묻던 혁리공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서 있는 절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가 흔들리더니 이내 옆으로 움직이며 동혈(洞穴)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동혈의 짙은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무심한 눈빛을 지닌 그를 보자 혁리공의 입에서는 도저히 억누르기 힘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검무적…….”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